포인트빌립보서 제 6 강 ‘합당, 그리고 일심’
빌립보서 1:27-30절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30-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27-Whatever happens,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Then, whether I come and see you or only hear about you in my absence, I will know that you stand firm in one spirit, contending as one man for the faith of the gospel
28-without being frightened in any way by those who oppose you. This is a sign to them that they will be destroyed, but that you will be saved--and that by God.
29-For it has been granted to you on behalf of Christ not only to believe on him, but also to suffer for him,
30-since you are going through the same struggle you saw I had, and now hear that I still have.
Point: 복음을 알고 합당하게 사는 인생은 일심으로 굳건해 집니다.
Introduction: 제가 베트남을 갔다 왔으니 베트남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하롱베이, 좋습니다. 부모님 모시고 꼭 한 번 가세요. 완전 한국사람 판이예요. 삼분의 이는 한국사람 같았습니다. 선상 유람을 한 서너시간 하는데 여기 저기서 한국유행가 부르고, 우리는 복음 성가 부르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에서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까지 영광돌림에서 회개로 다양한 찬양을 하였습니다.
거기서 가이드한테 들은 얘기입니다. 우리가 베트남 하면 베트남쌀, 쌀국수, 이런 얘기를 많이 듣고 또 먹는 체험도 우리가 합니다. 그런데 베트남이 공산화되고 나서 한동안 쌀을 수입을 했답니다. 열심히 생산해서 똑같이 나누니까 의욕이 사라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환경에서도 수입을 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개방정책, 도이모이라고 불리지요, 이 경제개혁을 실시한 후 사유재산을 인정을 하는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사람들이 사모작, 오모작을 했답니다. 맞는 말은 기작이래요. 사기작, 오기작! 일년에 쌀을 네다섯 번 수확한 거지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다 수확하고 다시 모를 심는 것이 아니라 벼가 익은 윗부분만 수확기에 자른답니다. 그래서 그렇게 몇 번을 사람들이 수확을 한 것입니다. 수익에 눈이 벌개져서 그런 거지요. 수확하면 내 돈이 되니까! 그런데 이러다 보면 쌀의 품질이 떨어지고, 땅의 질도 약화되는 단점이 생깁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당신들이 수확물은 가지되 품질과 땅의 질을 위해 일년에 2-3번만 하라.’ 이런 식이 되었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사람은 ‘가치, value, 이익, 유익’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정확한 사실입니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fact입니다. 그래서 가치관이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제가 사람을 많이 만나면서 알게 되고, 더욱 확신하게 되는 사실이 이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가치대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리더쉽은 우리 삶의 현장에 더욱 큰 이슈가 됩니다. 리더쉽은 사람들이 각자 가진 자기의 가치보다 우선되고 중요한 공동체의 가치를 제시하고, 또 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각자의 가치에도 도움이 됨을 설득하고 그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가게 하면 리더도 살고 공동체도 살지만, 이게 안되면 리더도 무너지고 공동체도 같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게 우리가 주위에서 자주 보는 모습입니다.
자, 요즘 우리가 독도, 일본교과서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보세요. 곳곳에서 욕을 하고 비난을 하고 데모를 하지만, 일본 리더쉽이 결심하고 추구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일본 내 우익정치집단의 가치입니다. 그들이 과거를 반성하는 것이 왜 어렵습니까? 자기들이 추구한 가치의 핵심이 과거사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힘의 추구! 그것에 아무리 잘못된 것이 많아도 자기들의 중심 가치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기가 힘듭니다. 또 되도록이면 그것을 회복해 보려고 저 야단입니다. 이게 그들의 모습이자 한계이지요.
이번에 베트남수도 하노이에서 보니까 우리 핸드폰 상품광고가 거리를 도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상점거리에 가면 몇 집 건너 우리 상품광고예요. 맘이 뿌듯했습니다. 얼마 전 한 언론기사를 보니까 핸드폰시장에 대해 썼는데 앞으로 흐름은 디자인싸움이랍니다. 기능은 많아서 좋은 점도 있지만 또 그게 역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기능이 많은 것은 되도록이면 안 썹니다.
미국은 실용성이 우선이었고 한국은 특히 기능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능면에서 우리가 몇 백만화소 카메라폰 얘기를 할 때 미국은 백만화소에 튼튼한 핸폰이 여전히 인기를 끈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시장이 다 디자인이 우선이랍니다. 그래서 모두들 디자인에 엄청난 노력을 쏟으며 시장의 판단을 주목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 반응이 미국 M사의 레이져폰과 한국 S사의 블랙블루폰이랍니다. 세계시장에서 굉장한 반응을 얻고 있답니다. 가치가 디자인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치, value가 뭐며, 그것이 어떤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가?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주목할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잊으시면 세상 살기가 참 빡빡해 집니다.
Point 1: 합당, 그리고 일심
오늘 본문도 이런 흐름에 있습니다. 뭐가 가치 있는 것인가? 본문에선 ‘합당’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27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서 ‘합당하게’라는 말을 영어번역은 worth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가치 있게, 가치에 알맞게’ 그런 뜻이지요. 그러면 무슨 가치에 알맞게 살라는 것입니까? 27절에 두 가지 표현이 나오지요. 하나는 바로 연결이 된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의 신앙의 가치에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좀 더 살피면 이 말의 문화적 배경이 나옵니다. 이것이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바울이 지금 어디에 편지합니까? ‘빌립보’라는 도시에 소재한 교회에 편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에 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보라는 도시가 어떤 도시인가? 바울은 이 도시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그 도시의 특성과 그곳 시민의 시민의식을 생각하며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전체를 그리스원어로 보면, ‘폴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우리가 듣는 폴리스라는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폴리스, 도시국가라는 뜻이지요. 본문의 ‘폴리테우에스타이’는 시민의 가치에 맞게 살라, 시민의 의무를 다하며 살라는 뜻이고, 3장에 나오는 폴리테우마는 시민권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하면 이 도시 사람들은 이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분당’을 ‘천당 밑의 분당’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분당에 사는 자부심이 상당히 들어있는 단어입니다. 마찬가지로 빌립보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폴리스, 이 도시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꽤 강했습니다.
왜인가? 이 빌립보가 로마의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small Roma, 작은 로마’의 역할을 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빌립보에는 제대한 로마 군인들이 많이 정착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많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이 도시에 뿌리를 내렸겠지요. 더욱이 그 주위에는 트라케라는 야만 민족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야만 민족과 로마 문화의 대비, 그런 상황에서 이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는 아니지만 로마의 빛깔을 담고 있는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번에 베트남에서 마지막 날 한 전통품가게를 들렀습니다. 대개 패키지로 가면 그런 곳에 가야만 되지요. 그런데 그 안에 구찌, 샤넬, 페르가모, 이런 상표가 붙은 핸드백, 지갑 같은 것들을 파는 부스가 보였습니다. ‘이거 진짭니까?’ ‘일급 짝퉁입니다.’ 저는 영어로 물었는데 ‘Is it authentic brand?' 그 사람들은 우리말로 대답합니다. ‘진짜로 좋은 일급 짝퉁이예요. 사세요. 베트남 짝퉁, 좋아요’ 이래요. 일급 짝퉁에 대한 묘한 자존심이 보였습니다. 가격도 더 깍을 게 없다며 흥정이 잘 안되었습니다. 물론 살 마음도 없었지만!
지금, 빌립보는 ‘일급 짝퉁 로마’입니다. 로마는 아니지만 로마스러운 모든 것을 가지려고 했던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문화적 배경을 활용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문화선교적인 접근을 하는 메시지이지요.
자, 바울은 지금 이런 문화 속에서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얘기합니다. ‘너희들이 듣고 믿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이냐? 그것이 너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느냐? 그 가치를 아는 너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또 어떻게 살 것이냐?’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제일 먼저 물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가치롭게 하는 것, 우리에게 자부심과 명예와 당당함과 담대함을 가지게 하는 것,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이며, 그것을 믿는 믿음이 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보세요. 지금 빌립보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뭡니까? ‘폴리’라는 원어가 담고 있는 의미, 즉 자신들은 시민인데 단지 빌립보 시민이 아니라 전 세계의 가장 강력하고 가장 문명화된 로마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로마가 인정해 주고 보장해 주는 일종의 계약, contract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일정 기간 군복무에 대한 보상이든지, 금전적인 대가를 치룬 후에 얻은 것이든지, 분명한 것은 로마가 인정해 준 시민의 권리가 자기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빌립보인들은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 contract, 계약이 가치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 권리의 가치에 맞게 자부심을 가지고, 굉장한 자존심을 부리며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그 권리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한 가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그보다 훨씬 더 고귀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사실입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우리는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 합당하게 날마다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보세요. 바울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의 신앙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여기에도 계약이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있어서 계약의 가치, 그 중요성을 먼저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약이라는 거, 중요합니다. 최근에 어려운 상황에 빠진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잘못한 당사자는 아닌 데 중간에서 서류에 싸인을 한 모양입니다. 계약에 개입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직접당사자가 거의 고의적으로 회사를 부도나게 만들고는 자기는 챙길 것 다 챙겨서 잠적을 했습니다. 이러니 중간에 있던 분이 다 책임을 져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가진 부동산도 위태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계약이 이런 것입니다. 잘 되면 서로가 유익을 얻지만 깨지면 너무도 큰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요즘은 점점 보편화되어 가서 둔감해지고 있지만,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보세요. 이것도 일종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서약, 혹은 언약이라고 더 자주 부르지만 다 계약, contract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깨지는 모습이 주위에 많이 일어납니다. 주로 성격차로 많이들 깨고 있지만, 이게 후유증이 많습니다. 당사자들도 그렇고, 자녀가 있으면 더 그러하고, 또 주위 가족들이나 관계된 사람들이 많이들 힘들어 합니다. 계약이라는 가치가 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계약이 없는 듯하지만, 있어요. 특히 사별을 할 때 유언이란 게 있습니다. 이것도 약속이 담긴 일종의 계약입니다. 재물이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제 때 제 때 잘 해놓아야 합니다. 그게 지혜예요. ‘왜, 나 죽는 것을 생각해!’ 이러면서 이것을 제대로 해 놓지 않으면, 자녀들이 꼭 싸워요.
보세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은 공식적인 약속이 있고 없음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잘 지켜지느냐, 아니면 무시되느냐에 따라 여러 상황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이게 왜 이런가? 이게 바로 창조자와 피조물의 성격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피조물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말씀은 그 본질이 약속개념입니다. 계약, 언약의 그 핵심적인 흐름입니다. 이것이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무서운 것이 왜 그렇습니까? 이 약속을 깨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약속을 무시해 버린 것이 죄입니다. 자기를 보호하는 약속을 마치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버리고 달아난 것이 죄의 성격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사람은 막 저주하고 짓밟으려고 작정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약속이 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대가를 사람이 치르게 됩니다. 영생의 약속이 깨지니까 자연히 사망의 대가를 치르게 되고, 축복의 약속이 깨지니까 저주의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들러붙게 되고, 사랑의 약속이 깨지니까 미움과 시기의 모습들이 사람을 칭칭 감게 되고!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뭡니까? 이 깨진 계약으로 생긴 대가를 예수가 뒤집어 쓴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 뒤집어썼으니까 사람이 뒤집어 쓸 것이 없고, 책임질 것이 없고, 치룰 대가가 없습니다. 이 사실이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의 신앙입니다.
저는 요즘 이 ‘덮어쓴다, 뒤집어쓴다’는 말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게 당하는 입장에선 이것만큼 힘든 일이 없지만, 혜택을 받는 입장에서 이 말만큼 은혜로운 일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굉장한 경제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도 직전이예요. 그런데 은행에서 마감일자를 몇 달, 아니 몇 년 연기해 주겠다고 그러면 그것은 기업하는 사람에게 복음입니다. 또 누군가가 ‘내가 다 책임질께!’ 이러면 생명의 은인이 됩니다. 부도로 인해 심리적인 중압감으로 세상을 등지는 사람까지 생기니까 생명의 은인인 셈이지요. 보세요.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관계에서나, 친구사이에서, ‘내 책임이야. 다 내 잘못이야. 내 부덕의 소치야. 내가 다 책임질께. 내가 다 뒤집어쓸께.’ 이렇게 나와 보세요. 복잡해질 관계가 없습니다. 다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싫은 겁니다. 그 자존심을 잃기가 싫고, 그 조금의 손해를 안 보겠다고 다들 버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복잡한 것입니다.
바울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뭡니까? 인생의 제일 큰 문제를, 그래서 인생들이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그로 인해 생긴 모든 결과와 부작용과 썩어들어감을 ‘다, 내가 책임진다. 다 내가 덮어쓴다. 내가 다 뒤집어썼다. 그런 나를 믿으면 내가 말끔하게 처리한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믿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 곧 복음의 신앙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자기가 다 뒤집어쓰고 덮어써서 그 대가를 치룬다는 것입니다.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멸망의 싸인이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자유와 해방과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래서 이제 바울이 얘기하는 바가 뭡니까? ‘그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면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라.’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합당하게 사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까? 27절에 나오지요. ‘일심으로 서’는 것입니다. 성도들 간에! Stand firm in one spirit! 빌립보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바울이 암시적으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일심이 못 되고 있고, 마음이 나누어져 있고 그것이 빌립보교회의 큰 문제로 나타난 것을 바울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얘기합니다. ‘복음을 아는 믿음의 교회는 일심으로 서는 데, 너희들의 모습이 지금 어떠하냐? 일심으로 서고 있느냐? 왜 그렇지 못하느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일심으로 설 수 있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그래서 일심으로 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임을 얘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 일심! in one spirit! 일심으로 서는 것! Stand firm in one spirit! 이게 복음에 합당한 삶의 모습이라면 어떻게 일심으로 설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일심으로 서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우선은 27절에 나오는 대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심으로 교회가 서게 되고 그것이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이고, 그것이 복음을 제대로 아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 뜻으로 협력하다’ contending as one man!이라는 말은 원뜻을 보면 운동경기 용어입니다. 팀을 이루어 상대와 경쟁하는 운동경기의 모습을 말합니다. 팀웍이 좋다라는 그 말이 바로 이 말의 뜻입니다. 이렇게 팀웍이 좋아야 교회라는 팀이 든든하게 서게 되고, 일심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팀웍이 좋은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축구경기를 생각해 봅시다. 11명의 선수가 많은 훈련의 과정을 거쳐서 마음과 마음이 통할 정도가 됩니다. 또 그러면 공격선수는 수비선수가 든든해야 공격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수비선수는 공격선수가 신바람 나게 공격을 잘해 상대방 팀을 흔들고 제때 골을 넣어야 수비하는 보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막아도 공격진영에서 골을 넣지 못하면 수비는 자꾸 지쳐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역습을 당하게 되지요.
보세요. 모두가 모두에게 서로가 너무도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팀웍의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그래, 니 잘났다!’ 이런 식이 되거나 수비나 골키퍼의 마음이 골 넣는 데에만 있다면 팀전체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공격선수가 수비의 허술함을 늘 걱정한다면 그 팀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체적인 가치나 유익이 떨어지게 되고, 별 볼 일 없는 팀이 됩니다.
또 한 두 사람이 퇴장을 당해보세요. 나머지 사람들이 소비해야 하는 체력부담이 엄청납니다. 너무도 힘든 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팀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모두가 자기 자리를 지키고, 모두가 서로에게 유익하고 귀한 존재임을 기억할 때 한 뜻으로 협력이 되고, 이 팀이 일심의, one spirit의 든든한 팀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교회를 이런 운동경기의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팀웍이 어떻게 굳건해 지나?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한 존재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빌립보 교회가 그룹 그룹 의견이 다르고, 그래서 나누어지려는 모습이 있는데 그게 과연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어떤 유익인가? 그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자기 자존심 세워지고 자기 위신 세워지고, 자기 이익을 차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손해이고, 서로에게 더 불익만 가져다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얻는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일심으로 든든히 서가나?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도 소중하고 고귀하며, 너무도 필요한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든든히 서 가게 됩니다.
우리가 다윗의 경우에서 이런 예를 하나 찾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도피 중에 아둘람굴로 도망한 얘기가 사무엘상 22장에 나옵니다. 그 때 다윗 공동체가 한 사백 여명이 형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 구성원이 어떻습니까?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이런 식이었다고 성경이 리포트하고 있습니다. 별로 주목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지요. 지금으로 말하면 아주 좀 어설프게 교회가 구성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공동체를 말씀의 바탕 위에 지도합니다. 하나님의 정직과 진실 속에 그 공동체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그런 어설픈 상황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하며 고귀한 존재임을 배워갑니다. 다윗의 믿음의 정신이 공동체를 움직여 간 것입니다. 한 뜻으로 협력을 한 것이지요. 그랬더니 보세요. 그 공동체가 다윗 킹덤의 핵심이 됩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이스라엘 엘리트들이 다 배출됩니다. 다윗이 보여준 하나님 나라, 즉 구약교회의 중추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일심으로 굳게 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게 복음에 합당한 삶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복음에 합당한 삶의 모습, 즉 일심으로 굳게 서는 모습의 두 번째 내용! 28절에 나옵니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그리고 이 부분을 바울은 29-30절에서 구체적으로 자신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자, 어떻게 복음에 합당한 삶, 즉 일심으로 굳게 설 수 있습니까? ‘고난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라. 그래야 일심으로 굳게 설 수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는 내부에 의견이 나누어져 있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심이 흔들리고 있고 이로 인해 자신의 사명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더욱이 외부적으로 교회의 모습이 뚜렷해지자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생기자, 이 교회의 일심이 또한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기 이런 모습에 대해 바울이 지금 뭐라고 얘기 하고 있습니까?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그렇다는 거지요. 바울 자신에게 있는 싸움이 믿음의 동지인 빌립보교회에게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28절의 ‘두려워하다’라는 말 역시 운동경기 용어로 또는 군사 용어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달리는 말이 장애물이나 적군을 만나 두려워서 움찔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얘기가 뭡니까? 그렇게 장애물이나 방해물이나 믿음의 대적이나 고난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움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고난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대하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일심으로 굳게 서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교회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모습이라는 거지요.
고난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 제가 베트남 하롱베이 얘기를 하겠습니다. 하롱, 하용, 아래하자, 용용자, 용이 내려온 베이, 만, 바닷가란 뜻입니다. 바다에 2천여 개의 기암괴석이 솟아있는 곳입니다. 이곳의 특징! 바다에 파도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뱃놀이하기가 너무 좋습니다. 배를 아무리 타도 파도가 없으니 배멀미할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니 배위에서 노래부르고, 얘기하고 먹고 또 먹고 해도 전혀 부담이 없습니다. 환상적인 뱃놀이 코스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왜 이런가? 자, 2천 여개의 기암괴석이 겹을 이루는 데 이게 거의 100겹이나 됩니다. 바위섬을 지나면 또 섬, 또 섬, 또 섬! 이렇게 겹이 백여개가 됩니다. 그러니 파도가 아무리 세차게 몰려와도 중간에 거치고, 거치고, 또 거치고! 이러니 파도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아주 평온하기 그지없는 바다! 이게 하롱베이입니다.
우리가 왜 고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해야 하는가? 그 고난 속에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맞서고, 또 맞서고, 믿음으로 맞서고, 소망을 가지고 맞서고, 두려워 않고, 움찔하지 않고, 이러면서 우리 가운데 평안이 자리 잡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흔들어놓지 못하는 평안이 우리 가운데 생깁니다. 그래서 일심으로 든든하게 서 갑니다.
사사기 1장에 보면 유다가 가나안회복이라는 사명에 앞장섭니다. 이 때 시므온지파가 적극적으로 나서요. ‘나도 함께 가리라’ 그래서 귀한 것들을 얻습니다. 그런데 단지파는 자꾸 꽁무니를 뺍니다. 그게 습관화되니까 나중에 제일 먼저 망해요. 좋은 곳 찾으러 간다고 나섰다가 사라져 버립니다. 신앙의 싸움을 회피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천국은 침노하는 이가 차지합니다. 고난 한 가운데 하나님 축복의 알짜배기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제가 요즘 겸손과 교만, 그리고 고난의 상관관계를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를 해 보았습니다.
보면 겸손 그 자체인 사람이 있습니다. 흔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이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런 분이 옆에 있으면 무조건 순종하고 따르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축복을 같이 덮어쓰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은 교만을 철저하게 겸손으로 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 어려운 말을 쓰면 메피스토펠리안적인 사람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이름이 메피스토펠레스지요. 악한 마귀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교만을 겸손으로 완전히 감추고 다닙니다. 자기를 광명의 천사처럼 가장을 하는 부류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류는 희귀하지만 또 우리 힘으로 진짜 겸손한 사람과 구분하기가 참 힘들어요. 분별이 여기에 있어야 하고 천상의 지혜가 역사해야 구분이 되는 데 이게 많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이 속습니다. 진짜 사기꾼은 정말 진짜와 같은 것도 비슷한 원리지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겸손으로 교만을 가장해도 그 교만이 자꾸 눈에 띄는 사람이 있습니다. 겸손한 채 하는 데 교만한 게 보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대하는가? 상식적으로, 객관성을 가지고 대하면 됩니다. 겸손할 때는 잘 해주고, 교만할 때는 피하고! 그러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교만이 철철 흘러 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만이 눈에 다 보여요.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하나?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언제 망할지 모르니까. 또 그런 속담있지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하면 됩니다.
제가 왜 이런 인간론을 얘기하나? 고난이란 것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고난이란 게 뭔가? 왜 아무 일에든지 대적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나? 왜 은혜를 아는 사람은 고난도 받게 되고 그와 같은 싸움이 우리에게 있나? 고난의 유익 두 가지! 첫째,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은혜의 고난을 받으며 이겨온 사람은 보면 알아요. 하나님의 성품, 그 겸손이 스며 나옵니다. 풍겨 나와요. 두 번재, 고난은 그 인생에게 교묘한 교만, 즉 악마적인 교만, 겸손으로 철저하게 위장하고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한 악한 계교를 보는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고난을 이겨낸 겸손은 악한 장난에 속지 않습니다. 바고 이게 고난의 유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바, 고난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라, 어려움에 대해 두려워말라, 힘든 일에 대해 움찔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라, 은혜의 고난과 그 싸움을 당연하게 여기며 받아들여라, 바로 이 믿음의 모습에서 굳건함이 나옵니다. 든든함이 나옵니다. 그리고 복음에 합당한 삶이 나오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깊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청년 여러분, 제가 이번 베트남 여정에 책 한권을 가지고 가서 흥미 있게 다 읽고 왔습니다. 한 선교사님의 문화체험에 대한 기록입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선교적인 측면에서 본 문화인류학의 기록이고, 쉽게 말해 선교사가 살아온 얘기들입니다. 인도네시아 끄웨르바족의 성경번역을 감당한 선교사님 얘기입니다.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어느 시기가 되면 머리를 빡빡 밀더라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그래요. ‘패션인가?’ 그런데 전문이발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간에 면도날로 머리를 미는 것입니다. 가족끼리 밀고, 친구끼리 밀고, 연인끼리 밀고!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거든요. 의도는 머리를 미는 것이지만 밀다보면 뽑기나 뜯기가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다가 옆에 친구라도 지나가면 ‘어이! 안녕’하다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아니고 머리를 잘라요. 상처내고 피, 푸악! 튀고. 이렇게 된 말이예요. 그런데도 몇 달 정도 지나면 이런 머리 밀기를 꼭 하는 모습을 선교사님이 본 것입니다. 왜 저럴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머리 감는 게 일년 행사에 들어가거든요. 우리는 거의 매일 감잖아요? 안 그래요? 혹시 안 감으면 모자쓰고 다니고! 아무리 안 감는 사람도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감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일 년에 두 세 번, 이런 행사로 머리를 감거든요. 그러니 관리가 됩니까? 안되니까 좋아하는 애들이 있지요. 이! 그리고 상처가 생기면 이게 그냥 등창 같은 종기로 발전하게 됩니다. 전혀 관리를 안 해 주니까!
그래서 이 원주민들이 몇 달에 한 번씩 남녀 노소 머리를 빡빡 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도 사라지고, 등창, 종기도 햇볕을 쬐서 자외선 때문에 그만 타서 병균이 죽고. 이렇게 대청소가 되기 때문에 그들이 머리를 이렇게 관리를 합니다. 나쁘지 않는 지혜지요.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세요. 저도 목사만 아니면 합니다. 제 두상이 나쁘질 않거든요.
여러분, 보세요.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복음의 신앙을 붙들고 살지만 우리 믿음이 그래요. 살다보면, 뭔가가 자꾸 끼여듭니다. 잘못된 가치관들이 끼어들어 자리잡기도 합니다. 습관들도 그렇습니다. 생각들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우리 믿음을 혼탁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게 이같이, 등창이나, 종기같이 우리를 어지럽게 하고 헷갈리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뭐예요? 우리가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밀려나가 버립니다. 그런 군더더기, 그런 찌기, 그런 불순물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의 믿음이 시원하게 되고, 정결하게 되고, 맑고 깨끗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고난을 지나면 그 고난 중에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참 이상하지요. 그러나 그래요. 원주민들 머리가 밀리듯이 우리 삶의 잘못된 많은 것들이 밀려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 귀한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 믿음이 일심으로 든든히 서기를 원하십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세요. 한 뜻으로 협력하는 것, 그것이 서로에게 복입니다. 고난, 피하지 마시고 적극적으로 만나세요. 그 안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이 유익을 누리는 믿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rayer: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복음을 더욱 더 알게 하시고 그래서 든든한 믿음의 유익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