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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3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둘째 주일)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창15:1~12, 17~18; 시27편; 빌3:17~4:1; 눅13:31~35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더욱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잠시 머무는 동안, 오늘 예수님처럼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라고 선언할 수 있다면, 그것이 꼭 말로 발설하는 발언이 아니더라도 마음 속 깊이에서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라고 하는 태도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위세나 뭔가의 반동으로 튀어나온 고집이 아니고, 내면의 깊은 부름에서 나온 고요하고 진중한 태도라는 것을 여러분은 짐작하실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하신 예수님의 선언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여러분 자신은 마음 깊이에서 이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 마음 깊이에서 내 길을 가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라 이렇게 “내 길”을 알고 비록 험하고 거친 길이라고 그 “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을 일컬어 우리는 성인이라, 믿음의 사람라고 부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이 숙제를 풀러 이 땅에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너의 길’을 깨우치고 ‘너의 길’을 걷다가 오너라, 그러라고 내가 너를 이 땅에 보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며 우리 안에다 이런 말씀을 속삭이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내 길을 가야겠다고 말씀하신 “내 길”이란 무엇일까요? 그 길은 어떻게 걷는 길일까요? 그 길 앞에는 무엇이 있고, 그 길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누가복음 본문 3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낱말은 하나의 단어입니다. 그것은 “포류오”라는 단어인데요, 오늘 본문에는 그 미래형인 “포류소마이”가 쓰였습니다. “포류오”라는 단어는 “나아간다”, “여행한다”, “행한다” “살아간다”라는 뜻입니다. 완곡어법으로 “죽음으로 나아간다”라는 뜻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1인칭 단수 미래형으로 쓰여서 “내가 내 길로 나아갈 것이다, 내가 내 여정에 오를 것이다, 내가 내 일을 행할 것이다, 내가 내 삶을 살아갈 것이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느 정도 감을 잡으시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곳이, 제자들이 상상하듯 그렇게,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자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언질을 주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때 몇몇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헤롯왕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여기를 떠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습니다. 이들이 선한 의도로 그랬는지 아니면 함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권고를 듣고 예수님은 이렇게 일갈 하십니다.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고 전하여라.” 예수님은 헤롯왕을 여우라고 지칭하는데, 여기서 여우라는 은유는 꾀가 많고 교활한 사람을 가리키기도 했지만, 무의미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은, 즉 다가올 얼마 동안에는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며, 사흘째 되는 날, 즉 얼마 안 있어 내 일을 끝내신다고, 직역하면 완성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일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실 본연의 일이었음을 우리는 복음서들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귀신과 병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장애들의 상징입니다. 인간을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자기, 진정한 자기를 살지 못하게 하는 방해 세력이 바로 귀신과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성을 침해받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장애들과 걸림돌, 방해 세력을 제거하여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으셨습니다. 이 일은 사흘째 되는 날, 즉 이제 얼마 안가서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은 겉으로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의미했지만, 더 깊은 의미에서는 예수님 사역 전체를 의미하는, 다시 말해,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높으신 분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중의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부르심, 즉 그분의 소명은 이 땅의 인간 조건에 매여 있는 사람들, 상처입고 아파하는 사람들, 병들어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람들, 귀신들려 참 사람으로 사는 길이 막혀 버린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당신들의 자리가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고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얼핏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의 길”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알고 계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길을 단호하게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확고하게 걸어가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길을 훤히 다 꿰고 있어서가 아니라, 실은 당신의 삶을 온전히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생의 모든 각본을 미리 알고 그 각본대로 움직였다면, 그것은 그저 배우나 꼭두각시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길에 대한 각본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길을 아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그 하나님의 이끄심에 온전히 동의했다는 의미에서, 당신의 길을 아시고 그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내 길로 나아가고, 내 여정에 오르고, 내 일을 행하고,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내 길, 내 여정, 내 일, 내 삶이 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지금 내가 사는 이런 찌질한 삶이 내 길이고 내 일이라면 너무 불행한 일 아니냐고 불평합니다.
우선 “내 길”을 어떻게 아는가? 내 길은 선명히 알고 가는 길인가? 여기에 대해서 신화학자 조셉 켐벨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숲으로 들어가라. 그곳에는 어떤 길도 나 있지 않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길일 것이다. 각각의 인간 존재는 고유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블리스를 향해 가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대 앞에 놓인 길이 분명히 보인다면 그것은 아마 다른 사람의 길일 것이다. 기막힌 말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자기 길은 자기 앞에 미리 있어서 그 길을 보면서 따라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생은 길을 알고 가는 길이 아니라 자신만의 블리스,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지복, 그 천상의 기쁨을 향해, 혹은 따라 가다보면 만들어 지는 길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앞으로 나있는 길이 아니라 자신의 뒤로 나있는, 혹은 자신의 뒤로 만들어지는 길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 안에 켜진 불빛, 자신 안의 부르심은 보거나 들으려 하지 않고, 자꾸 이미 짜여진 각본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미 짜여진 각본이란 것은 애초부터 없는 것입니다. 그 각본은 자신 안에 켜진 불빛으로, 자신 안의 부르심으로 자신이 써나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자신의 삶은, 혹은 자신의 길은 대상화하거나 상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내면의 부르심이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기독교의 말로 바꿔볼까요? 토마스 머튼도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지요.
“주 하느님, 저는 지금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 앞에 놓인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길이 어디에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제가 당신의 뜻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당신 뜻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토마스 머튼은 영적 천재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영적 천재가 평생 수도승으로 투신하는 삶을 살면서, “저는 지금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 앞에 놓인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그 길은 너무 분명한데 말입니다. 그런데 머튼의 기도문 마지막 부분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비록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더라도 당신은 저를 바른길로 이끄실 것입니다. 제가 길을 잃고 죽음의 그늘 속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저는 한결같이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 당신이 언제나 함께 계시기에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은 제가 위험에 홀로 서도록 저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길은 알고 가는 길이 아니라, 우리의 길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여 그분의 이끄심을,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그는 내면에서 너의 길을 가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태어나 자란 땅, 너무나 친숙하고 안전한 그 땅을 떠나라는 부름은 아브라함 안에 뿌리 깊이 자리 잡은 안전과 확실성이라는 자리를 흔드시는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땅이라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보입니까? 이 말이야 말로 정말 애매모호한 말입니다. 자신의 터전을 떠났으면 어디 다른 곳으로 정착을 해야 하는데, 단지 보여주는 땅이라니요.
여러분, 오늘 창세기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고민이 그것입니다. 확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땅과 자식의 약속은 안전과 미래에 대한 약속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안전한 자기의 집, 터전을 떠난 후로 그에게는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안전하게 거할 땅도 없었으며, 자신의 미래를 이어줄 자식도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런 중에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음성을 따라갔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6절)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확실성의 욕구를 내려놓고 내면의 안내와 부름을 받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길에서 올곧게 성공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번 실수도 하고 실패도 맛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들을 얻는 것은 좀 더 쉬운 방법으로, 소위 꼼수를 부리려고 하지요.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시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꼼수를 넘어 하나님을 은근히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장점은 그가 하나님과 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것을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 것으로 표현하지만, 실제로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친밀하게 그분을 사귀며 그분을 지향하는 일을 반복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심지어 그는 “깊은 어둠과 공포”(창15:12)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찾았고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원하는 확실한 길, 확실한 매뉴얼을 보여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이 온전하게 성장하는데, 우리가 진정한 나의 삶을 살아가는데 치명적인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안전과 확실함에 매달려 우리를 이끄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나만의 고유한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내밀한 부름이, 내면의 고요한 등불이, 우리 안에 블리스가 가장 중요한 지도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할수록 진정 우리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키딩은 말합니다 “그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그곳이 어딘지를 알려고 하지 않겠다고 동의하는 것이다. 안전과 확실성에 대한 욕망이나 요구는 신뢰의 대양에서 항해를 시작하는 데에 방해물이 된다.”
여러분, 그렇다면 나의 이 평범하고 어쩌면 찌질한 것 같은 보잘 것 없는 삶도 “나의 길”이 되는 것일까요? 이 세상을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것일까요? 바로 이 질문은 나의 길을 미리 알려고 할 때, 다시 말하면 나의 길을 대상화하고 상대화 했을 때, 일어나는 질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 주님의 내밀한 부름을 따라가고 내면의 고요한 등불을 따라가는 길이라면, 이런 질문은 더 이상 질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는 나의 길이 나만의 고유한 길이며, 누구와도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각자의 삶이, 각자의 길이 사물처럼 대상화하거나 상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는 나의 삶이 진정 고귀하고 거룩하다는 것을 압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길도 그렇게 존중할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서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의 삶을 모방해서 살라는 말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 간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라고 합니다. 이 “굳건히 서 있다”는 말, <스테코>는 초소를 지키는 군인이 경계를 설 때, 또는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경주자가 출발선에 서 있는 자세를 일컫는 말입니다.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 계십시오.”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데에 “굳건히 서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가는 길이 분명히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더욱 찾고 주님과 사귀며 주님의 내밀한 안내를 받아 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