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웨일 라이더(Whale Rider) -
추석 명절이 다가온다.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고 멀리 떨어져 있던 친척을 만나는 뜻깊은 날이다. 요즘은 미리 차례를 지내고 추석명절의 긴 휴일을 이용해 놀러 다니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한쪽에선 우리의 전통이 사라진다고 푸념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해 가는 현상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웨일 라이더’ 는 이렇게 변해 가는 시대 속에서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하려는 뉴질랜드의 조그만 해변 마을이 배경이다. 전통을 주장하는 구세대의 할아버지와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손녀딸의 갈등과 화해 속에 진정한 전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곳은 먼 옛날 조상이 고래를 타고 내딛은 땅이다. 그분의 이름은 파이키아. 대대로 장남 중에 그 마을의 지도자가 탄생한다. 왕이 될 자는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는 셈이다. 예언자인 할아버지는 다음 지도자를 선발해야 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아들은 쌍둥이를 낳았지만 며느리와 남자아이는 죽고 살아남은 건 쓸모 없는 여자아이 뿐이다. 할아버지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오로지 지도자를 찾는 일에만 열중이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에 실망한 아버지는 아이를 파이키아(케이샤 캐슬 휴즈)로 이름짓고 집을 나가버린다. 더 이상 전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간혹 파이키아를 보러 올뿐 자유롭게 유럽을 떠돈다.
이후 영화는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되는 파이키아와 할아버지를 통해 전통과 새로움의 충돌을 보여준다. 손녀딸이기에 다정하면서도 지도자 선발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파이키아를 배제시키는 할아버지. 파이키아는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는다. 할아버지의 고집은 전통을 떨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을의 어느 소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데도 파이키아를 제외시킨다. 가부장제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대부분의 어촌마을이 지리적 특성상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가 천대받는 상황이 많다. 파이키아의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또한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여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게끔 미리 상황 설정돼 있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갈등과 화해는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상처받은 소녀의 침체된 심리가 아프게 느껴진다. 파이키아는 아무에게도 그 아픔을 얘기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카누에 앉아 바다바람과 파도로 마음을 달래며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으려 애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소녀가 할아버지에게 지도자로 인정받으며 고래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장면이 아니다. 파이키아가 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접목된 전설에 관한 웅변 장면이다. 정작 들어줬으면 하는 할아버지의 자리는 비어있고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이 복받친 파이키아는 울음을 삼켜가며 그간의 서운함 등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참아보지만 흐르는 눈물은 막을 수 없고 울먹이면서 전통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지 않겠냐는 자신의 의지까지 토로한다. 이 장면이 케이샤 캐슬 휴즈를 아카데미 최연소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려놓지 않았나 싶다. 마냥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참아내는 줄 알았던 파이키아의 상처받은 마음이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이 장면 때문에 자칫 전설 혹은 동화가 돼 버릴 뻔한 영화는 현실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된다.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전통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한다. 전통과는 동떨어진 상황이 빈번하게 연출된다. 전통이 시대에 따라 발맞춰 변해갈 수 없다면 그 시대에 맞는 전통을 정립하는 건 어떨까? 이 영화는 신화와 전통 의식을 할아버지와 손녀를 통해 현대로 끌어올려 재현하고 있다. 전통은 단순히 과거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현재를 존재케 한 기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전통을 확립해 가는 것이 곧 문화이다.
지도자를 구하는 할아버지와 사랑을 원하는 손녀의 바람이 풋풋한 바다바람과 함께 밀려온다. 꾸밈없는 청정함이랄까. 소박한 어촌마을의 투박한 모습 속에 세대를 초월한 화해와 화합이 어우러진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보내는 가을편지 같은 흐뭇함이 느껴지는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