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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신앙생활의 네 가지 요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가장 필요한 핵심요소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이 무엇인지 성도에게 물었습니다. 성도 중에 한 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제 아내 이름도 가물가물하는데 아브라함 아내 이름을 어떻게 압니까?” 어느 성도가 장로님에게 이스라엘과 중동이 왜 저렇게 싸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들도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냐고 하자 맞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죽기 살기로 싸우느냐고 하자 장로님이 대답합니다. “원래 형제끼리 싸우는 게 더 무섭다.”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형제끼리 왜 저렇게 싸우는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이런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핵심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년 전에 하동에서 40여 마리 소를 키우는 주인이 며칠 여행을 갔다 돌아와 보니 소가 8마리나 없어졌습니다. 경찰에 신고를 해서 도둑놈을 잡았는데 다름 아닌 친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은 잘못했다며 형에게 용서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동생이 이전에 전과가 있어서 이번에 구속되면 재범이 되고 더 큰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을 알고 형은 고민 끝에 동생을 용서해주며 고소를 취하했습니다.
정작 소도둑은 용서를 받고 풀려났는데 동생의 친구 두 사람이 처벌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동생이 소를 훔칠 때 망을 봐준 사람인데, 이 사람은 범행 가담 및 방조죄로 구속되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훔친 소인줄 알고도 싸게 산 장물업자입니다. 이 두 사람은 꼼짝없이 처벌받았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용서는 받았지만 가까운 두 친구에게 큰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좋은 친구를 둔 행복한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네 명의 친구가 한 사람을 빛나게 했습니다. 성경은 철이 철을 빛나게 한다고 했습니다. 친구가 친구를 빛나게 하고 성도가 성도를 빛나게 합니다. 옆에 계신 분에게 이렇게 인사해 보십시요. "성도님 덕분에 제가 다 빛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이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1.먼저 예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을 바로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 해도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들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4대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고백하기를(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백을 인정해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할렐루야!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직접 밝힌 내용이 있습니다. 20절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반문합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감히 죄를 사할 수 있는가. 사람이 어찌 죄를 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24절에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면, 그리고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한 대속 제물로 오셨다면 그분이 먼저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인이 죄인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기에 그에게는 죄가 도무지 없습니다. 요일 3:5입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죄를 한 번도 안 지어서 죄가 없는 분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와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아무리 심문해도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의인일 뿐만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의인이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죄인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의사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친구들이 의사가 왜 하나님을 믿느냐, 첨단 의학, 과학 시대에 가장 지성인이고 이성적이어야 할 사람이 교회를 다니느냐고 놀리자 자신의 신앙체험을 고백했습니다. 의사의 키가 180센티를 조금 넘는데 보통 사람들과 있으면 큰 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만일 전 농구선수 서장훈 씨 곁에 서면 얼마나 작아 보이고 왜소해보이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의사가 교회에 간 날 죄 안 짓고 나름대로 잘 산다고 생각했는데 의로우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롭다고 우기는 사람들에게 정말 의로우신 분, 죄가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곁에 점점 가까이 갈수록 죄를 더 깨닫게 됩니다. 죄인됨을 깨닫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용서의 기쁨과 평안도 누리게 됩니다.
죄 지은 사람 잡는 이가 경찰인데, 경찰이라고 죄가 없습니까? 보직 해임된 경찰 두 명이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하다 한 경찰이 엉엉 우니까, 옆에 경찰이 왜 우느냐고 하자 처음에는 억울하고 서러워서 운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자기 죄가 생각나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이렇게 알고 나아가길 소원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아는 바른 지식에서 출발하여 자라가야 합니다. 벧후3:18에 보시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벧후1:2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우리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은혜와 평강이 더하여 넘치게 됩니다. 할렐루야!
2.둘째는 예수님이 이런 분임을 알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 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느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침상에 누운 채로도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그 아는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예수님 앞에 나가야 죄 용서의 은혜도 경험하고 하나님이 능력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 앞에 나오면 죄 용서가 있습니다. 어떤 죄도 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아직도 죄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에게 용서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 죄인줄 깨닫고 돌이키는 회개가 부족해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다만 용서받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예수님께 나오지 않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와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돌이켜 회개하면 용서받습니다. 율법은 한 없이 죄를 지적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용서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복음은 죄인을 향한 용서가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세상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수님의 용서가 필요치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3.세 번째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행함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행함을 통해, 순종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행함이 곧 믿음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신앙이 곧 그의 생활, 즉 행함이고 그가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곧 그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가 행하는 것을 보면 그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믿음이 안 보인다고 하지만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통해 믿음이 다 보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믿습니다.'하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이 친구들의 행동을 통해 주님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믿음입니다. 단순히 친구의 우정과 열정이 좋은 것을 보신 것이 아니라 저들이 주님 앞에 나오면 나을 수 있다고 믿고 지붕을 뚫어서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려는 저들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들의 행함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보였습니다. 우리도 행함 있는 믿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은 또한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중풍병자에게도 장애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무엇보다 이동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다는 정보는 알았는데, 그곳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119를 부를 수도 없고 휠체어도 없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 매고 갈 수 있도록 먼저 침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침상에 누인 채로 나왔습니다. 첫 번째 장애물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장애물을 만납니다. 도착해보니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도무지 방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 되겠다고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위해 나무로 올라가듯이 이들도 포기하지 않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침상에 누운 채로 달아 내렸습니다.
이들은 어지간한 장애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주님 앞에 나아가서 문제를 해결받고자 할 때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문제가 크고 작은 상태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의 크고 작음을 보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신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주님이 기뻐보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4.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림입니다. 이 중풍병자가 나았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5,26절입니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을 보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나타내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고 영광 돌릴 수 있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연약함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중풍병자처럼 자신의 약함이었지만 그것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요9장에 보시면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보고 제자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저가 맹인 된 것이 자기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때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합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고 나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회로, 도구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 큰 일을 보고도 비방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21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한다며 비방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비방하고 기도 응답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복된 자인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이 큰 구원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고 믿고 나오는 자가 복된 자인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복된 자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아는 지식과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 그리고 행함 있는 믿음과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바른 신앙을 갖게 되길 소원합니다. 이러한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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