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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은 자(字)가 영숙(穎叔)으로 찬성사(贊成事) 이곡(李穀)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운 것이 다른 사람과 달랐으며 책을 읽으면 곧 암송하였다.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면서 이미 명성을 얻었다. 이곡이 원에서 벼슬을 하며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이색을 조관(朝官)의 아들이라 하여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에 보임시켰다. 재학한지 3년 만에 이곡이 고려에서 죽으니 〈이색이〉 원에서 급히 돌아와 상(喪)을 치렀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에 이색(李穡)이 복상(服喪) 중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상중에 있는 신하 이색이 아룁니다. 신이 듣기에 ‘나라에 변고가 없는 때에는 공경(公卿)의 말이라도 가볍게 여기다가 나라에 변고가 생기고 난 이후에야 필부(匹夫)의 말을 태산(太山)보다 중히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필부의 천함으로 감히 말씀을 올리는 망령되고 요망한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용서받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작고 미미한 것이라도 높고 깊은 바탕이 되며, 나무꾼의 말이라도 성인이 취할 것이 있으니, 혹시라도 전하께서 〈저의 말을〉 채택하시는 은혜를 입게 된다면 종묘(宗廟)에 심히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며, 사직(社稷)에도 심히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경계(經界)를 바로잡고, 경지를 균등하게 하는 것을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가장 먼저 힘써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우리 조종(朝宗)께서 창업하신 제도와 간직하고 지켜야할 규례(規例)는 지극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400여 년 동안 말세의 폐단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 중에서도〉 전제(田制)가 특히 심합니다. 경계가 바르지 못하면 권세가가 겸병하게 되니 까치둥지에 비둘기가 산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유사(有司)가 비록 공문주필(公文朱筆)로 선후(先後)로 그 손님과 주인을 정하여 놓았어도 갑(甲)이 만약 힘이 있다면 을(乙)에게는 무리가 됩니다. 하물며 공문주필은 또 진위를 많이 판별할[魚目混珍]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이 전지(田地)를 받은 집안은 모두 왕의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힘을 쓰는 나머지, 대신 경작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저쪽이 비록 전지를 잃으면 이쪽이 전지를 얻게 되니, 이는 초나라 사람이 활을 잃어도 초나라 사람이 〈다시〉 활을 얻는 것과 같다는 것이니 오히려 괜찮습니다. 민이 하늘로 삼는 것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땅에 있는 것으로 몇 무(畝)의 땅이라도 한 해 내내 성실하게 일하면 부모와 처자를 먹일 수 있으니 오히려 넉넉하지 않은데도 조(租)를 거두어들이는 자가 오고 맙니다. 만약에 땅 주인이 하나라면 다행이겠지만 혹 3~4가(家)이거나 혹 7~8가(家)인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로 힘으로 상대할 만하고 세력이 서로 대적할 만 하다면 누가 양보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조(租)를 바쳐도 부족해지면 이자를 받고 돈을 꾸어주어도[稱貸] 〈이자가〉 늘어나기만 하니 어떻게 부모를 봉양할 것이며, 어떻게 처자를 기를 수 있겠습니까? 민이 곤궁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시경(詩經)』에서도 이르지 않았습니까? ‘부자들에게 괜찮지만 슬프도다! 이 사람들이 외롭구나.’ 라고 말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반에 가장 먼저 전제(田制)에 힘을 쓰시고 이어서 교지(敎旨)를 내리시는 것이 이와 같이 진심이 담겨있었습니다. 깊고 멀리 내다보시는 생각이 성심(聖心)에서 나왔으니, 아! 위대하십니다! 어리석은 제 생각으로는 물고기를 잡는 데는 그물을 짜는 것 만한 것이 없으며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여놓으면 거문고를 탈 수 없습니다[膠柱鼓瑟]. 그 법을 고치지 않으면 그 폐단을 없애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갑인주안(甲寅柱案)을 위주로 공문주필을 참작한다면 〈땅을〉 빼앗으려 다투는 것은 이로 인하여 바로잡힐 것이며 새로 개간하는 것은 따라서 헤아려 질 것입니다. 새로 개간되는 땅에서는 세를 받고, 넘쳐나는 사패전(賜牌田)을 줄이면, 나라로 들어오는 것은 많아질 것입니다. 다투는 땅을 바로잡고 경작하는 민을 안정시키면 인심이 기뻐할 것입니다. 인심이 기뻐하면 나라로 들어오는 것이 늘어날 것이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크게 바라는 것으로 전하께서는 무엇이 걱정되어 하지 않으십니까? 혹자가 말하기를 ‘부유한 사람의 땅은 갑작스럽게 빼앗는 것이 어렵고 오랫동안 쌓인 폐단은 갑자기 없애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용렬한 임금이 하는 것이지 전하께 바라는 바는 아닙니다. 만약 시행하는 방도와 윤색하는 일을 대신을 거느리고 행한다면 반드시 현명한 계책이 나올 것이니[運籌], 어찌 신진(新進)의 소생의 망령된 논의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행하는 것과 행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전하께서 성심으로 하시는지, 성심으로 하지 않으시는지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근래에 왜적이 강역을 침략하여 성상(聖上)께 밤낮으로 걱정을 끼쳐드리고 있습니다. 세신(世臣)의 노성(老成)한 덕으로 서로 함께 지략을 논하여 〈왜적을〉 처치하는 방도의 요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부친의 상을 당하여 바닷가에 거처하며 재야에서 도모한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의 계책은 불과 두 가지로 육지에서 지키는 것과 바다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수레는 개울을 건널 수 없으며, 배는 육지를 나다닐 수 없으니, 인성(人性)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호(胡)와 맥(貉) 사람들은 그 성정이 추운 것은 잘 참아내며, 양(楊)과 월(粤) 사람들은 그 성정이 더운 것을 잘 참아냅니다. 지금 대저 평지에 사는 민은 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배에 뛰어오르지도 않았는데도 정신이 이미 혼미해지며, 한번 세찬 바람과 험한 파도를 만나게 되면 왼쪽으로 구르고 오른쪽으로 넘어져 배 안에서 서로 깔고 뭉개어 〈잠시라도〉 겨를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군대가 정연하게 움직이려고 해도 적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기가 어렵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육지에서 지키게 되면 평지에 사는 민을 징발하여 병장기를 날카롭게 다듬고 요해처에 주둔하여 군대의 모습을 성대히 하고, 봉화를 성실하게 하면 왜적의 눈을 현혹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다면 안렴사(按廉使)와 군수(郡守)에게 〈임무를〉 맡기기에 충분하니, 도순문사(都巡問使)가 어찌하여 필요하겠습니까? 수령을 욕보이고 공급받은 물자만 소비하는 것이 그와 같을 뿐입니다. 해전의 기술은 신도 생각하였던 바입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를 끼고 있어 섬에 사는 민이 무려 100만입니다. 배를 움직이고 수영하는 것은 그들의 장기(長技)이며 그 사람들은 또한 농상(農桑)을 일삼고 고기잡이와 소금을 굽는 것으로 이익을 도모합니다. 근래에 왜적으로 인하여 살던 곳에서 떨어지고 그 이익을 잃으니 왜적을 원망하는 마음이 육지에 사는 민에 비하여 어찌 10배에 그치겠습니까? 말을 달려 계책을 담은 글을 들고 연안에서 민을 모아 반드시 상을 준다고 하면 수천 명을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장기를 가지고 원망의 대상인 왜적을 대적하게 한다면 이기지 못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적을 죽여서 상을 얻는다면 오히려 고기잡이와 소금을 굽는 이익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추포사(追捕使)를 보내어 항상 배 위에 있도록 명령을 내리면 주군(州郡)은 편함을 얻을 것이며 도적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가 〈바로〉 도적을 막는 긴요한 방법입니다. 대개 육지를 지키고 바다에서 싸우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가 겁을 먹었다고 여겨 셀 수 없는 만큼 쳐들어 올 것입니다. 바다에서 싸우고 육지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들은 혹 나가더라도 불의에 쳐들어와 해가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지를 지키는 것은 우리를 굳게 지키는 것이며, 바다에서 싸우는 것은 저들에게 위세를 보이는 것이니, 이와 같다면 둘 다 얻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文)과 무(武)는 한 가지를 폐할 수 없으니, 문이 날줄이 되고 무가 씨줄이 되는 것은 천지(天地)의 도(道)입니다. 당우(唐虞) 삼대(三代)는 먼 옛날이나 양한(兩漢)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漢)〉 고조(高祖)가 초(楚)와 각축(角逐)을 벌일 때, 소하(蕭何)와 같은 자는 궁리(窮理)하여 전략을 세웠으나 말에 땀을 흘리게 하는 공은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문입니다. 한신(韓信)과 같은 자는 군사를 나누어 전쟁에 수고하는 공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무입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중흥할 때, 창을 던지고 문예를 강론하여 말을 쉬게 하고 도를 논하였으니 곧 문무가 병용되어 날줄과 씨줄이 함께 펴져서 후세 〈사람들은〉 미치지 못하는 바입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비록 전투에 당하였을 때라도 강론하는 도를 폐하지 않아야 하니, 하물며 승평(昇平)한 때라도 싸워서 지키는 대비를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로써 선왕(先王)이 그의 당연함을 알고 관직과 직분을 만들어 문을 숭상하고 무를 중히 여긴 것은 일찍이 이것만을 거론하고 저것만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성군이 왕위에 오르시어 교화(敎化)를 이루시었고[熙洽漸磨], 동쪽으로 점점 나아가 100년 동안 승평을 이루니 민은 군사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만호부(萬戶府)는 역대 황제께서 세우신 바이지만 이미 비어 버렸습니다. 제위(諸衛)의 직책은 권세가들이 차지하였으며 또한 군사도 없습니다. 이제 옛 것에 준하여 비록 무를 중히 여긴다고 하더라도 무를 쓰는 실질은 없습니다. 최근에 왜적이 중외(中外)에서 소란을 일으켜 〈민은〉 거의 땅을 잃고 말았으며 또한 중원(中原)의 민은 왜적의 비린내에 많이 물들었다는 〈말이〉 들립니다. 오로지 황천(皇天)께서 우리 원(元)을 돌보아주시는 깊은 뜻과 우리 황제께서 백성을 길러주시는 드넓은 은혜에 의지하여 지금은 편안해져서 엎어지고 자빠지지[顚沛]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편안한 곳에 거처하며 위태로움을 생각한다면 비록 가득 차더라도 넘치지 않을 것이며, 환란을 생각하여 미리 막아둔다면 어찌 어려운 지경에 뒤엉키겠습니까? 만약 머뭇거리다가[因循] 하루아침에 위태로운 일이 닥치게 되면 장차 어찌 대비할 수 있겠습니까? ‘초나라가 원숭이를 잃으니 화가 수풀의 나무에게까지 미치며, 성문에 불이 나면[失火] 재앙이 못의 물고기에까지 미친다.’고 합니다. 편안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나라는 동쪽에 일본이 있고 북쪽에는 여진이 있으며 남으로는 강절(江浙)에 배로 통합니다. 다만 중국에 조회하러 가는 길은 서쪽의 연산(燕山)으로 가야 합니다. 왜적이 쳐들어오면 이미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다가 갑병(甲兵)을 청하는데 이르고 맙니다. 절강의 도적이 만일에 배를 타고 쳐들어오거나 여진족이 만일 남쪽으로 깃발을 휘날리며 말을 타고 쳐들어오면 쟁기를 매던 민이 어찌 성을 지키는 군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변고가 창졸간에 벌어지면 사람들은 모두 엎어져서 사직을 호위하거나 군왕을 돕지도 못할 것입니다. 매양 걱정이 여기에 미치면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신이 바라건대 무과(武科)를 설치하여 제위(諸衛)의 군사를 충원하게 할 것이며, 무용(武勇)을 시험하고 기예(技藝)를 연습시켜 작록(爵祿)을 하사하면 그와 같은 기질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나라에 족히 정병(精兵)이 있고 사람들이 기꺼이 〈군사에〉 쓰인다면 다른 날의 후회스러운 환란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옛날 가의(賈誼)는 〈전한(前漢)〉 문제(文帝)가 무사했을 때도 크게 탄식하며 통곡했으니, 하물며 지금 이미 섶이 불에 타고 있는 상황에 오히려 침전(寢殿)에 누워있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미천한 신하로 하여금 요망한 말을 하는 죄를 얻을지언정, 전하께서 대비가 없었다는 비난을 듣지 않게 하는 것이 신이 원하는 바입니다. 공자(孔子)의 도(道)는 매우 원대하니 신이 능히 찬양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고금(古今)에서 숭앙하고 받드는 묘학(廟學)의 규모도 또한 신이 모두 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나라에 안으로는 성균(成均) 12도와 동서학당(東西學堂)을 세워두었으며 밖으로는 척박한 주군(州郡)에도 학교를 두었는데 규모가 매우 원대하며 절목(節目)은 치밀하였습니다. 조종(朝宗)의 뜻을 보건대 유도(儒道)를 숭상하고 중히 여기는 바가 깊고도 간절합니다. 대개 국학(國學)은 풍화(風化)의 근원이며 인재는 정교(政敎)의 근본이니 배양하지 않는다면 그 근본이 공고하지 않아 깊게 할 수가 없어서 그 근원이 맑아지지 않습니다. 옛 제왕들로 천하에 이름 있는 이들은 역시 여기에 뜻을 두었습니다. 전하께서는 태어나면서 지혜로운 자질을 갖추고 일찍이 성인의 도를 흠모하시어 학교가 폐해진 것을 가슴아파하시다가 마침내 수리할 것을 명하시었으니 〈이것은〉 우리 유학의 다행스러운 일일 뿐 아니라 실로 생민(生民)의 복입니다. 그러나 생도(生徒)들은 흩어지고 재사(齋舍)는 기울고 퇴락한 것에는 유래가 있으니 신이 말씀을 청하여 올립니다. 옛날의 학문은 성인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나 지금의 학문은 벼슬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를 외우고 글을 읽으며 도(道)를 좋아하는 마음이 아직 깊어지지 않았는데도 귀하게 되는 경쟁에서 이기려고 합니다. 문장(文章)을 깎고 구절(句節)을 다듬는 데 마음을 쓰는 것이 매우 지나치게 되니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공력(功力)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러는가 하면〉 혹자는 〈도를 향한 마음을〉 바꾸고서 다른 곳에 나아가 붓을 놀리는 것을 과장하기도 하고 혹자는 늙어서도 이룬 것이 없어서 신세를 망친 것을 한탄합니다. 그 중에서 영매(英邁)하고 걸출한 인재가 유가(儒家)의 종장(宗匠)이 되고 나라의 초석이 되는 것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시경(詩經)』에서 말하기를, ‘화평하고 단아한 군자여! 어찌하여 인재를 만드시지 않으시는가?’라고 하였는데, 인재를 만드는 묘법(妙法)은 실로 왕화(王化)에 있는 것입니다. 사류(士類)의 폐단이 이와 같다면 윗사람으로 어찌 책임이 있단 말을 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하물며 벼슬에 올라간 자들은 반드시 급제할 필요도 없고, 급제한 자들이 반드시 국학(國學)에서 나와야 할 필요도 없으니 누가 지름길을 버리고 돌아가려고 하겠습니까? 생도가 흩어지고 재사가 퇴락한 것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신이 엎드려 청하오니, 조제(條制)를 명백히 내리시어 밖으로는 향교(鄕校)를, 안으로는 학당(學堂)을 두고 〈생도의〉 재능을 살펴서 12도(徒)에 승진시키소서. 12도의 생도는 또한 〈재능을〉 총괄하고 살펴서 성균관(成均館)으로 승진시키되, 날과 달을 한정하여 덕성과 기예를 가늠하여 예부시(禮部試)를 치르게 하소서. 합격한 자는 예에 의거하여 관직에 임명하시고 합격하지 않은 자들도 출신(出身)의 품계(品階)를 주소서. 관직에 있으면서 과거를 보려는 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국학생이 아닌 자들에게 시험을 볼 수 없게 한다면, 옛날에는 불러도 오지 않던 자들도 지금은 몰아내도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보기에 장차 인재가 배출되어 전하께서 쓰시고자 해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왕공(王公)과 사서(士庶)가 존중하고 섬기니 한(漢)부터 지금까지 날이 갈수록 번성하였습니다. 우리 태조가 건국하셨을 때에는 사찰과 민가가 한데 섞여 있었습니다. 중세(中世) 이래 승도(僧徒)가 더욱 늘어나 오교양종(五敎兩宗)이 이익을 위한 소굴이 되었으며 냇가와 산골까지 절이 없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승려의 무리들만이 점점 비루해졌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민으로서 놀고먹는 이가 많은 것에 식자(識者)들은 매양 애통한 마음이었습니다. 부처는 대성인(大聖人)이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반드시 사람들과 같으니 이미 죽은 영혼이 승도들도 이와 같다는 것을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바라건대, 조제(條制)를 명백히 내리셔서 이미 승도가 된 자들은 또한 도첩(度牒)을 내줄 것이며, 도첩이 없는 자들은 군대에 충당하소서. 새로 창건되는 사원은 모두 철거하소서. 철거하지 않으면 즉시 수령에게 죄를 주고, 양민으로 하여금 모두 머리를 깎지 말도록 하소서.
신이 듣건대 전하께서 〈부처를〉 받들고 섬기는 정성이 역대 선조[列聖]들보다 독실하다고 하던데, 국운을 길이 연장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부처는 지극히 성스럽고 공정하여 받들기를 지극히 아름답게 해도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 대우하는 것이 심히 박하여도 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경전 중에 분명하게 설명하기를, ‘보시와 공덕은 경전의 말씀을 간직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였으니, 정사를 돌보는 여가와 쉬시는 여가에 방등(方等)에 주목하시고 돈법(頓法)에 마음을 두신다면 괜찮지 않을 것도 없습니다. 단지 윗사람이 된 자는 사람들이 본받는 바이므로 허비하게 된다면 재물도 소모되고 없어질 것입니다.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방비하여[防微杜漸]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고 하시었으니 신이 원컨대 부처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와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신이 또한 군왕의 뜻을 거스르면[逆鱗] 반드시 머리가 부수어질 것을 알지만, 다만 잔을 넘친 물이 하늘에까지 찰까 걱정되는 까닭에 죽음을 무릅쓰고 한마디 말을 아끼지 않고 드리는 것입니다. 신이 또한 다시 생각해보건대 성쇠(盛衰)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 이치상 필연입니다. 우리나라는 2대에 걸쳐 어린 임금이 즉위하여 배신(陪臣)이 정권을 잡아 기강이 무너지니 사람들은 그 다스림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너그럽고 굳세시어 가히 다스림을 이루실 자질을 갖고 계셔서 난세(亂世)가 극에 달하여도 잘 다스림만을 생각하실 것이니, 〈바로〉 훌륭한 다스림을 이룰 수 있는 때가 온 것입니다. 마땅히 어진 이를 등용시키는 데 갈증이 나있는데도 폐백을 묶어 〈어진 이의 등용이〉 급급한 것을 보지 못하고, 마땅히 정사를 돌보는 것이 급한데도 뜰 안의 횃불이 밝은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진 이를 어찌 모두 등용할 수 있으며, 간사한 무리들을 어찌 모두 물러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온 정치를 행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고 백성의 바람을 실망시켰으니, 이와 같은데도 다스림이 이루어짐을 바라는 것은 뒷걸음질 치며 앞으로 나갈 것을 도모하는 것과 같고, 남쪽으로 수레바퀴를 돌려놓고 연(燕) 땅에 가려는 것과 같으니 신은 전하를 위하여 심히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주역(周易)』에서 이르기를,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니 군자는 스스로 힘쓰고 쉬지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마음을 닦는 요체와 다스림을 행하는 방책은 이를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전하께서는 〈여기에〉 마음을 두소서.”라고 하였다.
〈공민왕〉 2년(1353)에 〈이색이〉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에 제수되었다.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 제1명으로 합격하여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었고, 원(元)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하였다. 이듬해 정시(庭試)에 응시하자 독권관(讀卷官)인 참지정사(叅知政事) 두병이(杜秉彝)와 한림승지(翰林承旨) 구양현(歐陽玄)이 이색의 대책(對策)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으며 마침내 제2갑 제2명으로 발탁되었고, 칙서를 내려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 承仕郞 同知制誥 兼 國史院編修官)에 제수하였다. 곧이어 〈이색이〉 고려로 돌아오니 왕이 〈그에게〉 전리정랑 예문응교(典理正郞 藝文應敎)를 제수하였다. 〈공민왕〉 4년(1355)에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승진하였으며 또 원에 가서 예우를 받아 한림원권경력(翰林院權經歷)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5년(1356)에 〈이색은〉 어머니가 늙었다고 하여 〈원의〉 관직을 버리고 고려로 돌아왔다. 〈이후〉 글을 올려 시정팔사(時政八事)를 말하였는데, 그 하나는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전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왕이 〈이색의 제안을〉 기뻐하며 받아들였으며, 마침내 이색을 이부시랑 겸 병부낭중(吏部侍郞 兼 兵部郞中)으로 삼아 문무관의 선발을 관장하게 하였다. 〈공민왕〉 6년(1357)에 시국자좨주(試國子祭酒)가 되었다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관직을 옮겼으며, 삼년상(三年喪)을 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왕이〉 따랐다. 〈공민왕〉 7년(1358)에 어떤 일에 대해 말하였다가 권귀에 거슬려 일시에 간관들이 모두 좌천되었으며, 이색도 상주(尙州)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날 밤에 〈공민왕이〉 명령을 내려 이색을 추밀원우부승선 한림학사(樞密院右副承宣 翰林學士)로 삼고 재상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색은 재능과 덕성이 출중하니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등용[用舍]을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인심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이색이〉 나라의 기밀을 관장한 것이 무릇 7년이었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되어 왕이 남쪽으로 피난을 하는데 호종(扈從)하여 공이 1등에 책록(策祿)되었다.
〈공민왕〉 11년(1362)에 왕이 불호사(佛護寺)의 승려의 말을 듣고 전지(田地)를 하사하려는데, 마침 이색이 어보인(御寶印)을 갖고 과거합격자 명단을 살펴보고 있었다. 왕이 환관을 보내어 승패(僧牌)에 인장을 찍을 것을 명하니 이색이 아뢰기를, “이 일은 마땅히 여러 대신들과 의논해야지 가볍게 바꿀 수는 없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매우 노하였는데, 이색이 두려워하여 즉시 승패에 인장을 찍어주었다. 〈그런데도〉 왕의 노기(怒氣)가 여전히 풀리지 않아 〈이색이〉 과거합격자 명단에 인장을 찍는 것도 정지하라 명하였다. 지도첨의(知都僉議) 유숙(柳淑)이 간하여 말하기를, “승려가 도리에 맞지 않게 전하의 정치를 더럽히고 있지만, 이색의 간쟁(諫爭)이 진실로 옳습니다. 전하께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은 들어주고 간쟁하는 신하를 죄준다면 〈이 또한〉 도리에 어찌 맞는 것이라 하겠습니까?”고 하였다. 왕의 노기가 조금 풀려 이내 곧 과거합격자 명단에 인장을 찍으니, 이색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국사(國事)에 임해서 제멋대로 행하였다가, 〈전하께서〉 도리어 격하게 노하시니 천둥 같은 위엄 아래에서 몸 둘 곳을 생각하면 천지간에 용납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공민왕〉 12년(1363)에 원에서 〈이색에게〉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 儒學提擧)를 제수하였으며, 고려에서는 〈그에게〉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密直提學 同知春秋館事)를 제수하고 단성보리공신(端誠保理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왕과〉 국정을 함께 하였으며, 비록 휴가 중에도 큰 정사는 반드시 〈이색에게〉 가서 묻게 하였다. 〈공민왕〉 14년(1365)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공민왕〉 16년(1367)에 성균관(成均館)을 중영(重營)하고 이색을 판개성부사 겸 성균대사성(判開城府事 兼 成均大司成)으로 삼았다. 〈이때〉 생원을 늘리고 경술(經術)을 공부한 선비인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을 택하여 모두 다른 관직을 가지고서 교관(敎官)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전에는 성균관의 학생이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이색이 다시 학식(學式)을 정하고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경전을 나누어 수업하였는데, 강의를 마치면 함께 논쟁하느라 지루함을 잊을 정도였다. 이에 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서로 함께 눈으로 보고 느끼게 되니,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이 비로소 흥기하게 되었다. 원에서 〈이색에게〉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제수하였다.
〈공민왕〉 17년(1368)에 시중(侍中) 유탁(柳濯) 등이 글을 올려 마암(馬岩) 영전(影殿) 공사에 대해 간하였다. 〈그러자〉 왕이 크게 노하여 유탁 등을 옥에 가두었으며, 이색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다. 왕이 이 일로 유탁을 죽이고자 이색에게 포고문[諭衆文]을 짓게 하였다. 이색이 유탁의 죄명을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수상이 되어 불의(不義)한 일을 많이 하여 하늘이 큰 가뭄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 첫 번째이다. 연복사(演福寺)의 토지를 빼앗은 것이 두 번째이다. 공주가 훙서(薨逝)하자 3일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 세 번째이다. 그 장례에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예로 낮추어 사용한 것이 네 번째이다. 불충하고 불의한 것이 누가 이보다 더 큰가?”라고 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최근에 유탁 등이 영전 공사를 중단할 것을 청하였으니 네 가지 일로 죄를 준다고 하여도 나라 사람들은 모두 〈유탁 등이 영전 공사에 대한〉 글을 올렸기 때문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또한 이 네 가지 일은 모두 사형에 처할만한 죄가 아니니 원컨대 다시 생각해 보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더욱 노하여 〈글을〉 더욱 급하게 재촉하니 이색이 엎드려 말하기를, “신이 차라리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감히 글을 지어내어 죄를 만들어내겠습니까? 또한 글을 올린 일은 유탁이 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영도첨의(領都僉議)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 신돈(辛旽)이 영도첨의가 되어, 막 왕의 곁에 있었다. 〈신돈이〉 부득이하여 이내 말하기를, “저도 그 일을 알고 있으나 다만 주상께서 노하시어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였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시중(侍中) 이춘부(李春富) 등에게 명하여 어보(御寶)를 봉하라 하였는데, 이춘부가 엎드려서 감히 하지 못하였다. 신돈이 말하기를, “마땅히 말을 꺼낸 자가 봉해야 합니다.”고 하니, 이내 이색에게 명령하였는데, 이색은 왕을 더욱 노하게 할까 두려워 곧바로 봉하였다. 〈이색이〉 글로 쓰기를, ‘신 이색이 삼가 봉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덕이 모자라 내 말을 좇지 않으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덕이 있는 사람을 구하여 섬기라. 우리 태조께서 어찌 처음부터 왕손(王孫)이셨겠는가? 내가 왕위에서 물러나겠다.” 하고는 이내 정비(定妃)의 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음식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다음날 신돈이 왕의 노여움을 풀고자 왕에게 이색을 하옥할 것을 아뢰고 찬성사(贊成事) 이인임(李仁任), 지도첨의(知都僉議) 유연(柳淵)으로 하여금 〈이색을〉 신문하게 하였는데,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죄를 준 것이었다. 이색이 말하기를, “신이 포의(布衣)시절부터 주상의 지우(知遇)가 되어 전공(戰功)도 없고 이직(吏職)을 거치지 않았으나 다만 글을 짓는 작은 재주로 재상에 올랐는데 주상의 은혜가 깊고도 중하여 갚고자 해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일찍이 생각하기를, 진실로 주상의 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 몸과 목숨이 아깝지 않다 여겨 힘써 말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시중이 포승줄에 묶여 있으며, 저를 문사관(問事官)으로 삼으셨는데 감히 말을 다하고자 한 것은 왕께서 마음을 움직이고 반성하시어 대신을 함부로 죽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라 하였다. 〈또 이색이〉 울며 말하기를, “제가 우는 것은 옥관(獄官)에게 동정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감히 주상께 알려지기를 바라서도 아니요,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일로 인하여 주상의 이름을 한번 더럽혀 천하 후세에 아름답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인임 등이 보고하니 왕이 마침내 감복하여 유탁 등을 풀어주고 이색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목욕하고 조정에 나오면 내가 장차 해줄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이색이 나아가 사례(謝禮)하니 왕이 말하기를, “전에 노여워한 것은 괘념치 말고 다시 진심을 다하라.”라고 하였다. 〈공민왕〉 18년(1369)에 〈이색을〉 다시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옮겼으며, 〈공민왕〉 20년(1371)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칭호를 더하였다. 우리 태조〈李成桂〉가 지문하무사(知門下府事)가 되었는데 왕이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최근에 여론이 어떠한가?”고 하였다. 〈그 신하가〉 대답하기를, “모두들 나라에서 인재를 얻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문무에 모두 일류를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았는데 누가 감히 문제 삼겠는가?” 하였다. 왕이 이색과 이인복(李仁復)을 부를 때마다 반드시 좌우에 일러 청소하고 향을 사르게 하였다. 총애 받는 승려 신조(神照)가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를 볼 때 하필 이와 같이 공경을 다하십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이를 알 것인가? 두 공의 도덕은 용렬한 선비와 다르다. 또한 이색의 학문은 살을 버리고 골수를 얻은 것과 같아서 비록 중국이라도 비교할 이가 많지 않으니 어찌 감히 거드름을 피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얼마 있다가 〈이색은〉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기복(起復)되어 옛 직책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22년(1373), 사직을 청하여 면직되었으며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되었다.
우왕(禑王) 3년(1377)에 〈이색에게〉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더하였으며, 우왕이 그를 사부(師父)로 삼았다. 이색이 부친 이곡(李穀)의 뜻에 따라 대장경(大藏經)을 조성하려고 하였는데, 우왕이 그것을 듣고 지신사(知申事) 노숭(盧嵩)에게 향을 내리게 하였다. 〈우왕〉 8년(1383)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나 병이 있다고 일을 맡지 않았다. 이듬해 〈이색은〉 한산군(韓山君)에 다시 책봉되었으며 이윽고 판삼사사에 복직하였다. 〈우왕〉 10년(1384)에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으로 올려 책봉하였다. 황제가 장부(張溥)와 주탁(周倬) 등을 보내었는데 장부 등이 국경에 이르러 이색의 안부를 물으니 우왕이 이색을 판삼사사라 칭하게 하고 〈황제의〉 고명(誥命)을 맞이하게 하였다. 〈우왕〉 11년 글을 올려 퇴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우왕이 들어주지 않고 이어서 〈그를〉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으로 삼았다. 〈우왕〉 12년 〈이색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는데, 구례(舊例)에 따라 화원(花園)에서 우왕을 위하여 잔치를 열었다. 우왕이 사부로 공경하여 친히 손을 잡고 이끌어 들어가서 의자에 마주앉으려고 하였으나, 이색이 완고히 사양하였다. 우왕이 친히 내구마(內廐馬)를 이끌고 와서 하사하면서 시를 지을 것을 명하니, 이색이 〈시를〉 쓰기를, “성군이 나라가 흥할 운수를 여시니, 어리석은 신하는 남다른 은혜를 입었네. 과장(科長)에서 급제자를 나눌 것을 명하시고, 음식을 먹이시고 특별한 술상을 벌여놓았네. 산을 대하니 그 빛이 생생하고, 임금 곁에 임하니 햇볕은 따뜻하구나. 경연(經筵)에 별것 아닌 재주로 참여하니, 넉넉한 은혜가 하늘과 땅 같구나.”라고 하였다. 이 시험에서 이색이 규칙을 엄하게 세워서 응시자의 나이가 20세가 되지 않으면 응시를 허락하지 않았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조민수(曺敏修)의 아들이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동지공거(同知貢擧) 염흥방(廉興邦)이 그를 선발하고자 이색에게 힘써 청탁하였는데, 이색이 들어주지 않았다. 〈우왕〉 13년 우왕이 서보통탑(西普通塔)을 수리하면서 이색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했는데, 요약하자면 “우리 태조께서 창업하시고 왕통을 드리우시면서 불법을 널리 드날리시어 자손을 보호하신 것은 이전의 제왕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선왕께서는 능히 태조의 마음가짐을 본받으시어 삼보(三寶)에 귀의하시고 숭앙하셨으며, 지금의 전하께서 탑을 수리하시는 것이 이와 같이 하시니, 전하의 마음가짐이 위로는 태조께 합치하신다는 것을 또한 알 만 합니다. 아! 〈『시경(詩經)』에〉 주(周)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명을 새롭게 하였다고[維新] 했는데, 〈이 말은〉 바로 오늘날에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식자(識者)들이 임금과 부처에게 아첨한다고 비난하였다. 하루는 이색이 병을 칭탁하고서는 나가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시중(侍中) 이성림(李成林)은 조그만 집에서 자라 재상에까지 이르렀는데 전민(田民)을 광대하게 점유하고는 일시에 집 3채를 지었으며, 좌사(左使) 염흥방(廉興邦)은 또한 민에게서 거두어들이고 탐하는 것을 일삼으니 나라를 그르칠 자들은 바로 이 두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우왕〉 14년(1388)에 우리 태조〈李成桂〉께서 회군하고 종실 중에서 선택하여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조민수가 창왕(昌王)을 세울 것을 모의하였는데 이색이 당시의 명유(名儒)이므로 그의 말에 의지하고자 하여 몰래 이색에게 물었다. 이색도 또한 창왕을 세우고자 하여 바로 말하기를, “마땅히 전왕(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창왕을 〈임금으로〉 세웠다. 창왕이 이색을 기용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제수하였으며 추충보절동덕찬화보리(推忠保節同德贊化輔理)의 호칭을 하사하고 말 1필을 하사하였다. 왕대비도 환관을 보내어 술과 과일을 보내었다.
공민왕이 훙서(薨逝)한 때부터 〈명(明)나라〉 황제가 매양 집정대신(執政大臣)이 입조(入朝)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모두들 두려워하여 감히 가려하지 않았다. 이때 이색이 재상이 되어 말하기를, “지금 우리나라에 허물이 있으니 왕과 집정대신이 친히 입조하지 않는다면 논변할 수가 없습니다. 왕은 어려서 갈 수 없으니 이 늙은 대신의 책임입니다.”라 하고는 곧 스스로 입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우리 태조〈이성계〉가 칭찬하기를, “강개(慷慨)하구나, 이 늙은이여!”라고 하였다. 창왕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색이 늙고 병이 있어 굳이 가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색이 말하기를, “신이 포의(布衣)에 있다가 지위가 지극히 높아졌으므로 항상 죽음으로써 보답하려고 하였는데, 이제야 죽을 곳을 찾았습니다. 설령 길에서 죽더라도 시신으로라도 명을 받들 것이니 진실로 천자께 나라의 명을 전달할 수 있다면 비록 죽어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라 하였다. 마침내 이숭인(李崇仁), 김사안(金士安)과 함께 〈명(明)의〉 경사(京師)에 하정사(賀正使)로 갔으며 또한 왕의 관직과 감국(監國)을 청하였다. 이색이 우리 태조의 위세와 덕이 날로 높아져서 중외(中外)가 마음으로 귀부하여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변란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아들 하나를 딸려 보낼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우리 태종(太宗)〈李芳遠〉을 서장관으로 삼게 하였다. 〈이색이〉 입조함에 미쳐서 길에서 어떤 관인 하나가 이색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의 최영(崔瑩)이 정병 10만을 거느리고도 이성계(李成桂)에게 붙잡혀 쉽사리 포승줄에 묶였는데, 그대 나라의 민은 이성계의 지극한 덕을 어떻게 보답하려는 것이오?” 하였다. 〈명(明)〉 황제가 평소에 이색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그를〉 서너 번 불러서 예우하는 것이 매우 후하였다. 〈황제가〉 조용히 말하기를, “그대는 원조(元朝)에서 한림(翰林)이 되었으니 응당 중국말을 알아듣겠구나.”라고 하니, 이색이 바로 중국말로 급히 대답하기를, “친조(親朝)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알아듣지 못하고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예부의 관리가 이색의 말을 전달받아 아뢰었다. 이색이 오랫동안 입조하지 않아 말을 많이 더듬었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중국말은 납합출(納哈出, 나하추)과 같구나.”라고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발해(渤海)에 이르러 두 객선과 동행하였는데 반양산(半洋山)에 이르러 거센 바람이 불어 두 객선이 모두 침몰하였다. 우리 태종〈이방원〉이 탄 배도 거의 구조할 수 없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 엎어지고 넘어졌는데도 태종의 얼굴빛은 태연자약하였다. 이색이 돌아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황제는 마음가짐에 줏대가 없는 군주이다. 내가 황제가 반드시 이 일에 관해 물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는 황제가 묻지도 않았으며, 황제가 물은 것은 모두 나의 뜻과 달랐다.” 하였다. 당시에 여론이 비난하기를, “대성인(大聖人)의 도량을 속유(俗儒)가 알고서 논의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당시에 전제(田制)가 크게 무너져 우리 태조〈이성계〉와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이 사전(私田)을 혁파하고자 하였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제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이색은 구법(舊法)을 가벼이 고치는 것은 불가하다고 버티며 논의에 따르지 않았다. 이색이 황려부(黃驪府)에서 우왕을 알현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을 청하면서 이림(李琳)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였다. 창왕이 이색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로 삼았다. 이색은 일찍이 홍영통(洪永通), 이무방(李茂方) 등과 함께 남신사(南神寺)에서 백련회(白蓮會)를 열었는데 불자들이 이색의 말이라 빙자하여 더욱 그 말을 늘어놓았다. 또한 오래도록 문형(文衡)을 맡았다가 그 아들 이종학(李種學)에게 다시 과거를 관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종학은 평소에 글을 잘 짓지 못하여 사림(士林)들이 이색이 자기 아들을 사사로이 기용했다고 비난하였다. 창왕이 〈명(明)에〉 친히 입조하려는데 이색이 말하기를, “요동의 들판은 매우 추우니 일찍 출발해야합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창왕의 모친 이씨(李氏)가 창왕의 나이가 어린 것을 불쌍히 여겨 도당(都堂)에 말하여 사행이 중지되었다. 창왕이 이색과 이림 및 우리 태조〈이성계〉에 명하여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전(殿)에 오르게 하였으며 찬배(贊拜)할 때는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하고 각각 은 50냥, 채색 비단 10필, 말 1필을 하사하였으며 교서를 내려 격려하였다. 처음에 이숭인이 부사로 이색을 따라 남경에 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숭인이 물건을 매매한 일로 탄핵을 당하여 유배를 가게 되니 이색이 스스로 불안해하다가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창왕이 들어주지 않고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이색에게〉 술을 하사하고 위로하게 하였는데도 출근하지 않았다. 창왕이 일을 볼 것을 재촉하고 찬성사(贊成事) 우인렬(禹仁烈)에게 명하여 집으로 술을 하사하니, 이색은 또 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창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대개 이색은 일찍이 이숭인의 글재주를 아껴서 재차 글을 올려 그를 구제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색이 마침내 장단(長湍)의 별업(別業)으로 돌아가니 창왕이 중사(中使) 이광(李匡)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으며 또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을 보내어 술을 하사하고 거듭 돌아올 것을 청하였으나 이색은 나가지 않았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이색은 장단에서 돌아와 궁궐로 가서 축하하였다. 왕이 궁 안으로 불러 용상에서 내려와 접대하였다. 〈공양왕이〉 말하기를, “평생 한가하게 노닐다가 뜻하지 않게도 지금 이 자리를 얻었소. 원컨대 경이 나를 도와주시오.”라고 하고 다시 〈그를〉 판문하부사로 삼았다. 왕이 친히 태묘(太廟)에 관(祼) 제사를 지내고 즉위를 고하려는데, 그날 저녁에 유사(有司)에서 우왕 모친의 신주를 철거할 것을 청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이 일은 아직 그 결말을 알 수 없으니 잠시 천천히 하라.”라고 하였다.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과 문하사인(門下舍人) 조박(趙璞)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이색(李穡)은 우리 현릉(玄陵)〈恭愍王〉을 섬기며 유종(儒宗)으로서 재상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공민왕[玄陵]이 훙서(薨逝)하고 후사가 없게 되자 권신 이인임(李仁任)이 제멋대로 권력을 농단하려고 어린 군주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이색이 논의를 도와 우왕(禑王)을 즉위시켰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회군하여 왕씨들 사이에서 〈왕을〉 옹립하자고 논의하던 즈음에 대장군(大將軍) 조민수(曺敏修)가 이인임의 인척이라 우왕의 아들 창왕(昌王)을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조민수가〉 그 흉측한 모의를 이어가려고 이색에게 계책을 물으니, 이색도 일찍이 창왕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를 옹립하는 논의가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종학(李種學)은 외척에게 선언(宣言)하기를, ‘군신들이 논의하여 종실(宗室)을 옹립하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세자를 세운 것은 우리 아버지의 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색이 〈명(明)의〉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이숭인(李崇仁)·김사안(金士安) 등과 서로 기약하여 황려(黃驪)에서 우왕을 만나기로 하였는데, 이색이 먼저 가서 독대하였으니 독대하는 사이에 말한 것이 공적인 것인지 사적인 것인지 아직 알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천자께서 명령하시기를, ‘비록 왕씨를 가탁했다고 해도 이성(異姓)을 〈왕으로〉 삼는 것은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킬 수 있는 좋은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충신과 의사(義士)들이 말하기를 왕씨를 다시 옹립하여 천자의 명에 따라야 한다고 했으나 적신(賊臣) 변안렬(邊安烈)은 공을 세워 부귀를 얻으려고 이색 및 우왕의 장인 이림(李琳) 및 김저(金佇), 정득후(鄭得厚) 등과 함께 우왕을 맞아들일 것을 모의하여 왕씨를 세우려는 논의를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이미 15년 동안 신하로 헌신하면서 다른 마음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500년의 왕씨는 저버리고 15년의 신씨에게는 충성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색은 대대로 왕씨에게 벼슬하면서 공민왕의 지극한 은혜를 입고도 이인임에게 붙어 신우(辛禑)를 세우고 왕씨를 끊었으며, 여러 장수들이 왕씨를 세울 것을 논의하는데도 조민수에게 붙어 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세웠습니다. 〈또〉 충신과 의사들이 왕씨를 다시 세울 것을 논의하는데도 변안렬에게 붙어 창왕을 내쫓고 우왕을 맞아들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왕과 창왕에게 있어서도 두 마음을 품은 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논의가 부족합니다. 대대로 왕씨의 신하가 되어 적신(賊臣)에게 아첨하고 빌붙어 왕씨의 종사를 영원히 끊으려고 하였으니, 그 죄악은 천지와 종사(宗社)에 용납할 것이 없습니다. 아! 왕망(王莽)이 한(漢)을 찬탈한 것이 장우(張禹)에게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장우가 그 모의에 참여하지 않고도 그의 힘을 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다만 장우는 유종(儒宗)으로서 평소에 신망이 두터웠던 자인데, 왕망에게 빌붙으니 왕망이 거리낌이 없었으며 나라 사람들도 그를 믿고 따랐으므로 왕망에게 붙지 않는 자가 도리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운(朱雲)이 그를 참형에 처할 것을 청하니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였으며, 후세의 공론으로부터 스스로 도망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이색은 우왕과 창왕에 붙어서 나라 사람들을 죄로 인도하였으니 도리어 장우보다 죄가 무겁습니다. 또한 이색은 이인임에게 소중했던 그의 부귀를 보전하였고, 이인임과 그 무리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이 탐욕을 자행하여 관직과 옥사를 팔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며 전민을 탈점하여 원망이 쌓이고 죄가 가득 차 드디어 패망하는데 이르게 되었는데도 이색은 그들의 그릇됨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왕의 사부가 되어 누차 상을 받았는데 젖내 나는 어린 자제들을 모두 과거에 급제시켜 요직에 늘어놓았습니다. 우왕이 포악하고 잔학한 짓을 자행하면서 무고한 이를 살육하는 것을 보면서도 이색은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왕이 망령되이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국경을 범하고자 하여 동방에 무궁한 화를 입히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도 이색은 또한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는 사전(私田) 때문에 공가(公家)는 메마르고 민생에 해를 끼치며, 송사(訟事)를 일으키고 풍속을 훼손하므로 그것을 혁파하고자 논의하여 전법(田法)을 바로잡으려는 데도 이색은 재상에 있으면서 고집을 부려 〈혁파는〉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 이종학(李鍾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여 권세가들의 원망과 비방의 단서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이림(李琳)이 탐욕스럽고 용렬하다는 것은 나라 사람들도 알고 있으나 이색이 또한 외척과 통하여 보전을 도모하기 위해 이림을 천거하여 자신의 벼슬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이색은〉 또한 유종(儒宗)이면서도 부처에 아부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조성하였는데 온 나라가 〈이를〉 다투어 본받으면서 오직 〈여기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게 함으로써 풍속을 그르쳤습니다. 〈이색은〉 자제들을 시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할아버지 이곡의 뜻을 좇은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버지를 이단(異端)에 빠뜨린 것이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색은〉 또한 창왕을 모시고 입조하고서 우왕을 맞아들이려는 계책이 미수에 그치자, 이숭인이 탄핵을 받은 것에 의탁하여 장단(長湍)으로 돌아가 사태가 변화하는 것을 관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전하께서 즉위하시자 공연히 와서 판문하부사의 직책을 제수 받아 백관의 위에 오르고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아예 없었습니다. 〈이색은〉 학문을 왜곡하고 시세에 아부하여 거짓으로 이름을 낚으니 청컨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이색 부자와 조민수의 죄를 논하여 후세에 남의 신하로서 불충한 자의 경계로 삼으로서.”라고 하였다. 왕이 이색과 이종학을 파직하고 조민수의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오사충 등이 다시 상소하여 탄핵하니, 이색을 장단에, 이종학을 순천(順天)에 유배하고 규정(糾正) 전시(田時)를 보내어 창녕(昌寧)에서 조민수를 국문하였다. 이때 조민수에게 창왕을 옹립하려 하였던 모의가 이색에게서 나왔다는 말을 얻어내고자 하였으나 조민수가 불복하고 말하기를, “창왕을 세운 죄는 나 혼자서 한 것이며 이색은 진실로 함께 한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여러 날 동안 고문을 하자 승복하였다. 〈공양왕〉 2년(1390) 헌사(憲司)가 상소하여 이색과 조민수가 창왕을 세운 죄와 또 우왕을 맞아들이려고 했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간관이 또 상소하여 이색과 조민수를 헌사에 가두고 엄히 국문을 가하여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이색의 관직을 삭탈하고 조민수와 함께 먼 곳으로 옮겼는데, 좌상시(左常侍) 윤소종(尹紹宗)이 이색의 문생(門生)이므로 서명하지 않았다. 간관(諫官)이 다시 이색의 죄를 청하니 왕이 오사충과 전시 및 집의(執義) 이고(李皐)를 보내어 장단에서 이색을 국문하게 하고, 명령하며 말하기를, “이색을 놀라게 하지 말 것이며, 만약 불복하거든 다시 명을 받으라.”고 하였다. 이색이 과연 불복하며 말하기를, “창왕을 세운 것은 내가 아는 바가 아닙니다. 내가 만약 요망한 말을 했다면 하늘이 알 것이니, 조민수와 대질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오사충이 전시[時]를 보내어 보고하니 왕이 〈이색에게〉 고문을 가할 것을 명하였다. 전시가 돌아와 왕명을 전하니 옥졸을 시켜 장(杖)을 잡게 하여 좌우에 세워두고 하루 종일 밤늦도록 고문하였다. 또한 조민수가 창녕의 감옥에서 한 말을 〈이색에게〉 보여주었다.
이색이 말하기를, “회군하여 왕을 옹립할 것을 논의하는 사이에 조민수가 내게 묻기를, ‘종친과 아들 창(昌) 중에서 누가 〈왕으로〉 마땅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조민수가 주장(主將)으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으며 또한 창왕의 외조부 이림과는 족친이라 마음을 같이 하였으니 내가 감히 거스를 수 없어서 ‘우왕을 세운지 오래되었으므로 마땅히 〈그의〉 아들 창왕을 세워야 한다.’고 대답한 것이지, 함부로 왕을 세울 것을 나서서 권하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명(明)〉 경사(京師)에 입조하러 가서 예부(禮部)에 이르렀는데 상서(尙書) 이원명(李原明)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서 아비를 내쫓고 아들을 세웠는데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습니까? 왕과 최영이 모두 죄를 입었는데 이것은 무슨 의리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대답하기를, ‘최영이 왕을 가르쳐 요양(遼陽)을 범하는 것을 꾀하였는데, 장군 조민수와 이성계(李成桂)가 불가하다 하여 의주(義州)에 이르러 감히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최영이 수차례 재촉하자 부득이 회군하여 최영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는데, 이에 왕이 노하여 제장들을 해치려고 했으므로 태후가 왕을 폐하고 강화(江華)에 안치시킨 것입니다. 〈강화는〉 개경에서 20여리 떨어져 있는 옛 도읍이고 명승지[勝地]이므로 성정(性情)을 수양하는데 이와 같은 곳이 없습니다. 또한 재상들이 〈우왕을〉 시위(侍衛)하고 있으며 의장(儀仗)과 기물(器物)과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음식은 모두 평소와 같은데 어찌 내쫓았다는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돌아와 시중(侍中) 이성계(李成桂)에게 말하기를, ‘이원명의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었으나 입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여흥(驪興)은 먼 곳이니 가까운 곳으로 옮겨두면 임금을 쫓아냈다는 이름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이 말만 한 것일 뿐 진실로 맞아들여 세우고자 논의한 것은 없습니다.’”고 하였다. 오사충 등이 이 말을 듣고 돌아갔는데, 이색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옛날 진(晉) 원제(元帝)가 들어가 대통(大統)을 이은 것에 대해, 치당(致堂) 호씨(胡氏)〈호인(胡寅)〉은 ‘원제의 성은 우씨(牛氏)로서 함부로 진의 왕통을 이었으니, 동진(東晋)의 군신들이 어찌 안주하고 없애려고 하지 않았는가? (이는) 호갈(胡鞨)이 번갈아 침입하니 강좌(江左)의 세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니, 만약 옛 왕업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인심을 붙들어둘 수 있겠는가? 〈이것을〉 버리고 새로 창업을 하는 것은 어렵고 쉬운 것에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또한 시세(時勢)를 타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색이 신씨(辛氏)를 세우는데 감히 다른 논의가 있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뜻이었다. 대간이 다시 이색과 조민수의 죄를 논하였으나 〈왕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번갈아 글을 올려 논죄하니 마침내 이색을 함창(咸昌)으로 옮겼다. 대간이 또 이색과 이림의 죄를 논하자 왕이 재상과 논의하고자 하였는데,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이 말하기를, “대간이 논한 것이 공신의 뜻과 다르다는 것을 알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손으로 상소 끄트머리에 쓰기를, ‘지신사는 이색을 좌주(座主)로 여겼다.’라고 하였으며, 우대언(右代言) 조인옥(趙仁沃)에게 대신 서명하게 하였다. 대간이 이행은 좌주에게 당여로 붙어서 일을 독선적으로 처리하여 덮어버렸으며 조인옥은 직무를 침어(侵漁)하였다고 탄핵하니 왕은 부득이하여 모두 파직하였다. 우리 태조〈이성계〉와 공신 7명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대간이 논하여 열거한 것은 저희들이 아는바가 아닌데 사람들이 이로써 저희들에게 허물을 돌립니다. 우왕과 창왕의 무리는 저희들을 미워하여 말을 지어내고 비방하니, 저희들은 관직에서 물러나 비방에서 벗어나 목숨을 보전하게 해주실 것을 청하옵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문을 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사헌(大司憲) 성석린(成石璘)이 이를 듣고 사직하는 상서를 올리니 대간의 논조가 더욱 강해졌다. 왕은 평소에 이색이 난을 모의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우홍수(禹洪壽)가 부마(駙馬) 우성범(禹成範)의 아버지인 까닭에 대간의 탄핵이 그치지 않은 것에 화가 나서 음식을 들이지 말게 하였다. 대간이 대궐문에 엎드려[伏閤] 명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말하기를, “이림과 이색 등은 모두 유배를 보냈으니 다시는 논죄할 것을 청하지 말라.” 하였다. 왕은 공신 등이 일을 보지 않자 평리(評理) 배극렴(裵克廉)에게 명하여 도당(都堂)에서 일을 처리하게 하니 대제학(大提學) 안종원(安宗源)과 좌사(左使) 권중화(權仲和)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도당의 서무는 지극히 긴요하니 두 시중이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속히 명령을 내리시어 9공신(九功臣)에게 일을 보게 하소서.” 하니, 왕이 말하기를, “경들이 해보라.”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한 사람의 재상이 사직하면 도당은 모두 비목(批目)을 고쳤습니다. 지금도 또한 마땅히 9공신의 비답(批答)을 고치시어 나가서 일을 보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따랐다. 9공신이 대궐에 가서 절을 하며 사례하여 왕이 내전(內殿)으로 불러 술을 하사하고 위로하였으니, 〈그들이〉 곧 나가서 일을 보았다. 대간이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사직하자 〈대간을〉 모두 수령으로 좌천시켰으며, 이행은 청주(淸州)에 유배 보냈다.
왕방(王昉)과 조반(趙胖)이 〈명(明)〉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왕에게 아뢰기를, “예부에서 신(臣) 등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들 나라의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彛)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라는 자가 와서 황제께 호소하기를, 「고려의 이시중(李侍中)이 왕요(王瑤)를 임금으로 세웠는데, 왕요는 종실이 아니며 이시중의 인친(姻親)입니다. 왕요와 이시중이 군사를 움직여 장차 상국을 범하려고 모의하였는데 재상 이색(李穡) 등이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곧 이색·조민수(曹敏修)·이림(李琳)·변안렬(邊安烈)·권중화(權仲和)·장하(張夏)·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이종학(李種學)·이귀생(李貴生) 등을 살해하고 우현보(禹玄寶)·우인열(禹仁烈)·정지(鄭地)·김종연(金宗衍)·윤유린(尹有麟)·홍인계(洪仁桂)·진을서(陳乙瑞)·경보(慶補)·이인민(李仁敏) 등은 멀리 유배를 보내었습니다. 쫓겨나있는 재상 등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께 와서 고하는 것입니다.」라 하였습니다. 이어서 친왕(親王)에게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토벌하여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윤이와 이초가 기록한 이색과 조민수 등의 이름을 꺼내어 보여주었습니다. 조반과 윤이 등이 대질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사대(事大)에 정성을 다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윤이에게 물어 말하기를, ‘당신의 지위가 군(君)에 봉해지는데 이르렀으니 나를 잘 아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윤이가 몹시 놀라 낯빛이 변하였는데, 예부 관리가 말하기를, ‘천자께서 명철하시어 또한 그가 무고(誣告)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대는 속히 환국하여 왕과 재상들에게 말하여 윤이의 글에 나오는 사람들을 국문하여 보고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간들이 연이어 상소하여 윤이와 이초의 무리를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대간의 청을〉 보류하고 명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김종연(金宗衍)이 도망하자 마침내 우현보·권중화·경보·장하·홍인계·윤유린을 순군에 하옥하였으며, 〈이러한〉 큰 옥사가 갑자기 일어나게 되었다. 대성(臺省)과 형조(刑曹)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먼저 윤유린을 매우 심하게 국문하니, 최공철(崔公哲)·최칠석(崔七夕)·조언(曹彦)·조경(趙瓊)·공의(公義)·한성(韓成)·김충(金忠)·안주(安柱)·곽선(郭璇)·정단봉(鄭丹鳳)·박의룡(朴義龍) 등의 이름이 연루되어 〈이들을〉 모두 하옥하였다. 처음에 윤유린의 종제(從弟)인 윤사강(尹思康)이 평소 행동에 절제함이 없었다. 〈윤사강은〉 승려였을 적에 장물죄를 범하였으며 상국에 도망해 들어가 윤이라고 개명하였다. 윤유린의 가신(家臣)인 정부개(丁夫介)는 조반을 따라 남경에 갔는데 〈윤이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돌아와서는 먼저 윤유린의 집으로 가서 그 상황을 말하였다. 윤유린이 옥에 있으면서 걱정스럽고 분하여 식사를 하지 않다가 죽었다. 〈그러자 윤유린의 목을〉 저자에 효수하고 그 집안을 적몰하였다. 정부개를 가두고 이색·이림·우인렬·이인민·정지·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 등을 붙잡아 청주옥(淸州獄)에 가두고 문하평리(門下評理) 윤호(尹虎), 밀직부사(密直副使) 박경(朴經), 우사의(右司議) 이확(李擴), 형조좌랑(刑曹佐郞) 신효창(申孝昌)·전시(田時) 등을 보내어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 유구(柳玽)와 함께 국문하게 하였다. 윤호 등이 청주에 있으면서 여러 죄수들을 국문하였는데 모두 불복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크게 내려 〈관아〉 앞의 개천이 크게 넘쳐 성의 남문을 부수었고 곧바로 북문까지 밀고 올라왔다. 성중(城中)이 1장(丈) 남짓 침수되었고 관사(官舍)도 물에 잠기었으며 민가도 태반이 잠기었다. 옥관(獄官)은 당황하여 나무에 매달려 목숨을 건졌다. 늙은이가 이르기를, “청주가 생긴 이래로 이와 같이 심한 수재(水災)가 없었다.”고 하였다. 왕이 수재 때문에 교서를 내려 그들을 풀어주게 하였으며, 〈이색은〉 이내 함창(咸昌)에 안치되었다가 곧이어 이색을 용서하고 종편(從便)할 것을 허락하였다.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 헌부(憲府)가 다시 이색과 이종학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는데, 헌부가 다시 이색의 죄를 논하니 왕이 억지로 그를 따라 〈이색 등을〉 함창으로 유배 보냈다. 간관이 또 이종학의 죄를 논하여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 경외종편(京外從便)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색이 글을 올려 사례하기를, “신이 재주가 없으나 다행히 전하가 들어와 정통(正統)을 계승하는 것을 만났는데, 처음 정치를 하시면서 외람되이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에 제수되었습니다. 차고 넘친 것을 두려워하고 더욱 경계했어야 하지만 열흘이 못되어 탄핵을 당하였습니다. 잇달아 글을 올려 문서가 쌓였는데 〈신을〉 극형에 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해가 세 번 바뀌는 것을 보니 더욱 강경해지고 쇠해지지도 않아 신의 목숨은 조석(朝夕)에 달려있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전하의 살리기 좋아하시는 덕과 하늘과 같은 공업(功業)이 아니었다면 신이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겠으며, 성상께서 풀어주시는 혜택을 입을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전하의〉 명을 듣던 날 급히 은혜에 감사드리고 나서 곧장 유배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넘고 북쪽으로 향하면서 풍설(風雪)을 맞고 충주(忠州)와 여흥(驪興) 사이에서 숙질이 발병하여 걷기도 어려웠습니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서 궁궐로 당장 갈 수가 없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이 쇠약해진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살리기 좋아하시는 덕을 보이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글을 보고 곧장 역마(驛馬)에 명하여 이색과 이숭인, 이종학을 불렀다. 이색이 서울로 돌아와서 사제(私第)에서 우리 태조〈이성계〉를 알현하니 태조가 놀라고 기뻐하여 윗자리로 맞아들였으며 무릎을 꿇고 술을 올렸다. 이색에게 〈이성계 자신은〉 서서 마시기를 청하니 이색이 사양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두 비난하였다. 매우 즐겁게 놀다가 파하였는데, 왕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이 두 공은 이전부터 두터운 사이였다.”고 하였다. 왕이 일찍이 좌우(左右)에 일러 말하기를, “예전에 대성(臺省)과 헌부에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이색과 그의 아들을 주살할 것을 청하였다. 이색이 일찍이 현릉(玄陵)〈공민왕〉을 섬기는데 언사(言事)가 왕의 뜻을 거슬러 비록 〈왕을〉 심히 노하게 하였는데도 오히려 예로써 우대하였다. 또한 위조(僞朝)때 명(明)에 사행 가서는 황제가 총애하고 우대하는 것이 두터워 〈그를〉 편전(便殿)에 불러서 접대하였으며 누차 잔치를 열어 위로하였으니 천하가 그의 사람됨을 우러러보았다. 공민왕[玄陵]의 밝은 본보기와 황제의 위엄과 존엄으로 예를 지키는 것이 저와 같으니 하물며 과인과 같은 사람이 감히 그를 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며칠 후 이색과 이숭인, 이종학이 궐에 나가 은혜에 사례하니 내전(內殿)으로 불러 술을 하사하고 위로하였다. 〈이색의〉 고신(告身)을 돌려줄 것을 명하였으며 다시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으로 책봉하고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로 삼았다.
〈공양왕〉 4년(1392)에 군신(群臣)들을 위하여 수창궁(壽昌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색이 취하여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가까이서 〈왕을〉 모시고 있던 대호군(大護軍) 김정경(金鼎卿)이 제지하자 이색이 황공하여 재빨리 나가버렸다. 정몽주(鄭夢周)와 유만수(柳曼殊) 등은 취하면 시끄러웠는데, 이날 약간 조용하였던 것은 무릇 이념(李恬)이 주사로 죄를 얻어 징계되었기 때문이었다. 정몽주를 죽이고 간관 김진양(金震陽) 등을 국문하는데 연이어 이색, 이종학, 이종선(李種善)의 이름이 나오자 이종학과 이종선은 외방에 유배 보내었다. 〈또한〉 왕이 사자로 하여금 이색에게 말하게 하기를, “경의 두 아들이 조정에 죄를 지었으니 경도 나가야 한다. 양강(兩江)의 밖으로 경이 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색이 낙심하여 말하기를, “신이 생각해보니 전택(田宅)도 없으니 과연 어디로 가야합니까?”하였으나 마침내 금천(衿川)으로 쫓겨났으며, 이윽고 여흥으로 옮겼다. 본조에 들어서는 한산백(韓山伯)에 책봉되었다.
이색은 69세에 죽으니 제사와 부의를 하사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색은 천성이 명민하고 여러 책을 널리 보았으며 〈그가〉 시문을 지을 때는 붓을 잡으면 곧바로 쓰니 대체로 막힘이 없었다. 후학을 힘써 진출시켜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니 학자들이 모두 우러러 흠모하였다. 나라의 문한(文翰)을 수십 년간 맡아 여러 차례 중국에서 칭송을 받았다. 평생 당황하거나 급히 행동하지 않았고 모나는 언행을 하지 않았으며 가산(家産)을 돌보지 않아 비록 여러 번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조와 절개가 확고하지 않아 크게 건의한 것이 없었으며 학문이 순일(純一)하지 않고 불법(佛法)을 깊이 믿으니 세간에서 비난을 받았다. 『목은집(牧隱集)』 55권이 세상에 간행되었으며, 아들은 이종덕(李種德), 이종학, 이종선이다.
이종덕은 관직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종학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