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여행.....오로지 먹기위한 여행...지난 주 사랑방 모임 끝무렵 그 유명한 영주 한우, 영주 쫄면 이야기가 나오면서 마구잡이로 현충일을 맞아 오로지 먹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로 반 강제로 결의 되었다.
야베스 3,4도 같이 가려했으나 박모 순장의 결혼기념일이라..다른 곳으로...
화요일 저녁 차 모 순장 사무실 앞에 모여든 오로지 먹기위한 순원들... 안 모 부부, 황 모 부부, 차 모 부부, 기러기 김씨, 차에 올라타고 영주로 출발
유명한 한우 식당에 전화해보니 9시 반까지만 입장하면 고기를 준단다...출발이 너무 늦어 시속 170 킬로로 달려 겨우 달려 9시 20분에 식당 입장...너무도 배가 고픈 나머지 사진 찍는 것을 잊고 한우를 퍼먹어 인터넷에 떠다니는 다른 비슷한 사진을 올린다...죄송..!
배터지게 한우로
포식을 하고 영주 부석사 바로 앞에 팬션으로 입장
팬션을
소개시켜준 정모집사의 동생가족
일단 먹고
숙소에 도착했어도 차모 순장에의한 강제 도착예배
그래도 예배는
즐겁게
기도는
뜨겁게
찬양은 차겁게??
안되지...내가 황집산데..
알았다!
새벽 3시에
도착해서 잠간 자고 일어난 안모씨 가족들
일단 어제 남은 수박부터
먹고
아침 식당
열기전까지 뭘할꼬?
절 구경이나
하자
아침부터 웬
절?
단체 사직
박고..
새벽부터 목을
잘 씻었군!
영주
부석사로!
애들은 애들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절에서도 역시 수다는 최고야!!
왕따당한 차모 순장
기껏 쫓아왔더니 다른데만 쳐다보고...쯧쯧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부석사 당간지주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浮石面) 북지리(北枝里) 부석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4.28m이고, 재료는 화강석이다. 부석사는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818m) 중턱에 있는 사찰로 신라 때인 676년(문무왕 16) 의상조사(義湘祖師:625∼702)가 창건하였으며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당간은 사찰에서 법회 의식(儀式)이 열릴 때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으로 이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2개의 받침대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부석사 경내 원래 위치에 원상대로 1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소박 미려한 지주이다. 전면에 별다른 조식(彫飾)은 없고 다만 양쪽 모서리의 모를 약간 둥글게 처리하였다. 앞뒤 양 측면에는 양 지주 모두 한 줄기의 종선(縱線)이 양각되어 있다. 지주 정상부의 바깥쪽 모서리는 호선(弧線)을 2단으로 깎아내고 안쪽에는 직사각형의 간구를 파서 간을 끼우게 되어 있다. 양 지주 사이 지면에는 주변에 연꽃무늬를 새겨 장식하고 중앙에 지름 30㎝의 둥근 구멍을 뚫은 원형 대석(臺石)을 놓아 당간을 받치게 하였다. 이 당간지주는 가늘고 긴 편이지만 아래 위의 두께가 차이가 있어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단아하고 견실한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7세기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 부석사[浮石寺]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절.
종파 해동 화엄종
창건시기 676년 (신라 문무왕 16)
창건자 의상조사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무염국사(無染國師)·징효대사(澄曉大師)·원융국사·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부석사삼층석탑 (浮石寺三層石塔)
종목 : 보물 제249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 : 1기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대 : 통일신라
소유자 : 부석사
관리자 :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의 각 층에는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윗층은 하나씩 두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으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 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지나치게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해 보인다.
1960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철제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저기 가서 뽀뽀나 할까?
부석사무량수전 (浮石寺無量壽殿
종목 : 국보 제18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수량 : 1동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대 : 고려시대
소유자 : 부석사
관리자 : 부석사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날아 와 줄곧 의상을 보호하면서 이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아직도 무량수전 뒤에는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로 전하는 ‘부석’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간결한 형태로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쪽은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 (浮石寺無量壽殿앞石燈)
종목 : 국보 제17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석등
수량 : 1기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대 : 통일신라
소유자 : 부석사
관리자 :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십일조를 못했는데 시주나 할까?
들에핀 아주
작은 들풀
그들도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그 유명한 순흥
묵밥집에서 아침을...
동서지간
배고파요 기도좀 빨리 끝내주세요
묵을 이리
쓰시는군요
메밀
소수서원 [紹修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지정번호 사적 제55호
지정년도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경북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
시대 1542년(중종 37)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다음해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후 1544년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풍기에서 생강
도넛을 가족당 한 박스씩 사고
풍기
인삼시장으로
뭘 먹여야 우리 남편 힘을 쓸고?
예천감천면의석송령(醴泉甘泉面의石松靈)
수령(樹齡)은 600여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1m, 가슴높이 줄기 둘레가 3.67m이고, 가지의 길이는 동·서쪽이 19.4m, 남·북쪽이 26.2m이다.
이 소나무가 위치해 있는 천향리마을은 예천읍에서 영주로 가는 길 왼편에 있고 그 마을회관 앞뜰에 서 있다. 소나무는 원래 원줄기가 위로 솟아나는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이 석송령은 굵은 곁가지가 멀리 뻗어 남북방향으로 30m에 이르고 있다. 곁가지의 무게를 지탱시키기 위해서 석주(石柱)를 곳곳에 세워 주고 있다.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소나무는 인격이 부여된 특이한 존재로 세계적으로 유례를 볼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소나무는 약 600년전에 큰비가 와서 풍기지방에서 시작된 홍수에 따라 흘러 내려오는 것을 어떤 과객이 건져내어서 이곳에 심은 것이라 한다. 그 뒤 이 나무는 좋은 성장을 계속하였는데 이 마을의 주민이었던 이수목(李秀睦)이란 사람이 이 나무에서 영감을 느끼게 되어 석송령이란 이름을 지어 주고 그의 소유토지 6,600㎡를 이 나무에 상속시켜 문서등기를 마쳤다. 토지와 같은 부동산을 나무가 소유한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동리회관건물도 석송령의 소유토지 위에 건축된 것이다. 이 소나무는 해마다 농지를 경작하는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것을 은행에 저축하고 있다. 땅을 소유하고 있으니 제반 세금을 또한 내고 있다. 즉 재산세 지방세 방위세 등을 납부하고 있다. 그리고 해마다 선정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고 박정희대통령은 이 나무에 500만원을 하사한 일이 있고 이것은 당시의 가치로 보아 큰돈이었다. 이것이 장학기금이 되었다.
정월보름날 새벽에 동민들은 이 나무 아래에서 동제를 올려 평안을 비는데 사람들은 이 나무가 동리를 수호해 주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동제가 끝나면 아주머니들이 막걸리가 든 술병을 들고 이 나무의 주변을 돌면서 술을 땅에 뿌린다. 소나무는 술의 효과를 얻어 더욱 씩씩하게 자란다는 것도 사람들은 믿고 있다. 동리 노인들은 이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송계(松契)를 만들고 있다.
평탄한 곳에 서 있는 생육공간은 충분한 편이다.
여보 나좀 커보이게 하자
이제 어울리는군
내 마누란 어디갔지?
여기있군! 사진좀 제발 찍자...친한적!
초간정 [草澗亭]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죽림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지정번호 경북문화재자료 제143호
지정연도 1985년 8월 5일
소재지 경북 예천군 보문면 죽림리
시대 조선시대
분류 누(정), 각
초간정 /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경북문화재자료 제143호. 조선시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20권을 저술한 초간 권문해가 세우고 심신을 수양하던 곳이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한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가 1582년(선조 15)에 지은 정자이다. 현재의 건물은 후손이 중창한 것으로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도 이런 정자 있으면 성경 100독은 하겠다
물
수제비
배는 안꺼졌지만 예천 복집 한국관으로...
예천의 그
유명한 복어 매운탕
혀가 스르르
녹는 복껍질
오로지 배를
꺼뜨리기 위한 다음 여행-안동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 [安東河回─]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하회리(河回里)에 있는 민속마을.
지정번호 중요민속자료 제122호
지정연도 1984년 1월 10일
소장 안동시
소재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시대 조선시대
면적 528만 8,008㎡
분류 민속마을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을 잘 보존한 풍산 유씨(柳氏)의 씨족마을이다.
하회마을의 지형을 태극형 또는 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을 이룬 형국을 말한다. 강 건너 남쪽에는 영양군 일월산(日月山)의 지맥인 남산(南山)이 있고, 마을 뒤편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花山)이 마을 중심부까지 완만하게 뻗어 충효당(忠孝堂)의 뒤뜰에서 멈춘다. 강 북쪽으로는 부용대(芙蓉臺)가 병풍과 같이 둘러앉아, 산천 지형 또한 태극형 연화부수형국을 이룬다.
유성룡(柳成龍) 등 많은 고관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임진왜란의 피해도 없어서 전래의 유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허씨(許氏) 터전에, 안씨(安氏) 문전에, 유씨(柳氏) 배판이라는 말대로 최초의 마을 형성은 허씨들이 이룩하여, 하회탈 제작자도 허도령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허씨들이 벌초를 한다고 한다.
화천(花川)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하여 위쪽이 북촌, 아래쪽이 남촌이다.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북촌댁(北村宅),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南村宅)은,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 양반가옥이다. 이 큰 길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부에는 유씨들이, 변두리에는 각성(各姓)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2개의 문화가 병존한다.
지금까지 보물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은 양진당(보물 306), 충효당(보물 414), 북촌댁(중요민속자료 84), 원지정사(遠志精舍:중요민속자료 85), 빈연정사(賓淵精舍:중요민속자료 86), 유시주가옥(柳時柱家屋:중요민속자료 87), 옥연정사(玉淵精舍:중요민속자료 88), 겸암정사(謙菴精舍:중요민속자료 89), 남촌댁(중요민속자료 90), 주일재(主一齋:중요민속자료 91), 하동고택(河東古宅:중요민속자료 177) 등이다.
양진당·충효당·남촌댁·북촌댁 등 큰 가옥들은 사랑채나 별당채를 측면으로 연결하거나 뒤뜰에 따로 배치하는 등 발달된 주거 구조를 보이고, 장대한 몸채·사랑채·많은 곳간·행랑채가 공통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특히 사랑방·서실·대청·별당과 같은 문화적 공간을 지니는 점은,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일반 서민들이 소유한 최소한의 주거 공간과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그 전통
마을에도 교회가...감동!
600년 수령의
마을 중심의 나무
유성룡 선생의
충효당[忠孝堂]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생가.
지정번호 보물 제414호
지정연도 1964년 11월 14일
소재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시대 조선 중기
크기 총 52칸
종류 건축물
1964년 11월 14일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후손 유시영(柳時泳) 외 7인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조선 중기에 지은 건물로 단층 기와지붕이다. 규모는 총 52칸. 행랑채에 달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대청 앞에 마주서게 되며 이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대청 정면과 측면에는 난간이 있는 툇마루가 있고 기둥은 원주(圓柱)를 세웠으나 내부와 방에는 방주(方柱)를 사용하였다. 사랑채 온돌방 옆에 대문간이 있어서 안채로 들어가게 되며 건물은 중정(中庭)을 둘러싸고 ‘口’자형의 평면으로 배열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내당은 대청과 방앞에 퇴간(退間)이 있으며 높은 원주를 세우고 그 위에는 2익공(二翼工) 계통의 공포(栱包)를 배치하였다. 이 충효당은 유성룡의 장자(長子) 여(袽)가 임진왜란 후 재건한 것을 증손인 병조판서 의하(宜河)가 확장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제 둘이먹다 셋이 죽어도 모르는 쫄면집으로 40Km 돌진...아직 덜 먹엇는데도 수요예배 보러가자시는 차모순장은 시외버스 태워 의왕으로 추방!
드디어 그
유명한 쫄면집 중앙분식-앗 내부수리중
쫄면대신 다른
쫄면을...역시 견줄바가...
인도네시아산
닭살!
정말 많이 먹었당
난 붕어빵도 사달래야지!
드디어 쫄면
대령
이건 내꺼다 눈독 들이지 마라!
쫄
우동도..
왠
건배?
어른도 울고
먹는 매운 쫄면을 잘 먹는 성수와 더달라는 성만
아이들이라 회비도 안 받았건만..먹긴 어른들보다 너 먹노! 회계의 실수로 지갑 펑크! 다음부턴 너희도 회비 받는다!
이리하여 터진
배를 움켜지고 모두 귀향-헉 만두를 안찍었네...도착해서 뷴당서 유명한 솥뚜껑 삼겹살을 먹으려했으나 모두 너무 피곤해서 다음기회로....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