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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행
손 창 섭
“건 안 되겠다.”
한 마디로 고선생(高先生)은 딱 잡아뗐다. 관식(寬直)의 얼굴빛이 대뜸 달라졌다. 의외라는 듯이 고선생 (高先生)을 치떠 보았다. 그럴 수가 있느냐는 눈길이다. 고선생(高先生)도 마땅찮은 눈으로 마주 보았다. 둘은 그대로 잠시 말이 없었다. 다방에서 탁자를 사이에 놓고 앉아서다.
“너무 합네다!”
“너무하다니? 내가 너무한 게 아니라, 네가 어지간히 뻔뻔하다.”
“난 필사적입네다. 뻔뻔한 거이 문제가 아니 야요. 내가 굶어 죽어두 얼어 죽어두 좋단 말입네까?”
“네가 굶어 죽건, 얼어 죽건, 차에 치어 죽건, 그 책임을 왜 내가 져야 한단 말이냐? 어째서 하필 날더러 책임지라는 거냐?”
“난 선생님 이 그럴 줄은 몰라시요. 정 말 그렇게 나오깁 네까?”
두 사람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똑같이 흥분한 표정 이었다.
관식(寬植)은 내일부터 갈 데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고향의 선배가 내고 있는 병원에 있었다. 병원이란 명색뿐이었다. 빈민가 뒷골목에 있는 무허가 병원이었다. 들은풍월이라, 의사의 아들인 관식(寬植)은 거기서 조수인 체했다. 선배도 면허 없는 의사였다.
당국의 취체¹에 걸려들어 문을 닫게 되었다. 선배는 짐을 꾸려가지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병원 자리에는 딴 사람이 들게 되었다. 내일은 집을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관식(寬植)은 생각다 못해, 중학교 때의 교사인 고선생(高先生)을 찾아와 당분간 신세를 지자고 청을 드린 것이다.
“근 십 년 만에, 만나는 길로 그게 인사냐? 아무리 생각해두 난 네 심경을 이해할 수가 없다.”
“뭐가 만나는 길입네까? 두번째 아닙네까?”
“마주 앉기는 오늘이 첨이지 뭐냐? 그날은 전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연락처 만 가르쳐 줬으니까.”
“하여튼 너무합네다. 난 선생님이 그렇게 냉정할 줄은 몰라시요.”
“날더러 너무한다, 냉정하다, 하기 전에, 너로서는 먼저 내게 대해서 알아야 할 게 있지 않느냐? 내 생활 형편을, 내 성격을, 내 취미를 미리 알아야 한단 말이다.”
“그럴 여유가 어데 있습네까? 내일 당장 이불 보따리를 꾸려 지구 나와야 할 판인데, 어디루 갑네까?”
“그러면, 만일 날 만나지 못했더면 어쩔 뻔했니?”
“그러니까 사람이란 죽지 않구 살게 마련 아닙네까. 선생님의 인정이나 우정을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거야요. 너무 몰인정합네다.”
“우정? 아니 이거 점점 더 해괴한 소리가 나오는구나. 너와 나 사이에 대체 언제 그리도 알뜰한 우정이 쌓였드냐? 나는 먹기 위해 시가(時價)로 너희들에게 지식을 팔았다. 너희들은 도매값으루 내게서 지식을 샀다. 언제 탐탁히 친교를 맺어왔단 말이냐? 이북에서 삼 년 월남해서 삼 년, 육 년간의 훈장 생활에 나는 수천 명의 학생을 상대했다. 그래 그 수천 명에게, 인정이나 우정을 베풀 의무가 내게 있단 말이냐? 간혹 거리에서 만나두 점심 한 그릇, 차 한 잔 먹자는 말이 없는, 그따위 수천 명에게 나만이 일방적으루 우정을 베풀어야 해? 나는 남을 위해서 태어났단 말이냐? 네게 우정을 베풀기 위해 태어났단 말이냐?”
고선생(高先生)은 자연 음성이 높아졌다. 무슨 일인가 하고 다른 자리의 손님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찻집을 나와 가지고도 고선생(高先生)은 속이 풀리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운 놈이다. 뻔뻔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그놈은 어디까지나 이쪽을 몰인정한 사람, 박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억울하고 괘씸 했다.
다음날 어슬어슬²해서다. 그날따라 몹시 추웠다. 늦도록 단골 찻집에 앉아 있노라니까 관식(寬植)이가 또 나타났다. 오늘은 낡은 회색 담요에 싼 이불 보따리까지 한 손에 들었다. 비좁은 탁자 사이로 그놈을 무작정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손님들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레지가 뭐라고 해도 모르는 체하고 부득부득 고선생 (高先生)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고선생 (高先生)은 눈살
을 찌푸리고 일어섰다.
“나가자, 나가. 얼른 나가.”
떠다밀 듯이 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니 그래 뉘게다 막 떼거지를 쓰자는 거냐?”
“어떡 하갔소, 선생님. 미안합네다!”
관식(寬植)은 머리를 굽실했다. 입술이 퍼렇게 얼어 있었다. 몸을 덜덜 떨곤 했다. 길거리에 그러고 서서 나무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런 정도로 간단히 해결될 사태는 이미 아니었다. 근처에 아는 책방이 있어서 짐을 거기에 갖다 맡겼다. 둘이는 다시 찻집으로 갔다. 앉기가 바쁘게 관식(寬植)은 또 한 번 머리부터 숙였다.
“선생님 정말 안됐습네다.”
“어제 네가 한 말을, 오늘은 내가 써야겠다. 너무한다 너무해!”
관식(寬植)은 머리를 북적북적 긁었다.
“오늘 낮에까지는, 저두 선생님을 찾아오지 않을라구 결심했습네다. 그렇지만 이 이불짐을 메구 서울 바닥을 싸댕기다 보니 결국은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오구 말아시요. 할 수 있습네까. 한 쥘 동안만 신셀 집세다. 선생님 은혜만은 잊지 않가시요!”
관식(寬植)의 태도가 어제와는 달랐다. 오늘은 덮어놓고 머리를 숙이고 달라붙는 것이다. 이놈이 아주 나보다는 윗수로구나, 생각하면서도, 고선생(高先生)은 차마 어제처럼 딱 잘라 거절해 버릴 수는 없었다.
“나두 궁한 판이지만, 일주일 정도라면 어떻게 되겠지.”
마지못해 고선생(高先生)은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관식 (寬植)은, 여태 독식³을 면하지 못한 채,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고선생(高先生)의 식객이 된 것이다. 이것이, 웅덩이의 물처럼 잔잔한 고선생(高先生)의 생활에 풍파를 일으키게 된 시초였다.
어느 날 관식(寬植)은 얼굴이 가무잡잡한 소녀를 데리고 왔다. 별스레 눈이 동그랗고, 웃으면 한쪽에만 보조개가 패었다. 스물둘이라지만, 겨우 십칠팔 세밖에 안 먹어 보였다. 검정 우단 잠바에 풀색 코르덴 양복바지를 받쳐 입었다. 엉덩이나 무릎은 달아서 반들반들했다. 귀남(貴男)이라는 이름이었다.
“내 친굽네다. 앞으루 내 색씨가 될 사람입 네다.”
“까불지 마, 함부루!”
귀남(貴男)은 눈을 흘겼다.
“남(男)은 꽤 유망한 연극 소녀입네다.”
관식(寬植)은 그렇게 소개했다. 귀남(貴男)은 그제야 베레모를 벗고, 일본 여자처럼 무릎을 모으고 앉더니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나쁜 인상은 아니었다. 연극을 한다니, 배우 지망이냐고 고선생(高先生)이 물었더니, 관식(寬植)은 웃으면서 모로 고개를 저었다.
“주로 희곡을 써보고 싶댑네다. 한편으론 물론 연출이나 연기두 하구요.”
관식(寬植)이가 설명을 달았다. 여자로서 왜 그처럼 다난한 길을 택했느냐고 고선생(高先生)이 물었다.
“인생이 숫제 연극인걸요.”
야, 요년 봐라, 하는 생각이 고선생 (高先生)에겐 들었다. 젊은 사람의 입에서 인생이니, 인류니 하는 말이 튀어나올 적마다 고선생(高先生)은 본능적으로 입에서 신물이 돌았다. 그러나 이번만은 안 그랬다.
“그럴까? 인생은 모두가 연극일까? 좀더 진실한 인생두 있지 않을까.”
“그저 진실한 체 해 보이는 거죠. 뉘게나 진실하게 보이리만큼, 진실한 체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닐 거예요. 상당한 수련이 필요할 거예요. 연기란 결국 게까지 가야 되니까요.”
고선생 (高先生)은 적이 놀랐다. 덮어놓고 발그라지거나⁴ 건방진 소리로만 들리지 않고 어딘가 신선한 맛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두 한 사람의 배우에 지나지 않겠군. 극히 서투른 연기밖에 할 줄 모르는, 아주 삼류나 사류 배우란 말야.”
귀남(貴男)은 웃기만 했다.
“남(男)은 쩍하문 나보구두, 그 서투른 연기 좀 집어치우라는 거야요. 아주 몹시 까다로운 감독이랍네다.”
관식(寬植)은 너털웃음을 쳐 보였다.:
“앤, 벌써부터 날 따먹을려구 노리는 거예요. 그렇지만 아직 그 솜씨룬 어 림없다!”
귀남(貴男)은 관식(寬植)이가 만든 찬 없는 저녁을 얻어먹고 갔다. 고선생 (高先生)은 문간까지 따라 나갔다. 초라한 귀남(貴男)의 뒷모습이 몹시 추워 보였다. 버스 종점까지 귀남(貴男)을 바래주고 온 관식 (寬植)은 방에 들어서는 길로 물었다.
“어떻습네까? 선생님.”
“뭐가?”
“남(男)이하구 결혼할라구 그럽네다. 그만 했음 쑬쑬하지요?”
고선생 (高先生)은 대뜸 눈살을 모았다.
“결혼을 해? 저 하나두 처신 못 하는 주제에 결혼이 다 뭐니?”
“날 너무 무시하지 말라구요. 이제 두구 보시라구요.”
“무시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다. 남에게 얹혀 지내는 녀석이 결혼은 다 뭐냐 말이다.”
사실 고선생(高先生)에게 관식(寬植)은 귀찮기만 한 짐이었다. 약속한 한 주일이 지나도 관식(寬植)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네가 온 지 어느새 한 주일이 지냈다!”
나가라는 뜻으로 그랬더니,
“벌써 그렇게 되나요. 맘이 펜하니까 여게 와서 살이 좀 올라시요. 인제 한 달쯤 지나문 몸두 나가시요. 그러구 보니 오길 잘 해시요.”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도니, 고선생 (高先生)은 벌렸던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고선생(高先生)은 몇 군데의 잡지에 삽화를 그려주는 외에, 매주 두 시간씩 어느 여학교에 그림을 지도하러 나갔다. 그 수입으로 두 주둥이 당장 입치레야 못 할까마는 도무지 여유가 없어서 심신이 못 견디게 고달팠다. 관식(寬植)은 놀라운 대식가였다. 고선생(高先生)의 세 곱은 먹어 치웠다. 연료고 건건이⁵고 배나 헤펐다. 그만이문 그래도 좋겠다. 고선생 (高先生)의 내의나 양복을 제 것처럼 입고 나가기가 일쑤였다. 아침마다 대개는 고선생(高先生)이 먼저 외출을 하게 된다. 하루는 거리에서 나중 나온 관식(寬植)을 만났다. 동행이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얼른 몰라보았다. 이말이랑 하고, 춘추복이지만 신조⁶ 양복으로 쪽 뺐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게 고선생 (高先生) 자신의 양복이었다. 오래 벼르던 끝에 지난가을에 큰 맘 먹고 장만한 것이었다. 국산이지만 색깔과 바느질이 맘에 들어서, 몇 번 안 입고 아껴 두었던 외출복이었다. 고선생(高先生)은 안색이 달라지며 관식(寬植)을 노려보았다.
“미안합네다, 선생님. 오늘 좀 깨끗이 채리구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래시요. 얼른 돌아가 벗어 놓갔습네다.”
그러고 나서 관식(寬植)은 몇 걸음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여자를 분주히 따라가 버렸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는 길로 고선생(高先生)은 관식 (寬植)을 대놓고 나무랐다. 관식 (寬植)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과히 무색해하지도 않았다.
“그까짓 양복 한 번 입었다구 뭘 그러십네까.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시라구요. 내가 인제 돈만 잡으문 선생님 양복 한두 벌쯤 문제없이 해 드리가시요.”
도리어 그랬다. 그전에도 한 번 털내의를 갈아입으려고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어느새 관식(寬植)이가 척 입고 있었다.
느닷없이 관식(寬植)은 불쑥 이런 질문을 내대기도 했다.
“선생님은 왜 장갈 안 드십네까?”
“내 장가 걱정까지 하라드냐? 널더러.”
“하두 딱하니까 그럽 네다. 무슨 재미루 사십네까?”
“무슨 참견이냐, 시끄럽게.”
“내가 생각이 있어 그럽네다. 재산 있는 여자가 있이요.”
고선생 (高先生)은 대꾸를 않고 돌아앉아 버렸다.
“한 번 만나게 해 드리가시요.”
“……”
“선생님 속은 도무지 알 재간이 없어요.……난 색씨 얻구 싶어 못 겐디가시요.”
관식(寬植)은 좀더 노골적으로 나오는 날도 있었다.
“선생님 내 근사한 데 안내해 드리가시요. 상게⁸ 한 번두 못 가 보셨지요? 둘이서 천 환이문 돼요.”
고선생 (高先生)은 마침내 골을 내고야 말았다. 다시없는 모욕을 당한 것처럼 얼굴을 붉혀가지고 대들었다.
“네가 날 어디까지 조롱할 셈이냐? 그렇게 내 성격이나 취미를 몰라줄 테문 당장 짐 싸갔구 나가라. 당장 나가 없어지란 말이다.”
“괘니 성 내지 마시라구요. 난 선생님을 조롱하는 거이 아니야요.”
그대로 관식(寬植)은 잠시 동안 눈만 꺼벅거리며 앉아 있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 혼자 가서 놀구 오가시요. 오백 환만 빌려 달라구요.”
고선생(高先生)은 성큼 돈을 내주었다. 이런 기분으로 잠시라도 더 관식(寬植)과 버티고 앉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어서 혼자되고 싶었던 것이다. 관식 (寬植)은 돈을 받아 간직하고 유유히 어두운 거리로 나갔다.
이렇게 염치없이 눌어붙는 관식(寬植)이가 날이 갈수록 고선생(高先生)은 짐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어떤 압박감까지도 느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내쫓을 수도 없었다. 쫓겨나갈 관식(寬植)이도 아니었다. 겉으로만 공연히 팩팩거리면서, 용단성 없는 자신을 고선생 (高先生)은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고선생(高先生)은 차차 지쳐가기 시작했다.
귀남(貴男)은 가끔 왔다. 대개는 관식(寬植)이가 데리고 왔지만, 혼자 오기도 했다. 늘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검정 우단 잠바에 엉덩이와 무릎이 달아서 번들번들한 풀색 코르덴 바지다. 게다가 남자용 양말을 신고 있었다. 양말에 구멍이 뚫려 발가락이나 뒤꿈치가 내다보일 때가 있다. 귀남(貴男)은 자고 가기도 했다. 그런 날은 관식(寬植)이가 나가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에 귀남(貴男)은 양말을 기웠다. 귀남(貴男)이가 자고 가는 날은 누구보다도 고선생(高先生)이 피해를 입었다. 불가불 이부자리를 귀남(貴男)에게 양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관 (寬植)의 침구에 비하면 그래도 고선생(高先生) 것이 훨씬 깨끗한 편이니 할 수 없었나. 귀남(貴男)은 이불을 보더니 때가 껴서 덮을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고선생 (高先生)은 수건을 주었다. 귀남(貴男)은 그것으로 목에 닿는 부분만은 싸서 덮었다. 귀남(貴男)은 잠바만 벗고, 다른 건 다 입은 채로 자리에 들어갔다. 이불 속에서 옷을 벗었다. 부스럭부스럭하다가 머리맡으로 손을 내밀면 즈봉이 나왔다.
두번째는 윗 내의, 세번째는 아랫내의가 나왔다.
“야, 남(男)아, 너 몽땅 벗니? 드로즈꺼정 벗니?”
먼저 자리에 들었던 관식(寬植)은 자라처럼 목을 빼고 건너다보다가 마침내 부질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까불지 말구 어서 잠이나 자!”
“야 통 잠이 안 온다. 남(男)아, 너 이 방에 총각이 둘이나 있다는 걸 알아다구.”
그래놓고도, 남보다 먼저 코를 고는 것은 관식(寬植)이었다. 한참 지껄이고 있다가도 말끝을 맺지 못한 채 잠이 들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고선생(高先生) 이 일을 마치고 자리에 들 때쯤은, 물론 귀남(貴男)이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고선생 (高先生)의 눈이 까닭 없이 귀남(貴男)의 벗어놓은 내의로 갔다. 명색이 털내의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래위가 다 미군용이었다. 적당히 줄였을 뿐 아니라, 팔꿈치며 무르팍은 딴 천을 대고 되는 대로 꿰맨 것이었다. 고선생 (高先生)은 귀남(貴男)의 자는 얼굴을 보았다.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귀남(貴男)의 모친은 일본 여자였다. 해방 다음다음 해에 모친은 남편과 자식을 떼어두고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때 귀남(貴男)은 열네 살이었다. 아홉 살짜리 남동생이 있었다. 모친이 떠나간 지 석 달 만에, 뜻밖에도 이번엔 부친이 덜컥 죽었다. 정체불명의 괴한의 손에 피살당한 것이었다. 죽 청년단에 관계하고 있었으므로 좌익 계열의 행패라고 주위에서들은 해석했다. 귀남(貴男)은 슬픈 줄도 몰랐다. 그저 동화 속에 나오는 불쌍한 아이 같이만 자기 남매가 생각되었다. 그들 오뉘는 고모네가 맡아주었다. 과히 궁하지 않은 고모네 집에서 여학교엘 다녔다. 그 고모네가 육이오 사변통에 폭삭 녹아버리고 말았다. 고모부만 피란 나간 뒤, 아이들을 데리고 남아 있던 고모는 공습에 시체도 찾을 수 없이 되었다. 옆집 방공호에 들어가 있던 아이들만이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고모는 가재(家財)와 함께 비산(飛散)⁹해버리고 만 것이다. 귀남(貴男)의 남동생은 현재 어느 신문사 숙직실에 기숙하면서, 신문 배달을 하는 한편, 야간 상업학교에 다닌다는 것이다. 고선생(高先生)은 귀남(貴男)의 잠든 입술에다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귀남(貴男)은 한쪽으로 고개를 틀면서 입맛을 다셨다.
“나는 너를 딸이라 생각하고 그랬다. 돈이 좀 생기면, 네 겨울 내의부터 한 벌 장만해주마.”
하고 호젓한 기분으로 고선생 (高先生)은 중얼거려 보았다. 이불을 끌어당겨 잘 덮어주었다. 코를 고는 관식(寬植)을 한쪽으로 바싹 밀고, 고선생(高先生)도 그 옆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호젓한 심정은 이내 깨져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고선생 (高先生)보다도 뼈대가 굵직굵직한 관식(寬植)은 이리저리 몸을 뒤챌 적마다, 팔꿈치와 정강이로 고선생 (高先生)을 쿡쿡 찌르고 밀어냈다.
그보다도 모로 누운 고선생(高先生) 등에 관식(寬植)은 잠결에 바짝 달라붙는 수가 있다. 그럴 때마다 관식(寬植)의 사타구니가 거치적거려서 고선생(高先生)은 이를 데 없이 거북스러웠다. 관식(寬植)이가 그 무거운 다리를 얹고 자기 때문에 아침에 잠을 깨면 고선생 (高先生)은 허리가 저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귀남(貴男)을 하룻밤 푹 쉬게 해주기 위해서는 고선생 (高先生)은 그 정도의 피해쯤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어느 날 귀남(貴男)은 청이 있노라고 했다. 당분간 자기도 여기 같이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일정한 숙소가 없이 떠돌아다니니까 저녁때만 되면 피곤해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출가한 고모 사촌 언니네 집에서 잤다. 형부나 그 가족들이 귀남(貴男)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니의 괴로운 심경을 생각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와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언니네 집에서 자지 않기로 했다. 여기저기 친구네 집에 찾아다니면서 한두 밤씩 신세를 졌다. 인제는 찾아갈 만한 데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고선생 (高先生)은 쾌히 승낙했다. 생활비는 벅찬 부담이리라. 그렇지만 기름 없는 기계처럼 뻑뻑한 관식(寬植)과 단둘의 생활도, 귀남(貴男)이가 섞이면 훨씬완화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 오늘이라도 짐을 가져오라고 고선생(高先生)은 일렀다. 귀남(貴男)은 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노라고 했다. 다 낡은 트렁크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건 언니네 집에 그대로 맡겨두겠다고 했다. 그래야 딱한 때는 다시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반을 먹고 귀남(貴男)이가 먼저 나가고 나서다.
“선생님, 난 정말 귀남(貴男)이하구 결혼하가시요.”
관식(寬植)은 또 그런 소릴 꺼냈다.
“넌 어째서 다자꾸¹⁰ 결혼을 하겠다구 야단이냐? 더구나 귀남(貴男)이 하구.”
“그러기 선생님은 틸레시요, 평생 가야 선생님은 뭐가 뭔지 모르실 거웨다.”
“대체 넌 뭘 안다구 그러니? 네가 알구 있는 건 뭐냐?”
“난 내가 하구 싶은 거이 뭔지, 내게 필요한 거이 뭔지, 그런 걸 똑똑히 알구 있어요.”
“네가 안다는 게 고작 그거냐?”
“암만해두 선생님은 틸레시요. 지금 세상에 경멸받는 걸 누가 겁내는 줄 압네까? 덮어 놓구 속셈 차려야 해요.”
“제법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숭보는 격이구나!”
“똥칠을 겁내는 개가 벤벤히 개 구실 하나요¨”
고선생 (高先生)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구실’이라는 말이, 뜻하지 않고 그의 머리를 때렸기 때문이다. 구실! 과연 나는 무슨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으로서 사내로서 또는 화가로서, 제구실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선생(高先生)은 자기의 초라한 모습이 별안간 확대되어 자신의 심경에 환히 비치는 것 같았다.
하루는 관식(寬植)이가 또 웬 여인을 데리고 왔다. 한 고향 여자라는 것이다. 동대문 시장에서 화장품 도매상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는 넉넉히 삼십은 되어 보였다. 번득번득하는 저고리와 치마를 감고 있었다. 손가락의 금가락지가 너무 커서 무거워 보였다. 예쁘지 못한 얼굴을 예쁘게 보이려고 무척 고심한 화장이었다. 과일이며 고급 양과자랑 사가지고 왔다. 여인은 평안도 사투리를 그대로 썼다.
“선생님은 본 고향이 황해도시래디요?”
했다. 그리고 황해도 사람이 그중 낫다고 했다. 여자는 되레 고선생(高先生) 이 무안할 정도로 찬찬히 뜯어보았다. 관식(寬植)에게서 고선생(高先生) 얘기는 자세히 들었노라고 했다. 사십이 다 되도록 총각으로 지낸다니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그것 만 가지구두 전 선생님을 존경합네다.”
“글쎄 관식(寬植)이란 놈이 무슨 소릴 했는지 모르지만, 난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괘니 그르시디요. 얼마나 얌전하시길래, 상게두 당개두 못 드시구 집 한 칸 매련 못 하셌갔소. 지금 세상은 그래요. 얌전하구 양심덕인 사람은 쪽을 못 쓴답네다.”
고선생(高先生)은 갑자기 냉랭한 표정을 하고 반쯤 저쪽으로 돌아앉아 버렸다. 저녁 때가 되었다. 여인은 핸드백 속에서 만 환 뭉치를 꺼내더니, 익숙한 솜씨로 척척 세어서 삼천 환을 관식(寬植)에게 주었다.
“나가서 소고기랑 찌갯거릴 좀 사오우. 사나이가 벤벤히 살라구. 올티 이 체니하구 갔다 오구레.”
하고 귀남(貴男)을 보았다.
“난 돈을 쓸 줄 몰라요! 그런 대금(大金)을 쥐어본 일이 없는 걸요!”
귀남(貴男)은 아주 점잔하게 말했다. 그렇게 점잖은 언동을 행사하는 귀남(貴男)을 고선생(高先生)은 처음 보았다. 속으로 감탄했다. 여자는 귀남(貴男)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경멸하는 표정으로 귀남(貴男)의 존재를 묵살해버렸다. 관식(寬植)이가 시장을 보아 오자 여인은 손수 나가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저녁 준비를 했다. 그릇이 모자라니까 독단으로 주인댁과 교섭해서 여러 종류의 식기를 빌려왔다. 밥, 국 할 것 없이 여인도 관식(寬稙)이와 같이 한 그릇씩 널름 먹어 치웠다. 여자가 돌아간 뒤에 뭐라구 그런 걸 데려왔느냐고 고선생(高先生)은 관식(寬植)을 탄했다.
“그럴 거이 아니야요, 선생님. 장가 드시라구요. 수천만 환 있이요. 그 돈만 가졌으문 뭐든 한판 크게 벌려볼 그르테긴 돼요.”
“나보다두 네가 연분인데 그래.”
고선생(高先生)은 비꼬아 주었다.
“건 선생님이 몰라서 그래요. 거이 어떤 여잔 줄 압네까? 고년이 당초에 나는 신용을 안 해요.”
어느 모로나 고선생 (高先生)하고는 조건이 맞으니, 서슴지 말고 결혼을 하라는 것이다. 여인의 태도로 보아, 첫눈에 고선생(高先生)이 맘에 들었다는 것이다. 젊은 놈이 시치미를 떼고 한사코 권해대는 게 고선생 (高先生)은 우습기도 했다.
“참 너두 별놈이다!”
저녁 설거지를 분주히 해치우고 들어오더니, 관식(寬植)은 고선생(高先生) 앞에 또 손을 내밀었다. 놀러갔다 오게 오백 환만 달라는 것이다.
“왜, 그 돈 많은 여자보구 좀 달래지, 오백 환이문 우리겐 하루 생활비다.”
“선생님 자꾸 시시하게 굴디 말라구요. 돈은 써야 생기는 거야요.”
“뭣보다두 난 네 생활 태도가 좀 달라지길 바란다. 너무 난잡하단 말이다. 더구나 귀남(貴男) 이두 와 있는데 그래 쓰겠니.”
“설교는 갔다 와서 듣가시요. 되레 남(男)이가 와 있으니까 더 못 참가시요. 요게 내 말을 좀 들어주문 얼마나 좋아.”
관식(寬植)은 옆에 앉아 있는 귀남(貴男)의 허리를 슬쩍 안으려고 했다.
“얘가 누굴 창년 줄 아니!”
귀남(貴男)은 두 손으로 관식(寬植)을 떼밀었다. 고선생(高先生)은 잠시 생각해보고 나서 돈을 내주었다.
“언제든 꼭 갚아 드리가시요.”
관식(寬植)은 가슴을 펴고 유연히 밖으로 나갔다. 고선생(高先生)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은 단순히 관식(寬植)의 분방한 태도에 대해서만은 아니었다. 보다 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탓인지도 모른다.
“그놈에겐 도의적인 의식이란 아주 없는 모양이야.”
고선생(高先生)은 혼자 중얼거리듯 했다. 귀남(貴男)이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아직은 괜찮아요. 그러다 아주 위악적(僞惡的)으루 흘러버리문 안 되지만요.”
“괜찮다니?”
“인제는 인간이 그 위선적(僞善的)인 습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을 거예요.”
“그럼 넌 인간의 타락을 긍정한단 말이냐?”
“위선두 일종의 타락이 아닐까요? 선생님은 미술가이면서두, 왜 공식적 사고방식을 못 버리셔요. 인간이 습성화된 위선의 가면을 벗지 못하는 한, 그 생활 자체가 도저히 멜로드라마 이상일 수 없을 거예요.”
고선 (高先生)은 눈을 크게 뜨고 귀남(貴男)을 보았다. 신선한 경이였다. 그 꾸겨진 논리의 제시보다도, 색다른 인간의 강한 호흡이 직접 피부에 스미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고선생(高先生)은 몇 번이고 일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귀남(貴男)은 물론 잠들어 있었다. 관식(寬植)이도 벌써 오래전에 돌아와 코를 골고 있었다. 고선생(高先生)은 종이에다 귀남(貴男)의 자는 얼굴을 옮겨 보았다. 제대로 되지 않아서 여러 번 고쳐 그려 보았다. 그러면서 고선생 (高先生)은 자신이 너무나 고독했다는 걸 깨달았다. 고선생(高先生)은 다시 손을 멈추고 귀남(貴男)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귀남(貴男)의 한쪽 팔이 반쯤 이불 밖으로 나와있었다. 고선생(高先生)은 귀남(貴男)의 손을 만져 보았다. 별수 없는 일이었다. 더 외로울 뿐이었다. 마침내 고선생(高先生)은 조섬히 허리를 굽혔다. 귀남(貴男)의 그 야들야들한 입술 위로 자기의 입술을 가져갔다. 귀남(貴男)은 한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파리를 날리듯 손질을 했다.
“나는 너를 딸이라 생각하고 그런다.”
하고 고선생(高先生)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던 일을 대강 끝마치고 자리에 들면서도, 고선생(高先生)은 다시 귀남(貴男)의 입술을 빨았다. 귀남(貴男)은 이번에도 머리를 꼬며 한 손으로 고선생(高先生)의 얼굴을 밀었다. 동시에 귀남(貴男)은 눈을 떴다. 몇 번 눈이 깜빡거렸다. 좀더 크게 떴다. 고선생(高先生)은 약간 당황했다.
“난, 난 너를 딸처럼 생각하구 그랬다.”
속삭이듯 하는 소리였다. 귀남(貴男)은 그저 웃었다. 말없이 도로 눈을 감았다. 귀남(貴男)은 아주 저쪽으로 돌아누워 버리고 말았다. 그 뒤에도 고선생 (高先生)은 자기가 늦게 자게 될 때마다 귀남(貴男)에게 입을 맞추었다. 역시 딸이라고 생각하면서. 귀남(貴男)은 눈을 뜨기도 하고 안 뜨기도 했다. 눈을 안 떴을 때도 일부러 자는 체한 것인지 모른다. 눈을 떴을 때는 한결같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한 번은 이렇게 해명을 했다.
“전 선생님의 신세를, 키스로 갚아도 좋아요.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까요!”
얼마 전에 다녀간 화장품상 여주인이. 고선생 (高先生)이면 두말없이 결혼하겠노라, 했다고, 하며 요즘 와서 관식(寬植)은 부쩍 더 그 여인과 결혼하기를 강권했다. 그러면 궁상스레 삽화 나부랭이나 그리며 독신으로 늙지 않아도 되니 우선 고선생(高先生) 자신 좋고, 맘 놓고 총각 신랑 맞아들이니 그 여인도 좋고, 관식(寬植)이 자신 또한 좋으니, 다 좋지 않으냐는 것이다. 남, 시집장가 가는 데 너까지 좋을 게야 있느냐고 했더니, 관식(寬植)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선생님 팔자 고치는데 내가 왜 안 좋아요?” :'
“이놈아, 그게 뭐 팔자 고치는 거냐? 황소처럼 팔려가는 게지. 난 그런 팔잔 고치구 싶지 않다.”
“선생님은 참 딱합네다. 사람이 모두 상품이지 뭡네까? 이왕 팔려서 살 바엔 근사한 데루 한번 팔려가 보시라구요. 선생님이 그 여자와 결혼만 하시문 나두 한몫 봅네다. 그 여인의 돈을 미끼루 내가 큰 사업을 하나 벌려볼 수 있거든요.”
“그러기 직접 네가 장갈 들란 말이다. 당장 팔자 고치게.”
“그러니까 선생님은 틸레시요. 여자 솜씨루 그만치 큰돈을 잡은 사람이 사람 보는 눈이 녹록할 줄 압네까? 결혼하자구 지근지근 쫓아댕기는 놈팽이가 얼만 줄 압네까? 그러나 싹싹 머릴 내젓는 거야요.”
“왜? 무척 결혼을 하구 싶어 한대틱석?”
“왜라니요. 까딱하문 몸 망치구 재산 날라가겠거던요. 얼마나 무서운 눈인 줄 압네까? 사내 자식들 속을 환하게 께 본답네다. 사람을 보구 집적대는 게 아니라, 단지 돈바라구 대든다는 걸 대번에 알아채린단 말야요. 여자 따위나 주물르는 덴 나두 자신이 있지만요 남(男)이하구 그 여자만은 안 되가시요. 그 여잘 예까지 끌구 오는 데두 얼마나 앨 썬 줄 압네까.”
“그처럼 잇속에 밝은 여자라면, 내가 결혼한다 가칭해두, 감히 네가 그 돈을 돌려쓸 테냐?”
“거 염네 마시라구요. 내게두 다 복안이 있는 거야요. 우선 그 여자 주변에서, 거치장스런 놈팽이들을 말짱 쫓아놓구, 나 혼자 장기전으루 달라붙을 기회만 만들어놓문 문제없지요.”
“고렇게 야무진 여자라면, 나 같은 남잘 택할 리 만무하지.”
관식(寬植)의 뱃속이 하 신기해서 고선생(高先生)은 한번 슬쩍 그렇게 떠 보았다.
“그건 모르는 소리웨다. 그런 여자니까 선생님처럼 어수룩한 남잘 좋와하는 거야요. 우선 안심이 되거던요. 그렇다구 정말 바보는 아니구, 말하자문 물욕이 없어서 이해(利害)에 어둡구 활동면은 아주 무능하구 그러면서두, 노상 교양이니 뭐니 내세워가지구 점잖은 체하구, 똑 선생님 같은 분이 그런 여자겐 맘에 드는 거야요.”
고선생(高先生)은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왜 그런지 관식(寬植)이가 무서워지기 때문이다. 한편 스스로 믿고 사는 인간적 가치나 의미란 것이 관식 (寬植)의 손에서는 휴지처럼 너무나 가법게 꾸겨져버리기 때문이었다. 고선생 (高先生)은 그저 아연(啞然)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완강히 거부하지 않는 고선생(高先生) 의 태도를 약간 마음이 동한 탓이라고 지레짐작을 했는지, 관식(寬植)은 아침상을 물리기가 바쁘게,
“선생님 더 생각해볼 게 없이요. 그럼 얼핀 내 여자한테 갖다 오가시요. 웬만하문 그 여잘 데리구 올 테니, 그저 잠자쿠 나 하라는 대루만 하시라구요.”
그러고는 방을 뛰어나갔다. 그 꼴을 보고 귀남(貴男)이가 소리내 웃었다. 고선생(高先生)은 웃지 않았다. 관식(寬植)을 붙잡지 아니한 자신에 고선생(高先生)은 놀란 것이다. 기실 나는 속으로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고선생(高先生)은 자기를 의심해보았다. 고선생(高先生)은 좀 무색해졌다. 그는 얼른 귀남(貴男)을 보았다. 물론 귀남(貴男)은 고선생(高先生)의 그런 속을 눈치 챌 까닭이 없었다. 귀남(貴男)은 프린트한 각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모여 새로 조직 한 극단에서 불일간 상연할 작품인 것이다. 거기에 귀남(貴男)이도 출연하는 것이었다. 겨울 날씨답지 않게 푸근한 게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고선생(高先生)은 자신을 픽 웃었다. 그리고 아랫목에 누워서, 아까 보다 만 신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얼마 뒤, 사회면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한구석에 고선생(高先生)의 눈을 끄는 삼단 제목이 있었다.
美貌의 ‘匕粧品商 女主人 被殺
돈이 원수냐? 사랑이 원수냐?
어제 아침 여섯시 반경 동대문시장 내에 있는 굴지의 화장품상 주인인 변영주(邊英珠·51)라는 미모의 독신 여자는 임모(任某)라는 청년에게 권총으로 피살당했다는 기사 내용이었다. 임모(任某)는 오래전부터 변(邊) 여인을 따라 다니며, 결혼을 강요했으나 종시 거절당하고, 최근에는 그러면 사업 자금으로 삼백만 환만 융통해달라고 졸라온 사실을 주위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피살당한 변(邊) 여인은 1·4 후퇴 때 단신 월남한 이래 수차에 걸져 화장품 밀수입에 성공하여 천여만 환의 재산을 장만해놓았다는 것과, 범인은 즉시 도주하였으나, 그 체포는 시간문제라는 구설도 있었다. 고선생(高先生)은 신문을 귀남(貴男)에게 보였다. 이름을 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난번 왔다 간 그 여자 같은 생각이 고선생(高先生)에겐 들었다. 그 여인은 결코 미모는 아니었으나, 신문에는 그런 식으로 취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틀림없어요. 그 여자예요. 제 직감이 맞을 거예요.”
귀남(貴男)의 말은 과연 맞았다. 점심 때가 거의 되어서 관식(寬植)이가 긴장한 얼굴로 돌아왔다. 시체는 오늘 오후에 화장터로 내 간다고 했다.
“선생님 같이 가시자요. 가서 약혼자라구 그러시라구요. 남(男)아 너두 가자. 가서 강력히 입증해야 한다. 먼 일가 한 사람과 친구들이 모였는데 잘 하문 한몫 뜯어올 수 있을 거야.”
“이놈아, 입 닥쳐라!”
동시에 관식(寬植)의 뺨에서 찰싹 소리가 났다. 고선생(高先生)의 손길이 번개처럼 움직였던 것이다. 사람을 때려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학교에서 아무리 화가 나도 말로만 쨍쨍할 뿐, 학생의 머리 한 번 쥐어박아 보지 못한 고선생 (高先生)이었다.
“아무래두 난 가봐 주야가시요.”
잠시 뒤 관식(寬植)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나가려고 했다. 귀남(貴男)이가 얼른 따라 일어섰다.
“나두 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예식 가운데서 난 장례식을 젤 좋아해. 구경 갈 테야!”
“가라! 가라! 어서 가! 썩 가서 아주 송장하구 같이 타 죽구 돌아오지들 마라!”
고선생(高先生)은 미친 듯이 소릴 질렀다. 치미는 분노를 누를 수가 없었다. 관식(寬植)이와 귀남(貴男)은 태연히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고선생(高先生)은 가만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까닭 모를 울분이 샘솟듯 자꾸 솟아올라 몇 차례나 일어섰다 앉았다·했다. 왜 이렇게 분한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생 처음 부당한 모욕을 당한 것 같은 생각이 막연히 들었을 뿐이었다. 고선생(高先生)은 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었다. 고선생(高先生)은 눈을 맞으면서 한참 걸어갔다. 얼마 뒤 발밑에 한강이 내려다보였다. 한강 얼음판 위에도 눈은 내렸다. 고선생(高先生)은 한강을 끼고 길 없는 언덕을 눈 속에 그냥 걸어갔다.
-끝-
2016년 5월14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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