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부여 궁남지 연꽃입니다
=<부여군 상징 꽃-연꽃으로 피어나다>=
2006년 부여 궁남지 연꽃입니다
부여군 상징 꽃이 개나리에서 연꽃으로 바뀌었다.
백제문화의 세계화와 백제왕도 부여의 특징을 살리며 궁남지 서동연꽃 축제 등의 다양한 홍보전략과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정비 했다는 것.
부여군 상징 꽃의 변화는 군의회와 군민, 전문가 등 의견수렴을 거쳐 확정 됐으며
각종 행사, 시책추진 등 다양한 업무에 널리 활용될 예정이다.
연의 상징성은 고대 인도에서 여성의 생식 능력, 다산, 생명창조의 상징물이었으며
중국에서도 일찍이 생명창조와 생식번영의 의미를 가진 꽃으로 애호되었다고 한다.
민간에서 많이 제작되었던 전지(剪紙:종이를 오려 내어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드는 지공예의 일종)도안에서 여성의 생식기를 연화모양으로 표현하고 있
예에서 연화가 생명창조와 생식번영의 상징물로 간주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특히 연꽃은 백제의 기와, 미술, 공예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무늬 중 하나이며 청정무구, 풍요, 여성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 백제 능산리(왕릉원) 고분벽화의 연화문 등에서 연꽃은 천계(天界)의 중심(中心)을 나타낸다고 한다.
중국 북송 주돈이는 그의 애연설(愛蓮說)에서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그것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의 모습을 칭송하여‘
꽃 가운데 군자(花之君子者也)라고 하였다.
이것도 연꽃의 순결하고 고상한 품격을 말한 것 이다.
조선의 정약용은 당대의 선비들과 함께 죽란지사(竹欄詩社)라는 모임을 만들어
계절에 따라 정적인 풍류를 즐겼는데 연꽃 피는 계절이면
이른 새벽 연지(蓮池)에 나가 꽃피는 소리를 듣는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이처럼 유교에서는 연꽃을 선비다운 태도나 풍류의 상징형으로 바라보기도 했던 것이다.
부여는 123년간 백제왕도였던 곳으로 군목, 군조, 군화를 선정함에 있어
다분히 백제적이고 백제의 색을 띄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부여군 상징물의 백제적 변화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고서를 뒤지고 찾아내 군민들에게 화두를 던져야만 한다.
삼국사기에는 사슴을 신령스런 동물로 간주하고 왕들이 사냥을 나가면
으레 기록으로 남겼다.
고려시대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후대의 왕 때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한 적이 있으며,
또 응준(鷹準) 혹은 나투(羅鬪)라고 칭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다.
응준과 나투는 모두 조류의 일종인 매를 지칭하는 것으로 정식 국호라기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백제를 지칭할 때 사용한 일종의 별칭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있다.
이렇듯 역사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 부여만의 멋을 뽐낼 수 있는
매와 사슴, 연꽃 중 군화를 먼저 연꽃으로 교체한 것은
동북아의 중심문화-백제문화를 빛내는 신선한 시도라 할 수 있겠다.
=궁남지 연꽃=
금년 7월엔 어김없이 제5회 부여서동연꽃축제가 궁남지에서 개최된다.
궁남지를 중심으로 드넓게 펼쳐진 10만여평의 연지에는 희귀한데다
수줍은 듯 피어나 가장 사랑받고 있는 홍련과 연잎사이에서 피어나는
자태가 신비로워 누구나 좋아하는 백련 등 형형색색 연꽃 20여종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대표적인 연꽃 관광명소로 단장돼 있다.
부여의 상징 꽃으로 피어난 연꽃을 바라보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음미하고 일상의 작은 쉼표를 찍기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듯하다.
바람이 연못을 스칠 때면 10만여평의 연지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물바람을 타고 숨결에 스며든다.
나는 연꽃과 대화를 하며 백제의 왕들이 거닐었던 궁남지 정원을 거닐고 있다.
연꽃은 산꼭대기나 마른땅에서 피지 못한다. 진흙탕에서만 핀다.
하지만 흙탕물 위에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날 때 더러운 흙탕물은 자취를 감춘다.
청초한 꽃과 향기에 의해 투명하고 맑게 다시 태어난다.
그러면서도 연꽃은 자기 몸에 단 한 방울의 흙탕물도 용납하지 않는다.
흐린 곳에 살면서도 항상 조촐한, 이것이 연꽃의 생태이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의 백제이야기 속엔 연꽃과 부여가 녹아들어 있다.
연꽃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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