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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만약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았다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부활을 믿기에 교회가 존재하였고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부활주일 “예수님 다시 사셨네” 온누리에 교회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하는 기쁨과 소망의 날입니다. 할렐루야!!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요 연동교회에서 장로로 피택 받으신 월남 이상재 선생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어른이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 받쳐 일본에 항거할 때였습니다. 당시 친일파 사람들이 이상재 선생님을 매수할 것을 의논하고 돈뭉치와 함께 일본기자를 이상재 선생님께 가도록 했습니다.
일본 기자는 “선생님! 이 돈으로 시골로 가셔서 편히 사시지요” 이상재 선생은 돈 뭉치를 밀어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돈으로 사는 자가 아니다. 나는 말씀으로 산다” 기자는 당황하면서 물었답니다. “인도의 간디는 백세를 산다고 했고, 영국의 누구는 얼마 동안을 산다고 장담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몇 살이나 사시겠습니까?” 그 때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일본기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사람이 한 번 났으면 영원히 살지 죽긴 왜 죽나?”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진시황은 불사약을 구해 먹었어도 죽었는데 선생님은 무슨 불사약이라도 잡수셨습니까?” “먹었지. 너희 천황이 먹지 못한 것을 내가 먹었지.!! 영생 불사약을 먹었기에 나는 죽지 않을 것이요 일본이 망하고 죽는 것을 다 볼거야”
그럼 “영생 불사약이 어디 있습니까? 기자가 묻자 이상재선생님은 옆에 있는 성경을 가리키며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네 나는 이 말씀으로 사네 그러면 영원히 살고 죽어도 부활하네”...... 이처럼 이상재 선생님은 확실한 부활신앙으로 독립운동하며 살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매 주 예배시간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특히 부활에 대해 두 가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는....예수님 부활하심을 믿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 고백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도신경 끝 부분 “ 나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를 다 함께 신앙 고백합니다. 입술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내가 믿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부활과 영생에 참여한다는 믿음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했는데 확실한 부활신앙으로 고백하셨습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열왕기하 4장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지만 선지자 엘리사의 기도로 다시 살아났습니다.(왕하 4:17∼37)
2.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는데 예수님이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선 포하실 때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습니다.(눅7:11∼17)
3. 회당장 야이로의 열 두살 된 딸이 죽었습니다. 가족들이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할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예수님 달리다굼, "아이야 일어나라" 아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막 5:41 눅8:40∼56).
4. 나사로는 죽어 나흘이 되어 무덤에 들어가 냄새가 나는데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까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사로가 무덤안에서 나왔습니다(요 11:1∼44).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에 대해 '부활'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눈을 떴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다'...... '아이가 곧 일어났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 수건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소개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은 특별한 병에서 깨어났을 뿐입니다. 그 후 이들은 살다가 나중에 다시 다 죽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다시 살아나 것을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부활은 오직 예수님만이 나는 부활이요 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26.....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000년 전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마르다에게 질문할 것이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 질문하고 계십니다. 주향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환난과 곤고 믿음이 약해지는 일이 다가와도 부활신앙 만큼은 반드시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2000년 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한 여인들이 있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은 이들이 예수님 무덤을 찾아옵니다.
1절 다시 봅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 시작됩니다.
날짜와 때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철저히 지키는 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이란 우리 예수님 금요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새벽을 말합니다.
그날 새벽 미명 두 여자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러 온 것입니다. 두 여인은 평소 예수님을 잘 섬겼던 여인들입니다. 여인들이 새벽 의시시한 때 무덤에 왜 왔을까요?
여인들은 3일 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아마 3일간은 이 여인들에게는 잠 못 이루는 3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궁금하기에 모두가 잠든 3일째 되는 새벽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의 시체라도 보고 냄새 나지 않도록 몸에 바르기 위해서 무덤에 온 것입니다.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향품을 준비하여 무덤에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두 여인이 상상 할 수 없는 것은 무덤에 예수님은 없고 빈 무덤만 현장에서 본 것입니다.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우리 예수님 시신이 없다니 예수님 다시 사신 부활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당황하고 있는 여인들 앞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더니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굳게 닫혀 있는 둘 문을 굴러 내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고 예수님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은 그냥 땅에 쓰러져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 시신이 있어야 할 돌 무덤에 시신은 온데 간데 없고 번개 같은 형상을 한 흰옷 입은 천사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는 것을 두 여인이 본 것입니다.
여기 두 여인은 부활하신 예수님 최초의 목격자입니다. 여인들은 누구보다도 행운이요 축복 받은 여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무섭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여인들의 모습을 지켜본 천사가 두 여자에게 5절 하반절을 보면.....“너희는 무서워 말라”고 했습니다. 무서워 떨고 있는 여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서움이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내 앞에 벌어졌을 때 나타난 반응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정작 무서워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시신이 없었기에 더 무서워 한 것입니다. 여전히 여인들은 예수님 부활하신 사실을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 받은 그 사랑만 생각하며 우리예수님 시신이 어디 갔을까? 두렵고 무서워 떨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무서운 일이 있고 두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천사가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핵심입니다. “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누우셨던 곳을 보라........ 두 여인에게 예수님 부활하심을 믿도록 누웠던 자리를 가르키며 확인까지 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말씀을 선포하면 두 여인은 예수님 부활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말씀대로 믿고 사는 신앙이 참으로 중요합니다........성경 말씀대로 99%는 믿었는데 1%를 못 믿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펼쳐서 말씀대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읽었다면 그 말씀을 다 믿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성경대로 이루어진 일 뿐만 아니라........ 장차 이루실 일까지 다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입니까?
이제 두 여인이 천사의 말에 어떤 모습으로 변했습니까? 8절....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무서움과 큰 기쁨입니다......① 무서움이란........ 안식일 새벽에 예수님 무덤이 있는 곳에서 빈 무덤을 보았을 때 무서움이 아닙니다. 오직 무한하신 능력의 하나님 앞에 감히 고개들 수 없는 경외심을 말합니다.
이런 모습은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이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경건한 마음입니다.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런 심정으로 뵙고자 한 것입니다.
또 다른 반응은 ② 큰 기쁨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자하는 기쁨입니다. 두 여인은 무서움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반전 된 것입니다.
이런 기쁨으로 여인들은 갈릴리에 계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뵙고자 달음질 하고 있습니다.
7절......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10절.....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 다른 여러 곳으로도 갈수 있는데 왜!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에게는 갈릴리가 특별한 장소입니다.
갈릴리는 어부였던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로 변화된 장소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을 만나 제자들이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된 장소입니다.
갈릴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생전에 많은 이적을 행하셨던 곳입니다.
갈릴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능력 행하심을 제자들이 보았던 장소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 잃어버린 믿음과 용기 꿈과 희망 사명을 다시 불어 놓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예수님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마 28: 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 유독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강조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사명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쿼바디스’ 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쿼바디스’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센키비치'의 소설을 바탕으로 1951년에 제작된 영화로 세트준비만 15년간 걸린 대작입니다. 여기에는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하고 수많은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 베드로에게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순교하려고 작정하지만 성도들이 극구 만류합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살아남아야만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할 수 없이 피신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피신을 가던 중 베드로는 저 멀리서 ‘예수님의 빛’이 비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의 어린 양들이 로마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 네가 내 양들을 버린다면 내가 다시 십자가에 달리러 로마로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양들을 책임지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양들을 버리고 베드로가 도망가니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다시 성도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순교하게 되는데 순교하면서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한 죄인입니다. 그런 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똑바로 서서 십자가에 달려 죽겠습니까? 나를 거꾸로 십자가에 달아 죽이십시오.”
그래서 베드로는 그의 소원대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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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감당했던 베드로 그가 순교하기 전에 쓴 복음의 편지 베드로전후서을 보면 베드로가 얼마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양을 치라는 말씀에 가슴에 울렀을까요? 그가 쓴 서신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벧전 5:2-3.......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아마 이 말씀을 편지할 때 베드로는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이 머리에 스쳐 지나가지 않았겠습니까?
주향성도여러분!! 우리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주님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처음 알게 된 곳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던 곳입니다. 쓰러진 나를 다시 일으켜 새워 주신 곳이 곧 갈릴리입니다.
어떤 자세로든 복음의 자리 나의 갈릴리에서 새로운 영적 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도 나를 부르셔서 갈릴리로 가자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부활절 다시 새롭게 생동감 있는 부활신앙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