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가련하고 고통 중에 있습니다.
하느님,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시편69,30).
시인은 자신을‘가련하고 고통당하는 자’로 표현하면서,또다시 자신의 고통스런 상황을 하느님이 이해하고 도와주시길 기도한다.‘가련한 이’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하느님 앞에 겸손한 사람으로서,힘센자와 약자,박해하는 자와 박해받는 자,착취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서 주님은 원칙적으로 희생자들의 편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시편 69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69편은 까닭 없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시인은 이유도 없이 미움 받고,훔치지도 않았는데 도둑 취급당하고,친척들과 형제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오직 하느님의 집에 대한 불타오르는 열정 때문에(10절)그는 모욕을 당하고 원수들의 조롱거리와 우셋거리가 되었다.고난 가운데서 그는 동정과 위로가 필요했지만 오히려 독이 든 음식과 초를 마시게 되는 배신을 당했다.스스로를‘하느님의 종’(18절)이라 일컫는 그는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모욕과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지 않기를 기도한다.이런 상황에서 그는 원수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멸망하도록 저주를 기원한다.그의 저주 기원은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하느님이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 편에 계시며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다.
특히 69편은 무죄한 이의 고통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을 제공한다.이 시편은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하여 해석되며 신약성경에서도 22편 다음으로 많이 인용되는 시편이다.이를테면“저를 까닭 없이 미워하는 자들”(5절;요한15,25),“당신 집에 대한 열정”(10절;요한2,17),“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습니다”(10절;로마15,3),“목말라할 때 초를 마시게하였습니다”(22절;마태27,48;마르15,36;요한19,29)와 같은 표현은 예수님의 생애에 적용된 말씀이다.그리고 69,23-24(로마11,9-10);69,25(묵시16,1);69,26(사도1,20);69,29(필리4,3;묵시3,5;13,8;17,8;20,12)도 신약성경에서 인용된다.69편은 예언이 아니지만 ‘주님을 위한 시인의 고난’은 메시아적인 성격을 띤다.주님의 집에 대한 그의 열정과 하느님을 위한 고난은 예레미야의 경우와 비슷하며,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표가 된다.그러나 원수들에 대한 저주 표현들은 예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우리는 예수님처럼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23-2 시편 42-89편)
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
101.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을 인식하지 않고서 그 증상들을 설명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인간의 삶과 활동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 왜곡되어 현실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빗나가게 되었습니다.이것에 대하여 차근차근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래서 저는 강력한 기술 지배 패러다임과 이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 행동이 차지하는 자리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합니다.
Ⅰ.기술:창의력과 힘
102. 인류는 자신의 기술력 때문에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우리는 두 세기에 걸친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물려받았습니다.여기에는 증기 기관,철도,전신,전기,자동차,비행기,화학 산업,현대 의학,컴퓨터 공학과 더불어 좀 더 최근에는 디지털 혁명,로봇 공학,생명 공학,나노 공학이 있습니다.이러한 발전을 기뻐하고 우리 앞에 계속 펼쳐지는 엄청난 가능성에 흥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우리 앞에 계속 펼쳐지는 엄청난 가능성에 흥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과학과 기술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 창의력의 놀라운 산물”이기 때문입니다.유용한 목적을 위하여 자연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류가 그 시초부터 지녀 온 특징입니다.기술 그 자체는“인간이 점차 물질적 한계를 넘어서도록 촉구하는 내적 긴장을 나타냅니다.”기술은 인간을 위협하고 제한하는 많은 폐단들을 개선해 왔습니다.우리가 이러한 발전,특히 의학과 공학과 통신의 발전을 어찌 인정하지 않고 고맙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대안들을 마련해 준 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업적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03. 기술 과학이 방향을 제대로 잡는다면,유용한 가전제품부터 대형 운송 수단,교량,건물,공공장소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의 질을 증진하는 데에 매우 소중한 수단을 생산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기술 과학은 아름다움을 창출해 내어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이 아름다움의 세계로 ‘도약’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항공기나 마천루의 아름다움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훌륭한 미술 작품과 음악 작품들도 있습니다.그래서 새로운 기술적 도구들을 사용한 이들이 의도한 아름다움을 통하여,그 아름다움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비약적 도약이 일어나 결국 인간 고유의 충만한에 이르게 됩니다.
104. 우리는 핵에너지,생명 공학,컴퓨터 공학,그리고 우리 자신의 유전 정보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우리가 이룩한 많은 다른 능력들이 우리에게 엄청난 힘을 가져다 준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엄밀히 말해서,이러한 능력들은 온갖 기술 지식,특히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경제적 재원을 확보한 이들이 인류 전체와 온 세상을 강력하게 지배할 있게 해 왔습니다.일찍이 인류가 이 정도의 힘을 지닌 적이 없었습니다.특히 현재 그러한 힘이 쓰이는 용도를 살펴보면 그 무엇도 그러한 힘이 지혜롭게 사용되리라는 것을 보장하지 않습니다.20세기 중반에 투하된 핵폭탄과 더불어 나치즘,공산주의,여러 전체주의 정권들이 수백만의 사람을 살상하려고 개발한 엄청난 기술의 동원을 생각해 보기만 하면 됩니다.현대전에 동원되는 더 치명적인 무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그토록 엄청난 힘이 누구의 손에 있고 결국 이 힘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겠습니까?소수의 사람들이 이 힘을 차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105. 사람들은 힘이 늘수록“진보”가 이루어지고,“안전,유용성,복지,활력,가치 충만의 증가”가 이루어진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이는 실재와 선과 진리가 이러한 기술과 경제의 힘에서 저절로 생겨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현대인들은 힘을 올바로 사용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것이 사실입니다.이 엄청난 기술 발전에 인간의 책임과 가치관과 양심의 발전이 함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모든 시대는 그 시대가 지닌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래서 오늘날 인류가 자신이 당연한 도전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자유의 규범이 아니라 이른바 유용성과 안전만이 요청되는”경우에는“인간이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할 위험이 지속적으로 증가합니다.”인간은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가 아닙니다.인간의 자유는 무의식,즉각적인 욕구,이기주의,잔인한 폭력의 맹목적인 힘 앞에 무너질 때 병들게 됩니다.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아무런 통제 수단도 없이 커져만 가는 자기의 힘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입니다.인간이 형식적인 수단들은 마련해 두었으니,실제로 한계를 정하고 냉철한 자제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개정판)
(무악재 06/09)
기적의 현실성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고 난 후에,그분께서 행하신 기적 이야기들을 전해 주면서 그것들을 통해서 보여 주셨던 그분의 구원 행위가 오늘 어떻게 우리 안에서 지속되고 이쓴가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이것을 우리는 기적의 현실성이라 부른다.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실로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그 가운데서도 불치병을 앓던 많은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다.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구태여 신앙의 행위라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다.예수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니 그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든가 아니면 치유해 주실 수 있었던 그분의 능력이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와 더불어 완전히 끝나 버렸다고 한다면,그분께서 보여 주셨던 그 많은 것들은 하나의 멋진 추억이나 기념할 만한 일들로 남는 것 이외에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그러한 심각한 문제제기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도들 공동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되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구원의 행위를 펼쳐가고 계시는가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보여주는 데 있었다.이제부터는 몇몇 특권 받은 사람들만이 예수님께서 베푸신 구원 업적의 혜택을 입는 것이 아니라,바로 그것이 사도들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주된 관심사였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완수해야 할 사명이었다.(성서 못자리 1/기적의 현실성/272쪽)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해는 내노년의 상대다.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햇볕은 新生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볕이다.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이 보이는데,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허송세월 43쪽/김훈 산문)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어진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길 꾾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굽어 돌아가는 길/박노해)
늘 행복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