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해원 시조집 『산길을 걸으며』 재재반론에 대한 평자의 답변
신기용(문학평론가)
1. 들어가기
부산시조문학회(볍씨) 회장을 역임한 시조시인 정해원(이하 그 또는 필자) 시조집 『산길을 걸으며』(2011)을 읽은 뒤, 한없이 망설였다. 그가 등단 30년을 넘겼기에 평자의 눈을 의심했다. 표제 시편에서 표절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중 「산길을 걸으며(3)」은 원로 시조시인 이상범 선생의 「가을손」을 그대로 옮겨놓았음에 놀라웠다. 그 외에도 표절 그림자는 물론 독창성을 상실한 표현과 자기 표절 흔적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월간 『예술부산』 1월호(2012)에 시조 전환구의 어휘가 반복되는 것과 자기 표절의 시편들을 예를 들면서 언급했다. 200자 원고지 17매 분량의 짧은 지면에서 표절을 직접 언급할 이유가 없었다. 자기 표절을 언급하면서 평자가 표절을 인지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풍겼다. 그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온갖 인신공격으로 반론해 왔다. 그래도 평자는 재반론에서 자기 표절을 언급하면서도 표절을 직접 언급하는 것만은 피했다. 인간적 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재재반론에서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2012년 『예술문화비평』 여름호와 『문장21』 여름호에 게재한 평자의 재반론 글에 대해, 그는 재재반론을 자신의 ‘다음’과 ‘네이버’ 블로그, ‘현대시조 창작 연구회’와 ‘부산시조시인협회’ 카페에 도배한 후, 『예술문화비평』 가을호에 특별 원고로 발표했다.
평자가 『문장21』 여름호 재반론의 글 마지막에 “이 글 이후 논점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가 어떠한 변명을 들고나오든 다시 논박을 진행하지 않으려고 한다.”라고 밝혔기에, 더는 논박을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논점 밖에서 평자를 향해 인신공격을 가함은 물론, 거짓 주장으로 독자를 기만하고 있기에 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다시 펜을 들었다. 평자가 최초 비평과 재반론에서 이미 주요 논점을 다루었기에 새로운 논박은 무의미하므로, 그가 의문을 던진 질문에 대해서만 답변 형식으로 진행한다.
2. ‘시적 영감의 근원은 무의식에서 출발한다.’에 대한 답변
평자는 재반론에서 “대부분의 경우 등단 5년만 되어도 (……) 자신의 시에 시론을 불어넣을 줄 알고, 혹여 반론을 제기할 일이 생기면 자신의 시론을 앞세워야 함을 안다.”라고 언급하였지만, 그는 재재반론에서도 자신이 정립한 시론이 아닌, 불필요한 여러 이론가의 권위를 내세워 ‘시적 영감의 근원은 무의식에서 출발한다.’라며 ‘권위에 호소 오류’에 빠져 버렸다. 아직 자신의 시론조차 정립하지 못한 그와 이런 논쟁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지만, 답변할 의무를 지키려 한다.
『예술부산』 3월호 반론에서 그는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쓸 때 무의식의 세계에서 작품을 쓰게 된다.”라고 ‘무의식의 표출’이 아닌 ‘무의식의 세계에서’라는 주술적인 ‘영감설’을 내세웠다. 이에 평자가 재반론에서 “무의식의 세계에서 시를 쓴다 하니 뽕을 한 대 맞지 않고서야 우째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며 풍자했다. 이 대목을 놓고 그는 재재반론에서 ‘영감의 근원’을 무의식에서 찾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설’로 말을 바꿔 탔다.
영감론의 세 가지 설 가운데 그가 반론에서 언급한 ‘영감설’은 주술적이라 이미 외면당한 지 오래다. 언급하지 않은 ‘천재설’은 영웅 숭배적인 면이 강해 오래전 설득력을 잃었다. 그가 다시 재재반론에서 언급한 프로이트의 ‘무의식설’은 시 창작의 불가해한 면에 대한 자연주의적 해석이라 현대인으로부터 옹호를 받고 있지만, 더 세분된 이론에서 프로이트의 주장은 이미 한 세기가 지난 이론임과 한계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그는 연구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가 재재반론에서 “플라톤은 시의 창조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한 것 (……)”이라는 말을 인용했다. 그의 오류가 여기에도 있다. 플라톤이 “시의 영감을 주장하면서 신비성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그 광기(狂氣)를 경멸하는 입장”을 취한 것임을 모르는 것 같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주장한 ‘시인 추방론’과 연결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남의 글을 베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프로이트를 언급한 뒤, “현대에 이르러 영감의 출처는 외부 세계에서 온다는 인식이 불식되었다. 곧 영감의 근원을 인간의 내면 심리세계 즉, 무의식에서 찾는 현상이 지배적이다.”라며 무의식 세계 속에서 시를 쓴다는 ‘영감설’이 아닌, 영감의 근원이 무의식이라는 ‘무의식설’로 말을 바꿨다. 많은 사람이 옹호하는 이론임은 맞다. 이 대목이 평자의 견해와 충돌하고, 그의 또 다른 오류이다. 프로이트는 “시적 표현을 억압된 심리, 곧 노이로제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즉, 시를 ‘정신병의 흔적’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를 맹신한다는 것은 그의 시조가 ‘정신병의 흔적’이라고 인정한 셈이다. 우리가 시를 논할 때, 자유로운 정신세계와 미적 구현, 나아가 인간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정신병의 흔적’과 대립하는 개념임을 그가 모르고 베끼기 수준의 인용을 했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자신에게 욕을 퍼부은 거나 다름없다.
그는 프로이트 학설만 가지고 광대무변한 우주와 같은 시 창작의 양상을 다 설명할 수 없음도 간과했다. 융 학파는 “시의 근원이 단순한 무의식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 나아가 인류 공통의 무의식에 있다.”고 본다. 즉, “인류 공통의 거대한 꿈이 시인이라는 한 개인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 시”라고 본다.
다시 정리하면 그는 재재반론에서 말을 바꾸기는 했으나, 프로이트 주장을 맹신하며 ‘영감의 근원을 외부세계가 아닌 인간의 내면 심리세계’, 즉 ‘개인의 심리세계’에서 찾고 있다. 평자는 융 학파의 주장에 무게를 두고 ‘영감의 근원을 개인 밖의 집단 무의식’에서 찾고 있다. 그가 오늘날 많은 이가 융 학파에 수긍하고 있음을 모른다는 것은, 정규 학제에서 철학과 심리학, 문학과 문예 이론 등을 접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융의 제자 바슐라르의 시학이 송욱에 의해 한국에 소개된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21세기에 와서 우리나라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대학 정규과정에서는 이를 적극 옹호하고 있으며 평자 또한 이를 옹호하고 있다. 이에 대해 철학자 이지훈이 『예술과 연금술』(창비, 2004)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 예로 “시인이란 ‘영감을 받아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통해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옳다면, 시인의 상상력은 모름지기 질료와 형상의 두 축을 함께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서 “바슐라르가 과학의 기원에서 꿈보다 몽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무의식자체가 아니라 과학정신의 무의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초적 본능”이 펼쳐지는 영역보다는 “덜 깊고” “더 지성적”인 곳을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거친 꿈과 과학정신, 깊은 무의식과 명료한 의식의 중간지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 중간세계는 또한 원서의 몽상이 전개되는 영역으로서 과학과 시학이 갈려나가는 지점이기도 합니다.”라며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 ‘원초적 무의식’을 시의 근원이라 주장하는 그는 20세기 초반의 정신분석학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는 이론적 수준이 하급이라 더 이상 대화의 상대가 안 됨에도 여러 이론을 연결도 하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짜깁기하여 궤변만 늘어놓고 있다. 정신병적 흔적에서 스스로 깨우치고 나오기는 한계가 있는 자로 판단된다.
3. ‘일부 시어의 빈도수가 높다고 어휘력 부족인가?’에 대한 답변
평자가 최초 비평과 재반론에서 그가 어휘력이 부족한 사실을 밝혔다. 전환구에 동일한 시어를 반복해서 채택한 것과 자기 표절을 지적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도 그가 증명 자료를 내놓으라고 하니 답을 할 수밖에 없다. 어휘력이 부족한 시인은 표절을 일삼기도 한다. 표절은 자신에게 부족한 어휘와 창작 기법을 몰래 훔쳐 오는 비윤리적인 행위이다. 그가 이에 해당한다.
3-1. 이상범의 「가을손」 그림자
시조집 『산길을 걸으며』의 표제 시조이면서 대표작 중 하나인 「산길을 걸으며(3)」은 이상범(1935~ ) 시인의 「가을손」을 표절한 흔적이 뚜렷하다. 이 「가을손」은 시조집 『꿈꾸는 별자리』(태학사, 2001)의 「서시」로 수록되어 있다.
두 손을 펴든 채 가을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 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 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 이상범, 「가을손」 전문
어느 가을 외진 산길 혼자서 걷습니다
가을볕을 손에 모으면 하늘빛이 고입니다
손끝엔 푸른 물감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억새꽃 은빛물결 출렁이며 밀려와서
온 갖가지 시름들을 말갛게 씻어 내면
바람은 하얀 꽃술을 흩날리고 있습니다.
미운 것 고운 것이 부질없다 생각하며
산 너머를 손차양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내 인생 남은 날들의 가얄 길도 보입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3)」 전문
그의 「산길을 걸으며(3)」과 이상범 시인의 「가을손」을 비교해 보면, 교묘히 구마다 시어를 바꾸기는 했으나, 소재를 비롯한 어휘, 시적 발상, 통사 구조, 시적 구조 등을 표절하였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원작인 「가을손」의 모든 행이 ‘–니다’체로 종결하듯이 그도 대부분 ‘–니다’체로 종결한 것과 시어의 위치만 비교해 보더라도 쉽게 표절 그림자를 밟을 수 있다. 또한, 일부 시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만으로도 표절 시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연한 일치라고 이해하려 해도 여러 층위에서 표절에 근접한 유사성 때문에 창작의 독창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평자의 주장에 대해 그는 2012. 9. 2. ‘현대시조 창작 연구회’ 카페에서 “이상범 선생의 ‘가을손’의 원초적 심상은 필자와 같은 것 같다. 이미지의 조작과 창조는 필자와 보법이 다른 것 같다. (……) 이상범 선생은 ‘풀 향기 같은 성좌’ ‘눈발 같은 이야기’ ‘우물처럼 고입니다’ 등 직유법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선명하게 표현하여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으나, 필자는 시작(詩作)에서 직유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라며 표절을 부인했다.
그가 표절을 부인하고 있지만, 동일한 시어가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에 주목해 보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표절임이 확연해진다. 1연 중장 뒤의 구 “우물처럼 고입니다 = 하늘빛이 고입니다”, 2연 중장 뒤의 구 “정갈하게 씻깁니다 = 말갛게 씻어 내면”, 3연 종장 결구 “떠날 날도 보입니다 = 가얄 길도 보입니다” 등의 시어를 동일한 위치에 배열해 놓았음은 우연성과 거리가 멀다.
그는 남의 시조를 표절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시조에서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산길을 걸으며(3)」 3연 중장 “산 너머를 손차양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니”에 주목해 본다. 이 시조집에 함께 실린 「2월, 오늘 다시 봄을 보며」 2연 종장과 비교해 보면 시적 발상이 너무나 똑같다.
미운 것 고운 것이 부질없다 생각하며
산 너머를 손차양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내 인생 남은 날들의 가얄 길도 보입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3)」 3연
일찍이 소식 끊고 연락 없는 그 친구가
지난겨울 잘 견뎠다고 기별이나 줄까봐서
이마에 손차양하고 행여나 싶어 바라본다.
- 정해원, 「2월, 오늘 다시 봄을 보며」 2연
「산길을 걸으며(3)」은 『실상문학』 51호에, 「2월, 오늘 다시 봄을 보며」는 『문학도시』 87호에 그가 발표한 시조이다. 그가 원고 청탁을 받으면 자신의 시조와 남의 시조를 짜깁기하여 발표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3-2. 당나라 시인 장구령의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 그림자
『산길을 걸으며』의 표제 시조이면서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인 「산길을 걸으며(5)」도 표절 그림자가 짙다. 중국 당나라 시인 장구령(張九齡; 673~740)의 오언절구인 「조경견백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 오언절구는 장구령이 당 현종 때 재상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심정을 읊은 시이다. 그 내용은 “옛날에 푸른 뜻을 품고 나라를 위해 힘을 다했으나,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늙어서 재상의 자리에서 밀려난 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백발을 바라보며 스스로 불쌍히 여길 줄 몰랐다.”라고 신세타령한 시이다. 「산길을 걸으며(5)」에 드리워진 장구령의 그림자를 읽어 본다.
宿昔青雲志 지난날에는 청운의 뜻이 있었는데
蹉跎白髮年 어영부영하다 보니 백발의 나이가 되었구나
誰知明鏡裏 거울 속의 이 모습을 누가 알았으리
形影自相憐 그림자가 서로 바라보며 불쌍히 여길 줄을
- 장구령,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 전문
시오야 밝은 밤을/ 하염없이 걷습니다.
달빛은 은혜로운/ 불음佛音으로 쏟아지고
겹겹이/ 고이는 월광月光/ 거울 되어 비칩니다.
비치는 내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청운靑雲의 꿈 어디 두고/ 빈손으로 걷습니다.
오늘은/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 회한悔恨으로 밀립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5)」 1, 2연
위와 같이 그의 「산길을 걸으며(5)」는 장구령의 오언절구 「조경견백발」의 그림자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산길을 걸으며(3)」에서처럼 시어를 교묘히 바꾸기는 했으나, 표절 혐의를 벗을 수는 없다.
「산길을 걸으며(5)」 2연 종장에서 ‘조경견백발’이라는 시어를 차용하였다 하여 그것만으로는 표절이라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장구령의 ‘조경견백발’의 뜻인 ‘거울에 비친 백발’ 혹은 ‘거울을 비춰 백발을 보다’라는 주제와 ‘거울’과 ‘백발’ 등의 소재를 차용하여 시적 변주를 하였다고 그가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월광’을 ‘거울’과 겹쳐 놓았는데 어떻게 시상이 장구령의 오언절구와 일치하느냐? 하고 따질 수도 있을 법하고, 2연은 장구령의 오언절구를 ‘패러디’한 글이라 우길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주제와 소재를 비롯한 어휘, 시적 발상 등을 꼼꼼히 비교해 보면 오언절구를 현대 시조로 변환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조경견백발」의 번역본을 기준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번역본과 그의 시조와 비교해 본다. 오언절구의 ‘불쌍히 여기다’를 ‘측은하게’로, ‘이 모습’을 ‘내 모습’으로, ‘청운의 뜻’을 ‘청운의 꿈’으로 교묘히 시어를 바꾸어 놓았지만, 표절 흔적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우연성 때문일까? 주제, 소재, 어휘, 시적 발상 등 여러 층위에서 표절에 근접한 유사성 때문에 창작의 독창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만일 그가 원작인 「조경견백발」이 너무나 유명한 시라서 누구나 차용임을 알아차릴 수 있어 그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차용 또는 패러디[Parody]한 것이라고 항변한다면 굳이 반박할 필요성은 없을 것 같다. 표절의 그림자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평자의 주장에 대해 그는 2012. 9. 2. ‘현대시조 창작 연구회’ 카페에서 ‘패러디’라고 항변했다. 그 내용은 “‘청운의 꿈’은 모두가 한 번씩은 입에 담아보는 보편적인 관용어다. 여기의 靑雲之志와 照鏡見白髮도 많은 사람이 아는 하나의 상징적 시어로 작용하는 것이며 이 시조의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둘째 수만을 단수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장구령의 시를 패러디한 것으로 볼 일이지 표절로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여기서는 첫째수와 마지막 수를 보충해 주는 기능밖에 하지 않는다.”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는 ‘패러디’가 풍자성과 해학성을 포함하는 용어이면서 인용 출처를 밝혀야 성립하는 용어인지 모르는 걸까? 또한, 관용어와 한자어를 많이 채택하는 구시대의 작법을 고수하는 그가 자신의 정체성과 거리가 먼 포스트모더니즘 추종자라고 밝힌 꼴이 되어 버렸다. 평자는 앞서 “‘조경견백발’이라는 시어를 차용하였다 하여 그것만으로는 표절이라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인정했다. 그가 ‘바라보며’를 그대로 ‘바라보며’로, ‘불쌍히 여기다’를 ‘측은하게’로, ‘이 모습’을 ‘내 모습’으로, ‘청운의 뜻’을 ‘청운의 꿈’으로 교묘히 시어를 바꿔 놓은 것과 그 어디에도 인용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은 ‘패러디’가 아닌 베끼기 수준의 ‘표절’임이 분명하다.
「산길을 걸으며(3)」처럼 이 시조에서도 남의 시를 표절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시조에서 짜깁기한 그림자를 밟을 수 있다. 「산길을 걸으며(5)」 1연 초장 뒤의 구 “하염없이 걷습니다”와 3연 종장 결구의 “정처없이 갑니다”에 주목해 본다. 이 시조집에 함께 실린 「산길을 걸으며(4)」 1, 3연과 비교해 보면 위치가 똑같다.
시오야 밝은 밤을/ 하염없이 걷습니다.// (……)// 나 또한/ 이 밤을 질러/ 정처 없이 갑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5)」 1 연, 3연
첫눈 온 산길 따라/ 하염없이 걷습니다// (……)//창백한/ 하얀 낮달은/ 정처 없이 흐릅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4)」 1 연, 3연
「산길을 걸으며(5)」와 「산길을 걸으며(4)」는 워드 작업할 때 한 편의 시조를 놓고 두 편의 시조로 개작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또한, 「산길을 걸으며(4)」 1연 중장 앞의 구 “육각의 결정結晶들이/ 설화雪花로 폈습니다”에 주목해 보면, 이 시집에 함께 실려 있는 「빙점」의 2연 중장과 앞의 구는 동일하고, 뒤의 구는 시어를 교묘히 바꾸어 놓았지만, 시상은 같다.
육각의 결정結晶들이/ 설화雪花로 폈습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4)」 1연 중장
육각의 결정結晶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면
- 정해원, 「빙점氷點」 2연 중장
이처럼 남의 시조의 표절 그림자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자신의 시조를 짜깁기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가 짜깁기로 발표한 시조 「빙점」을 대표작으로 하여 2012년 가을에 ‘낙동강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제아무리 흔하고 흔한 것이 문학상이라 하더라도 낯간지러운 일이다.
3-3. 자신의 시조를 짜깁기한 여러 흔적
평자가 『예술부산』 1월호에서 자기 표절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표적 예로 「입춘에」 1연 종장 “오늘은 현관 앞에다 춘방을 붙입니다.”와 「아버지」 1연 종장 “오늘은 춘방春榜을 써서 현관 앞에 붙이신다.”를 지적했다. 이 글에서는 「어느 봄날」 1연 중장 “입춘 날 아침에는 춘방春榜을 붙이시고”를 추가하여 지적한다. 또한, 「입춘에」와 「아버지」를 비교해 보면, 「입춘에」 2연 중장 “입춘대길立春大吉 만사형통萬事亨通 붙이는 손끝에는”와 「아버지」 3연 중장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양쪽으로 붙이시고”도 ‘만사형통’과 ‘건양다경’이라는 말만 바꾸고 서로 짜깁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평자가 「어떤 봄날」 3연 종장 “내 가슴 한 언저리를 구비 돌아갑니다.”와 「밤에 흐르는 강(2)」 2연 종장 “내 가슴 한 언저리에서 철썩이는 강물소리.”도 최초 비평 때 이미 자기 표절임을 지적했다. 이 글에서 추가하여 「부나비로 죽고 싶다」 2연 종장 “세월의 언저리를 돌아 철썩이며 흘러간다.”도 서로 짜깁기한 것임을 제시한다. 또한, 「밤에 흐르는 강(2)」 1연 초장 “강물은 흐느끼며 밤을 질러 흘러간다.”와 「별빛 지는 밤에」 3연 종장 “세월은/ 덧없이 흘러/ 밤을 질러가누나.”도 서로 짜깁기한 것임을 제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입동에」 1연 초장 앞의 구 “개암나무 가지 끝에”라는 시구가 「나무」 1연 종장에도 그대로 짜깁기 되어 있고, 「빙점」 1연 중장 앞의 구 “미루나무 가지 끝에”라는 시구가 「한 사내의 실루엣」 2연 초장 앞의 구에 그대로 다시 등장하고, 「샛강」 3연 종장에 “미루나무 위로”도 등장한다. 이것은 서로 짜깁기한 흔적이다.
평자는 재반론 때 “그에게 필자는 왜 동일한 시상의 시조와 몇 자만을 바꿔치기한 시조에 대해서 언급을 회피하며 자인하기를 거부할까? 그가 ‘삼류 시인은 시상을 짜깁기하면서 시를 조립하듯이 쓴다.’라고 반론의 글에서 주장한 것에 대입해 보면, 몇 글자만을 바꿔치기한 자신이 삼류 시인 수준에도 못 미침을 잘 알고 있다는 증거는 아닐까?”라고 언급했다. 그가 이번 재재반론에서도 답을 피했다.
그러나 평자의 주장에 대해 그는 2012. 9. 2. ‘현대시조 창작 연구회’ 카페에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자기 표절이라고 한 것들을 보고 나는 내심 게으름을 실감했다. 나는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는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다. 원고 청탁이 왔을 때 써둔 작품이 없을 경우에는 새로 작품을 쓰게 되는데 그때 나도 모르게 그런 구절이 가끔 들어간 것 같다. 설사 그랬어도 작품집을 묶어서 낼 때는 한번 일별해서 보고 바꿨어야 했는데 나태한 것 같다. 꼭 그런 구절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다르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며 자기 표절에 대해 반성을 하는 듯하다가, “강물을 많이 노래하다 보면 미루나무가 자주 등장하게 되고 개암나무가 있는 산에 올라가게 되면 개암나무를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것을 피해서 일부러 미루나무나 개암나무를 보고 느낀 이미지나 시상을 수양버들이나 소나무로 바꾸면 더 이상 한 것이 아닌가?”라며 변명의 길로 내달렸다. 이런 변명을 보면 그는 현대시조가 사실만을 추구한다고 믿는 얼치기 시인임이 분명하다.
그의 ‘다음 블로그’와 ‘네이버 블로그’에 탑재해 놓은 시조만 보더라도 “나는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는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다.”라는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발표한 글과 그 글의 발표 연도, 매체, 수상작까지 온전히 저장되어 있다.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그 자료를 이용해 짜깁기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4. ‘논리적 오류투성이의 글들’에 대한 답변
거짓은 거짓을 낳는 법, 그는 거짓과 변명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야 하는 처지에 몰려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평자가 손가락으로 달(작품)을 보라 했더니, 그는 달(작품)을 보지 않고, 평자의 손가락(글꼬리 잡기)만을 보았다. 그가 논리적 오류에 빠져 있다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평자가 그런 양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타인이 개입하여 대필한 흔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논점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그가 사용한 용어 범위 안에서만 숫자로 구분하여 답변한다.
➀ 그는 평자를 향해 ‘허수아비 공격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등단 30년이라고 어디에도 말한 바 없는데,(……) ‘놀랍게도 등단 30년이 넘었다고 자인했음에도.’라고 흡사 필자가 한 말인 것처럼 오인하도록 하면서 허수아비 공격을 하고 있다.”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과연 평자가 ‘허수아비 공격’을 했을까? 그는 이 시조집 129쪽 서두에서 “등단 30년이 넘었다. 습작부터 셈을 하면 사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라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재재반론이 거짓을 진실로 오인하도록 ‘허수아비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시조집에 인쇄된 글을 두고 자기가 한 말이 아니라 함은, 누군가가 시조집을 대필했음을 시인한 것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재재반론을 누군가가 대필했다는 말이 성립한다.
➁ 그는 ‘언어적 혼동 오류’ 또는 ‘의미론적 오류’를 앞장세워 놓고 그 스스로 오류에 빠져 버렸다. 평자가 “작품을 읽지도 않고 평을 쓸 수만 있다면 하나님보다 더 영적으로 우위에 있는 신일 것이다.”라고 비틀은 말에 대해 그는 “이 말은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가치를 평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글자가 망막에 비치는 물리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했다. 그는 비틀거나 꼬집는 말을 이해하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하며 ‘의미론적 혼동’에 빠져 버렸다.
평자가 말한 그 대목이 가치 평가를 위해 읽었다는 의미가 왜 아니란 말인가? 비평가가 비평 대상의 글을 읽을 때 가치 평가를 우선시함은 기본 책무이다. 그가 다른 이론가를 앞장세워 앵무새처럼 내뱉었던 말이기도 하다. 우짤라꼬 그는 물리적 현상의 의미로 읽었을까? 재재반론을 누군가가 개입하여 대필하지 않았다면 이런 주장을 할 수가 없다. 대필이 아니라면 그의 문장 독해력도 얼치기이다.
➂ 그는 ‘논점 일탈 오류’를 내세워 평자가 재반론 글에서 논점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서론 말미에 “(……) 최초 비평에 시조시인으로서 자질이 의심스러움을 비평하려고 했었지만, 인신공격이 될 수 있어 심사숙고한 끝에 순수하게 작품 비평으로 선회했었음을 이글에서 밝혀 둔다.”라고 논점과 관련이 없음을 선을 그어 놓은 글을 두고, 논점을 일탈했다고 주장했다. 그 자신이 ‘논점 일탈 오류’를 범한 것이다.
또한, 그는 “필자도 2~3배 정도 비싼 출판비로 서울에 있는 유명출판사에서 고급 양장으로 작품집을 발간하였다면 이런 구설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의 질과 상관이 없다.”라며 그 스스로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했다. 그는 주요 논점에서 벗어나려고 넋두리에 불과한 말로 포장했다.
여기서 논점은 평자가 최초부터 줄곧 밝혔듯이 그의 시조가 질적으로 함량 미달이라는 것이다. 시조의 핵심인 전환구에서 과도한 어휘 반복으로 언어의 폐쇄화, 자기 표절, 시적 자유와 무관한 한글맞춤법 오류 등은 물론, 표절이라는 심각한 하자 때문이다.
➃ 그가 ‘원칙 혼돈 오류’를 범해 놓고 평자가 그런 양 거짓 주장을 했다. 평자가 말한 “나이 어린 작가 지망생들도 ‘이름 모를 새’나 ‘꽃’이라는 상투 어구를 시에 넣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원칙과 기본을 익히게 하여야 하나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원칙 혼돈 오류’이다.”라며 주장을 펼쳤다. 아마추어 학생들도 잘 아는 상식을 등단 30년을 넘긴 시인이 모른다면 그게 무슨 프로의 자격이 있단 말인가? 그가 아마추어라면 그 말에 수긍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로가 할 말은 아니다. 그의 주장은 배우는 학생들에게 법과 질서 준수라는 원칙을 가르치더라도 어른들은 법과 질서를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다름없는 비도덕적인 주장이다.
➄ 그가 반론과 재재반론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이론가의 말을 장황하게 따와서 앵무새처럼 내뱉으며 ‘권위에 호소 오류’에 빠져 허우적거려 놓고, 마치 평자가 오류를 범한 것처럼 매도했다.
그가 반론에서 “대학총장까지 지낸 원로 평론가는 (……) 원고지 두 장 분량의 편지를 일부러 보내주었다. ‘현대시조의 격을 한 단계 더 높였다.’는 너무 과분한 평가에 오히려 송구하기도 했다.”라고 ‘권위에 호소 오류’를 범했다. 이에 평자가 재반론에서 “그 평론가는 모든 분에게 덕담을 잘하는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다. 평자도 그분을 존경한다. (……) 필자가 그분의 이름을 내세워 글 수준을 포장하려고 한다면 그분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다.”라고 그분의 권위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그러함에도 그는 그 평론가의 덕담을 끌어들여 자신의 시조가 명작이나 되는 것처럼 자아도취에 빠진 주장을 했다.
➅ 그는 “평론을 전문적 업으로 삼는 비평가의 글에서 고등학생들도 아는 논리적 오류투성이의 글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라며 인신공격을 했다. 등단 30년을 넘긴 시인이 왜 이러한 언동을 할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표절 때문이다. 그는 남의 글을 베끼고, 자신의 글을 짜깁기한 것이 들통 날까 봐, 평자에 대해 온갖 인신공격을 감행했다. ‘모방시 짓기’는 중학교 교과과정이다. 그가 아직 모방시를 발표하고 있다는 것은 중학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을 대변한다. 나아가 표절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 행위임을 모르는 걸까?
5. ‘그의 띄어쓰기와 맞춤법 수준은?’에 대한 답변
이번 재재반론의 글에서 그는 논점과 무관한 평자의 글꼬리를 잡았다. 그가 논점과 무관한 ‘허수아비 공격’을 자행한 것이지만, 평자는 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한글맞춤법에 대해 스스로 무지함을 또 한 번 인정한 꼴이 되어 버렸다. 부산대학교 인공지능연구실과 (주)나라인포테크가 공동으로 개발한 ‘한국어 맞춤법/문법검사기’(이하 검사기)에서 제시한 문구가 오류인지 분간 못 하고 그대로 베껴 앵무새처럼 내뱉는 것을 보면, 30년 넘게 가짜 시인 노릇을 한다고 힘들었던 것을 스스로 폭로한 꼴이다. 남의 시와 시조, 이론을 베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컴퓨터의 오류마저도 베끼고 있다. 그 베끼기 정신 너무나 투철한 표절 정신이다. 그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숫자로 구분하여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➀ 그는 “‘우째’는 사투리 오류로 ‘어찌’로 써야 한다.”라고 ‘검사기’에서 제시한 문구가 오류임에도 그대로 베껴서 주장했다. ‘우째’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어째’의 방언(강원, 경기, 경상)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가 말한 ‘어찌’의 사투리는 ‘우찌’로 등재되어 있다. 평자의 글 “무의식의 세계에서 시를 쓴다 하니 뽕을 한 대 맞지 않고서야 우째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는 전체 문맥을 보면, ‘우째’라는 사투리 두 자는 강조이다. 비틀거나 꼬집을 때 사투리를 끌어들이는 것은 문인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수법이다. 이러한 풍자와 해학을 읽지 못하는 그가 우째 시인이란 말인가?
➁ 그는 “‘한 쪽에서’는 접미사 ‘-쪽’은 방향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한쪽에서’로 붙여 써야 한다.”라며 ‘검사기’에서 제시한 문구를 그대로 베껴 제시했다. 평자의 글에서는 명사 ‘쪽’임에도, 그는 접미사 ‘-쪽’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했다. 평자가 “출판사 발행인 한 분은 몇 년 전 산문집의 딱 한 쪽에서 4줄이 밀려난 것을 발견한 뒤”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사 ‘딱’을 사용한 것만 보더라도 ‘한’은 관형사이고, ‘쪽’은 책의 ‘면(페이지)’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쪽’이라고 띄어 씀이 틀렸다는 그의 주장 때문인지 자꾸 배꼽이 소리를 낸다.
➂ 그는 “‘회자되고’는 ‘회자하고’로 써야 하며, 명사에 ‘하다’가 붙어서 자동사가 되는 말은 ‘되다’를 붙이지 않는 것이 좋다.”라며 ‘검사기’에서 권장하는 문구를 그대로 베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회자하다’와 ‘회자되다’가 동시에 등재되어 있다. 등재된 내용에 대입해 보면, 전체 문맥상 평자가 박남철 시인에 대해 표현한 “그러한 정신이 바탕이 되어 그의 시가 회자되고 해체시의 거목이 된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회자되고’가 적확한 표현이다. 주체를 잘 살펴야 한다. 시가 회자되는 것이지 시가 회자할 수는 없다.
➃ 그는 “‘MBC ! 느낌표’는 ‘MBC! 느낌표’로 붙여 써야 한다. 종결어미 다음에 쓰거나 문장을 마치면서 쓰는 종결형 문장부호는 종결어미 다음에 바로 붙여서 써야 바르다.”라며 검사기에서 제시한 문구를 그대로 베꼈다. 우야꼬, ‘MBC’가 우째 종결어미란 말인가? 종결어미가 아닌 방송국 명칭인 고유명사이므로 띄우는 것이 맞다. 2002년도 MBC 프로그램 타이틀이 ‘MBC ! 느낌표’였다. 느낌표 선정도서에 인쇄된 문장부호 ‘!’ 역시 하나의 독립된 심벌이었음을 모른다는 것은 그가 책을 멀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➄ 그는 “‘들고나오든’은 합성어로 볼 수 없으므로 ‘들고 나오든’으로 띄어 써야 한다.”라며 ‘검사기’에서 제시한 기계적 오류를 그대로 베꼈다. ‘들고나오다’는 국립국어원에서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으며, 『표준국어대사전』에 ‘들고-나오다’라고 합성어로 등재되어 있다. 그가 사전도 찾아보지 않고 오로지 베끼기 표절 정신만을 앞세웠다.
➅ 그는 “‘이로 인해’는 ‘이 때문에’로 바꿔 써는 것이 좋다. (……)[한겨레신문 자체 자료에 따름]”이라며 이것 또한 ‘검사기’에서 제시한 장황한 문구를 그대로 베껴 마치 오류인 양 매도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우리말로 등재되어 있고, 국립국어원에서 우리말로 인정하고 있다. [한겨레]신문의 자체 의견은 ‘외국식 표현이므로 너무 빈번하게 사용하지 말자’는 하나의 견해이다. 그가 하나의 견해를 전체의 견해로 매도하는 ‘원칙 혼돈의 오류’에 스스로 빠져 버렸다.
➆ 그는 문장부호를 지적했다. 각 출판사와 언론사마다 독자들이 읽기에 편하도록 내부 방침을 정해 두는 것이 관례임을 진정 모르는 걸까? 평자의 원고는 『문장21』 편집 내부 규정에 따른 것이다. 그가 주장한 ( ), [ ]를 『문장21』에서는 괄호를 포함하여 그 안의 글을 축소 편집함으로써 독자가 명확히 구분하여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임을 책을 읽는 순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억지 주장은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이나, 무지함이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만이 범할 수 있는 오류이다.
6. ‘그는 지금도 긴장해 있다.’에 대한 답변
평자는 최초 비평에서 소제목에서부터 ‘긴장성을 상실한 낡은 표현’이라며 ‘긴장’, 즉 텐션[tension]을 말했고, “이름 모를 새들(「배산에서」)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본 순간, 긴장성을 상실한 시조임을 알아봤다. (……) 구체적인 의미의 언어로 개별자이든 보편자이든 새로운 이미지의 새를 창조해 내야 하는 것이 시인의 본령이다. 독자성을 띤 표현만이 의미의 긴장성을 자아내는 법이다.”라며 언급했다. 그가 ‘긴장(tension)’이 아니라 주장함은 창작의 기초 용어조차 모른다는 증거가 명확하다.
평자가 재반론에서 “그는 시어의 ‘긴장(tension)’이라는 용어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 (……) 시어를 채택할 때 ‘시어의 긴장, 내용의 긴장, 의미의 긴장’ 등 긴장미를 고려해야 함은 기초 이론이다. 기초적인 용어로 쉽게 설명했음에도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이론적으로는 무장해제 상태임이 분명하다.”라고 그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억지임을 반박하기도 했다.
평자가 “상투적인 표현을 본 순간, 긴장성을 상실한 시조임을 알아봤다.”라고 말한 대목을 떼어 놓고, 그는 “긴장(tonicity)해서 토로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와서 (……) 텐션(tension)을 말했다고 항변한다.”라고 왜곡된 주장을 풀어놓았다. 그가 문학 기초 용어조차 몰라 반론에서 ‘의미론적 오류’를 범해 놓고 왜 남 탓을 할까? 투사(Projection)라는 심리학 용어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가 지금 처한 함량 미달의 행위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 탓으로 돌리는 방어기제를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 탓하는 놈 치고 잘되는 놈 없다.”라는 속된 말이 왜 존재하는지 겹쳐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내 탓은 행복, 남 탓은 불행을 의미한다는 것도 모르는 걸까?
그가 재재반론에서 주장한 대로 이 용어를 알고 있었다면 이 또한 누군가가 반론과 재재반론의 글을 대필한 결과라는 말과 상통한다. 거짓에 거짓을 덧칠하다 보면 진퇴양난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의 이치 아니던가?
7. 마무리
평자는 그의 표절 그림자를 다룬 별도의 원고에서 “지금까지 읽어 낸 표절의 그림자만 해도 이 시조집은 작품집으로서 자격을 잃었다. 그가 이후에 어떠한 궤변과 평자에 대해 인신공격을 가해 오더라도 이미 등단 30년을 넘긴 시인의 수준이 아니므로 더 이상의 논박은 무의미하다 여겨진다.”라고 말했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가 논점 안에서 또 다른 의문을 던지면 얼마든지 답변을 해 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평자가 던진 ‘표절’, ‘자기 표절’, ‘한글맞춤법의 심각한 오류’, ‘대필’ 등의 의혹 제기에 대해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모든 예술은 발표하는 순간, 작가의 것이 아니다. 아직도 그가 자신이 발표한 시조가 비평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절필함이 마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