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추
보성에서 출발해 광주 어디쯤이던가
소머리국밥 집에 들렀지
상 위엔, 해진 군청색 축구화 끈 같은 파김치
고단함에 풀이 죽은 새우젓
허우적거리는 면목 없는 젓가락들
심심한 국물에 짱짱한 고추나 하나 먹으려 했지
된장을 깊숙이 찍어
한입 깨물다 그냥 뱉어놓고 말았지
고추는 어디서나 고추였지
한때는 사는 게 밍밍해서
아니, 외로워서
당신이나 한 소쿠리 따서 먹어보려 했었지
그때,
당신은 참 매웠지
단단한 물풍선 같은 당신을 두어 번 입에 넣고 나면
밤새 어찌나 혀가 얼얼하던지
땀을 흥건히 흘리며
소머리국밥 한 그릇 다 비우는 동안
당신 꼭 닮은
그 고추 끝내는 먹어보지 못했지
너무 매워서 아렸던 당신을 떠올리며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오물거렸지
조갯살 같은 내 아랫입술이
개 꼬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우리 집 해피 녀석, 해피해서 죽을 것 같다고
죽여 달라고 꼬리를 흔든다
아니, 휘두른다
길을 막아서는 녀석을 발로 물리고
방으로 들어가자
그 녀석 상주처럼 문짝을 긁어대며 박박 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그래
당신을 생각하면
나도 개 꼬리처럼 나를 흔들던 때가 있었지
연탄집게가 부러진 아궁이 앞에서
바람이 벌려 놓은 지붕 밑에서
시간도, 거리도
당신에겐 참 어둡던 때
머리를 바닥에 붙이고 꼬리를 흔들다
결국 꼬리가 몸통을 흔들던
바짝 당신에게 납작했던 시간들
축대를 짚고 가는 꺼칠한 바람의 기척에
나의 귀가를 그렸을 당신도
한때는 분간도 없이 흔들던 개 꼬리였을까
밤새 밖에 두어 영영 잃어버린,
이제는 더 이상 흔들 수 없는 그 개 꼬리
그래서 꼬리뼈라도 더듬어보는 밤
내가 참 미안하다
그때 좀 더 아프도록 흔들지 못한 것이
<2014 시와 경계 가을호>
첫댓글 좋아요^^
부끄럽습니다.희선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