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 '육신'은 새로운 피조물로 옮겨질 수 있는 '몸'과는 달리 이 세상의 존재 양식에 속하여 있고 이 세상과 더불어 멸망당할 자로서의 인간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육신'은 '영'과 대립을 이루면서 연약함과 허무 가운데 있는 인간성을 의미한다.따라서 본절은 본 서신을 받아보게 될 로마교회가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예를 들었음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에 대한 예를 가리킨다. 바울은 성도의 신분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라는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종과 주인과의 관계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과 같이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표현을 갈 3:15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전에 너희가...불법에 이른 것같이- 본 구절은 1:18에서 3:18까지 바울이 언급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요약 설명으로 이해된다. 바울은 여기서 로마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 '거룩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스'가 '성화'를 의미하는지 '성결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견해가 학자마다 다르다.
혹자는 고전 1:30;살전 4:3, 4, 7;살후 2:13;딤전 2:15;히 12:14;벧전 1:2 등을 근거로 '하기아스모스'가 과정적인 의미를 지닌 '성화'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거룩' 또는 '성별'을 뜻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구절들 중에 살전 4:3, 4, 7과 딤전 2:15은 단순히 '성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그밖의 것들은 그렇지 않다.
렌스키에 따르면 '하기아스모스'의 접미사 '모스'는 '활동'을 의미하는데, 이 '활동'은 우리 자신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고전 1:30;6:11에서 '하기아스모스'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거룩'을 의미하며 이 '거룩'함이 '의'와 '구속'과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전가됨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기아스모스'를 '거룩' 또는 '성별'로 해석하든지 '성화'로 해석하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위해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와 '구속'과 '거룩'을 믿음으로 전가받았으나 아직 연약한 육신에 매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몸의 구속'을 기대한다고도 했으며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듯이 당연히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바울의 권면은 '거룩'이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롬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 이 표현은 19절의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는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자기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 의를 행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비록 자연인은 본성이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육체의 자유는 단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여 마귀에게 얽매이게 할 뿐이다"라고 진술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교훈과도 일맥 상통한다..
[롬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 때에 - 바로 앞절에서 언급한 '죄의 종이 되었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었던 때를 가리킨다.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 성경은 '열매'(카르폰)에 대해 말할 때 '선한 열매'와 '악한 열매'를 구분한다. 혹자는 여기서 바울이 '선한 열매'를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본절의 질문에 대하여 '전혀 없었다'란 대답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다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때'란 표현이 죄의 종이었던 때를 의미하므로 '열매'를 달리 해석하지 않고 '열매'란 표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면 본절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 ?"가 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가 아니었던가 ?"일 것이다.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 이 표현은 17절에서 20절까지의 진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에 거하자'고 주장하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상태의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것임을 보여준다. 성도가 하나님을 모르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했었으나 하나님을 알면서부터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그는 지난 날의 일들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 죄의 종이 된 결과는 오직 '사망'만 있을 뿐이다.
혹자는 이 '사망'이 '영원한 사망'을 가리키는지 확실치 않다고 주장하지만, (1) '사망'이 '영생'과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는 점, 그리고 (2)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종말론적 사건인 대심판에 대한 암시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사망'은 '영원한 죽음'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러나 이제는 - 이 표현은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바울은 죄에게 종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실존과 그 결말에 대해 설명했으나 본절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내용으로 전환시키고자 이 같은 접속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 18절의 내용을 반복한다.
그리고 성도가 죄에서 해방된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께 종이 되어 -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행해야 한다. 이 '의'는 (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에게 이루어졌지만, (2)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성도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바울이 18절에서는 '의에게'라고 언급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께'라고 언급했을 뿐이지 그 두 단어는 본질상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 여기에 언급된 '거룩함'도 19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기아스모스'이다. 이 '거룩'은 인간의 순수한 노력만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던 '성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해석상 애매한 표현이지만 구체화시키자면 '거룩함의 열매' 또는 '성화의 열매'로 해석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성화의 열매'를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얻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테'의 시제가 개역성경과는 달리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이 시제는 본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성화의 열매'를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지 않고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19절의 '거룩함(에 이르라'는 권면과 함께 종합적으로 해석되어야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본절과 19절을 종합해 볼 때 성도는 '성화의 열매'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으면서도.
동시에 '성화'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닌 신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화' 자체도 '의'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성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것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 예수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그렇지만 완전한 의미의 영생은 마지막 부활 때에 거룩함의 열매를 소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 -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죄에 계속 거하는 자에게 지불되는 대가가 사망이라는 의미이다. '삯'에 해당하는 헬라어 '와소니아'는 흔히 '병사들의 급료'의 의미로 사용된다. 비록 '와소니아'가 딤전 5:18에서는 단순히 노동자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나머지 구절들에서는 군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일꾼과는 달리 군인들이 철저하게 군사적인 의무에 매여있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처럼, 사람이 '죄의 종'으로서 죄에게 충성함으로 '사망'이라는 대가를 받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와소니아'는 그 다음에 언급되는 은사와 대조되고 있다. 이 '은사'는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다.
그리고 이 '은사'는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 거룩의 열매를 얻게 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성도는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노력한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 값없이 '의', '성화',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므로 결코 자랑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