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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ingle-hearted 원문보기 글쓴이: 백년의 약속
출처 : 붙여보고나눠보고 | ||||||||||||||||||||||||||||||
얼마전에 산삼 100년 넘은 것이 5천만원 넘게 팔린 방송을 보았습니다. 사람 썩은 물과 새의 삼먹은 배설물이 합쳐서 나온게 산삼이라니 노후에 이렇게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합나다만,,,,
(::서천 천방산 장뇌삼밭::) 심봤다 아마 심마니들이 그산을 찾는다면 곳곳에서 그같은 환성을 내지 를지도 모른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 천방산(425m). 이 산은 겉보기에 한 적한 농촌마을의 평범한 야산이다. 그러나 삼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 찾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잡목이 우거진 숲속으로 한번 발을 디뎌보자. 발에 채일 정도로 빼곡한 산삼 잎사귀들.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곳의 삼은 장뇌삼이다. 산삼은 사람들이 재배한 인삼의 씨가 꿩이나 까치, 비둘기 등의 배설 물을 통해 전파된 것입니다. 이에 반해 장뇌삼은 산삼의 씨를 야산이나 밭 에 뿌려 후일 수확한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이곳은 분명 꿈의 동산, 황금 노다지밭이 분명하다. 신비스러운 영약으로 알려진 산삼만은 못해도 장뇌삼 역시 산삼 에 버금가는 효능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에따라 인삼 보다 훨신 고가에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방산에 처음 씨를 뿌린 사람은 천방농산의 대표인 권오만(47) 씨. 그는 지난 83년 부친 묘를 부여에서 선산인 이곳 천방산으로 옮 겨오면서 당시 농어촌소득증대 분야 국무총리 표창과 함께 받은 상금 60만원을 털어 삼씨를 구입한후 이장한 묘 주변에 심어놓았 다고 한다. 권씨는 한때 부여에서 벌여놓았던 중장비 임대사업이 어려워져 단신으로 상경, 서울에서 공사장을 전전하며 어려움을 겪기도 했 다. 그러던 권씨가 삼의 진가를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 그동안 키운 10년근짜리 삼 몇뿌리를 가지고 약재상을 찾았을 때 웬만한 봉급쟁이 한달 월급을 뺨치는 뭉칫돈을 받고 나서였다 . “본격적으로 삼씨를 구입해 문중의 산인 천방산에 심기 시작했 습니다. 삼이 자라기에 주변 여건도 좋았습니다. 삼은 음지를 좋 아해요. 그런데 산이 북향이어서 안성맞춤이었죠. 게다가 인근에 호수가 있어 적당한 습도가 유지되는데다, 호수앞의 희리산(329 m)이 서해로부터 불어오는 염도 높은 해풍도 막아주었습니다.” 권씨는 삼을 재배하며 사업으로 진빚을 모두 청산하고 새출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그는 장뇌삼이 고소득작물임을 확인한 후 아예 마을주민 17명과 함께 판교면 산지자원개발연구회라는 장뇌삼 작목반을 결성했다. 현재 판교면 일대의 장뇌삼밭은 권씨가 애초에 삼씨를 뿌린 천방 산 11만여평의 부지 외에도 희리산 일대까지 도합 60만여평에 걸쳐 삼이 심어져 있다. 삼의 효능에 대한 입소문 때문일까. 현장에서 직접 삼을 구입하기 위해 주말이면 끊이지 않고 방문객들이 천방농산을 방문한다. 특히 가을철은 삼의 효능이 가장 뛰어나다는 황절삼(잎사귀가 누르스름하게 변한 것) 수확기. 이에 맞춰 관광버스를 대절해 단체 로 찾는 이들도 많은데 현지 전문가들과 함께 숲속 삼밭으로 들어가 삼을 직접 캐보고 현장에서 구입, 생식도 한다. 천방농산은 최근 농림부로부터 주류제조 면허도 획득, 곧 장뇌삼 주도 생산할 예정. 또 여건이 허락되면 작목반과 함께 삼캐기 체 험과 현장 시식을 주제로 한 테마기행 상품도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천방산 일대의 장뇌삼은 택배(02-2109-6648)로도 판매중이며 상 품 한뿌리당 10만원에서 15만원 안팎을 받고 있다. 서천〓글·사진 이경택기자 ktlee@munhwa.co.kr #찾아가는길〓서해안고속도로 서천IC에서 나와 부여방향으로 우 회전, 약 10여분 직진하면 판교면 못미쳐 양문교회와 바로 옆에 천방농산 입간판이 보인다. 이곳에서 농로로 약 2㎞ 가면 된다. 100년 묵은 산삼을 캔 행운의 부부 2004/07/16 13:58
꿈 속에서 아버지가 가리켜 준 고향 산을 찾아갔다가 100년 묶은 산삼을 캔 행운의 부부가 화제다.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 사는 50살 김진세씨는 1일 아내 박원숙씨와 함께 고향인 경북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일월산, 꿈속에 아버지가 알려준 장소에서 캔 100년 묶은 산삼을 들고 있는 김진세씨(사진=경북매일신문 제공) 이날 김씨 부부는 산 중턱에서 1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산삼 1뿌리와 10년산 산삼 10여뿌리를 캤다. 김씨는 간밤에 아버지께서 꿈에 나타나 "네가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 일월산 어느 부근에 가면 산삼이 있으니 가 보아라"라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 김씨는 아버지 말씀에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으나 생시처럼 너무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이튿날 새벽잠을 깨자마자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출발했다. 김씨는 꿈 속에서 아버지가 일러준 지점으로 향하던 중 30분도 채 못돼서 산삼을 발견했다. [CBS포항방송 조중의기자]
끝도 없이 뻗어오른 활엽수림을 뚫고 한줌의 광선이 숲 속의 평화를 뒤흔든다. 광선은 나무의 흔들림을 따라 춤추고, 숲은 곧 바람과 햇빛이 만들어낸 빛의 파도로 넘실댄다. 그 즈음 빛의 산란(散亂)을 가르며 긴 여운을 남기는 외침 한 마디.
“심봤다!”
경춘 국도를 타고 남양주 시내를 지나 북쪽으로 20분쯤 비껴 달리면 마을 주민 모두가 산삼을 친자식처럼 기르며 사는 ‘산삼 키우는 마을’이 나타난다. 경기 남양주시 수동면 수산리. 30가구가 채 되지 않는 마을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뇌산삼(長腦山蔘·이하 장뇌삼)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이 마을에서 장뇌삼을 기른 지 15년, 이제 장뇌삼이 자신을 길러준 마을 주민들에게 큰 이익으로 보답하고 있다. 장뇌삼(山養蔘)은 천종(天種·자연 그대로의 산삼) 또는 지종(地種·산삼의 씨앗을 먹은 동물의 배설물 속에서 핀 산삼) 산삼의 씨앗을 채취해 깊은 산속에 파종한 뒤 7년에서 수십년 동안 재배한 것. 요즘은 산삼의 씨앗을 산 밖에서 재배한 뒤 묘삼을 깊은 산속에 이식함으로써 장뇌삼의 씨알을 굵게 만든다.
천마산과 축령산, 서리산, 주금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예로부터 산삼이 많이 나기로 소문난 지역. 지역 자체가 해발 800m의 고지대인 데다 주변에 인삼밭이 많아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해마다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의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 이곳은 옛 농서(農書)에서 말하는 천혜의 환경이다. 물이 풍부하되 습하지 않고, 숲은 서늘하게 음지를 드리우면서도 햇볕이 간간이 쬐는 ‘비습(非濕), 비양(非陽), 비음(非陰), 비한(非寒)’의 조건(임업십육지)을 모두 만족시키는 곳이 바로 수동면 수산리라는 것. ‘수동면’은 ‘물골안’이라는 옛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 산의 경사도가 알맞게 형성돼 물이 풍부하지만 고이지 않고, 활엽수림과 침엽수림이 8대 2의 황금비율로 섞여 있어 적절한 음지를 만들어준다. 북동향의 산은 아침 햇살이 잠깐 들어왔다 간 뒤 오후 햇살은 조금도 머물지 않아 음지식물인 산삼이 살기에 매우 좋은 조건이다.
해발 800m 산삼 재배 최적지
5월6일 이른 아침, 산삼 키우는 마을을 찾은 취재진을 마을의 촌장 격인 박동준 반장이 반갑게 맞았다. 박반장은 영농법인 남양주 장뇌삼작목반의 반장이자 대표이사로, 국내 최초로 장뇌삼 키우는 기술을 인정받아 올해의 ‘신지식인’에 선정된 인물. 산삼 키우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은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채비를 하느라 공사가 한창이었다. 박반장은 “장뇌삼을 심은 곳을 취재진에게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말을 꺼냈다.
“모두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못 믿더군요. 훔쳐갈 것이 걱정이지만, 이곳에 와서 장뇌삼에 그 어떤 비료나 농약도 치지 않은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 쓸데없는 오해도 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예 장뇌삼이 나는 곳을 등산로로 개발해 관광지화하기로 했습니다. 한편으로 아이들에겐 자연체험 학습의 장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모든 것을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박반장과 작목반이 장뇌삼을 심어놓은 곳은 천마산, 축령산, 서리산, 주금산 일대 50만평. 일부는 박반장의 사유지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빌린 산들이다. 얼마나 심어져 있느냐고 물었더니 엄청난 답변이 돌아왔다. “100만 주요.”
100만 뿌리. 모두 심은 지 7년에서 15년 된 장뇌삼이니 개당 10만원으로 잡아도 1000억원대가 넘는 어마어마한 물량이었다. 얼마나 투자했는지를 물었더니 담담하게 “30억원”이라고 답했다. 장뇌삼의 씨앗, 즉 종자 값만 한 되에 600만원이란다. 장뇌삼의 씨앗은 일반 인삼의 종자가 아니라 산에서 자란 산삼의 씨앗이기 때문에 값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게 박반장의 설명. 하지만 지난해 남양주 장뇌삼작목반은 장뇌삼을 팔아 주민들에게 2000만원씩의 일당을 나눠주고도 3억5000만원의 순수익을 올렸다. (계속) 꿩 배설물 이용한 ‘지종산삼’도 재배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장뇌삼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 산삼은 심산계곡에서만 난다고 했던가, 곧게 뻗은 활엽수림 사이로 간간이 새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숲 사이를 1시간가량 걸어 올라갔을까, 갑자기 작목반의 김학춘씨(37)가 큰 소리로 외친다.
“어, 산삼 밟았어요.”
아래를 보니 기자가 산삼을 밟고 있는 게 아닌가. 다급히 발을 떼고 자세히 보니 긴 줄기에 잎이 다섯 개, 거기다 막 하얀 꽃을 피우고 있는 게 산삼이 확실했다. 파보니 새끼손가락보다 약간 가는 8년근 산삼이 자태를 드러냈다. “심봤다”며 좋아하는 기자에게 작목반의 사람들이 옆을 보라며 가리켰다. 사방을 둘러보는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주위 반경 5m 안에 산삼 줄기가 수백 개나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이런 광경이 산에 올라가고 능선을 따라가면서 수백 곳이 더 나왔다. 산의 한쪽 귀퉁이만 돌았는데도 그 정도인데 4개 산에 흩어진 곳을 모두 돌면 100만 주가 있다는 게 거짓은 아닌 성싶었다. 그런데 7~8년 된 산삼을 캐면서 다른 것보다 눈에 띄게 작은 산삼을 발견했다.
“그게 바로 지종산삼이란 거죠. 여기 것들은 모두 꿩의 배설물에서 나온 조복(鳥腹)산삼으로, 사실은 우리가 꿩에게 산삼의 씨앗을 먹여 그 배설물을 묻어둔 것이지요. 조복삼은 묘종을 이식한 게 아니기 때문에 장뇌삼보다 작습니다. 그렇지만 희귀성으로 따지면 장뇌삼보다 높아 수십 배는 더 비싸죠.”
나중에 확인해보니 정말 산 아래 작목반 사무실 옆에는 커다란 꿩 사육사가 따로 있었고, 수백 마리의 꿩이 산삼씨를 먹고 배설물을 내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박반장과 작목반은 두 종류의 산삼을 기르는 것일까. 박반장은 “국내에서는 장뇌삼보단 조복삼을 더 고급으로 치는데 외국에서는 산삼도 큰 것이 대우를 받기 때문에 국내용은 조복삼으로 키우고, 국제용은 이식한 장뇌삼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장뇌삼의 경우 중국을 비롯해 캐나다, 미국 등에서는 비료와 농약을 쳐 장뇌삼의 부피를 크게 하는 경우가 많지만 남양주작목반은 ‘크기를 크게 하면서도 농약과 비료는 주지 않는’ 방법을 개발했다. 농림부가 남양주작목반의 장뇌삼에 친환경마크를 인증해준 것이나 남양주시가 이곳 장뇌삼을 특산물로 지정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 박반장은 “유혹은 있었지만 단호히 거절했고 외국산삼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산삼 재배지역을 관광지로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산에서 내려와 작목반의 온실에 가니 참나무 화분에 산삼 분재가 자라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산삼 분재’였다. 산삼 꽃과 열매의 화려함을 이용해 관상용으로 만들어낸 아이디어 상품. 이미 안면도 꽃박람회와 고양 꽃박람회에서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은 터였다.
국제적으로 우리 산삼의 효능을 인정받고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박반장과 남양주작목반은 장뇌삼 농사를 짓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미 경상도 일원을 제외한 전국(제주도 포함)에 남양주작목반을 벤치마킹한 장뇌삼작목반이 생겨났을 정도.
“최소한 산 1000평에만 장뇌삼을 길러도 억대 부자가 될 수 있는데 국토의 65%가 산인 나라에서 농민에게 국유림 빌려주기를 주저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박반장이 취재진에게 거듭 강조한 말에서 뒷북만 치고 있는 우리 임업정책의 현주소를 느낄 수 있었다. (끝)
”산삼은 캐고 싶다고 캘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찬찬히 살피면 산삼이 스스로 다가옵니다.”이번 산삼여행을 마련한 한상수 대전대 교수(민속학)는 거듭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조언했다. 한교수는 최근 신초(神草)로 불리는 산삼 캐기를 대중화하기 위해 ‘등산(山)도 하고 산삼(蔘)도 캐고’(대훈닷컴)를 펴냈다. 등산을 통해 체력을 기르고 어쩌다 산삼을 발견하면 부수입도 올릴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그런데 왜 욕심을 없애라는 걸까. 운만 터진다면 산삼 군락지라도 발견해 ‘인생역전’할 수 있을 텐데 어찌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욕심이 있어야 산삼을 캘 의욕도 생기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들이 들면서도 3년 만에 산삼 600여 뿌리를 캤다는 한교수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릴 수 없어 다시 물었다.
“근거 있는 말인가요? 괜히 하는 얘기지요?”
한교수는 대답 대신 씽긋 웃었다. 이번 산삼여행에 동참한 이는 모두 16명. 좀 많은 인원이지만 모두 대전 21C지구촌교회(목사 허광필) 신도들이다. 이 교회 장로인 한교수가 신도들과 우의를 다지기 위해 마련한 첫 여행에 기자가 객으로 끼어들었다. 이 모임은 앞으로 매달 1회씩 산삼여행을 마련할 계획이다. 한교수와, 대전에서 가장 큰 서점인 ‘대훈서적’을 운영하는 김주팔 사장 등 서너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산삼 채취 경력이 없는 이들.
“캐고 싶다고 캘 수 있는 게 아니지…”
혼자 산삼을 캐러 간다면 나침반, 휴대전화, 물, 소금, 카메라, 장갑, 등산용 지팡이, 모종삽, 칼 그리고 산삼을 안전하게 옮기는 데 쓸 신문과 아이스박스 등을 챙겨 가야 한다. 그러나 기자는 넘치는 의욕만 갖고 맨몸으로 따라 나섰다.
6월14일 새벽 6시 대전을 출발한 일행은 소백산 자락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산삼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좋기는 좋습디다. 오줌발 하며, 몸에 기운 도는 게 확 달라집디다.”
“저는 오래 앓던 통풍을 고쳤고, 아내는 관절염을 고쳤습니다.”
찻길 가 야산에는 눈꽃 같은 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날이 맑아 산삼 캐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그런데 가는 길에 작은 교통사고가 났고, 길을 잃고 헤매는 시간이 많아 예정보다 2시간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행은 그것을 액막이로 여기고 싶은 눈치였다. 초행자들이 산삼을 캘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생각으로라도 가능성을 높이고 싶은 심사였을 것이다.
목적지에서는 한교수와 친분이 있는 심마니 김정식씨(53·가명)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와 부인 정희자씨(45·가명)는 채삼을 시작한 지 4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수십년 경력의 심마니 못지않은 능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실직의 고통에 빠져 있던 이들이 우연히 산삼을 캐기 시작하면서 삶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지난해 김씨 부부는 산삼을 캐 5000만원이 넘는 소득을 올렸다.
이날 산삼을 캐기로 한 산은 김씨 부부의 ‘농장’(산삼을 캔 장소를 이르는 심마니들의 은어로 보통 한 번 발견하면 6년 정도 계속 채취한다고 한다)으로 부부는 이날 자식들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장소를 우리 일행에게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산삼을 매개로 김씨 부부와 오랫동안 교유해온 한교수 덕분이다.. (계속)
그런데 놀랍게도 심산유곡이 아니라 야산이었다. 논과 잇닿은 야트막한 산에 무슨 산삼이 난단 말인가. 혹시 산삼 씨를 인위적으로 심어둔 장뇌삼밭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의심은 한교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풀렸다.
한교수와 김씨에 따르면 산삼 자생지는 과거의 인삼 경작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깊은 산 속에서 산삼의 씨가 떨어져 자란 천연 산삼인 천종(天種)은 거의 멸종 상태다. 한국전쟁 이후 무차별하게 이루어진 벌목으로 산삼이 자생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 심마니들이 발견하는 산삼은 사람들이 재배한 인삼의 씨가 까치나 꿩, 비둘기 등에 의해 전파된 것이라고 한다. 인삼은 파종하기 전에 단단한 인삼 씨의 눈을 틔우는 개갑(開匣) 과정을 거치는데, 새들의 배설물에 섞인 인삼 씨는 스스로 발아해 싹이 터 자생하게 되는 것.
따라서 산삼은 새가 많이 찾는 떡갈나무 등 활엽수 근처에 뿌리내리는 경우가 많다. 마을 주변의 논밭에서 먹이를 찾아 먹는 까치나 꿩, 비둘기 같은 산새들의 행동반경이 2km 안팎이라고 하니 당연히 산삼 자생지는 야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산삼은 심산유곡의 인적 드문 곳에서 나고, 발견하기도 무척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은 심마니들이 산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과장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직도 깊은 산에 천종 산삼이 있을 수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산삼은 야산에서 발견됩니다.” 산에 오르기 전 한교수와 김씨는 산삼을 발견하기 위한 기본적인 지식들을 일러줬다. 우선 경사가 15도 이하인 산의 북쪽 사면 3~5부 능선, 시원한 바람이 볼에 와 닿는 곳을 유심히 살피되 해를 등지면 잘 보이지 않으므로 해를 바라보며 갈 것.
이전에 심마니들은 산에 오르기 며칠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근신했다. 하찮은 미물도 살생하지 않고, 금주하며, 초상집 음식도 먹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런 금기를 잘 지키지 않는다. 산을 제대로 타려면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므로 삼겹살이나 추어탕, 혹은 비린 음식까지 먹는 이들도 있다. 다만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침착하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지금도 중요한 지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활엽수 주변 경사지고 편편한 곳에서 발견
설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사뭇 긴장한 듯했다. 정말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고,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심마니들의 대장 ‘어인마니’가 된 한교수는 심마니들처럼 규칙을 정했다. 이날은 산삼을 먼저 발견한 사람이 독차지하는 ‘독메’ 방식이 아니라 고루 나눠 갖는 ‘원앙메’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밖에서 볼 때는 그저 그런 야산이려니 했는데 산 숲에 안기자 의외로 험했다. 방향감각을 잃을 정도로 숲이 깊었다. 긴 소매 웃옷과 긴 바지를 입었지만 덤불가시가 옷을 뚫고 들어왔다. 온몸에서 후텁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일행은 고작 10여m씩 떨어져서 훑어 올라갔지만 금세 주변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갑자기 숲 속에서 튀어나와 나한테 달려들 것만 같았다. 나는 조그만 동물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흠칫 놀랐다.
30여분이나 지났을까. 멀리서 한교수가 소리를 질렀다.
“정기자~!”
산삼을 발견한 그가 “심봤다!”고 외치는 대신 나를 부른 것이다. 일행에게 산삼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야 하니 나를 부르라고 부탁해뒀던 터였다. 너무 빨리 산삼이 ‘다가와’ 잠깐 싱겁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소리나는 쪽을 향해 뛰었다. 산삼을 발견한 이는 심마니 정씨였다. 그는 산삼 캐는 일을 한교수에게 맡겨두고 계속 산을 올랐다. 역시 전문가답게 그는 산의 생김새며 바람의 방향 등을 따지며 산삼이 자생할 만한 위치를 찾는 데 탁월한 감각을 보여줬다. (계속)
산삼은 활엽수 주변 약간 경사지고 편편한 곳의 부엽토에서 나와 우뚝 솟아 있었다. 30cm 정도의 줄기에, 5개의 잎을 단 가지가 3개. 한교수는 뒷주머니에 넣어뒀던 모종삽을 끄집어내어 산삼 주변을 둥글게 판 다음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손으로 흙을 덜어냈다. 잠시 뒤 산삼이 그 완전한 형체를 드러냈다. 27년근으로 평가됐다. 한교수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산삼을 흔들어 보였다. 모여들었던 이들은 넋을 잃고 바라봤다. 한교수는 산삼을 캔 자리를 다시 흙으로 메우고 표시 나지 않도록 그 위를 부엽토로 덮었다. 그것이 산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그때 내 마음속에서 거대한 욕심덩어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어차피 심마니의 농장이라면 이 산 어딘가에 몇 뿌리는 더 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서 기운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눈에 핏발이 섰다.
이상하게도 욕심이 앞설수록 자꾸 다리가 휘청거렸고 잡초들이 산삼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실물 크기의 산삼 사진을 들고 비교해봤지만 숙맥(菽麥)을 구별 못하는 사람처럼 참나무 순이나 산나물을 산삼인 줄 알고 캐기 일쑤였다.
다시 “정기자” 하고 부르는 메아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쪽으로 올라가자 정씨가 손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산삼이었다. 그 잎이며 줄기가 어찌나 예쁘던지. 발견한 것은 정씨였지만 캐는 것은 내가 맡기로 했다. 첫경험이었던 탓일까. 조심스레 흙을 파내는 데 너무 긴장돼 손이 떨렸다. 산삼은 실뿌리 하나라도 훼손되면 그 가치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동행했던 정우일씨(한국양명회 이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마무리작업을 했다. 7년근. 기대보다 어린 산삼이었지만 캤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자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욕심은 더 커졌다. 산삼을 캐고 사진도 찍었지만 내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는 사이 혼자 어딘지 모를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방향을 가늠해보려 했지만 나침반도 없고, 나무들이 하늘을 덮어 해도 보이지 않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시원한 바람이 뺨에 와서 닿는 곳을 찾으라”고 했던 한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경사진 비탈로 올라가다 미끄러지고, 가시덤불에 옷이 찢겼다.
한참을 올라가다 소나무들 사이에 있는 잎 넓은 뽕나무를 발견했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었다. 머리 끝이 쭈뼛해졌다. 무언가 있을 듯했다.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산삼은 결코 내게 ‘오지’ 않았다.
산삼 잎에서도 달콤쌉싸름한 향기 진동
입산한 지 3시간. 하산하자는 일행의 전화가 걸려왔다. 일행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포기하고 산을 내려갔다. 다른 계곡으로 정씨를 따라간 이윤수씨(44·건설업)가 30년근 산삼을 캤다고 좋아했다. 정씨가 이씨에게 떡갈나무 근처에서 찾아보라고 조언했고, 이씨가 어린 산삼 두 뿌리를 발견했다. 정씨는 줄기를 건드리지 않고 잎만 살짝 따고는 산삼을 캐지 않았다. 줄기를 건드리면 수년간 휴면삼이 되어 지상으로 줄기가 올라오지 않기 때문. 그 근처에서 이씨가 30년근을 발견한 것이다.
“정말 짜릿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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