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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4월26일(화)맑음
강변산책 나가다. 찰나생멸하는 citta에서 불변하는 동일성의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는 모두 존재를 붙잡고자하는 욕구(有愛, bhavatanha, craving for being or existence)이다. 왜 생멸하는 마음을 그냥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으로 받아드리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 배후에 무엇인가 ‘안 변하고 영원히 나의 것, 내 편으로 남아 있을 무언가’를 꾸며내어 항상 그대로 있을 것이라 믿고 싶은가? 그러기에 또 이런 질문을 한다. 찰나생멸 한다면 업은 어디서 효력을 발생합니까? 업은 어디에 끼어 있다가 나와 찰나생멸에 개입합니까? 찰나생멸하는 자체가 바로 업, 원인과 결과이다. 전 찰나가 있으므로 후 찰나가 있다. 전 찰나가 없으면 후 찰나가 없다. 전 찰나가 일어나므로 후 찰나가 일어난다. 전 찰나가 사라지므로 후 찰나도 사라진다. 전 찰나와 후 찰나는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현상이다. 그러기에 악한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선한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하려면 선한 생각을 이어나가면 되고, 불편하게 그대로 지내려면 악한 생각을 이어가면 된다. 선한 마음, 악한 마음이 찰나 생멸하며 그에 따르는 결과를 가져온다. 찰나생멸이 곧 업의 발현이다. 그러므로 의상대사의 일승발원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티끌 같은 한 생각으로 佛事를 이루어내듯 생각 생각에 그러하기를,
한 가지 不善法을 끊음으로 모든 불선법을 끊고,
한 가지 善法을 이룸으로 일체의 선법을 이루기를.
如一念塵作佛事, 一切念塵亦如是;
諸惡一斷一切斷, 諸善一成一切成.
찰나생멸하는 마음을 활용하여 큰 선법을 이루어내라는 것이 부처님의 진의이다. 마음의 실체를 찾는 것은 애초에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있는 마음의 작용을 선용하여(善用其心) 고통을 떠나 안락하게 살라는 것(離苦得樂)이다. 이런 대화를 나누며 대숲 길까지 걷다.
도향스님이 점심을 잘 차려줘서 함께 먹고 시장 보러가다. 전기스탠드를 사고 이마트에서 채소꺼리를 사다.
2016년4월27일(수)비
하루 종일 봄비가 추적추적. 점심 먹고 도향스님과 시장보다. 스님은 주방기구 도매점에서 중국식 요리 칼과 후라이팬을 사다. 체육사에서 간편 철봉을 사다. 문아보살의 외숙모인 묘인보살이 저녁 공양을 대접한다. 도향스님 수요강의 하시다.
2016년4월28일(목)흐린 후 맑아짐
아침 7시 고속버스 타고 서울 오다. 민족사 방문하여 사기순 편집장과 최윤영 편집위원과 이야기 나누다. 재판 찍을 준비하기 위한 교정과 표지 디자인에 대해 상의하다. 설연화보살과 창경궁을 산책하다. 지월거사 댁에 와서 저녁 먹고 쉬다.
‘좋은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안개 자욱한 들판에서 삽시간의 황홀을 기다리는 즐거움도 잊어야 한다. 칼바람 견디며 오름에서, 바다에서, 가쁜 숨을 참은 뒤에만 느낄 수 있는 행복도 이제는 추억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카메라를 잡을 수 없는 사진가의 삶은 날개 잃은 새의 운명처럼 시련의 연속이다. 폭풍 치는 바다에서 날지 못하는 새는 내일을 기약하기 힘들다. 새는 더 이상 짙푸른 하늘을 꿈꾸지 않는다.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는 사진가는 고민하지 않는다. 눈,비, 바람, 구름, 안개에 마음이 달아오르지 않는다. 편안하게 바라보며 잃어버린 것보다는 얻은 것을 생각하며 미소 지을 뿐이다. 이제 마음으로만 숱한 사진을 찍는다. 절망하자면 한없이 절망스런 상황이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건강이 악화될수록 행동반경이 점점 좁아지고 지나온 세월을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진다.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거부하지 못할 것이 과거의 추억이다. 내 앞에 펼쳐질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피하려야 피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인정하고 끌어안으면 또 다른 길이 보일 것이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사진/글에서
제주도에서 생을 마친 사진작가 김영갑은 말년에 루게릭 병을 혼자 앓으면서 제주의 아름다움에 빠져 찰나의 황홀을 찾다가 죽었다. 김영갑(1957~2005)이 죽기 전에 세운 두모악 갤러리는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437-5에 있다.
학생에게 줄 법명을 생각하다. 荷淨하정-연꽃처럼 맑게, 硏耕연경-돌을 갈 듯, 밭을 갈 듯.
敬正경정-팔정도를 공경스럽게 닦는다.
2016년4월29일(금)맑음
양재천 산책, 지월거사와 함께.
春宵淨微笑; 춘소정미소
綠陰淸暎楚. 녹음청영초
봄 하늘은 맑은 미소 같아,
푸른 나무그늘
지나는 사람의 그림자도 물들어 청초하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과 ‘한시 미학 산책/정민 지음’을 이야기하다.
<사보아야 할 책>
시냅스와 자아-조지프 르두 지음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데이비드 로이 지음, 허우성 옮김
한시 미학 산책-정민 지음
제따와나 선원 초기불교대학에서 자애관과 통렌에 대해 강의하다. 일묵스님의 명품불교에 대해 공감하다. 정념samma-sati를 ‘바른 기억’으로 해석해야 학습learning과 훈련training으로 곧 수행이라고 받아들여지며 이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임을 이해하게 된다. 일묵 스님은 현대 뇌신경학과 뇌생리학을 아우르는 neuroscience와 기억을 결부시켜 이해하는 프레임을 구상한다. 그의 관점은 수행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작업이다. 나는 스님의 견해에 동감하고 찬탄했다.
2016년4월30일(토)흐림
아침에 양재천 산책하다. 아파트 벤치에 앉아 지월거사와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거사는 이하준의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를 읽고 느낀 것을 말한다.
사람은 저절로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아니라 ‘제 힘으로 돌아가는 둥근 바퀴’이어야 한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여기에서 cogito에 방점이 찍히느냐, sum에 방점이 찍히느냐가 문제이다. cogito사유하다, 생각하다, 회의하다에 방점이 찍히면 citta의 기능으로 전향하여 이해하는 것으로 착안할 수 있다. 그러면 citta로 이해된 cogito는 선법을 증장하는 토대와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sum에 방점이 찍히면 atta자아의 존재 근거를 찾았다고 안심하고 거기에 안주하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오취온을 자아로 움켜쥐면서 아견을 조장하게 만든다.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존재하려는 욕망'을 알아차려라. 존재하려는 본능적 충동에서 야기되는 강박과 불안에서 벗어나라. 존재being보다 과정process에 눈을 돌려라. 그것은 cogito에서 samma-sati로 전향할 때 이루어진다. 이렇게 될 때 bhavana와 sikkha가 가능해진다. 방법론적 회의는 교학연찬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도향스님은 ‘부처님을 믿지 말라. 의심하고 의심하여 의심이 다해, 과연 그렇다고 판단될 때까지 들은 것, 배운 것을 믿지 말고 분석하고 사유해서 이해하라.’고 하였다.
각자는 자신의 몸과 정신의 주권자이다. 각자는 자기의 의지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각자는 자기 방식의 리듬과 감각에 따라 삶의 춤을 추고 있다. 그의 삶은 그가 추는 춤이다. 자신이 안무하고 실연하여 그 결과를 스스로 향수한다. 이것이 kammasakata이다. 업은 자신의 재산이다. 자신이 자기 업의 주인이다. 짓는 자가 지은 대로 받는다. 자업자득이다. 이렇게 보면 개인은 제 마음 가는대로, 그게 선이든 악이든 가리지 않고 해도 된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만약 지옥에 갈 업을 짓고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괘의치 않겠다며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쿠데타를 일으켜 몇 천 명의 시민을 살상하고 정권을 탈취한 사람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가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말거나 그건 그 사람의 자유이고, 그 사람의 업이니 그의 업에 맡겨놓자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는가? 제가 지옥 갈 업을 지었으니 살아있는 동안 그 죄를 물어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아도 죽으면 지옥 갈 테니까 그대로 놓아두자고 할 수 있는가? 죄를 짓는 것은 그의 자유이지만 그 죄악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간접으로 악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악행을 통제하거나 제압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방조하거나 협조하면 그의 죄악에 공범자가 된다. 이것을 '공동의 업'이라 해서 <共業공업>이라한다. 한 사회가 민주적인지 아닌지, 합리적인지 아닌지, 건전한지 아닌지, 살만한지 아닌지는 그 사회구성원의 공업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건전한 사회적 환경도 중요하다.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이익이 상충될 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말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ewart Mill의 관점은 아주 유용하다.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되 사회의 공공선을 동시에 지향해야 된다는 것이 公理主義공리주의이다. 자업자득의 業自性正見업자성정견은 공리주의와 상보되어야 빛을 발한다.
사람은 습관에 의해서 완성된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덕스런 행동의 반복이 그 사람을 만들어 간다. 여기에서 학습과 훈련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을 교육이라 한다. 교육은 점수漸修이다. 수행의 진보가 급진적일 수 있어도, 결국 덕스런 행동을 훈련해야 한다.
모든 욕망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면해야 한다. 그것이 성취되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에피쿠로스 <단장>
명상 모임 갖다. 지호와 지호와 같이 온 분, 민음사 편집위원, 이미현, 최윤영이 참석했다.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호흡명상을 안내하다. 차를 마시며 마음 나누기 하다. 끝나고 인사동 한국미술관 들렀다가 진주로 내려오다.
2016년5월1일(일)맑음
밴쿠버 공공도서관과 시애틀 공공도서관에 붓다프로젝트 기증하길 원한다고 이메일 보내다.
알라딘에 책 주문하다. 여러 스님들께 붓다프로젝트를 보낼 생각이다.
산청 대성사에서 개를 데리고 경호강변을 산책하다. 신입생 모집에 대해서 생각하다.
2016년5월2일(월)맑음
죽향에서 회장단 모임 갖다. 초심반 모집과 홍보, 명상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 도향스님이 월요 강의하다. 마치고 공지사항을 전할 사이도 없이 흩어져서 뭔가 마무리가 안 된 듯 찜찜하다. 학원을 마치자마자 흩어지는 느낌이다. 법우들 사이의 친목을 도모할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 그리고 도과선원이 자기들이 만들어가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공부모임이 자기들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이 왔다가는 손님처럼 되어버린다.
2016년5월3일(화)흐림
어젯밤 비가 세차게 내렸다고들 한다. 한차례 센 비의 세례를 받은 풍경은 봄이라 하기엔 너무 성숙해졌다. 그래도 ‘늙은 봄’이라 할 수는 없으리라. 봄에다 ‘늙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기에는 어쩐지 어색하기에. 이젠 초여름의 길로 들어가는가, 그렇지만 그렇게 쉽게 들어가선 안 되지. 때가 5월이니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변해가는 과도기며 전환기라. 봄을 지켜야 하는 관점에서 보면 가는 봄을 아쉬워하니 ‘과도기’라 하고, 여름을 기다리는 관점에서는 봄이 빨리 가고 새것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환기’라 한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5월은 달리 정의된다. 목하 5월은 봄에서 여름으로 변해가는 정치적 여울(灘)을 지나고 있다.
‘있다’는 무슨 말인가? 그건 주관이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순간적으로 정지시킨 가상의 일점에서의 서술이다. 슬로비디오를 정지한 순간 그때를 ‘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있다’란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을 포괄한 현상전체를 아우르고 뭉텅거려 나타낸 낭만적 언어표현이다. ‘있다’는 ‘모두 함께 널브러져 이렇게 있다’는 말이다. 만물이 함께 ‘있다’라는 현상에 동참하고 있으니 ‘있다’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모든 게 ‘있다’에 포섭되는데 굳이 ‘있다’라고 말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닌가? 뭐 하러 ‘있다’라는 말을 쓰는가? 말하자면 ‘있다’는 것일 뿐, 별 다른 기특한 ‘있다’는 없다. 이러히 '있다'라는 말은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안개비이다. 안개비는 사물의 윤곽을 흐리게 하여 생겨난 그 모호한 여백에 불안한 마음을 잠시 쉬게 만든다. ‘있다’는 ‘없어지면 안 된다’는 불안한 마음이 잠시 쉬는 휴게소이다. 휴게소에서 오랫동안 쉴 수는 없다. ‘있다’는 곧 휘발되고 무효화된다. ‘있다’를 떠받치고 있는 토대가 있는가? 다만 안개에 싸인 공간, 그 혼몽한 배경을 ‘있다’의 토대로 삼을 수 있을까? ‘있다’의 원인이나 근본이 찾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거기에 머물지 못한다. 우리는 ‘있다’에 머물 수 없고, ‘있다’를 잡을 수도 없다. 그러면 안개비에 젖지 않은 명료하고 투명한 ‘있다’를 가정해볼 수 있는가? 있는 그대로의 ‘있다’를 볼 수 있는가? 그러려면 안개가 말끔히 걷힌 맑은 날 다시 봐야한다. 모든 풍경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맑은 날은 언제인가? 그날 그걸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만 ‘볼 뿐.’ 보이는 대로 보이고, 보고자하는 대로 보일뿐이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의 토대와 근원은 없다. 보이는 것에서 실체를 찾지 말고, 보는 것에서도 실체를 구하지 말라. 그런데 무슨 말이 이리 긴가?
바람에 색깔이 있는가? 밤은 무겁게 가라앉아 어둡고, 낮은 가벼이 떠서 밝은가? 보수保守는 심해를 헤엄치는 가오리이며 진보進步는 수면으로 활강하는 날치이다. 이런 말놀이는 여가에 나누는 차담꺼리이다. 말과 글로써 하는 유리알 유희Glasperlenspiel는 소통과 공감을 위한 도구로서 사람과 사람, 뇌회로와 뇌회로, 가슴과 가슴을 통하게 해준다. 이렇게 하여 문화적 유전자meme가 교류되고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 형성되고 공진화co-evolution가 이루어진다.
사진으로 촬영한 탕카(탱화Thanka)를 출력하러 가다. 간 김에 초심반 홍보용 포스터도 주문하다.
2016년5월4일(수)맑음
아침 먹고 대구 관오사 가다. 스리랑카 비구 담마끼띠(다르마키티Dharmakirti)와 왕기사Vamgisa가 찾아오다. 평택에 스리랑카 노동자를 위한 법당을 개설하여 포교하는 중이라 한다. 담마끼띠는 동국대에서 중론을 연구하여 박사학위을 취득했다. 대단한 일이다. 상좌부 출신 스님이 대승불교의 백미인 중론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땄다고 하니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스님은 40대의 젊은 나이로 총명한 기운이 눈에 서렸다. 스리랑카에서 일어나 흥왕했다가 사라진 대승의 역사를 물어보고 답하는 사이 영겁의 시간이 흘러간듯.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헤어지다. 오후에 대구불교방송으로 가서 붓다프로젝트를 낭송하며 녹음했다. 진주로 돌아오다. 저녁에 도향스님 수요강의 하시다. 윤회의 고통 말씀하시다 눈물을 흘리신다. 어떤 스님은 아홉 살 때 ‘아, 내가 잘못 태어났구나. 아, 이 윤회 속에 빠진 내 인생을 어찌하랴!’고 탄식하면서 베개가 적시도록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무지한가, 그 나이 때 나는 철부지처럼 시냇가에서 놀고 학교에서 공부 잘한다고 칭찬 받으며 천지도 모르고 살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의식이 깨어나는 정도가 이렇게 수준 차가 난다. 그는 이미 아홉 살의 나이에 윤회를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나는 스무 살에 겨우 불교에 뜻을 세우고 출가할 결심을 했으니. 그런데 출가한다고 윤회에 벗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어떻게 바른 견해를 세우고 그에 따라 수습하느냐가 문제이다. 그는 머리털이 빠지도록 지관을 수습하여 견해를 정립하였으니 나의 스승이다.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시는 것이 자세하고 정확하다. 그런데 학생들은 그들의 가슴 속에 어느 정도 깊이 새겨들었을는지 알 수 없다. 황금 같은 가르침이 눈앞에 주어지는 데도 눈이 어두운 사람은 보지 못하고, 손을 내밀지 않으면 받지 못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법문을 새겨서 가슴에 담아 자기 것으로 가져가는 사람은 한 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만큼 귀하고 소중한 인연이라는 뜻이다. 학생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 도향스님과 여운의 감상과 학생들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하며 생각하다.
2016년5월5일(목)맑음
아침 도향스님과 남강변 산책을 나가다. 천수교 다리를 지나 대숲 길을 돌아서 오다. 죽향에 불교학생회 후배인 전영효 일행이 유람하는 중에 나를 만나러 왔다. 하루가 이렇게 갔다. 홀로 고요한 밤을 즐기다.
새길교회 정경일 목사의 글모음을 읽다. 제도화한 기독교 테두리 안에서 탈영토화한 유목민 정신으로 예수의 길을 모색하고 인도하려는 자상한 마음 씀을 본다. 전통과 권위의 눈 밖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진보적인 입장을 관철하려는 시도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왜 그렇게 눈치를 보는가? 그의 설교는 이단이라고 찍힐까봐, 바이블에서 벗어난 말을 한다고 비판받을까봐 얇은 얼음을 밟고 가듯이 그 문장과 행간이 조심스런 스텝과 유화적 표현으로 채워져 있다. 진리에 정직하고, 사실에 솔직하면 될 텐데, 왜 신에게 직접 묻지 못할까? 신이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실재 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집단의식의 투사입니까? 왜 우리에게 신의 존재가 필요한가? 신이 우리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 신이란 관념인가, 실재인가, 상징인가? 신은 존재이유를 물을 수 없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면, 왜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자족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인간을 만들어 내고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는가? 그렇다면 신이 홀로 있음에 뭔가 결핍을 느꼈거나, 무료하거나, 장난기가 발동하여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닌가? 신은 원인도 없고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존재라 한다. 그런데 세상에 원인 없이, 구성요소가 없이 존재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신은 완전한 무Nothing-ness이기에 원인 없이 구성요소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세상만사 잡다한 것들이 모두 ‘완전한 없음’에서 나왔단 말이다. 그렇다면 ‘완전한 없음’은 벌써 진짜 ‘없음’이 아니라 만물 생성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며 근원이며 바탕이 된 것이니 하나의 ‘있음’이라고 해야 하리라.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완전한 무’는 이름만 있지 실체를 잡을 수 없다. ‘완전한 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무’로서 신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혀 불필요한 사족이다. 인간의 뇌신경회로가 조작해낸 집단적인 망상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신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인간지성의 패배요, 불안한 인간을 위한 자기위안이 아닌가? 이런 소리를 들으면 크리스천은 불쾌하고 불안하며 혼란스러울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신의 눈에 미쁘게 보이기 위해서 선하게 살아갈 것이니 나름대로의 도덕적으로 유익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하다. 그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들의 믿음을 이해하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수 있어야(易地思之) 한다. 불교와 기독교가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 알아야 한다. 나의 거울에 비친 상대를 보고 나를 알 수 있기도 하지만, 상대의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얼굴을 볼 때 자신을 더 잘 알 수도 있다. 크리스천은 부디스트Buddhist를 어떻게 볼까? 그들은 우리와 자기들이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 과연 알고 있을까? 그들도 불교를 배우고 익히고 있다고 한다. 더블빌롱잉Double-belonging이라는 풍조가 있다. 크리스천-부디스트, 부디스트-크리스천이 그들이다. 기독교와 불교 두 가지를 동시에 믿고 배우며 수행한다는 미국과 유럽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주로 틱낫한(베트남의 고승)을 따르는 사람들이거나 티베트불교의 세례를 받은 기독-천주교도들이다. 구미의 주류종교인 기독-천주교에서 약간 이탈한 사람들이 불교 쪽으로 살짝 발을 들여놓아 양다리를 걸친 분들이다. 이런 흐름이 유일신종교와 무아와 연기론적 종교 간의 차이를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宥和유화appease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돌연변이mutation가 생겨날 수 있고, 새로운 변종hybrid이 나올 수도 있다. 종교 간의 교배현상crossing-over과 과학주의가 결합하여 생겨날 뉴에이지New-Age 종교는 21세기 말이나 22세기의 새로운 종교 트렌드가 될 것이다.
첫댓글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다. 오로지 순수하게 법들이 일어날 뿐이다. 찰나생 찰나멸이다. 연속되나 동일하지 않다. 인과만 있을 뿐이고, 절대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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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double belonging 그거만 해도 대단한 일이지요. 이게 모두 소통과 공동지성을 향해 사회가 유연해지고 관대해져가는 lenient 징조가 아닌가요.
예 스님~ (홍세화가 '파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말하던 tolerance를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스님 변덕스런 날씨에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일상에서 생각없이 행했던 말과 해동들이 무지의 극치였음을 깨닫게됩니다 사유하고 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도과선원에 발을 디딘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