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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주일) 에스더 9:20~10:3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 날’
오늘은 에스더 9장 20절로 10장 3절 본문을 중심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 날’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 날’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부림일 혹은 부림절입니다. 부림(Purim)이란 히브리어로 ‘제비뽑기’를 뜻하며, 하만(Haman)이 유대인을 학살할 날짜를 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은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유다 백성은 하만이 ‘부르’(제비)를 던진 것을 본따서 이 날을 ‘부림’(부르의 복수형)이라 불렀고, 후에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공식적으로 ’부림절‘로 명명하여 칙령으로 공포합니다. 부림일(Purim)은 유대교의 명절로, 이 날은 페르시야 제국에서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음모가 좌절되고, 유대인들이 구원받은 것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하만의 계획대로라면 아달월 13일은 유다인들을 몰살시키고, 그 재산을 모두 빼앗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유다인들이 그들을 이유없이 미워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슬픔이 기쁨으로, 초상집이 잔칫집으로 바뀐 날입니다(22절). 왕후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아달월 14일과 15일을 부림일로 정해 기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승리를 기념했다면 아달월 13일을 기념했어야 합니다. 13일이 바로 하만이 유다인을 전멸하기로 제비뽑은 날이기 때문입니다(에3:13). 그러나 그들은 13일이 아닌 14일과 15일을 부림일로 정합니다. 대적에게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지 않고, 원래 전멸되어 슬퍼해야 할 그날이 기쁨으로 바뀐 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틀동안 계속되는 부림절은 유다 사람으로서는 거를 수 없는 명절이 되고, 자손에게도 잊어서는 안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달월 14일과 15일은 당시 페르시아에 살던 유다인들에게는 제2의 생일이자 새해가 시작되는 설날과도 같은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날을 그들은 혼자서 즐거워하지 않고, 잔치를 열어서 음식을 함께 나누고, 서로 선물을 주어서 의미를 되새기며,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날로 삼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 날이 공동체의 날이 되고, 민족의 명절이 되었습니다.
부림절은 현재도 아달월 14일에 지켜지고 있으며 13일은 에스더의 금식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부림절이 되면 이 에스더서를 읽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절기를 지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우리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념하고 구원의 은혜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곧 우리가 지켜야 할 절기, 곧 예배 입니다. 부림절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100% 죄인으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것입니다.
한자의 사자성어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있습니다. ‘전화위복 (轉禍爲福)’이란 사자성어인데요. 이 뜻은 "재앙이 바뀌어 복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어려움이나 불행이 오히려 좋은 결과로 이어질 때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슬픔이나 고난이 결국 기쁨이나 축복으로 변하는 상황과 잘 맞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도 고통과 슬픔을 기쁨과 위로로 바꾸시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묘사합니다.
1) 요한복음 16:20 (개역개정)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가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으로, 그들의 슬픔(예수님의 죽음)이 결국 기쁨(부활)으로 변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려면, 우리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9:20~28).
모르드개는 하만의 계략으로 민족 전체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지만, 그 당시 왕후인 에스더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에스더 4:14).
에스더가 에스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곁에 모르드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스더는 포로민의 딸이었고, 부모마저 없었습니다. 그러했던 그녀가 귀족의 딸만이 될 수 있었던,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 페르시아 아하수에로왕의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지만, 모르드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신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가 처음부터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사는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의 담대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궁궐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로 말미암아 아하수에로왕에게 나아가면서, 3일 금식도 하고, “죽으면 죽으리라”의 각오도 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어 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모드드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신뢰했습니다.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줍니다. 또한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요청에 에스더와 유다인들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스더 4:16) 이 구절은 에스더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에 나아가기로 결단하며, 금식과 기도를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이는 그녀의 믿음과 용기를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모르드개의 믿음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경건한 습관들이 있지만,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어떻까요? 습관적인 기도를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다니엘인데요. 다니엘의 습관적인 기도는 그의 신앙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의지를 반영한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본질과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가 그의 일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서 6:10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문에서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습관적 기도의 특징은 1) 정해진 장소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집 윗방에서 늘 기도했습니다. 이는 그가 고정된 기도 장소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2) 정해진 방향입니다. 그는 늘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을 기억하며 기도한 것을 의미합니다(역대하 6:36-39). 3) 정해진 시간입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 기도했습니다. 이 일정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그가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다니엘은 왕의 금령을 어길 경우 사자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기도 습관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의 기도가 단순한 습관적 행위가 아니라 신앙의 표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전에 하던 대로"라는 표현은 그의 기도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꾸준한 삶의 방식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기도 중에 감사, 회개, 간구로 기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운 상황이나 결정의 순간에는 금식기도를 실천해보는 것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금식기도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의지하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
에스더는 유다 민족이 페르시야 제국의 권력 속에서 전멸의 위기에 처하자 모르드개의 제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중보기도와 금식을 부탁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으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갔습니다(4:16). 에스더는 왕비로서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녀의 진정한 사명은 자신이 아닌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고 또한 그렇게 실천했습니다. 에스더는 두려웠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자기 능력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와 금식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에스더가 민족을 구하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에스더의 믿음과 순종은 하만의 음모를 무너뜨리고 유대 백성을 구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22절에 유대인들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부림절을 제정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날을 기쁨과 감사의 날로 삼고, 서로 음식을 나누고 가난한 자를 돕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기념하는 삶은 단순히 감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고 그 기쁨을 확산시키는 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큰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적용) 나를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믿습니까? 나는 구원받은 기쁨으로 공동체와 이웃을 잘 섬기고 있습니까?
2.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9:29~32).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부림절을 통해 유대 민족에게 일어난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도록 명령합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 뒤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부림절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승리한 날이 아니라, 온 백성이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경험한 날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또한 우리의 교회 속에 행하신 일들을 기념하며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분의 구원의 사역을 되새기기개신교회에서 대표적인 절기를 지키는 이유 위함입니다. 이러한 절기들은 단순한 전통적인 행사나 기념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믿음을 새롭게 다지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절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대표적인 개신교 절기로는 성탄절과 부활절과 감사절이 있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이 날의 의미는 예수님의 탄생이 나의 삶과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묵상하며 구주로서의 예수님을 더 깊이 받아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부활절은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사건을 기념하며, 생명과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부활절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도 부활의 새 생명 가운데 살겠다는 결단의 시간이 됩니다. 감사절은 추수한 것을 감사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물질적 풍요뿐 아니라 영적인 축복에 감사하며, 감사의 삶을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렇듯 기독교의 절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단순히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믿음을 다시 점검하고 새롭게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또한 부림절 제정을 통해 이 구원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하라고 강조합니다(31절). 이는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도록 하는 중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 일은 단순한 전통을 넘어서 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일입니다. 믿음을 후대에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입니다.
신명기 6:6-7에서 모세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이 말씀은 믿음의 전수가 단순히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임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다음 세대가 인생에서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 영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잠언 22:6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는 어린 시절에 받은 신앙 교육이 평생 동안 삶의 지침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을 후대에 전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가 지속되도록 하는 거룩한 사명입니다. 우리가 후대에게 믿음을 전수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셔서 그들이 또 다른 세대에 믿음을 이어가는 축복의 연결고리가 될 것입니다.
"너는 이것을 네 아들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신명기 6:7)
이 말씀처럼, 믿음을 전수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대대손손 영광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 🙏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자녀와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는 통로(Pipeline)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은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나누고 선포할 때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나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 은혜는 반드시 이웃과 함께 나눠야 합니다. 은혜를 경험한 삶에는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할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다”라고 마틴 루터킹 목사는 말했습니다.
적용) 요즘 나는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통로로 쓰임받고 있습니까?
3. 하나님께 존귀케 되어질 인생임을 믿어야 합니다(10:1~3).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왕의 버금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는 본래 하만이 있던 자리였는데, 이제는 모르드개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에게 높임을 받아 존귀한 자가 되고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시는 최고의 사랑은 구원입니다. 모르드개가 유대인 중에 존귀케 된 사건은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영광을 잘 보여줍니다.
모르드개의 존귀케 됨은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의 계략으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처했지만, 하나님께서 모르드개를 향한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에스더 6장에서 아하수에로왕은 모르드개가 왕의 생명을 구한 일을 기억하고 그를 높였습니다. 또한 모르드개는 자신의 민족과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끝까지 신실하게 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겸손하게 행동했고, 결국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본문 3절은 모르드개의 존귀함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모르드개는 존귀한 자리에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유다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는데, 그 이유가 그는 유다인들의 이익을 도모했고, 안위, 평안하게 잘 살 수 있도록 돌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자신의 자리를 자신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로 사용했기에, 그는 2500년이 지난 지금도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모르드개의 존귀함은 그의 신앙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결과였으며, 이는 모르드개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때문입니다.
모르드개와 마찬가지로 성도의 존귀케 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성도도 모르드개처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존귀케 되는 존재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존귀한 자리에 서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1) 하나님의 선택으로 존귀함을 입음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성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로, 그분의 소유로 존귀한 신분을 부여받았습니다.
(2) 겸손과 신실함을 통해 높임을 받음
(야고보서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모르드개가 겸손히 하나님께 충성했듯, 성도도 겸손한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높임을 받습니다.
(3) 최종적으로 영광의 자리로 부르심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지금의 내 자리에는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사회생활에서 차지하게 되는 자리인, 직장에서의 자리, 기관에서의 자리, 단체에서의 자리,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의 자리인 부모의 자리, 자녀의 자리, 남편이나 아내의 자리 등이 모두 그러합니다. 이 땅에서 영원한 자리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 오를 때보다 내릴 때 더 아름답고 의미 있어야, 지금의 자리가 빛이 납니다.
인생은 전반전보다 후반전이 더 중요함을 교훈해 줍니다. 하만의 전반전은 얼마나 높아 보였습니까? 그는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후반전은 달랐습니다. 전반전에는 그의 권력의 자리가 높았다면, 후반전에는 그의 머리가 50규빗(약 22.5m)의 나무장대에 높이 달렸습니다.
에스더의 전반전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후반은 왕후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녀가 세상적으로 신분이 높아졌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다른 인생을 살게 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모르드개의 전반전도 그저 대궐 문지기의 신분이었고, 하만에게 몹시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빅단(빅다나)와 데레스의 역모를 고발하고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신비한 손길을 내미시자, 그의 후반전은 승리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동일합니다. 비록 지금 어려움과 부족함, 연약함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마침내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혹 우리가 살아서 승리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 우리의 자손들이 보게 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영원한 승리자인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도록 예정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배경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여도,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우리를 높이십니다(벧전 5:6).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에스더를 돕고 민족을 구원하는 데 자신의 삶을 헌신했습니다. 모르드개의 존귀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기에 주어진 결과였습니다. 또한 모르드개는 단순히 존귀한 자로 머문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고 강조합니다(3절). 그는 자신의 권세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유익을 끼치는데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존귀케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유익만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높임을 받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모르드개의 존귀케 됨은 성도의 삶에 깊은 영적 교훈을 줍니다. 성도는 모르드개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신뢰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때에 존귀함을 입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에게 높임 받아 존귀하게 된 모르드개는 유다인입니다. 그리고 유다인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당시 유다인은 작은 민족이며 포로로 잡혀 온 하찮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유다인을 친히 여겨주시고 왕을 통해 높임을 받고 존귀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또한 세상에서 손가락질받고 모욕과 조롱을 당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고후 4:8-9). 하나님께서 친히 여겨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환난과 멸시를 당할지라도 나를 친히 여겨주시는 하나님 사랑에 감사하여 그 사랑을 가족과 이웃을 끝까지 전하고 섬겨야 합니다.
적용) 나는 지금 내 인생이 존귀하게 여겨집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존귀함을 이웃과 공동체를 섬기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까?
결 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백성들과 동일하게 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요~~ 6면으로 된, 주사위를 던져서 1이 나올 확률은 6분의 1입니다. 주사위 2개를 던져서 둘 다 1이 나올 확률은 36분의 1입니다. 주사위 10개에다가 1에는 ‘생명’이라 쓰고, 나머지 5면에다가 ‘죽음’이라고 쓰고서 10개를 던져 전부 ‘생명’이라 쓰인 것이 나오면 살려준다고 할 때에, 그 확률은 6,000만분의 1이 넘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10개를 던져서 ‘생명’이라고 쓰인 글자 10개가 나란히 1줄로 세워지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거의 계산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기적적인 은총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속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죽음의 주사위’를 ‘생명의 주사위’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조건도, 자격도 없는 우리를, 아니 나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슬픔이 변하여 구원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합니다.
시편 30:11 (개역개정)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다윗의 찬양으로, 하나님께서 고난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은혜를 고백하는 구절입니다.
이사야 61:3 (개역개정)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 대신에 아름다움을,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근심 대신에 찬송의 옷을 입히시고..." 이 구절은 메시아의 사역을 통해 슬픔과 고통이 위로와 기쁨으로 바뀌는 약속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 31:13 (개역개정)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늙은 자도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에서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이 담긴 구절로, 이스라엘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을 선언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이야기처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일어낫습니다. 이를 날마다 경험하려면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우리를 존귀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슬픔과 좌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찬양하며 영광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