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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갈라디아서의 처음부분을 읽었습니다. 앞으로 갈라디아서를 쭉 설교를 해볼 생각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2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갈라디아 지역은 지금의 터키의 중앙지역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이 지역에 바울의 선교로 많은 교회를 세워졌습니다.
그러다가 2-3년 후에 다시 그곳에 가게 됩니다. 교회 안에는 복음이 아닌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이 침투하여 교인들에게 올바른 복음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는 안디옥에 돌아와서 갈라디아 교회를 생각하면서 이 편지를 기록하여 보내었습니다.
여러분, 편지를 써 보셨습니까? 편지를 보낼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보내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은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바울은 편지의 초두에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말합니다.
(갈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자신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도로 소개합니다. 왜 사도임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갈라디아교회 안에는 바울로 하여금 사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의 권위에 대하여 도전을 해 옵니다. 그러나 자신은 사람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12제자를 두고서 사도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바울은 사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바울이 무슨 사도냐?’라고 시비를 걸고 도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 생전에는 그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고, 그 분으로부터 임명을 받았습니다(행 9:1-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은 사람의 선택이나 승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임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강조합니까?
첫째는, 자신의 영적인 권위에 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교회가 거짓선생에 의해 거짓복음으로 인해 병든 것을 바로 잡고 가르치는데 영적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 입니다.
셋째는, 자신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말합니다.
뉴질랜드에서 학교에 가면 첫 시간이 되면 자기 소개하는 시간을 꼭 가집니다. 이때에 어떻게 나를 소개할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싶습니까?
우리 시대는 자기 피알시대라고 합니다. 자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자기를 잘 어필할 수 있어야 경쟁력이 확보됩니다. 그래서 피알이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린다’ 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기록하면서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에 대하여 권위를 확보하고 그 교훈에 깨우치고 바른 믿음을 전수하기 위해서 사도됨을 강조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을 알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사도라는 이 직분의 중요함을 알고 언제 어디서나 사도로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이 자신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자신의 가치나 소중함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아무렇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인생을 막 삽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했으나 직장이 없었습니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애인도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언제나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에 오면 자신의 내면을 숨기기 위해서 말도 잘하고 웃기기도 잘 했습니다. 저도 아주 명랑하고 유머가 넘치는 청년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집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친구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대부속병원 영안실에 그는 안치되었습니다. 술을 먹고, 자기집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자살로 추정이 됩니다.
저는 그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심각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가 생각하기를 직장이 없고, 애인이 없고, 자신이 못나다고 생각했겠지 마는 사실은 그 친구는 젊고, 건강하고, 많은 친구가 있었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너무 자신의 못난 면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가진 것, 자기의 장점들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가 죽고 난 후에 그의 어머니가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아들이 죽고 난 후에 어머니는 산목숨이기에 살아가지만 낙이 없었습니다. 재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다니던 교회를 그만 두었습니다. 병원의 식당에서 근무하셨는데 저는 자주자주 찾아가 위로하고, 기도해주었지만 아들을 잃은 실의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는 뉴질랜드로 왔습니다.
나의 삶에 어떤 도전이 있고, 위기가 온다고 하더라도 자신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하고, 자신을 드러낼 때에 우리는 순간 순간을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백성됨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4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악한 세상에서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여 우리를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건지기 위해, 아니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기 위해 자기의 살을 찢고 피를 흘려 나를 샀습니다. 나를 사기 위해 하나님은 친히 죽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살렸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통 존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를 죽어서 나를 샀기에 얼마나 귀합니까?
영현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대통령 선거날에 갑자기 그의 어머니가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선거날이라 의사가 없었습니다. 탯줄이 끊어져서 엄마 뱃속에 있던 영현이는 산소공급을 받지 못해 뇌에 이상이 되어 겨우 태어났습니다. 아이는 태어났지만 손발이 삐뚤어지고, 눈도 안보이고, 이상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저는 그 집에 갈 때마다, 기도해주면서, 격려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마음에는 이런 못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이나 그 어머니를 위해서 좀 안되었지만 빨리 죽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아이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어머니가 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고, 손발이 삐뚤어진 아이지만 열 달 동안 품고 있었고, 생명의 위급함 가운데서 이 아이를 얻었기에 너무나 소중한 아이였습니다. 자신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그저 불구자로, 쓸모없는 사람으로 보였지만 그 어머니에게는 달랐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얼굴이 좀 못 생겼다고 힘들어 한다면 생각을 바꾸십시오. 내 얼굴이 조금 개성있게 생겼다고 ....
하나님께서 조금 신묘막측하게 만드셨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 성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존재라고 말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아주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 짜리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생명)을 지불하므로 나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샀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핏값이니, 예수님 짜리라는 것입니다. 그 만큼 가치가 있고,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 된 존재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때에 그가 하는 일도 달랐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자기를 알고, 자신의 사명을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이 축복이지 않습니까?
(1) 바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사도임을 알기에 모든 형제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절에 “함께 있는 형제로 더불어”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더불어’ 라고 하는 말은 ‘같이’ ‘함께’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종종 ‘더불어 ’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낸 사도라는 사실을 망각했다면 ‘더불어’를 도무지 생각하지 못하며 살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해서 ‘더불어’ 형제들과 함께 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존재가 사람에 의해서 세워지고, 사람에게 집착되어 있다면 그가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다른 형제와 ‘더불어’가 아니라 자기만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5에서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
교회생활은 바로 더불어 사는 생활입니다. 교회는 신앙공동체입니다.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큰 사람은 더불어 함께 하며 사람을 세워가는 사람이지요. 이 사람이 큰 일꾼이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알므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할 줄 압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3).
복 받은 사람은 나 만을 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웃과 함께 잘 살기를 기원하면서 삽니다. 바울은 사도로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호의”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 시간에 ‘은혜 많이 받았다’라는 말을 하는데 사실은 그것은 감동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은혜’란 가장 쉽게 표현하면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 안 내고 받는 것이 선물이지 않습니까? 돈 내고 선물을 받는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우리 중에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는 사람이 있나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저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리고 은혜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라고 .....
이 은혜를 받고, 이 은혜를 아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구원받게 되면 평강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죄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과 평화하게 되고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린 경험이 있는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기원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체험하고 누리므로 다른 사람에게 이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며 사는 축복 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알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합니다.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5)
영광은 헬라어에서 ‘그 영광’(태 독사)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만이 받으실 오직 유일한 영광입니다. 예수님 만이 누릴 영광입니다.
그는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그 은혜와 사랑을 알고, 그분께 오직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만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은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하고서 받은 바 그 은혜로 더불어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