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타작마당에
나오는 기분으로 나왔다.
시골에 사신 분들은 타작마당이 무엇인지 아실 것이다. 콩이나 보리같은 곡식은 껍데기가 있다. 그 껍데기를 까야 열매가 나온다. 열매가 익으면 껍데기가 벗겨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 콩깍지가 같이 붙어 있거나 반만 터져 있다. 그것을 마당에 깔아놓고 도리깨로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그러면 알곡과 죽정이가 갈라져 나온다. 죽정이도 맞지만 알곡도 맞아야 하는 것이다. 맞지 않으면 거기서 알곡이 나올 수 없다.
나는 지난 47년간 대구에 머물렀다. 2년간 충주에 있던 것까지 합하면 50년이다. 그리고 교회 일을 한 것까지 합하면 58년이 되는 셈이다. 나는 지금까지 오면서 여러 과정을 지나왔다. 마치 나무 하나가 자라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감이 열리면 우리는 그냥 먹지만 그 감 하나가 열려서 홍시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씨가 심기고 싹이 나고 가지가 나고 잎이 나고 그 다음에 꽃이 피고 그 다음에 열매가 열린다.
그런데 그 열매는 그냥 바로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다. 감은 감인데 떫어서 먹을 수 없다. 그것이 시간을 지나면서 여러가지 과정을 겪어서 결실을 해야 먹게 된다.
감나무에는 금이 있어서 그 안에 해마다 병균이 들어간다. 그래서 열매가 익게 될 때 그것이 열매 속에 들어가고, 열매가 어느 정도 커지고 장마가 지거나 하면 상당수의 열매들이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익는 데까지 가는 데 역시 과정을 겪어야 한다. 나무에 붙어 있던 세균이나 바이러스 때문에 그렇게 된다.
그래서 봄에 황 소독을 한다. 잎이 나기 전에 유황을 뿌리면 장마 때도 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황 소독을 안하면 열매가 장마철에 거의 다 떨어져 버린다. 감이 뚝뚝 떨어지면 마지막 남는 것이 많지 않고, 다 커서도 떫어서 역시 먹을 수없게 된다. 그러다가 점점 붉은 빛이 나고 익기 시작한다.
그런 과정에서도 여러가지 병충해로 인해서 시달리다가 마지막에 익게 되는데 그때 홍시가 된다. 그 전에는 보기에는 빨갛게 익은 것 같아도 못먹는다. 그것이 빨갛게 익고 그 다음에 홍시가 되어야 먹을 수 있다.
그런데 그때는 새들이 와서 파먹는다. 그래도 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대구 지방에 사는 분들은 씨없는 감을 먹었기 때문에 감에도 씨가 있느냐는 생각을 하겠지만 대구 지방의 감이 씨가 없는 것은 특별한 기후 때문이다. 다른 지방에는 감에는 씨가 있다. 토종일수록 더 많이 들어있다. 종족 보전을 위해서 씨가 많다.
그래서 사람은 먹을 수 없어서 내뱉는다. 새들이 와서 먹어서 씨까지 먹지는 못하고 살만 쪼아 먹으면 그 씨가 땅에 떨어져서 다시 싹이 난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감이라는 것이 성숙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다 익으면 살은 사람이 먹고 새들이 먹고 씨는 땅에 떨어져서 다시 나무가 된다.
타작마당에 가면 콩이 있는데 그 콩은 깍지가 먼저 눈에 보인다. 내가 대구에 왔을 때 학생들이 “깍지가 먼저입니까, 콩이 먼저 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깍지가 먼저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는 콩이 들어있다고 대답했다. 씨를 위해서 깍지가 있는 것이지 깍지를 위해서 씨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 깍지가 나올 때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안에서 콩이 자라서 콩깍지가 된다.
가을이 되면 콩깍지가 터져서 씨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100% 터져 나오면 뭐하러 타작을 하겠는가. 100% 터져나오면 콩이 땅바닥에 다 떨어져서 사람이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약간 터질락말락 할 때 그것을 추수해서 타작마당에 넣고 도리깨로 사정없이 두드려 패는 것이다. 그러면 껍데기와 열매가 분리되어 알곡이 나오게 된다.
성경에도 타작마당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죽정이는 밖에 버려 불태우고 알곡은 곳간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곳간에 들어가는 알갱이는 많이 두들겨맞고 죽정이가 벗겨진 것이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알곡이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많이 두들겨맞아야 한다는 원리인 셈이다.
지난 목요일에 차경애가 나와서 말을 했는데 마지막에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교회가 이렇게 시끄럽고 복잡한데 이 목사님이 추수를 하기 바랍니다.”라고 마지막 결론을 지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안좋게 해석하면 안좋은 말이고 좋게 해석하면 좋게 되는 의미심장한 말인데 나는 좋게 해석했다. ‘아, 나보고 두들겨맞고라도 열매를 거두십시요.’라는 말이 되기도 하고, 아니면 모든 책임을 내가 지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고 해석했다. 교회가 분열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맞는 말이다.
우리 교회 47년 역사에서 한번도 오늘과 같은 일이 없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외부에서 보아도 두 쪽으로 갈라져있다. 무슨 말을 해도 이쪽에서는 저쪽 말을 안듣고 저쪽에서는 이쪽 말을 안듣는다. 이 책임이 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책임을 지고 여러분 앞에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나왔다.
나는 마지막 판에 구속의 복음을 발견했다. 내가 만일 이 복음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노상에서 객사할 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몰랐다. 어떤 사람들이 와서 “목사님,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었다. 열심히 전도를 하던 어느 자매가 나에게 와서 “무엇을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고민끝에 질문을 했을 때 나는 “참 잘왔다. 정말 잘왔다. 교회 안에 있으면 된다.
그리고 말씀만 열심히 들어라. 그러면 길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길을 가르쳐 줄 수없었고 내가 길이라고 할 수 없었던 상태가 내가 마지막을 맞이할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목회가 잘 되었다. 배울 것이 많다.” 하고 찾아오곤 했다. 그때는 나도 은혜가 너무 많았기에 만족했다. 내 일생은 은혜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을 일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대구교회 생활로 만족했다. 대구 교회가 너무 좋지 않은가. 평안하고 자유롭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헌금을 강요하는가, 새벽기도를 하라는가, 금식을 하라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참 편한 교회라고 하는데 바깥에서 열심히 하던 사람들은 ‘이상하네. 할 것이 아무것도 없네.’ 이렇게 느껴지는 교회가 대구교회다.
여러분이 어디 가서 전도를 하려면 할 말이 별로 없을 것이다. 너무 할 말이 많기 때문에 간단히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와 보라. 우리 교회는 참 좋은 교회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좋은 것을 보고 온 사람들이 더러 있다. 어쩌면 상당수가 그럴 것이다.
내가 교사들에게 특별히 여러번 말했다. “교무실에서 최소한 4년 길게는 8년을 함께 있는데 어떻게 한 사람도 전도를 못하느냐. 기회를 타서 전도를 좀 해 봐라.” 했지만 안되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교사순을 만들어 보라. 그러면 사람들이 오기 쉽지 않겠느냐.”라고까지 했는데 교사들은 그것도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저렇게 전도를 못할까 하고 속으로 답답하게 생각했다.
그 이유를 최근에 알게 되었다. 복음은 단순해야 되는데 너무 복잡했던 것이다. 누구를 만나서 말하려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다 얘기해야 되니 엄두가 나겠는가. 내가 경대에서 학생 하나를 붙들고 창세기를 가지고 6개월간 교제했다.
6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했는데 결혼할 때는 자기 누나가 소개한 사람과 결혼한다더니 그대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교회생활’을 보내주고 있고 내가 전화를 하면 굉장히 반가워한다. 그런데 세계는 하나가 안되고 갈라져 있다.
그래서 ‘아, 나도 그렇구나.’라고 알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개인전도를 한 사람도 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전도를 하려면 처음 본 사람에게 말을 많이 해야 하니까 엄두를 못냈던 것이다.
내가 CCC에 가서 좋았던 것은 사영리복음이다. “이것만 읽어 줘라.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해서 예수를 믿게 한다.” 이것이 사영리 복음이고 CCC의 전도 방법이다. 전도훈련을 시켜서 사람들을 내보낼 때 “이것을 읽어주기만 해라. 그러면 성령이 역사해서 사람들이 돌아온다.” 하고 내보냈다.
그러니 얼마나 쉬운가. 그래서 전도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에게 사영리를 읽어주었다. 그렇다고 다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사영리를 읽어주면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교회를 나가게 했다. 전도할 때 마지막 기도를 하면서 “좋은 교회로 나가게 해 주십시요.”라고 했다.
그들은 꼭 CCC로 오지는 않았지만 교회로 나간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래서 복음은 단순해야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복음을 알고 나니까 단순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내가 처음에 이 사람들 때문에 길을 잡게 되었다. 워치만 니가 이 사람들을 말한 책이 ‘주의 형상을 닮아’다. 내가 왜 이 책을 보게 되었는가.
충주 사람들은 아주 말이 없는 사람들이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엑스폴로 74가 지난 다음에 나는 성경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공부했다. CCC에서 전반적으로 그러했다. 왜냐하면 김 목사님이 엑스폴로 74를 하고 보니까 알맹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부터는 활동보다 차분하게 성경을 가르칩시다.”라고 말했는데 나와 마음이 딱 맞았다.
.
그래서 충주에 내려와서 성경공부를 했는데 묵묵부답이었다. 좋다는 것인지 나쁘다는 것인지 몰랐다. 모이자고 하면 다 모였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너무나 속이 답답했다. 그때 마침 우리 처가집이 제천으로 이사했기에 하숙집에서 밤에 혼자 있는데 캄캄했다. ‘왜 이럴까. 왜 이럴까?’ 그러다가 “주의 말씀이 꿀송이 보다 달 것이며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요.”라는 시편의 말씀이 생각났다. ‘이런데 왜 안될까, 이런데 왜 안될까?’ 성서주일마다 이 말을 했지만 이것 때문에 한 사람도 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그러면 나는 되는가? 나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꿀송이보다 더 단가?’ 이것이 나에게 꽃혀 들어왔다. 내가 설교를 한지 10년이었다. 교회에서 설교한지 8년이고 CCC에 와서 2년이니 10년 아닌가. 그런데도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성경은 진짜로 올바른 책이고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었지만 ‘꿀송이 보다 더 달다.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늘 성경을 읽으면 ‘이것은 시적인 표현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아니다. 내게 달지 않은데 남에게 달겠는가. 내가 정금처럼 사모하지 않는데 학생들에게 감동이 되겠는가.’ 이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날 밤에 아주 캄캄한 밤을 지냈다. 다음 날이면 다시 회관에 나가야 되는데 내가 할 말이 없었다. CCC 2년을 충주에서 사는 동안에 집에서 회관, 학교 외에는 간 데가 없었다.
옆에 수안보 온천이 바로 있었지만 한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갈 데가 없었다. CCC 회관에 가서 말해봤자 또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래서 시내를 방황하다가 조그마한 기독교 서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 서점에서 ‘주의 형상을 닮아’라는 두껍지도 않고 얇지도 않고 읽기에 좋은 책이 꽂혀있었다. 나는 제목이 좋아서 뽑아 왔다. 그 책을 읽는 동안에 너무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신학교를 시시한 데 나왔다. 김 목사처럼 좋은 데 나온 것이 아니라 이름도 없는 곳을 나왔다. 그런데 성경을 가르친 목사님은 아주 성경을 깊이 가르치셨다. 누가 들어도 거리낌이 없는 성경 말씀을 가르치셨다. 주로 그분의 성경말씀이 우리 신학교의 주된 과목이었다. 다른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강사들이 와서 했고 성경만은 그분이 전담해서가르치셨다.
그분이 평생 읽은 책이 일본의 성서학자 우찌무라 간조의 책이었다. 그의 책을 대본으로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다른책은 읽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신학자들이 쓴 것도 아니고 영어를 아시는 것도 아니니까 그 책을 읽을 수밖에없었다. 읽어보면 아주 성서적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의 무교주의의 창시자다. 그는 기독교가 제도화된 것에 대해 한탄했다. 처음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받았을 때 ‘미국은 얼마나 좋을까. 지상 천국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40일간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때 18세였다고 하는데 한창 미국에서 교파들이 난립하고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실망해서 돌아오는 길에 곰곰히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교파끼리 서로 싸우니까 안되는구나. 제도적인 교회는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제도없는 교회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무교주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교회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교회를 반대한다. 그래서 일본에는 교파가 없다. 내가 어느 일본 목사를 만나서 “어느 파입니까?”라고 물으니 “기독교입니다.”라고하기에 “어느 교단입니까?”라고 다시 물으니 “기독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들은 교파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교주의는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는다. 많아야 20명이다. 그렇게 모여서 성서연구를 하고돌아가면서 발표를 한다. 그러니 교역자도 제도도 필요없다. 많이 모일 필요도 없으니까 20명이 최고라고 한다. 한국에도 있고 대구에도 있다. 돌아가면서 성경을 연구하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교회다. 사람들이 볼 때 생소하고 교회같지 않는 교회다.
내가 성경을 배운 분이 거기서 영향을 받은 분이다. 그분은 제도적 교회를 극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교단이 생긴지 오래되었어도 교세가 불어나지 못했다. 그 교단은 평양에서 세워진 교단이다. 원래는 성결교 출신들인데 선교사들과한국 목사들이 돈 문제로 생긴 동양선교회 사건으로 인해 나오게 되었다. 이분들은 “이런 일은 못보겠다.
우리는 인간이 하는 교회를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는 교회를 하자.” 하고 고린도전서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을 찾아냈다.
그리고 ‘신의 교회’라는 간판을 붙였다. 일제시대 때 평양에서 그런 간판을 붙였으니 굉장히 오래된 교회다.
하지만 그때 나왔던 그 사람들 외에는 더 불어난 적이 없다. 수십년 간 교회를 세웠는데 교단이라 해봤자 전국에 열몇개 정도밖에 안된다. 제일 큰 교회가 목포에 있다. 측후동 교회라고 그것이 제일 큰 교회다. 목포 사람들은 다 안다. 아주 건전한 교회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러나 사람도 많이 불어나지 않고 교회도 불어나지 않는다. 신학생을 배출해봤자
갈 데가 없어서 축소되고 축소된 교단이다.
미국에 ‘Church of God’이라고 이름이 비슷한 교단이 있다. 그래서 둘이 연합을 했고 미국에서 선교사들이 왔지만 미국의 Church of God은 초교파적인 교단이다. 교단이라 할 것도 없고 일 년에 한번씩 연차대회만 한다. 모여서 현재적인 상황에 대해 토론하고 세미나를 하고 마친다.
아무것도 없다. 본부에는 국제선교부가 있고 신학부와 출판부가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주 건전한 교단이다. 미국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다니다 보면 가끔 ‘Church of God’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름은 좋지만 뭔가 파가 있어야 되고 이름이 있어야 되지 우리 한국에서는 그런 교회가 안맞는다. 장로교회에서 목사는 교육장로고 장로는 치리장로다. 치리장로는 정치 장로라는 뜻이다. 장로교는 정치적인 교회다. 장로교회라는 말이 그런 뜻이다.
감리교회는 감독체제다. 그래서 약간 독재적인데, 점점 교회가 커지면 감독 제도가 약해진다. 그래서 큰 교회는 간섭을 못하고 작은 교회에만 인사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작은 교회는 발전이 안된다. 원래 감리교회에는 장로가 없고 권사만 있었다. 요즘에는 큰 교회에서는 장로교가 장로가 있어서 잘된다고 생각해서 장로를 세우고 있지만 우리나라에 서는 장로교처럼 잘되는 교회가 없다.
사람은 원래 권력지향적이다. 그래서 교회가 잘되려면 장로교 간판을 붙여야 한다. 내가 있던 교단도 내가 나온 다음에 장로교로 바꾸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간판으로는 안될뿐만 아니라 안상홍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하나님의 교회 라는 간판을 붙이고 전국 각지에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간판을 보았을 것이다. 똑같은 건물에 똑같은 이름이 붙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 이름을 빼앗겨버렸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면 안상홍의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름을 장로교회로 바꿔 버렸다.
한신 쪽이라던데 너무 약소해서 장로교 사람들도 잘 모른다. 그렇다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도 아닌데 내가 나온 다음에 그렇게 되었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는가. 우리 교회도 어떤 교단이 되면 우선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는 쉽다. 그러나 답이 없어진다. 그 교단이 살아야 되기 때문에 거기 맞추어야 한다. 신학교마다 교단이 있다. 그 신학교는 주문생산품을 만드는 곳이다.
육군사관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훈련을 받는 곳이 아니다. 군사훈련은 일학년 때 한번뿐이다. 나머지는 뭐하느냐고 친구에게 물었더니 “군인을 만드는 곳이야.”라고 대답했다. 그때야 사관학교는 군인을 만드는 곳이라고 알았다.
군인은 죽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군인으로서 명예를 더 중요시한다. 걸프전 때 우리는 파병을 하니 마니 하고 민간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파평을 한다기에 공군 소장에게 “어떻게 저런 위험한 데를 가려고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닙니다. 줄 서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군인은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이 군인의 사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군인 정신이다.
강재구 소령 같은 사람은 날아온 수류탄을 자기 몸을 안고 죽어서 사병들을 구했다. 그러니까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예가 더 중요하다. 우리 생각과는 영 딴판이다. 우리 복음도 죽는 것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편하고 안정된것이 더 좋은 것인가.
참 복음이 왜 나타나지 않았는가. 폭탄을 끌어안고 죽을 강재구 소령같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말하는 십자가의 복음은 이천 년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은 복음이다. 그럴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왜 나같은 사람에게 이것이 발견되었는가. 나는 그렇게 용기있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충주에 있을 때 나 혼자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내 힘으로, 내 의지로는 십자가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해서 끌고 가신다면 억지로 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젊은 날에 기도했다. 얼마나 두려우면 그런 기도를 했겠는가.
그래서인지 하나님이 나에게 한번도 어려움을 주시지 않았다. 편안하게 대구 생활을 했다. 너무 좋은 생활이었다. 형제들과 나는 너무 친하고 친 형제들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한 때는 우리 집에 식객이 40명이었다. 끼니마다 사방에서 몰려와서 그냥 대구로 무작정 내려온 친구들이 많았다. 충주에서, 춘천에서, 서울에서 모여왔다. 갈 데가 있겠는가. 방이 좁으니까 우리 살고 있는 방이 꽉 차서 아이들 방이 없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2층 침대를 놓고 거기서 잤고 하나는 우리가 데리고 잤다. 어머니가 계셨는데 골방 하나를 조카와 같이 쓰셨다. 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이웃집에서 방을 두개 빌려서 잠은 거기서 잤지만 밥은 집에서 먹었다. 처음에는 원자 자매가 식모노릇을 했고 시집을 가서 나가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다른자매가 있었는데 결혼을 했고, 마지막에 온 사람이 이순희 자매다. 그 자매가 나와 함께 같이 살았고 그 식구를 다 먹여살렸다.
밥 먹을 때 보면 사람이 꽉 차서 난리였다. 어느 식당도 그렇게 복잡한 식당이 없었다. 그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순희 자매가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도 말이 없는 자매라서 묵묵히 받아주었다. 그래서 우리 대구교회가 성장했다.
그보다 더 초창기에 사람들이 많지 않을 때는 염경선 자매가 주모 노릇을 했다. 염경선과 이재승, 이 사람들은 대구교회의 모태가 된 사람들이다. 내가 대구에 내려와서 일년 되었을 때 이재승 형제가 왔다.
본부에 있었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대구로 발령을 받았다. 만나서 말씀 한번을 들었는데 재승 형제가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염경선 자매를 설득했다고 한다. “가보니 진짜 목사님이 있더라. 가자.” 하고 설득해서 봇짐을 싸서 내려왔는데 둘이 얼마나 멋있는 결혼을 했는지 모르실 것이다.
CCC내에서 결혼했는데 자매 부모가 극력반대했다.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고 염 자매는 이대를 나왔다. 게다가 메이퀸에 나갈 만큼 미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주 멋있는 신랑을 만날 줄 알았는데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이재승 형제와 결혼한다니까 반대해서 결혼식장에도 안나왔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대구에 와서 단칸방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조그마한 방이 두개였는데 마루도 없는 거적부엌에서 겨울에 유리 한 장으로 살았다. 내가 회관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재승 형제가 오더니 “우리 집으로 갑시다.” 하고 이불 짐을 들고 가 버렸다. 그래서 따라갔더니 조그마한 방 하나를 나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승 형제는 그 좁은 방에서 애기와 셋이 잠을 잤다.
내가 그런 사랑을 받고 그 집에서 사는 동안에 CCC에서 나오게 되었다. 나는 집이 제천에 있었기에 올라가 버리면 그만인데 재승형제와 같이 살다가 그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재승 형제 거취를 보고 내가 행동해야지 나 혼자 집이 있다고 갈 수 없다.’ 하고 머물렀던 것이 오늘 대구교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20여명이 되는 학생들이 매일같이 왔다. 집은 좁은데 학생들이 몰려 오니 주택 하나를 얻어서 거기 살려고 했지만 돈이 없었다. 아무리 돌아다니도 우리가 얻을 집이 없었다.
그때 지금 제주에 있는 박영호 형제가 고물상을 하는 유일한 나사렛 형제였다. 그 꼴을 보고 있더니 “목사님, 그럴 것이 아니라 점포를 얻으세요. 빈 사무실을 얻으세요. 그러면 세가 쌉니다. 월세를 내면 되니 반은 내가 담당하겠습니다.” 하기에 영대 사거리 황제 양화점 2층에 2-30평 되는 홀을 얻었다. 그곳은 30명이 들어가면 딱 맞았다. 그래서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는 ‘안근사’표 접이식 의자를 30개샀다.
학생 20여명, 우리 식구, 그리고 나사렛에 온 사람이 모이면 30여명이 되었다. 그때 서현배 자매가 유일하게 직장을 다녔는데 그렇게 모인 것이 대구교회의 시작이다.
그렇게 모여서 무엇을 했겠는가. CCC에서 하던대로 성경말씀밖에 안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이기 시작했다.
좁아서 할 수 없이 옮겼고 또 옮겼다. 그래서 지금 이 교회에 오기까지 이사를 열번 다녔다. 더 좋은 교회로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리가 좁아서 할 수 없이 옮겼던 것이다. 호산아 산부인과 4층에 있을 때는 사람 수가 너무 많아서 앉을 자리가 없게 되었다. 장의자도 그때 구입했는데 대전 은주 자매 아버지가 자기 딸이 결혼했다고 감사하다며 의자 30개를 기증했다.
6인용이라서 200명이 앉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장의자가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커도 더 이상 사람을 수용할 빌딩이 없었다. 그래서 늘 비좁게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누가 한 사람이 담당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늘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번 사업을 해 보았는데 하는 것마다 실패였다. 마지막에는 즉결재판소 2층에서 이불 공장을 인수했다. 여름 이불을 큰 기계에서 누벼서 갖다주면 그것을 가를 붙이는 것이 일이었다. 그것을 하청을 받아서 해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미싱 6대를 인수해서 그 일을 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미싱이 고장났다. 일은 밀려 있는데 기술자를 부르면 바로 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일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을 맞춰주지 못하니까 일을 맡기는 사람이 일을 딴 데 주고 우리에게는 나머지 일만 맡겼다. 그러니 어떤 때는 일이 많고 어떤 때는 적었다. 할 수 없어서 내가 미싱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미싱처럼 간단한 기계가 없다. 기계 중에 가장 간단한 것이 미싱이다. 보면 고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고치기 시작하니까 고장이 안났다.
그래서 이제는 되겠다 싶었는데 6개월쯤 하다 보니까 주객이 전도되었다. 나는 그일을 해서 교회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했는데 주객이 전도되어서 교회를 위하는 것인지 일을 위하는 것인지 모르게 되었다. 누가 나를 만나러 찾아오면 우선 ‘일꾼인가, 아닌가?’부터 보였다. 그 때 밤 1시까지 일을 했다. 그러나 ‘이것을 할 일이 아니구나.’ 하고 싼 값에 처분했다. 나는 하는 것마다 일이 안되었다. 그래서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덕선 자매가 어느날 “내가 지금 병원을 하기 위해서 땅을 샀는데 집을 짓기는 역부족이니까 교회가 도와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송현동에 있을 때 갑자기 건축헌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일억 이천이라는 큰 돈이 걷혔다. 그래서 덕선자매를 주었고 건물을 지으면 한 층은 교회로 쓰고 나머지는 자기가 쓰겠다고 했는데 그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땅값은 계속 내려갔고 고민고민하다가 본전치기에 넘겨서 본전을 갚았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건축헌금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건축헌금을 걷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일반 교회에서는 건축헌금을 하면서 교역자가 피땀을 흘려야 하기 때문이다. 1층을 지어놓고 부흥회를 하고 또 2층을 지어놓고 부흥회를 하고, 이렇게 해서 교회가 올라가니 그 동안에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그래서 나는 ‘저런 교회는 안짓는다. 뭐하러 저런 교회를 짓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나는 누가 얼마나 건축헌금을 했는지 모른다. 한번도 장부를 본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면 ‘누구는 할 만큼 했구나. 누구는 과분하게 했구나. 어떤 사람은 너무 안했구나.’라고 알 것 아닌가. 그러면 너무 안한 사람이 머리 속에 남게 된다. 그래서 일부러 장부를 한번도 안봐서 누가 얼마를 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헌금이 되었는지모른다.
뒤로 들으니까 지금 중심세대와 청년부 일부에서 나에게 맡기고 쓰던 통장을 몽땅 털어서 헌금을 했다고 한다. 그들이 “집 사는 것은 보류하자. 교회부터 짓자.” 하고 있는 돈을 몽땅 털어서 헌금을 해서 갑자기 불어났던 것 같다. 우리교회가 지금 이런 예배당이 된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의 희생과 봉사가 있었기에 된 것이다. 오늘 내가 이런 칭찬을 하는 것도 처음이다.
나는 한번도 이런 말을 안했다. 왜냐하면 누가 헌금을 많이 했다고 자랑하면 다른 사람은 어찌되겠는가. 그래서 참 고마운 일이지만 자랑을 못했는데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까 꼭 자랑을 하고 싶다.
나는 추수날 타작마당에 나오는 마음으로 나왔다. 왜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내 책임이다. 그러하다. 전체적으로는 내 책임이다.
교회는 사공이 둘이면 갈라지게 마련이다. 어느 교회든 마찬가지다. 이재철 목사라고 유명한 사람이 있다. 백주년 기념교회 담임목사였는데 퇴임하고 나오면서 목사 네 명을 세웠다. 어느 한 사람이 독자적으로 못하도록 각 부서별로 하나씩 맡겨놓고 나왔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상당히 관심꺼리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나란히 똑같은 강단에서 목회를하게 되면 갈라지지 않을 수 없다. 생리상 그러하다. 노선이 다르면 더욱 그러하다.
나는 김 목사를 불러올 때 40년 관계를 가졌기에 아무 염려가 없었다. 내가 병들고 늙었으니까 넘겨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와서 말하는 것을 들으니까 길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는데 신학이 다르니까 끝까지 안되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마지막 만났을 때 한 말이 그것이다. 서로 말을 많이 했다.
일방적으로 나에게 퍼부었고 무식해서 그렇다고 했고 몰라서 그렇다고 했다. 나는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그렇지. 너에 비해서 나는 무식하지. 내가 아는 것이 있나. 학벌이 있나 신학교를 좋은 데 나왔나.’라고 생각하니 맞는 말이다.
김 목사는 손꼽을 만한 학벌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 복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안했다. 기다려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만하자 하고 끝을 맺었다. 무슨말인지 아실 것이다. 노선이 다른 것이다.
내가 그러면 갑자기 노망해서 이런 복음을 만들어냈겠는가.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이 복음이다. 감이 익듯이 익은 것이다. 내가 아브라함을 말할 때 그가 누군가. 바로 이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백살에, 사람의 힘으로 아기를 낳을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삭을 주셨던 것이다.
이삭을 그냥 주셨겠는가. 이삭이 자란 다음에 “모리아 산으로 데려와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다. 그래서 어린 소년을데리고 모리아 산에 갔던 것이다. 거기서 단 위에 올려놓고 칼로 목을 따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양 한 마리를 준비해 놓았다가 “이삭을 죽이지 말고 이 양으로 대신 제물을 드리라.” 해서 이삭이 살아났다. 이삭은 십자가에 죽고 다시 난 사람이다. 죽었을 텐데 살아난 사람이다. 알고 보면 이것이 전부 복음이다.
그리고 이삭의 일생을 보면 너무나 평온하다. 한번도 문제가 없고 가는 곳마다 잘 되었다. 핍박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 잘 되었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에 눈이 어두워서 야곱을 축복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영 안이 어두워져서 축복을 잘못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그가 눈이 밝았더라면 에서를 축복하지 야곱을 축복했겠는가. 눈이 어두웠기 때문에 야곱인지 에서인지 구별을 못하고 축복을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축복이었다. 이삭은 눈이 멀어서 축복해야 했다. 눈을 뻔히 뜨고는 하나님의 뜻대로 축복을 못한다.
야곱은 성실하기도 하고 잔꾀도 많은 사람이다. 자기 집을 갖기 위해서 노력을 하다가 마누라가 네 명이나 되었다. 세명의 아내에게서 아들만 열 명을 낳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라헬에게서는 생산을 못했다. 왜 열명의 아들을 낳았겠는가.
라헬에게서 아들을 낳게 하려고 하다가 열을 낳은 것이다. 마지막 두 아들이 라헬이 낳은 요셉과 베냐민이다. 열두 명의 아들을 낳고서야 비로소 밧단아람을 떠났던 것이다. 가기 있다가는 외삼촌에게 다 빼앗기겠다 싶으니까 몰래 도망친 것이다.
야곱은 몇번을 속았다. 그래서 야반에 도주한 것이다. 그래도 얍복강에서 환도뼈를 꺾였다. 환도뼈가 고관절이다. 나도 요번에 고관절이 부러졌는데 야곱은 환도뼈가 외골되어서 평생 절름발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왔던 것이다. 그도 요번에 고관절이 부러졌는데 야곱은 환도뼈가 외골되어서 평생 절름발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왔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마지막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요셉은 형들이 시기해서 깊은 구덩이에 빠뜨렸는데 지나가던 대상들에 의해 발견되어 어느 높은 관료의 집에 종살이를 하러 들어갔다. 너무나 사람이 착하고 성실하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다. 그러나 유혹을 거절하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 감옥에서 떡을 맡은 관원과 포도주를 맡은 관원을 만났고 그들의 꿈을 해몽해 주었다.
그래서 요셉은 기적적으로 석방되었다. 요셉의 해몽대로 살아난 그 사람이 나가서 요셉을 자기 꿈을 알아맞힌 사람이라고 추천했고 바로가 데려다가 참모로 삼았다. 보좌관을 삼은 셈이다. 성경에는 총리하고 했는데 요셉은 애굽을 실제적으로 다스리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야곱으로서는 그 아들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애굽에 내려가서 만나게되었다. 빈손으로 애굽으로 나가니까 요셉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다 십자가다. 아무것도 없게 되고 빈털털이가 되고 절름발이가 되어 눈까지 멀었을 때 비로소 야곱은 꿈에도 그리던 요셉을 만났다.
여러분은 성경을 아니까다 아실 것이다. 이것이 다 십자가의 길이다.
내가 갑자기 돌아선 것이 아니다. 마지막 열매를 찾기 위해서 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 마지막 열매를 맛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한이 없다. 그런데 이것은 내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내가 무슨 특별한 것을 받은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을 받은 것이다. 사람은 당연히 원래 그렇게 지어졌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길로 갔던 것이다. 소유를 따라 갔어
선악과라는 것은 지식의 나무다. 지식을 따라 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운명이 너무 싫어서 피해 간 것이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이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나와 관계가 끊어질 것이다.”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먹었던 것이다.
왜 먹었는가? “네가 이것을 먹으면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는 말에 속아서 먹은 것이다. 그냥 먹은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먹은 것이다.
그 후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담이 생기고 말았다. 동산은 막혔고 화염검이 지키고 있고 사람은 동산 바깥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니 아담은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못하고 “내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이 인류 역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종교는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뭔가를 앞세워서 자기를 대신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원하신다. 우리 자신을, 벌거벗겨진 나, 뼈다귀만 남은 나를 원하신다. 참 신기한 분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후에 좋다 하시고 안식하셨다. 그리고 그 날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이안식하셨다는 말은 ‘이제는 되었다. 일이 끝났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안식하셨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없었다.
성경에 쓰여 있지만 어떤 사람을 좋다 하셨는지 이것을 아는 사람은 역사 이래로 아무도 없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버리고 갔다. 자기들의 목적에 안맞으니까 버린 것이다. 두번 째는제자들이 버리고 갔다. 그들 역시 자기들 목적에 안맞으니까 버렸고, 그래서 홀로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마지막에는 하나님도 버렸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셨지만 대답이 없었던 것이다. 그 전에는 여러번 대답이 있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런 확실한 대답이 있었다. 그 러니 이때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거기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거기서 예수를 만났다. ‘아, 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고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이렇게 쉬운 예수가 있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좋다고 교회에 발표했다.그러나 아무도 아멘을 안했다. 그래서 ‘참 이상하다. 이렇게 예수를 쉽게 만나는데 왜 아무도 아멘을 안할까?’ 의아했다. 그래서 추구하고 추구하고 또 가까이 간 것이 내가 지금 말하는 이 사람을 만난 것이다.
이 사람이 나에게는 너무나 좋았다. 왜냐하면 나는 바닥을 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이 내 기본이고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을 보니 나보다 몇십배 더 깊은 바닥이다. 그래서 나는 거기서 위로를 받았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다. 병이 있을 때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이웃이 된다. 내가 그러했다. 집에 있을 때는 결핵환자였다.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것 같아도 사람들이 볼 때는 결핵환자, 폐병쟁이였다.
젊은 청소년 시절이 그 말을 듣고 살다가 마지막 열아홉 살 때 죽게 되어서 병원에 갔다. 광주에 있는 제중원이라고 선교사들이 세운 결핵 병원이었는데 거기 가서 검사하니까 담에서 결핵균이 나왔다. 그래서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집에 서 쓸 수 있는 약을 다 쓰고 갔기에 거기서 쓸 약이 없었다. 아무 약도 못썼다.
그래도 균이 있기 때문에 거기 입원하게 되었는데 거기 두달동안 누워 있었는데 언제 그 심하던 기침이 사라졌는지 기억을 못하지만 기침이 그쳤다. 두 달에 한번 검진을 하는데 균이 안나온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겠는가. 두번 세번 검사해도 안나왔다. 그러니 나가라는 것이었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병원이 아니라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입원비를 아무리 내도 균이 없으면 입원하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그곳을 나왔다. 마지막으로 의사가 하는 말이 “조심조심 사세요. 조심하세요.”였다. 나는 평생 이 짐을 지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내가 이십 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고 다녔는지, 어떻게 미국을 일년에 두번이나 순회를 하고 다녔는지 도저히 상상이 안된다. 걷지도 못하고 방 안에 있어 보니 내가 언제 그랬던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것도 하나님에게 나에게 필요한 어떤 것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런 나를 보고 복음을 알겠다고 한다.
그러니 나로서는 환장할 일 아니겠는가. 나는 꼼짝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데 바울이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 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 아닌가.
형제들이 간병을 안해주면 나 혼자 잠을 잘 수 없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나는 잠들어버린다. 잠드는 것이 죽는 것이다. 이러니까 죽은지 살았는지 모르게 된다. 내가 마지막 병원에 갈 때는 가는 줄도 몰랐다.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에 갔다가 살아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구사일생이다.
왜 나를 살려두고 있는가? 나는 이 복음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걷든지 못걷든지 이 복음만이 나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서 구원을 받고 보니까 이것이 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 할 때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예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와 내가 하나면 너와 내가 하나다. 다 똑같다. 셋이 모이면 다 하나다.
누구보고 예수라 해도 다 똑같다. 누구보고 이현래라 해도 다 똑같다. 다 여러분의 이야기다.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과 전혀 다르다. 옛날에는 복음을 전했어도 성장을 시켜야 하니까 내가 아니면 안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딱 만나자마자 모든 것을 알아버린다.
이것이 지금 MZ세대들이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성경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같이 좋은 대구교회에서도 적응이 안되어 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를 안나왔다. 그런데 이들이 제일 먼저 알아들었다. 살 판을 얻은 것이다. 그러니 혹시 거칠더라도 여러분이 용서하시기 바란다. 이런 이들이 mz세대다.
어떻게 사람이 일정하게 될 수 있겠는가. 아이들을 키워 보면 한 배에서 난 아이들이라도 성질이 다 다르다. 그러니 어떻게 똑같이 모범적이고 본받을만 하게 되겠는가. 그러니 여기서 “너는 이래서 안되고 너는 저래서 안된다.”고 하면 되겠는가. 다 기가 죽어 버린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주눅들어서 못쓰게 된다.
어떤 사람이 형제가 넷인데 다 서울대 출신이고 자기 남편만 서울대를 못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그렇게 멸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국 그 아버지는 자기 회사를 그 아들에게 맡기게 되었고 그 아버지가 늙어서 병들면 이 며느리가 모시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출신만 추켜세우고 이 아들을 멸시했다고 한다.
병신 아들이 효자노릇한다는 속담이 있다. 꼭 그렇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아들보다 딸 낳기를 원한다. 딸 집에 살기는 쉬운데 아들 집에는 며느리가 있어서 어렵다. 여러분은 아들을 선호하지 말자. 딸이 더 좋다. 아들집에 있는 노인은 별로 없다. 다 딸네 집에 산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다.
나는 교회 덕택에 이렇게 둘이 살아도 밤이고 낮이고 형제들이 간병을 해 주니까 살고 있다. 우리 둘이는 이 집을 감당 못한다. 청소도 못한다. 그런데 자매들 몇이 와서 청소를 해주고 밤낮으로 형제들이 교대로 나를 지켜주고 있다.
이런 교회인데 나 때문에 갈라졌다니 총체적인 책임이 나에게 있다. 내가 성인군자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나를 보고 따라온 사람들은 나의 좋은 면을 보고 따라왔다. 나에게 나쁜 면도 있고 못볼 꼴도 있다. 내가 이것을 오늘 까발리려고 했는데 하지 말라고 해서 안하겠다.
정말 여러분에게 부끄러운 것이 있다. 이것을 까발리고 여러분에게 몰매를 맞을 각오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말라고 해서 구체적으로 말을 못하겠다.
여러분은 다 알 것이다. 루머가 퍼지고 있다. 내가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는데 막 퍼져가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내려가야 되기 때문에, 끝나야 되기 때문에, 내가 있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내가 내려가야 조용해진다. 그래서 오늘부로 강단에 서는 것을 마치겠다. 모든 것을 이제는 형제들에게 위임했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제일 나이 많은 형제, 초창기에 나와 같이 교회를 했던 형제, 이 형제가 아니면 교회가 될 수 없었던 형제, 이 형제를 형제들에게 맡기고 나는 오늘로 마감하려고 한다.
떠날 때가 되었으니 떠나야 한다. 왜 나이가 들어서 그냥 있냐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이 시끄러운 교회를 잠잠하게 하려면 내가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결정을 내렸다. 그 동안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잊을 수 없는 여러분들이다. 나에게는 여러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재산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여러분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여기는 객지다. 내가 여기 50년을 살았어도 어떤 사람들은 나보고 객지사람이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은 다 여기서 자라고 공부했어도 나를 객지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답답한 세상에 내가 끼어있는 것보다 차라리 나가서 홀로있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멀리 떠나고 싶지만 병 때문에 못 떠난다. 병원은 가까이 있어야 되지 멀먼 안된다. 이번에도 병원이 멀었으면 가는 동안에 죽었을 것이다. 산다 해도 시간이 지나서 간신히 깨어나면 한철이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잘 깨어날 때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못깨어난다. 죽기보다 쉬운 것이 없다. 죽은 줄 모르고 잠들어버린다. 병원이 가깝게 있지 않으면 집에서 잠들어서 편안히 죽어야 한다.
가스에 중독되어서 이산화탄소가 폐에 차면 혼수가 와서 죽는다. 이차대전 때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죽었다. 가스만들어오면 저절로 잠들어버린다. 내가 죽어보니
그러하다. 내가 죽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그렇게 편한 죽음이 없다. 목매달아 죽거나 약 먹고 죽을 필요가 없다. 가스만 들어가면 기분좋게 잠들어 버린다.
멀리 가고 싶다. 멀리, 조용한 데 가고 싶다. 나는 바닷가가 좋으니까 바닷가로 가고 싶다. 그런데 가까운 병원이 없어서 부득이 여기 있기로 했다. 내 눈은 이미 누군가에게 주기로 예약해 놓았으니 시체는 병원에 기증하려고 한다. 장례식은 없다. 안하려고 한다. 죽은 사람을 놓고 이러니 저러니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실험용으로 줘 버리고 가는 것이 낫지 이 육신 덩어리를 무엇에 쓰겠는가. 아무 데도 쓸 데가 없다.
나는 아주 홀가분하다. 여러분이 이제부터라도 이 복음 안에서만 산다면 나는 여한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못될 것 같아서 걱정일뿐이지 다른 걱정은 없다.
이재승 형제를 소개하고 마치겠다 재승 형제는 CCC간사로 본부에서 총재 영문 비서로 있다가 왔다 이재승 형제를 소개하고 마치겠다. 재승 형제는 CCC간사로 본부에서 총재 영문 비서로 있다가 왔다. 모자랄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를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없으면 원래 이 교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따라왔기 때문에 평생 모든 것을 교회에 넣었다. 아버지가 주신 유산도 교회에 들어갔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전세금도, 퇴직금도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다. 교회에서 150만원을 주다가 조금 올려주었는데 이제껏 그것을 갖고 살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더 똑똑한 사람도 있겠지만 교회 사랑은 이 형제만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 형제에게 맡기고 간다. 형제들이 다 그러기를 원한다.
원치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누구도 재승 형제만큼 교회를 사랑할 사람은 없다.
염경선 자매가 왔다갔다 했어도 교회사랑은 누구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염경선 자매에게 너무나 큰 사랑을 받았다.
이순희 자매에게도 너무 큰 사랑을 받았다. 원자 자매가 죽었는데 원자 자매가 수고를 많이 했다. 그리고 우순택이도 수고를 많이 했다. 그 위험한 길을 20년 동안 오갔다. 이화령 고개, 수십 길 낭떠러지 그 위험한 데를 일 주일에 한번씩 넘어다녔는데 너무 운전을 조심해서 잘했기에 나는 뒷자리에서 안심하고 잠을 잤다. 잠을 자고 나면 문경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수고하고 내 일을 대신해 주었는지 그 은혜도 잊을 수 없다. 만일 조금 잘못해서 방심했으면 교통사고로 죽었을 것이다. 이화령을 넘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슬아슬하다. 한번은 미니버스가 저 밑에 굴러떨어져 있었다. 트레일러가 급히 커브를 돌다가 맞은 편에서 오던 미니버스를 쳐서 수십 길 되는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아마 거기탔던 사람은 다 죽었을 것이다.
그런 아슬아슬한 길을 다녔다.
지금은 터널이 뚫어져서 그런 위험이
없게 되었는데 그전이었으니까
나는 그 터널을 다녀본 적이 없다.
지리산도 그렇게 넘어다녔다. 한 주는 정읍, 남해안 쪽으로 한주는 서울 방향으로 2주에 한번씩이지만 나는 매주 갔던 셈이다. 돌아오면 그날이 목요일이었다. 그날부터 집회를 해서 주일날 낮까지 집회를 했고
오후에 다시 출발해서 서울로 올라갔다.
이런 식이었다.
이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고 나를 위해서 봉사한 사람들이 많은데 제일 교회를 사랑한 사람은 이재승 형제다.
지금 함께 있다면 끌어앉고 울고 싶다. 여러분이 내 대신 섬겨주면 좋겠고, 반대측에 있는 사람도 이것을 인정해 주시면 좋겠다. 더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시기 바란다. 지금은 교회가 좋지 않은가. 번듯하고 자랑할만 하다.
ㅣ
내가 이재승 형제를 추천하는 것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을 하자면 끝이 없다. 어차피 여러분이 다 아실 것이다.
내가 가진 문제점이 많다.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루머도 엄청나게 많다. 진위를 다 가려내려면 너무나 치사하고복잡하다. 그래서 안하고 덮어두기로 했다.
전부 진실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내가 다 뒤집어쓰고 가겠다. 다시는 이런쓸데없는 소리, 거짓말은 안했으면 좋겠다. 참말이라도 나를 위해서 덮어주기 바란다. 이것이 내 마지막 부탁이고 소원이다. 감사하다. 안녕히 계시기 바란다.
손을 흔드는 분이 없어도 괜찮다. 여러분은 안심하고 복음만 지켜 주시기 바란다. 복음을 지켜주는 것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다. 우는 것보다 복음을 지키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길이다. 이것은 나를 위한 길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길이다. 알고 보면 여러분이 사는 길이 이 길이다. 예수와 연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예수와 연합이 안된다. 우리의 목표가 예수와 연합하는 것이다. 예수와 연합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바로 연합하는 길이다. 이것을 모르면 평생 예수를 믿어도 헛일이다. 내가 해 보지 않았는가. 과정을 겪어도 헛일이다.
과정을 거쳐도 열매가 안되면 헛일이다.모든 것은 열매에 달렸다. 타작마당에 달렸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죽정이는 모아 불태운다고 하셨다. 타작마당, 이것이 심판장이다. 그냥 심판장이 아니라 알곡을 모으는 좋은 심판장이다. 아주 좋은 심판장이다.
오늘 이 자리가 아주 좋은 자리다. 우리가 일생에서 단 한번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다. 그러니 여러분은 절대로 딴 생각하지 마시고 나를 축하해 주시기 바란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