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인물 탐구 - 오도일, 이관명, 윤지술
■ 귀양가면 그곳에 술이 있느냐고 물은--오도일
오도일(1645~1703)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관지, 호는 서파다. 현종 14년(1673)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을 하였다. 시문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하여 사람들로부터 동이 삼학사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였다. 언제가 숙종은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오도일은 술을 너무 좋아하여 고질병이 되었는데 도 깨닫지 못하니 안타깝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계주시(술조심을 깨우치는 시)를 소개한다."
성군의 은총이 지극하여
급제의 영광을 받았고
어머니의 자애가 깊어
오래오래 수하시네
임금의 은혜와 어머니의 사랑을
어느 한쪽도 갚지 못하였는데
만약 술 때문에 병이 난다면
뉘우친들 돌이킬 수 있으랴
계속하여 숙종이 하교하였다. "이 계주시를 늘 읽고 정신을 차린다면 어찌 술에 실수할 일이 있겠느냐?"
이러한 전교를 받은 오도일은 깊이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고질이 된 술버릇을
지금까지 끊지 못하고
무릎 끊고 전교를 읽으니
눈물만 흐른다네
뼈에 맺힌 깊은 은혜
무엇으로 갚을까
죽기 전에 오로지
지은 죄나 반성해야지
숙종 28년(17020 민언량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성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귀양 가던 날도 오도일은 만취가 되어서 자신을 호송하려 온 의금부 나졸들에게 말했다.
"장성에 가면 소주가 있느냐?"
"소주야 어디에 간들 없겠습니까."
나졸들이 대답하자 오도일이 말했다.
"그래? 그래! 소주만 있으면 됐다."
천안역을 지날 때 천안 군수가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니, 오도일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작별의 정으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달랠 길 없었는데
마침 이곳 천안 군수가
술병을 갖고 왔네
나는 술이 좋아
이날까지 평생을 마셨지만
오늘 마시는 이 술은
영원히 못 잊겠네
오도일은 장성까지 가는 동안 음식은 먹지 않고 오직 술만 먹었다. 정작 귀양지에 도착한 그는 며칠 못 가서 죽었다.
시인 유도삼이 다음과 같은 만시를 썼다.
대사마1)가 가셨으니
그 시혼은 어디에 노니실까
멱라수2)로 머리를 돌리니
맑은 바람이 잇달아 불어오네
1) 대사마:병조 판서, 즉 병조 판서를 지낸 오도일을 일컬음.
2) 멱라수:중국 호남성 북쪽에 있는 강. 초나라 삼려대부인 굴원이 혼탁한 세상을 비관하여 물에 빠져 죽은 곳으로 유명함. 여기서는 오도일을 굴원에 비유함.
유도삼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어느 날 밤에 낙산사에서 시를 짓고 노는데 갑자기 절 밑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시를 잘한다는 감사의 시솜씨가 가소롭구나!"
이상하게 여긴 유 감사가 속으로 놀라면서도 억지로 태연한 척하고 이어서 시를 읊조리자 또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다시 놀란 유 감사는 즉시 하인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였더니 하인은 돌아 와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다른 사람은 없고 웬 소금 장수가 돌멩이를 베고 누워 잡니다."
유 감사는 즉시 소금 장수를 데려오게 한 뒤에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감히 나를 비웃느냐?"
"예 사또께서 좋은 시를 짓지 못하시고 끙끙대기만 하기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어째? 좋다! 그러면 네가 한번 좋은 시를 지어 보아라. 만약 당장 좋은 시를 짓지 못한다면 관장을 비웃은 죄로 곤장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유 감사의 말 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금 장수는 한 구절을 지었다.
큰바다는 동남쪽으로
하늘에 떠 있고
일만 이천 기이한 봉우리는
대지 위에 꽂혔네
그의 시솜씨에 깜짝 놀란 유 감사는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말했다.
"과연 기재로다. 성명이 무엇이오?"
"천인의 성명을 알릴 필요야 없지요. 제 성은 오가입니다."
오도일의 혼이 소금 장수로 나타났음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 덕천에 귀양 가서 관아의 뜰을 청소한--이관명
이관명(1661~1733)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자빈, 호는 병산이다. 숙종 13년 (1687)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세마에 보임되고 외직으로 함열군수가 되었다. 숙종24년(169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관명이 옥당의 교리로 당직하고 있을 적에 그의 아우 한포재 이건명이 강화유수에 발탁되어 사은(임금의 은혜에 사례함)한 뒤에 금관자를 달고 옥당에 들렀을 때 동료들이 그의 형을 놀리며 말하였다.
"아우는 재상이 되었는데 형은 아직 옥당에서 당직을 하고 있다니, 어찌하여 태어나기는 먼저 태어났는데 벼슬은 뒤진단 말인가?"
이관명이 태연하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다른 욕심 없이 오직 벼슬살이만 한다면 나의 교리 벼슬이 어찌 유수만 못하겠는가. 단지 죽은 뒤에 명정이나 자손들의 영화를 뽐내는 데 쓰일 뿐이지!"
경종 2년(1722)에 아우 이건명이 극형을 받자, 그도 연좌되어 덕천에 유배되어 종의 신분으로 패랭이를 쓰고 베옷을 입고 날마다 관아의 넓은 뜰을 깨끗이 비질을 하고 물러나와서는 종일토록 관문을 열심히 지키고 있었다. 군수가 그만두기를 청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직분을 다하였다.
영조 1년(1725)에 방면되어 돌아와서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가고 대제학을 지냈다. 시호는 문정이다.
■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있다고 할 만한--윤지술
윤지술(1697~1721)의 본관은 칠원이고 자는 노팽, 호는 북정이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의 장의로 경종 1년(1721)에 상소를 올려, 대행왕(승하하여 묘호가 정해지기 전의 임금, 여기서는 숙종을 일컬음)의 묘지문을 지은 이이명의 잘못을 탄핵하다 화를 당하게 되었다. 숙야재 민익수, 정암 민우수가 윤지술이 죽은 후의 뒷일에 대한 수습에 대해 큰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숙야재는 그 딸을 윤지술의 아들 윤일복에게 시집 보내고, 정암은 그 부인을 보내어 윤지술의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게 하였다. 또 윤일복에게 글을 가르치려 하였으나 그가 글을 배우려 하지 않으므로 정암은 그를 가르치기 위해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우거하여 그의 집에 가서 가르쳤다. 이와 같이 이 두 사람은 죽은 사람이 가히 다시 살아 있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다.
이 때 병계 윤봉구가 문화현령이 되었는데, 윤지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옛날 책["맹자"의 이루 편]에 이르기를, '까닭없이 선비가 죽으면 대부는
떠나가야 한다' 하였다. 내가 비록 대부는 못될망정 때를 보아 떠나가야 겠다."
그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