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 세상을 꿈꾸며/靑石 전성훈
길 위의 인생, 나그네는 그 어떤 날씨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햇볕이 쏟아지는 맑은 날에도, 하늘이 노하여 앞을 가름하기 어려운 날씨에도 아무 말 없이 길을 떠난다. 봄바람이 불어 봄비가 내리든, 한여름 소나기가 빗발치든, 가을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든, 겨울의 소식을 전하는 소담한 함박눈이 내리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세찬 비바람이나 폭풍 한설이 쏟아져도 때가 되면 나그네는 미련을 버리고 길을 나선다. 다른 세계를 찾아가는 인문학 기행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되면 아는 얼굴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함께 길을 떠난다.
비 내리는 컴컴한 아침에 전라남도 화순으로 향한다. 두 달 만에 재개된 인문학 기행, 열성적인 분들은 꼭두새벽부터 나와서 버스를 기다린다. 오전 6시 40분경 도봉문화원을 출발한 버스는 시내를 거쳐 한 시간 정도 달려서 서초동 고속도로 입구에 도착한다. 비가 갤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가운데 눈을 감고 잠시 쪽잠을 청했는데, 어느 틈에 망향휴게소라고 안내를 한다. 뜨거운 어묵을 사 먹고 아침 약을 삼킨다. 혈압약, 통풍약 그리고 위내시경 검사로 위염 증세가 있다고 처방해준 약까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종합병동 같은 모습이다. 세월 따라 몸도 마음도 이렇게 늙고 쇠잔해지는가 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다. 버스가 충청도 땅으로 들어서니 차창 밖에는 푸르디푸른 논밭이 펼쳐진다. 이앙기로 모를 낸 논에는 반듯하게 자로 잰 듯이 좌우로 나란히 나란히 벼가 자라고 있다. 논밭에는 간혹 비닐하우스가 몇 동씩 지어져 있는 모습도 보인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었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하다. 공주를 거쳐 논산을 지나는 버스는 막힘없이 신나게 달린다. 잠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다가, 문화원에서 배포해준 문화탐방 자료를 읽어본다. 오늘 탐방 코스는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 고인돌 유적지 그리고 운주사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곳은 꼭 7년 전 이맘때에 다녀갔던 곳이다.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고 나서 선사시대 고대인의 무덤인 고인돌 유적지로 향한다.
화순 고인돌 유적지는 전북 고창 및 강화도 고인돌 유적지와 함께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화순 고인돌은 고인돌을 채석한 채석장이 주변에서 발견되어 고인돌 축조과정에 대한 종합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화순 고인돌은 남쪽 산기슭을 따라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를 잇는 보검재(해발 188.5m) 계곡 일대 약 4km 범위 안에 분포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고인돌의 군집에 따라서 화순 고인돌의 이정표인 괴바위 고인돌군, 거대한 고인돌 시대의 사회구조를 보여주는 관청바위 고인돌군, 밤하늘의 달과 별의 모습을 상징하는 달바위 고인돌군, 화순 고인돌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약 200톤 이상으로 추정하는 마고할머니의 다양한 전설을 간직한 핑매바위 고인돌군, 고인돌 축조의 종합전시장인 감태바위 고인돌군, 고인돌 발굴지 보호각이 있는 대신리 발굴지 등 596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지석묘(支石墓) 또는 고인돌로 불렀으나, 지금은 손진태선생이 제안한 순수 우리말 명칭인 고인돌로 부르고 있다.(도봉문화원 및 화순군 관련 자료 참조)
고인돌 유적지를 떠나서 천불천탑(千佛千塔)으로 유명한 절, 빗소리에 묻혀 적막감이 감도는 운주사를 찾는다.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새벽닭이 울어 공사를 중단했다.”는 도선선사의 창건 설화로 알려진 운주사에는 100여기의 돌부처와 21기의 석탑이 있다. ‘영귀산 운주사(靈龜山 雲住寺)’, 일주문에는 돌거북 한 마리가 절집을 찾는 중생을 반갑게 맞이한다. 함께한 일행들은 부부 와불(臥佛, 와형 석조 여래불)을 보려고 산길로 올라가고, 다리가 아파서 뒤떨어져 천천히 걷다 보니 아무도 없이 나 홀로 걷는다. 운주사에는 천불천탑의 마지막 불상으로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의 부부 와불(臥佛)있는데, 부처 모습을 만들면서 미쳐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불상이라고 한다. 이 ‘와불’이 일어서면 세상이 바뀐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힘든 세월을 살아가는 백성 사이에 새로운 세상이 왔으면 하는 간절한 염원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경내의 문화재인 원형다층석탑(일명 연화탑), 굴미륵석불, 9층석탑 및 원구형석탑, 석조불감 등을 둘러보고 대웅전으로 향한다. 목이 떨어져 나간 돌부처를 바라보며 한 많은 중생의 삶을 떠올린다.
비가 뿌리는 탓에 습도가 높아 온몸이 끈적끈적하다. 대웅전 처마 밑에 앉아서 비를 피하며 구름에 싸인 하늘을 쳐다본다. 새소리마저 끊어져 적막강산 같은 법당 마루를 수행하듯이 열심히 걸레질하는 중년의 보살 모습을 보니 저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계속되는 비로 흥건히 물기를 머금은 소나무는 푸르름이 넘쳐서 애처롭기까지 하다. 사계절 늘 같은 형상으로 살아가는 소나무의 본성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일행 모습을 바라보며 대웅전 뜰 아래로 내려서니 간간이 내리던 비가 그친다. 언제쯤 누워계신 와불이 일어나서 불쌍한 중생을 구원해줄 미륵 세상을 이 땅에 펼쳐주실는지 자못 기대가 크다. (2023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