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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일생일대의 라이벌이 누구였는가를 묻는다면, 중국인이든 누구든간에 열에 여덟, 아홉은 당연하게도 "모택동"을 꼽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장개석이 평생에 걸쳐 경쟁했던 상대는 모택동이 아니라 왕정위라는 사람입니다.
현재 중국인들에게 왕정위는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로 "중국의 이완용"이라 불릴만큼 경멸의 대상이지만 한때는 청조를 무너뜨리고 새시대를 연 혁명1세대로서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왕정위는 꽃미남에 학식과 지성을 갖추고 달변가로 이름을 날려 당대 지식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중국 근대사 최고의 사상가였던 호적조차 왕정위에게 반하여 "그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것이 아쉽다. 그래도 사랑스럽다"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그의 본명은 "왕조명"으로, 일본 유학시절 손문의 "중국혁명동맹회"의 결성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이후 귀국하여 당시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아버지이자 섭정이었던 순친왕 재풍을 폭탄으로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됩니다.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무너지자 그는 풀려났고 그때부터 손문의 오른팔이 됩니다. 4살 연하의 장개석이 뒷골목을 맴돌며 백수건달로 살아갈때 그는 이미 국민당내에서 주요 요직을 거치며 사실상 손문 다음의 위치에 올라있었죠.
후에 동서지간이 되는 손문과 장개석. 손문은 신해혁명전 동경에서의 망명생활중 상해도독이었던 진기미를 통해 당시 일본에 유학온 장개석을 소개받아 처음 만납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귀국한후 상해에서 증권사에 취업하여 인생을 출발했으나 많은 증권사 직원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주식으로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됩니다. 그가 손문의 혁명정부에 가담한 것은 몇년후였고 군벌들과의 전쟁에서 군사적 재능을 보이기는 했으나 왕정위, 요중개 등 손문 주변의 쟁쟁한 정치가들에 비한다면 감히 명함도 내밀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되면서 군권을 쥐게된 그는 급속도로 세력을 키워나가게 되죠. ※ 사진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대명출판사
1924년 5월 황포군관학교를 수립할때만해도 장개석은 왕정위에게 "몇년전만 해도 나는 혼돈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라고 편지를 보냈을만큼 한낱 애송이에 불과하였고 반면 왕정위는 그의 상관이자 손문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였습니다. 1925년 3월 12일 북경에서 장작림을 만나 내전중지와 남북 평화회담을 추진하던 손문이 간암으로 죽자 왕정위는 손문의 장례식을 직접 주관하여 자신이 손문의 후계자임을 대외적으로 각인을 시킵니다.
그러나 곧 국민당내 원로이자 광동군벌인 호한민, 요중개, 허숭지 등과 대립하였고 휘하에 아무런 무력이 없는 그로서는 황포군관학교장이었던 장개석과 손을 잡아 정치적 라이벌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1925년 6월 15일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왕정위가 주석으로, 장개석은 7인의 군사위원회의 위원이자 광주위수사령관 겸 제1군의 군장이 됩니다. 그러나 이 둘의 밀월관계 역시 이른바 "중산함사건"으로 깨졌고 권력다툼에서 패한 그는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평생에 걸쳐 반복되는 장개석과의 대립과 연합의 시작이었을뿐입니다.
※ 중산함사건 : 장개석은 국민정부 해군국 국장이자 공산당원인 이지룡이 중산함을 이용해 자신을 블라디보스톡으로 납치 감금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보고를 받자 1926년 3월 20일 새벽 3시 기습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병력을 동원해 이지룡을 체포하고 소련 고문단과 공산당원들을 구금한 사건입니다. 장개석은 이 음모가 왕정위와 공산당이 꾸민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 국민당은 두쪽으로 분열되어 장개석의 우파세력과 왕정위의 좌파세력간의 충돌직전까지 갔으나 모스크바에서 타협할 것을 지시합니다. 따라서 좌파측이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국민당내 공산당과 소련의 영향력은 대폭 축소됩니다. 장개석은 누구보다도 빠른 판단력과 추진력을 보여주었고 왕정위로서는 만만하게 봤던 장개석에게 완전히 한방 먹은 격이었죠.
당시 중산함의 모습. 청일전쟁으로 청해군의 대부분이 전멸한후 청나라는 해군재건계획을 추진합니다. 그중 일본에 68만엔의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 이 중산함이었는데 인도된 시기는 청나라 망한후인 1912년이었습니다. 원세개는 "영풍"이라고 명명했으나 1917년 원세개의 칭제에 대항하여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손문측에 가담합니다. 1925년 손문이 죽자 그를 기념하기 위해 장개석이 손문의 호를 따 "중산"이라고 명명합니다. 배수량 780톤에 승무원은 140명, 주무장은 101mm, 76.2mm 포 각 1문 등 한마디로 연안용 포함수준이었고 38년 10월 무한전역에서 일본폭격기들의 공습을 받아 격침당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외교부장 진우인을 일본으로 보내 비밀리에 교섭을 추진하고 "일본이 광동정부를 승인한다면 중일양국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논의할 수 있다", "만주에 대해서는 자치를 허용하되 그 지배에 대해서는 일본군에게 의존하고 싶다"는 등의 친일매국적인 제안을 합니다. 물론 당시 시데하라 외상과 일본정부는 남경정부를 정통으로 보고 있었기에 왕정위의 제안을 거부하였고 왕정위가 일본과 몰래 밀실회담을 했다는 의혹이 퍼지자 도리어 "반일"을 외치며 "친일적인 장개석 타도"운운하며 역공을 펼칩니다.
결국 장개석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왕정위가 요구하는대로 하야하였고 손과-왕정위 연합정권이 수립됩니다. 그러나 얼마안가 장개석은 도로 복귀하였는데 무력이 없는 왕정위는 어차피 장개석 없이는 단 하루도 군벌들을 통제하며 정권을 유지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장개석 역시 국민당의 원로인 왕정위의 영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서로 견제하고 미워하는 사이이면서도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두사람 다 남밑에 있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연합정권은 매번 오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왕정위와 장개석의 커플사진. 장개석이 왕정위보다 4살 연하인데도 훨씬 나이 들어보입니다. 장개석이 왕정위 아버지라고 해도 믿을만큼 노안인 반면 왕정위는 당대 최고의 꽃미남소리를 듣던 사람답게 훨씬 젊어보이죠.
만주사변이후에도 일본은 침략을 점점 노골적으로 확대하면서 화북을 위협하자 장개석은 "일본의 목적은 남경정부을 전복시키고 중국을 해체하려는 것"이라며 단호히 맞설 것을 주장했으나 행정원장으로서 대일교섭을 맡고 있던 왕정위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화북은 물론 상해, 남경까지 위험해질 것"이라며 현실론을 내세워 일본의 모든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결국 장개석은 동의할 수 밖에 없었고 "하메협정"이 체결됩니다.
왕정위는 "국민들이 당장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 일본과의 전쟁을 주장하고 있지만 중국이 무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 없는 이상 우선 역량을 키워야 하며 전국의 역량을 한 군데로 집중하고 실력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칩니다. 물론 장개석 역시 이런 왕정위의 현실론을 인정하고 지금으로서는 일단 공산군 토벌과 정권의 안정에 주력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기에 동의한 것이었으나, "일면저항, 일면교섭"을 주장하는 왕정위는 국민정부내에서 대표적인 친일 유화파로 통하게 되었고 대일정책을 놓고 영미파인 송자문과 여러차례 충돌하게 됩니다. 일본 외무성과 군부 역시 장개석에 대해서는 극도로 불신한 반면, 왕정위에 대해서는 친일파로 보고 있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완전히 친일매국노로 낙인찍힌 그는 국민적인 존경의 대상에서 암살의 표적으로 전락합니다. 35년 11월 1일 남경에서 국민당 제6차 전당대회가 개최되었을때 단체 사진촬영을 하는 과정에서 한 기자한테 총격을 받아 3발의 총탄이 그의 몸에 명중합니다. 한발은 그의 왼팔을 스쳤고, 한발은 그의 왼쪽빰에 박혔으며 또 한발은 척추 주변에 박혔습니다. 이 척추 주변에 박힌 총알은 결국 제거하지 못했고 이때문에 결국 나중에 골수 종양이 생겨 사망하게 됩니다.
범인은 상해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던 제19로군 소속의 장교출신으로, 우익단체의 멤버였습니다. 정부가 일본의 침략을 묵인하고 있다며 불만을 품고 있었던 그는 장개석과 왕정위 두사람을 "친일의 괴수"라고 보고 일차목표로 장개석으로, 두번째 목표를 왕정위로 정하고 있었는데 촬영장소에 장개석이 없자 왕정위를 저격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일본의 침략에는 저항하지 않고 내전에만 광분하고 있다"라는 비난은 장개석 입장에서는 명백히 부당한 것이었는데, 그는 결코 일본의 침략에 손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마다 초공전을 중단하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습니다. 단지 피아간의 차이가 너무나 컸기에 이길 수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그는 상해, 열하, 장성전투에서 직속 최정예 부대를 투입했음에도 큰 희생만 치루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또한 두차례에 걸친 이종인의 반란(양광사변)에 대해서도 무력 진압 대신 장개석은 일본의 침략에 단결해서 맞서야 한다면서 정치적 타협을 택하였습니다.
반면 왕정위는 상해사변과 열하사변, 이후 장성에서의 전투에서 중국군이 연전연패하자 점점 패배주의에 빠져들었고 심지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본들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마음의 안위를 삼기 위해서 저항해 보았을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장개석의 군사력 증강 정책이나 송자문이 중국경제의 대일종속성에서 벗어나려는 것에 대해서도 일본을 자극하여 침략을 불러올뿐이라며 반대합니다. 그의 저자세 외교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졌음에도 그는 이런 생각을 끝까지 바꾸지 않았죠. 오히려 자신의 유화정책이 실패한 것에 대해 "교섭과 저항을 동시에 하였기 때문에 둘다 실패한 것이다"라고 마치 저항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유도했다는 식으로 엉뚱하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암살 사건이후 그는 유럽 휴양을 내세워 홍콩을 통해 독일로 가는데 목적은 중국, 일본, 독일 3국의 방공조약을 수립하고 독일을 통해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장개석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을 떠돌고 있던 그에게 36년 12월 12일 중국에 남아있던 부인 진벽군이 "서안사변 발발"이라는 긴급 전문을 보냈고 그는 "할렐루야"를 외치며 급히 귀국길에 올라 12월 18일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중국행 배를 탑니다. 그러나 12월 25일 장개석은 석방되어 남경으로 돌아왔고 왕정위는 그 사실을 한참 수에즈 운하를 지나가고 있을때 알게 됩니다. 그는 37년 1월 14일에야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독일 퀠른의 나치당사를 방문한 왕정위.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왕정위는 장개석과 면담한후 1월 28일 행정원장 자리에 다시 복귀하여 군권은 장개석이 정무는 왕정위가 맡는 형태의 연합정권이 다시 수립됩니다. 그런데 왕정위는 장개석의 "국공합작"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고 "용공은 후환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 눈앞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것일뿐"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대일강경론과 주전론에 대해서도 여전히 반대하였고 일본과의 타협과 양보만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주장합니다.
노구교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왕정위는 표면적으로는 장개석의 항일방침에 찬성했으나 뒤로는 외교적인 교섭으로 해결할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합니다. 여론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에서 대표적인 "친일파"로 알려진 자신이 이 시점에서 타협론을 말했다가는 자칫 국민의 공적(共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겉으로만 타협론을 버린 것처럼 했을뿐 "싸워본들 이길 수 없다"는 패배주의와 비관주의를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국민정부 선전부장(우리의 장관에 해당)인 주불해를 비롯해 호적, 고종무, 웅식휘, 진공박 등 국민당내 일부 인사들도 "항일주장은 무책임한 히스테리일뿐"이라며 왕정위의 주화론에 적극 찬동합니다. 특히 주불해는 "중국은 일본과 비교해서 어떤 면에서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장개석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면서 장개석의 "지구전략"에 대해서도 "일본이 고통을 느낄때쯤이면 중국은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며 매도합니다.
주불해(1897~1948) 젊은 시절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대회 1기 멤버이기도 했으나 곧 탈당하여 국민당에 가담하였고 손문의 측근이 되어 추상적이고 모호했던 삼민주의 이론을 체계화하는데 큰 공을 세웁니다. 장개석정권에서도 국민정부 부주석, 행정원 부원장, 재정부장 등 두루 요직을 거칩니다. 그러나 장개석의 주전론에 반발하여 왕정위와 손을 잡았고 그와 함께 중경을 탈출하여 남경괴뢰정부 수립에 가담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자 그는 친일부역자로서 체포되었고 1948년 2월 28일 옥사합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왕정위와 함께 매국노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죠.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이들은 소위 "저조구락부"라는 조직을 결성하였고 암암리에 왕정위를 중심으로 뭉쳐 일본과의 화평운동과 비밀교섭을 준비해 나갔고 또한 "반공"이라는 명분을 내걸어 반장개석세력과 반공인사들을 대거 포섭하며 세력을 확대합니다.
중일전쟁 발발후 1년동안 중국군은 연전연패하고 광주, 무한마저 함락되자 왕정위는 이제는 자신의 화평론만이 중국의 살길이라며 "일본이 중국의 독립을 인정한다면 언제라도 화해할 수 있다"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합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완전히 궤변으로, 일본의 목적이 중국 전체를 장악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음에도 그 사실을 굳이 외면한채 일본의 선처에만 매달리겠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중국이 비록 광대한 영토를 빼앗겼지만 그 과정에서 무기력하게 패주한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저항함으로서 일본군도 예상을 뛰어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그들의 진격이 점점 둔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간과한 것이었죠.
남경함락직후 일본이 독일을 통해 제시한 화평조약이 매우 가혹하자 장개석은 이를 거부하였고 38년 1월 16일 고노에 수상은 "장개석정권과는 대화하지 않는다"라며 주중대사를 소환합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왕정위는 본격적으로 일본과 비밀교섭에 나섭니다. 38년 3월 27일 국민정부 외교부 아주국장이자 왕정위파인 고종무는 홍콩에서 일본측과 만나 "만주와 내몽고에 대해서는 일단 덮어두고 장성이남의 중국의 주권을 인정해준다면 화평하겠다"라고 제안합니다. 그는 장개석으로부터 승낙을 받았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왕정위의 지시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11월에도 고종무, 매사평 등이 상해에서 일본측과 만나 교섭을 하였는데 여기서 본격적으로 왕정위의 망명계획이 논의됩니다.
"왕정위는 진공박 등 주화파들과 함께 중경을 탈출하여 곤명을 거쳐 홍콩으로 망명한후 장개석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여기에 호응하여 운남, 사천이 독립을 선포한다. 그리고 운남, 사천, 광서, 광동 4개성을 기반으로 왕정위의 신정권을 수립한다"
일본으로서도 이런 왕정위파의 제안은 그야말로 반가운 것이었는데 무한, 광주를 함락시켰으나 오히려 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이것은 일본의 당초 예상과는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막대한 전비 부담은 일본 경제에 심한 타격을 주었고 영미 등 서구열강으로부터 대량의 군수품을 수입함으로서(특히 미국) 38년 7월이 되면 이미 외화보유고가 절반으로 감소하여 엔화의 가치가 폭락합니다. 따라서 전쟁의 장기화는 일본으로서도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죠. 만약 국민당의 부총재이자 행정원장이며 혁명가로서 명성이 높은 왕정위가 화평교섭에 나선다면 장개석과 중국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열될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육군상 이타다키 세이치로 중장(만주사변 당시 관동군 참모장으로 만주사변을 주도했던 바로 그 양반)을 비롯해 일본 정부는 새로운 방침으로서 "장개석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인물로 신정권을 수립하자"라고 결정하는데 이 새로운 인물이 바로 왕정위였습니다.
11월 20일 상해 중광당에서 일본과 왕정위측간에 이른바 "중광당밀약"이 조인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중일방공협정의 체결과 이를 위해 내몽고와 평진지구에 대한 일본군의 주둔 인정
2. 일본인의 내지거주 및 영업의 자유 인정
3. 만주국 승인
4. 경제제휴에서 일본의 우선권 인정 및 화북자원개발 및 이용에서 특별한 편리 제공
5. 일본은 중국에 대해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중국은 일본거류민이 입은 피해를 보상한다
6. 일본군은 2년이내에 현재 점령지구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일본의 목적은 중국 국민정부를 분열시키는데 있었고 소위 왕정위정권이란 이를 위한 한낱 일시적인 수단이자 괴뢰정권으로 보고 있었으나 자신만이 중국을 전란에서 구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왕정위는 일본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왕정위가 간과한 사실은 자신이 항전이냐, 타협이냐를 놓고 장개석과 대립하고 있듯, 일본 역시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고 관동군을 비롯한 강경파들은 오로지 무력을 통해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계산 착오가 되었고 따라서 스스로 "제2의 부의"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택한 것이었죠. 계산 착오인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자신이 들고 일어서기만 하면 운남과 사천의 군벌들도 죄다 들고 일어날 것이라는 왕정위의 말과는 달리 어느 누구도 왕정위의 괴뢰정권에 가담하지 않았고 장개석의 지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으로서도 왕정위정권은 한낱 괴뢰정권이상의 의미가 없었지만 왕정위는 그야말로 자신의 정치인생에서 최악의 오점을 찍은 격이었습니다. 마지막 황제 부의는 그나마 동정의 여지라도 있지만 왕정위는 어떻게 보더라도 "조국을 배신한 변절자"나 다름없었고 그의 화평론은 "매국투항이론"으로 비판받게 됩니다.
왕정위는 장개석에게 강연을 핑계로 성도로 출장간다고 하고서는 12월 18일 부인과 소수의 측근들을 데리고 중경에서 빠져나와 곤명으로 갑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장개석은 당시 전선 시찰을 위해 서안에 가 있었는데 갑자기 운남성장인 용운으로부터 "왕정위가 예고도 없이 곤명에 와서는 일본과의 화평운운하며 협력을 요구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보고가 들어옵니다. 깜짝 놀란 장개석은 자신은 왕정위와 그런 논의를 한 적도 없으며 일본과는 화평을 논할 여지가 없다는 전보를 용운에게 보내고 급히 중경으로 귀환합니다. 그리고 왕정위는 화평을 논할 자격도 없고 중국은 화평은 커녕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하여 공모설을 부정합니다.
왕정위가 곤명을 거쳐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하자 12월 22일 고노에 수상은 소위 "대중 근본방침"을 선언합니다. "중국은 만주국을 승인하며 중일방공협정을 체결하여 일본군은 내몽고를 비롯한 특정지점에 주둔권을 가진다"라는 등의 왕정위와 맺은 "중광당밀약"과 동일한 내용이었으나 한가지 다른 점은 일본군의 철병에 대해서는 쏙 빠졌다는 것이었죠. 이는 일본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왕정위의 망명에 대해 "그의 어리석음과 천박함이 그 정도까지 추락할줄을 미처 몰랐다. 그처럼 파렴치하고 퇴폐적인 인물을 가진 것은 당과 국가의 불행이다"라며 자신의 일기를 통해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던 장개석은 39년 1월 1일 그의 당적을 삭제하고 모든 지위에서 해임할 것을 결의합니다. 또한 용운에게도 왕정위는 매국노이며 그의 음모에 동요하지 말것을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왕정위는 이른바 구국방공동맹회와 이를 위한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고 일본이 점령지역에 수립한 여러 괴뢰정권을 흡수하여 신정권을 수립한다는 계획을 만들어 고종무를 통해 일본과 교섭을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3월 21일 장개석이 보낸 특무요원이 그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왕정위는 간신히 피했으나 대신 그의 비서인 증중오가 피살됩니다. 신변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왕정위는 일본이 보낸 화물선을 타고 5월 5일 당시 일본 점령지역인 상해로 갑니다.
그는 상해에 도착한 후 본격적으로 신정권 수립을 추진합니다. 그리고 40년 3월 30일 남경에서 소위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수립됩니다. 여기에는 왕극민의 북평정권과 양홍지의 남경정권, 몽강정부 등 그동안 일본에 의해 수립된 친일 괴뢰정권들을 모두 복속시켰고 왕정위는 주석대리 겸 행정원 원장, 주불해는 부주석 겸 행정원 부원장, 진공박은 입법원 원장, 양홍지는 감찰원 원장, 왕극민은 화북정무위원회 위원장으로 각각 한자리씩 차지합니다.
북양군벌의 거두였던 오패부. 장개석의 북벌군에게 패배한후 북평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왕정위외에 화북에서 상당한 명성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오패부에 대해서도 회유 공작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원래 반일성향이 강했던 오패부는 이를 거부했고 일본의 미움을 사 1939년 12월 4일 충치 치료를 위해 일본인 병원에 입원했다가 급사합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그러나 이 과정에서 왕정위는 일본과 많은 갈등을 겪게 되는데, 그가 내세운 명분이 "중국 주권의 존중"과 "일본군의 철수"였으나 정작 일본은 이에 대해 애매모호한 자세만 고수합니다. 일본군의 철수에 대해서도 중광당회담에서는 "2년이내의 철수"를 약속했음에도 이후에는 이 대목이 쏙 빠져버렸고 왕정위측이 여기에 대해 분개하자 일본은 군의 반발이 심하여 부득이했다는 식으로 답변합니다. 또한 왕정위는 6월에 동경을 방문하여 일본정부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이 두가지에 대해 일본이 구체적으로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대답을 회피한채 얼버무립니다.
사실 일본은 왕정위의 방일 직전에 내부적으로 "신중앙정부수립에 대한 방침"을 결정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철저하게 중국을 여러개로 분리시키고 친일괴뢰정권을 수립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왕정위는 자신들의 중국 통치에 필요한 한낱 이용물에 불과한 것이었죠. 왕정위의 머리속에 있던 구상과 일본이 생각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중국 분할 계획에 따라 남경정권의 통치구역 역시 일본이 장악한 화남과 화중일대의 점령지구로 국한되었고 화북과 내몽고에 대해 "국방상 특수한 지위"로 설정되어 제외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정위가 주장했던 중국의 주권 존중은 철저하게 무시되었죠.
붉은색 지역이 왕정위정권의 통치구역. 아무런 독자성도 없었고 일본에 철저하게 예속되었다는 점에서 만주국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독일도 장개석정권과의 관계를 고려해 이 괴뢰정권에 대한 승인을 보류하고 있다가 41년 7월에 와서야 승인하였고 미, 영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들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왕정위 남경정권의 국기. 왕정위는 자신의 정권이 결코 일본의 괴뢰정권이 아니라 중국의 정통정권이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손문이래 중국의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본은 장개석정권과 구분하기 어렵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청천백일기위에 황색기를 다는 것으로 합의를 봅니다.
결국 그는 당초 기대와 달리 한낱 괴뢰정권의 수장이었을 뿐이었고 부의처럼 아무런 권한도 없는 일본의 꼭두각시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정권에 가담한 이들도 고색창연한 청말, 북양군벌시절의 관료들과 부귀영화에 눈먼 친일파들이었죠. 게다가 양홍지를 비롯해 기존의 괴뢰정권에 가담해 있던 이들은 왕정위일당이 뒤늦게 빈손으로 와서 자기들끼리 독식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며 극도의 불만과 경계심을 품고 있었고 서로 심한 갈등을 빚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일본의 태도에 실망한 고종무 등 일부 인사들은 왕정위와 결별하고 홍콩으로 탈출한후 왕정위와 일본간에 체결된 굴욕적인 합의 내용을 공개합니다. 이로 인해 왕정위 정권의 실체가 알려져 그는 매국노로 지탄받게 됩니다.
왕정위는 일본의 소위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중국이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과거 손문이 제창했던 "대아시아주의"의 유지를 잇는 것이라며 자신을 변호했으나 이는 누가 보더라도 궤변에 불과한 것이었죠. 상식적으로 침략자인 일본이 새삼스레 그의 입장을 고려해 중국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그동안 빼앗았던 것을 되돌려줄리 없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일본이 그를 기만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명색이 중국을 대표하는 원로이자 지성과 학식을 갖추고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정치가였던 그가 일본의 상투적인 말에 속아넘어갈만큼 순진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었던 것일까.
태평양전쟁중이었던 43년 일본을 방문한 왕정위
※ 사진출처 : 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num=108510
그는 자신이야말로 손문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평생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자신보다 한참 후배이자 부하였던 장개석과의 권력싸움에 패한 그는 장개석을 밀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장개석의 그림자에 가려진 이인자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마지막 수단으로 일본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을 되찾으려고 했고 자신의 구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운명은 중경을 탈출할때 이미 결정났다고 할 수 있었죠. 그의 변절은 당시로서는 큰 충격을 주었으나 전쟁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습니다. 천황 히로히토조차도 왕정위 회유 공작에 대해 "이런건은 안되는 것이 당연하고 되는 것이 더 이상하다"라고 말했을만큼 비판적이었습니다. 일본의 어설픈 모략과 왕정위의 권력욕이 만들어낸 한편의 정치 희극은 결국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함으로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왕정위 정권에 가담했던 모든 사람들이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지거나 옥사합니다. 왕정위 본인은 44년 11월 10일 일본 나고야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으나 그의 묘는 종전후인 46년 1월 15일, 폭약으로 폭파되었고 그의 유해도 불에 태워져 들판에 뿌려졌습니다. 그의 부인인 진벽군 역시 체포되어 매국노로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모택동의 신중국이 들어선후인 1959년 6월 17일 옥사합니다.
첫댓글 역사의 흐름에서 각자 살길을 찾아가네요.... 누군 잘 풀리고, 누군 망하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이 택할 수 있는 길이 얼마나 될까요 ^^;;
전공이 사학이라 주불해의 삶에 대해서 논문 읽어본적이 있는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죠 한간이라는 이름으로 욕먹기도하지만 주불해는 당대에 처세에 능한사람으로 뷔쳐볼수도 있고 왕정위는 그의 능력과는 다르게 남경정부 시절에 약간은 바지사장 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주불해가 쓴 일기를 통해서 당시 남경정부 성립과 주불해가 3번의 전향에 대한 내용을 엿볼수 있는 것도 있지요 그리고 현재 주불해의 삶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어서 논문이 있습니다 보면 재미있어요 진짜 대단한 능력자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줄타기를 잘해서 대우를 받는 모습이거든요
일본이 고통을 겪을때쯤 중국은 사망했을거란말.. 제 관점이 그릇된것일지는 몰라도 저런 말이 이번 연재를 보면서 조금은 이해가가네요. 불과 일년만에 우리나라로치면 경제 군사 상업 요충지인 경기도와 영호남 지방을 모두 빼앗기고 강원도 산악지방으로 몰린 상태인데 저런말이 나올법만도 한거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