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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9월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청주] 낮아지는 삶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즈카 8, 1 - 8
† 복음 : 루카 9, 46 - 50
예로니모 성인은 340년 무렵 크로아티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로마에서 라틴 말과 그리스 말을 깊이 공부한 뒤 정부
관리로 일했으나,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사막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히브리 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사제가 된 그는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일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하였다. ‘대중 라틴 말 성경’이라고 하는 ‘불가타(Vulgata)
성경’이 그것이다. 또한 성경 주해서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 저술을
남기고 420년 무렵 세상을 떠난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셨고, 그
도시의 성전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에
머무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하여 뿔뿔이 흩어진 백성이 한데 모여
주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거듭날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넓은 포용력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제자들 사이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논쟁하자, 가장 보잘것없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하신다. 또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못 하게 막았다고 하자, 그가 반대의
뜻을 드러내지 않는 한 막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어린이처럼 보잘것없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을
갖추라는 말씀입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권력 있는 사람이나 인기 있는 연예인, 돈 많은 사람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반면
힘없는 사람, 인기 없는 사람, 돈 없는 사람 주위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들은 ‘작은 사람’이고, ‘작은 사람’ 주위에 있어서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사람들’은 점점 사회에서 소외되어
버립니다.
우리 사회가 ‘작은 사람’을 더욱 포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체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만큼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 ‘작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공동체로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분별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다른 이를 받아들이되, 그들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교회의 뜻을 반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수용은 자칫 주님의 뜻을 흐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낮아지는 삶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9월30일 연중 26주간 월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학자 기념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6-50
<낮아짐을 추구하라.>
보다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 하면서 포장을
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 말씀하십니다.“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가9,48).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 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만약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하든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필리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더 고참이다.’,‘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주임신부님이 강론을 시작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자리를 뜨는 신자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러니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신자 한 분이 매번 자리를 뜨니 그 이유를 좀 알아봐
주세요.’ 하고 회장님께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날도 아니나 다를까
강론을 시작 하자마자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기다리던 회장님이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무슨 급한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어떤
사정이라도? 그랬더니 신자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아! 예. 저는
화장실에 갑니다. 무슨 특별한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잠자기
전에 꼭 화장실을 다녀오는 습관이 있거든요. 뭐 잘못됐습니까?”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우리는 과연 큰 사람일까요?
2013년 다해 9월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아프리카의 오지에 선교활동을 나간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의 원주민들과 친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요. 그러나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이 지역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지인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온 것입니다.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생각했지요. 이 헬리콥터를 태워준다면 분명히 원주민들이
감동해서 더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부탁을 해서 원주민 몇 명을 태워서 마을 위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원주민들은 그 누구도
감동을 하거나 놀라워하는 기색이 없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그래도
속으로는 ‘감동을 받았겠지’라는 생각으로 원주민들에게 물었습니다.
“높은 하늘에서 숲과 동네를 내려다 본 느낌이 어때요?”
그러자 한 원주민이 심드렁하게 대답합니다.
“곤충들도 하는 것을 가지고 뭐 대단하다고 물어요?”
그렇습니다. 날아다니는 곤충들도 많지요. 따라서 하늘 위를 난다는
것은 곤충들도 하는 대단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대단한 것도 대단하지 않은 평범한 일이 될 수 있으며,
또 별 것 아닌 것이 대단한 것도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고정관념을 버리고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자기 포기식의 생각의 전환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보다는 긍정적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출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큰 사람이냐라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큰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바로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 예수님과 친한 사람만이 큰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세우시며,
어린이와 같이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어린이는 그 당시에 아직 성숙되지 않은 사람, 그래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 등을 갖추어야 주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들로 큰 사람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는 큰 사람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큰 사람일까요? 세상이 인정하는 큰 사람이 아닌,
주님께서 인정하는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존경하라. 그러면 그는 더 많은 일을 해낼 것이다(제임스 오웰).
오늘은 성경 연구에 온 생애를 바친 예로니모 성인의 축일입니다.
어린아이
어린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면 ‘참 맑다’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거짓말을
해도 어색해서 금방 탄로가 나지요. 그래서 더욱 더 눈이 맑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어린이들과 그 아버지들이 캠핑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그런데
어린이들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도 의심하지 않고 다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눈을 더욱 더 맑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와 같이 눈이 맑지 않습니다. 거짓말이 능수능란하고,
어떤 말에 대해서 먼저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 가졌던 천진무구함이 무너져 갑니다.
어른이 되어 버린 내 눈을 바라봅니다. 너무나 혼탁한 눈, 그래서 실망스러운
눈입니다. 어렸을 때의 천진무구함을 기억하면서 다시금 거짓말과 거짓된
행동을 피하고, 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믿음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어렸을 때의 맑은 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큰 사람이 되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큰 사람이 되십시오.'
2013년9월30일 연중 제 26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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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끼리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두고 다투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데려다 옆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서열(序列)이라는 말이 있다.
서열의 의미는 어떤 기준에 의해 줄 서는 순서를 말한다.
보통 서열이라는 말에는 인간적이고 이성적이라기보다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단어이다.
권력과 경쟁 그리고 명령과 복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의미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Ordo’(오르도)라는 라틴어 단어이다. 이 말의 뜻은 서열, 순서, 질서,
명령, 주문 등의 의미로 번역되고 있다. (영어의 Order(오~ㄹ더)는
여기서 파생된 같은 의미의 단어이다.
사제들이나 신학생들 사이에서도 선배인가 후배인가, 나이가 많은가
적은가, 서품년도가 빠른가 늦은가,
맡고 있는 책무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Ordo를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서열하고는 그 내용이 다르다.
Ordo에는 상대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포함된다. 그리고 Ordo의 앞
자리에 서야만 하는 입장일수록 책임은 더 없이 커진다.
상하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존경과 순명 혹은 책임과 협력의 관계를
만들어 낸다.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듯 하다.
따라서 흔히 사제들끼리 무엇인가에 대해 결정을 하거나 책임을 물을
때 ‘Secundum Ordinem’(세꾼둠 오르디넴)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서열에 따라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책임의
크기에 따라서’라고 이해하면 좋을 듯 하다.
겉으로 볼 때는 Ordo라는 단어는 명령이나 방향을 이끄는 권한의 크기를
두고 하는 말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 존중과 일치라는 개념이다.
그리고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다.
Ordo가 높은 사람일수록 철저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어떤 모임이던 어떤 무리이던 때로는 동물적으로 때로는 이성적으로
구성원의 높낮이를 정해야 움직여지고 돌아간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이 모여 조직을 구성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사회학적인 표현으로 조금 어렵게 표현한다면, 인간 사회라는 조직이
질서 있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메커니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경계해야 한다.
사람 사이에 높낮이가 어디 있겠는가?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협력하고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 안에서 순서를 정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모두가 귀하디 귀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작은 사람이란 큰 사람이 뭔지도 모르는 선한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남이 다칠까 봐, 함부로 자기 것도 주장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때린 사람이 가지고 있을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무 가지를 치는 모습을 보고 나무가 많이 아플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모기는 왜 태생이 피를 빨아먹어야만 살 수 있는 안타까운 운명일까를
놓고 슬퍼하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자신도 행복해지는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런 작은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을 터이니
가장 큰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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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저의 동료사제 춘천교구 김 현신 요셉 신부님이 담은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성 예로니모 사제 기념일
2013년 다해 9월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우리도 따를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급한 사람은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자녀의 문제인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며칠 전에 명동 성당 마당에 있는데, 어떤 형제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제게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본인은 성당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딸이 몹시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치유하기
힘든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저에게 ‘구마기도, 퇴마기도’를 해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현대 의학은 많은 발전을 하였고, 그래서 대부분의 질병을 의학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과 의학에는
분명 한계가 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신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서 따님을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침 제가
잠실 성당에 강의를 가기로 했고, 그 형제님은 잠실에 산다고 했습니다.
저는 강의를 가는 날 미리 잠실 성당에 가서 형제님의 가족과 아픈
따님을 만났습니다. 5년 동안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따님은 무척
밝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당에 다니지 않는 가족들을 성당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많은 것을 줄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픈 따님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따님은 제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신부님! 사람들이 이야기 합니다. ‘
저의 죄가 커서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왜 제게 이런 시련이 생긴 걸가요? 저는 한 가지는 분명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따님이 죄가 커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의 죄가 커서 그런 시련과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해서입니다. 꽃이 피면
분명 지기 마련입니다. 어떤 꽃은 가을까지 꽃이 피는가 하면, 어떤 꽃은
모진 비와 바람에 일찍 지기도 합니다. 그 꽃이 죄가 커서 그리 된 것은
아니듯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아픔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 된
것은 아닙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은 따님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딸을 위해서라면 스님도
만나고 싶고, 무속인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런 저와
딸에게 벌을 주시지 않을까요? 따님을 위해서 부모님은 여러 병원을
다니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따님을 위해서 그렇게 여러 곳을
찾아다닌 엄마를 벌하지는 않으실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는 것과 더불어 지혜로우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간혹 병을 고쳐준다는 이유로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놀라우신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걸어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만이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빨간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희생과 봉사입니다. 나눔과
배려입니다. 처음 만난 저에게 따님의 치유를 위해 기도를 청한 그
형제님을 생각합니다. 그 가족의 간절함을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그 따님과 가족을 위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2013년 다해 9월30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
복음 : 루카 9,46-50
<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
미국 남북전쟁 때, 남부 연방 대통령인 제퍼슨이 명장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을 불러 물었습니다.
“장군의 부하인 부하사관을 지휘관으로 승진시키려고 하는데 그의
능력은 어떠합니까?”
로버트 리 장군은 즉각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유능한 군인으로 지휘관이 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승진한 부하사관이 로버트 리 장군을 찾아왔습니다.
“저는 평소 장군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크게 칭찬해주셨습니다.
그 동안 저의 행동을 용서해주십시오.”
장군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알고 있었네. 대통령의 질문은 ‘내가 자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였지,
‘자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었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논쟁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느닷없이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세우신 뒤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누가 크고 작은 가의 판가름은 바로 ‘포용력’에 있음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버트 리 장군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칭찬해 줍니다. 이것이 그의 포용력이고, 이 포용력이 그가 위대한
인물임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 ‘하느님’이란 단어를 그대로 우리 하느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이미 가톨릭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느님이 한국에 계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엘, 엘로힘, 야훼; 데오스’ 등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 이름들은 그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이전에
사용되었던 신의 이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막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너무 배타적이 되지 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넓음 포용력을 지니기를 원하는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포용력을 기를 수 있습니까?”
“네가 낮아지면 된다.”
“왜요?”
“수많은 강물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이유는 딱 하나 뿐이다. 바다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바다를 상징하는 성모님은
가장 깊은 겸손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다가 결국 하느님을 전부
받아들여 잉태하시게 되었습니다. 큰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낮아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포용력 때문인 것입니다.
베네딕도 16세의 얼굴은 그리 온화한 얼굴이 아닙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얼굴과 비교해, 그 분 얼굴은 예전의 종교 재판소였던 교의성성
장관을 오래 해서 그런지 매우 엄하고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저의 이런 선입관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 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라틴어로 미사 하는 것을
고집하다가 파문당했던 르페브르 대주교에 대한 파문을 철회하고
교회에 받아들인 일이었습니다.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르페브르 파를 다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넓은 포용력을 보고 역시
교황님이 되실 인물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다가 개신교 신자들이 불교
사찰 그림에다가 붉은 십자표를 하고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등의 글을
밑에 써 놓은 것을 보고‘ 저자 유홍준씨가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을 대고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했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이렇게
포용력이 없는 사람들이 정말 사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가장 낮은 사람이
가장 넓은 포용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성경을 모르는 것은...
2013년 다해 9월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6-50
<성경을 모르는 것은...>
예로니모 성인(340~420)은 꽤 오래전 인물입니다. 예로니모는 성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성인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기원후 340년경
달마티아 지방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2살 때 로마로 내려가서 수사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하였으며, 19살
되던 해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는 다마소 교황의 비서로
활동하며 교황의 명에 따라 신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서방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라틴어 성경 번역본이
있었으나 번역본들마다 내용이 서로 달라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예로니모가 번역한 라틴어 성경은 ‘불가타’라고 불립니다. 라틴어로
불가타(Vulgata)는 ‘일상적’, ‘대중적’이란 뜻입니다. 이는 예로니모의
라틴어 성경 번역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이를 공식적인 성경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불가타
성경은 예로니모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예로니모는 다른 무엇에 앞서 지적 능력이 아주 탁월한 분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과외 없이 학교 수업만으로
충분했어요.’ 스타일입니다. 거의 천재였습니다.
외국어 학습체계가 잘 마련된 오늘날도 외국어 제대로 능통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인데, 머리가 비상했던 예로니모는 그 어렵다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희랍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니 예로니모 성인은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제일 힘들었던
과목(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들만 골라서 잘 하셨네요. 저는 이런
과목들의 동사 변화나 단어 외우기가 얼마나 어렵던지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곤 했습니다.
이런 탁월한 예로니모였기에 교회는 그를 ‘신학교의 주보성인’이자
‘수덕생활의 주보성인’으로 모십니다. 교회는 예로니모의 탁월한
업적을 인정하며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누스,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더불어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 꼽습니다.
그러나 동전의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토록
탁월했던 예로니모였지만 인간적 결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히 그는 불같이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완벽하다보니 이웃들의 결점 앞에 인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자주 이웃들의 부족함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의 화살을 던졌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에 벼락같이 화를 내는가 하면, 돌아서서 즉시 후회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로니모는 다른 사람의 결점 앞에서보다 자신의 결점 앞에서
더 속상하고 가혹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자신의
부족함과 실수 앞에 자주 후회를 했습니다. 후학들은 이런 예로니모를
기억하며 돌로 자신의 가슴을 치는 초상화를 그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한 교황님은 그 만일 그 초상화가 아니었다면 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결핍과
실수투성이인 우리들에게는 꽤나 위안이 되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마소 교황이 세상을 떠난 후 예로니모는 평소 꿈꾸어왔던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위해 베들레헴으로 떠나갑니다. 그곳에 여러 개의 수도
공동체를 건립한 그는 그 후 34년 동안 성경과 관련된 번역과 저술
작업에 몰두했으며 성경과 관련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많은
주해서를 남겨 교회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경 공부와 묵상에 우선권을 두라는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정말 필요한 말씀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여러분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경을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여러분을 감싸줄 것입니다.”
“성경을 파고드십시오. 성경 안에서 찾으십시오. 거기서 모든 것을 다
얻을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권능도 하느님의 지혜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또 다시 독서의 계절입니다. 스마트 폰 중독 증세에서 살짝 벗어
나야겠습니다. 한평생을 오로지 성경에 전념했던 예로니모 성인을
생각하며 하루에 30분만이라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삶 속에
적용시키는데 시간을 할애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백그라운드나 줄 끝은 하느님까지
2013년 다해 9월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백그라운드나 줄 끝은 하느님까지
연인들, 상대만을 사랑한다며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 닫히면 안 됩니다.
상대의 부모 형제 주변 환경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상대를 그 삶속에서 빼내어 내 삶에 넣겠다는 건 삶을 유괴하는 거지요.
백그라운드라는 말이 있고 줄을 잘 서야한다는 사회의 말이 있습니다.
한 인간은 상하좌우 종횡으로 그라운드를 이루고 어떤 줄에 서 있겠지요.
백그라운드나 줄 끝은 하느님까지라고 일깨워주시는 주님, 감사
감사합니다.
“그들에게 이르셨다.‘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24)”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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