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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님은 용서 이야기를 하시면서 모임을 시작하셨다.
용서가 잘 안 된다.
여러분의 돈을 떼어 먹은 사람이 여러분의 돈을 갚을 생각은 않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있고
여러분은 경제적으로 힘들게 산다면 그 꼴을 보고 어떻게 살겠는가?
돈에 관련되면 용서가 잘 안 되는데, 거기까지 용서를 하셔야 한다.
용서가 안 되어서 이를 뿌득뿌득 간데니깐요. 그런데 그것도 용서 했버려야 ! 한다.
근데 이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용서가 된다.
용서가 안 되고 누구를 자꾸 손가락질하고 시기질투 하고 하면 예수님이 절대 안 계시는거다.
예수를 믿는다는데, 입으로 믿는 거지 그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시는거다.
화가나서 씩씩거리다가 심장마비로 죽으면 어떡할 것인가. 언제 죽을 지 모른다.
내가 부정적인 말을 하고 있는 그때에 숨이 끊어지면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항상 정신 바짝 차리고서 사셔야 한다.
요12:47~48)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러 구원하러 오셨다.
예수님을 저버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을 받지 안으면, 그러면 나중에 어떻게 되냐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 말이 우리를 심판을 한다 하신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내 말을 잘 듣고 지키라” 하신다.
예수님이 오셔 하신 말이 무엇인가? 구약의 성경 이야기 하셨겠는가?
예수님이 오셔어 ‘사랑하라고!’ 하셨다.
‘사랑하라!’ 는 이 말이 마직막 날에 너희를 심판을 할 것이라 한다.
그러니 사랑을 안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용서했버리고! 그리고나서 끌어 안고 사랑했버리시라!
잘 안 되겠지만,
그러나 먼저 사랑하는 것은 어렵더라도 용서했버리라! 여러분이 그 사람을 용서하면 올무에서 놓임을 받는거다.
나를 상처 준 그 사람은 내가 묶여서 힘들어 하는지 모른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다.
“ 하나님 나 용서 했버렸어요!”
주기도문 처럼 “하나님, 저 사람을 용서 했으니, 나를 용서해 주세요?”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건덕지가 있으니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다.
남을 용서한 것도 없이 씩씩거리고 있는데
‘내가 용서 안 한것 처럼 남도 용서하지 마세요.’ 이렇게 되면 안 되쟎는가?
무시무시한 이야기이다.
지긋지긋한 남편, 아내를 빨리 용서하셔야 한다.
안 하면 내가 죽어. 가득이나 힘든데 남을 미워해서 마음이 부글부글하면 어떻게 살아.
홧병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홧병은 의사도 못 고치니 죽을 수 밖에 없다.
“홧병 걸렸는데 살아난 사람 보았어요?”라고 형제님이 질문을 하셨다.
’홧병 걸렸는데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 며 희락의 자매님이 과거 체험을 말해 주었다.
홧병에 걸려도 예수님 앞에 오면 살아.
그런데 홧병 걸릴 정도되면 예수님이 잘 안 보인다.
내 의가 나와 “죽일놈 살릴놈” 하게 되니 예수님이 안 보인다.
희락의 자매님은 미국에 건너와서 믿고 의지하던 분에게 이민 사기를 당해 재산을 다 날렸을 때에
가슴에 홧병이 생기며 삼일을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을 때에 남편이
“네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디계시냐?”
“그렇게 낙담하는 하는 모습을 보니 당신이 믿었던 하나님은 없다! ”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자매님도 모르게 안에서 “ 아니야!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는 선포를 해 버리게 되었고
그러구 나서 가슴의 홧병 불이 내려가고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 주세요!”라는 그 기도를 다시 시작했다 한다.
가슴에 불이 있다 했는데, 여러분이 누구를 미워하면 가슴에 맺힌 것 처럼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그 사건을 생각하면 거기서 부터 시작을 한다. 귀신이 가슴 거기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빨리 내 보내야 한다.
우리가 인간이니깐 불이 없는 사람이 없지.
그것을 예수님 능력으로 다스리는 것이 관건이다. 성화 단계에 들어가 주만 바라보시라!
사건을 바라보면 그것이 질병을 주고 일을 하기 시작한다.
사건을 보지 말고 갈릴리 호숫가 옆으로 가서 거기에 계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보시라.
마음이 간난한 자가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으니깐
저 사람은 내 것을 뺏고 잘 사는 줄 모르지만, ‘나는 마음이 가난하고 갈급하니 천국이 내 것이니 감사하다’며
그 예수님을 믿고 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요즘 간증에 나온 것 처럼 바보 예수님을 쫒아 가는 것이다.
여러분이 잘 못도 없는데 한대 얻어 맞았다면, 이쪽도 때리라고 돌려 대기가 쉽지 않는데
삶을 살다보면 그럴 경우가 여러분에게 올 수 가 있다.
그 사람은 뭘 잘 모르고 여러분을 자꾸 때려.
그런 기회가 여러분에게 오면 감사하시라.
예수님 심볼이 뭐냐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 대는 것이다.
그걸 체험케 하시니 얼마나 기가막힌가.
그런 기회가 오면 “하나님 감사해요!” “예수님이 하신 것을 체험케 하시니 감사해요.
얼마나 아픈지 견뎌 볼께요.” 하시라.
하나님께 감사하시면 그것이 된다.
여러분이 간과하고 흘려 보내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는 말을 다 하시는데,
여러분에게 실제로 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 인줄 아시는가?
23년 전에 성령님이 오신 다음 delete Holy spirite를 하시고는 Living GOD을 체험으로 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회사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오셨다.
나와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남을 미워할 수가 있어?
하나님은 살아 계시데. 우리와 영~ 원히 함께 계신데.
여러분 마음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가 있는가?
하나님 딸 아들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는가?
여러분 마음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여러분이 말하는 것, 생각하는것,
행동 하는 것을 불꽂같은 눈동자로 살펴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확~ 들어오면, 금방 “아이구 잘못 했어요!” 한다.
잘 못한 것을 몇일 있다가 깨달으면 그 만큼 영이 어두운 것이다.
어떻게 남을 정죄할 수 있어? 어떻게 시기질투 할 수 있어? 어떻게 미워할 수 있어?
어떻게 낙담,좌절, 두려워 할 수 있는가?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시래! 그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미워하고 비판정죄하고 욕지거리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없는 고아처럼 행동하는 거다.
우리가 살아 계신 아버지를 믿고 가는데, 주머니에 돈이 없다고 낙담할 수 있는가?
그런데 믿는다 하면서 아버지가 없는 것 처럼 사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은, 매일 매순간 어디를 가더라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중얼중얼~ 하면서
다니시는 것이다.
전지 전능하신 분이 내 아버지이신데 뭐가 걱정인가?
근데 열심히 교회를 다닌다면서도 남을 손가락질 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언제 한번 원수를 용서 해 볼까?’
원수를 사랑하기는 커녕 자신에게 한번 잘못 말했다고, 용서못하고 씩씩거리는데 그 분은
죽은 하나님을 믿는 것일 지 모른다.
입술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죽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챤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45년동안 입술로라도 ‘살아계신 하나님’ 이라고 내뱉지 않았었다.
그냥 ‘성경에 있는가보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예수님 믿는다고 입으로 시인했으니 죽어 천국가면 되었지. 나랑 무슨 관계야!’
그러구 살았었다. 과거에 나는 죽은 하나님을 믿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꾸 강조 하시는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정말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지 않는 모양이다.
정말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믿는 다면 이런 꼴로 살면 안 된다고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셨다.
의붓자식처럼 고아처럼 살면 안 된다고.
입으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아버지 없는 고아처럼 행동한다며
설교를 하셨다.
예수님은 사랑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이 사랑하라 사랑하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일흔번씩 일곱번씩이라도 사랑하라.
사랑을 안해. 내가 말한 이 말이 마지막때에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다.
내가 간 다음에 교리 같은 것으로 여러분을 유혹하면 미혹될 수 있기에,
그래서 여러분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다. 늘 여러분들이 사랑을 하고 계시는지 정검하셔야 한다.
특별히 나에게 해를 준 원수 같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있는지 살펴 보셔야 한다.
아니면 마지막 때에 그것이 우리의 올무가 된다.
“예전에 말한 것이 기억이 나는가?” 하시며 스리랑카 청년 이야기를 짧게 다시 말씀해 주셨다.
스리랑카에 사는 청년이 다른 친구들은 염소 한 마리도 키우기 힘드는데 염소를 30마리를 키워 유학을 갔던
스토리가 기억 날 것이다.
그 청년은 염소마다 이름을 지어 주고 불러주고 쓰다듬어 주고 사랑해주고 해서 새끼도 잘 낳고 건강하게 잘 하
라 30마리의 염소로 불어 났다.
사랑이 흘러 가야해! 예수님 방법 대로이다. 염소가 사랑을 받는 줄을 안다. 하물며 인간은?
다음으로 형제님은 금정진 사모님이 쓰신 칼럼 <피부 접촉 결핍-르네 스피치 박사의 마라스므스>을
읽어 주셨다.
어린이가 많이 울고 잔병치례를 많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접촉 결핍증 때문이라고 합니다.
스피츠 박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피부접촉이 인간의 중요한 욕구임이 밝혀 졌습니다.
동물 실험에 따르면 동맥경화제가 함유된 음실을 투여한 두 종루의 토끼로 실험한 결과 사람들이 쓰다듬어 준 토끼들은 동맥경화증에 걸리지 않았는데 사람의 손질을 받지 못한 토끼들은 동맥경화증에 결렸다고 합니다.
특히 유아들은 피부접촉을 통해 사랑을 느낍니다.
스피치 박사는 감옥에서 태어났거나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 국립병원의 의사였습니다.
동정심을 가지고 튼튼하게 자락 수 있도록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 주고 위생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높은 유아 사망률은 떨어 지지 않았고 그 이유도 밝혀 지지 않앗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이 죽어가는 이 원인모를 병을 마라스므스 병이라명명했습니다.
그런던 어느날 멕시코에서 겨울 휴양을 즐기던 박사님은 휴양지 근교의 고아원에서 예기치 않은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병원에 비해 위생적이지도 않았고 영양 공급도 형편이 없었는데 아이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고
뺨은 발그레하게 혈색이 돌았고 건강미가 넘쳤고 울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박사님은 휴양을 접고 그 고아원에서 몇달간 머물면서 아이들을 관찰했습니다.
관찰한 결과 아이들이 건강한 것은 이웃마을에 사는 여인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마을의 아낙네들은 매일 고아원을 찾아와 아이들을 안아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생의 첫해”라는 연구서에서 “접촉을 가진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다 그러나 늘 유모차에 실린채 피부 접촉도 없이 자란 아이들은 점점 약해졌고 접촉결핍증 때문에 세포들이 죽어갔다.
우리는 내가 다른 사람과 연관되어 있고 또 그들이 나를 돌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포옹하고 만져주는 손길이 필요합니다.
연말연시를 맞으면서 사랑의 선물을 주고 받으며 따스한 사랑으로 소외된 분들의 마음과 손을 어루만져 드리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손길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저께 이야기 한 건데, 집나간 둘째 아들 그 집에는 아들이 둘 밖에 없었을까?
첫째 아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둘째 아들도 있고 세째 아들은? 네째 다섯째도 있었겠지. 또 없을 수도 있고. 그냥 한번 생각해 보았다.
이 둘째 아들이 쥐엄 열매 먹다가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한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아.
그래서 아버지 집에 오니깐, 둘째 아들이 배가 고플 것이니 아버지가 닭 다리 튀겨가지고 나왔어요?
아니다.
어떻게 나왔어요?
맨발로 뛰어 나오셨다.
무엇 가지고 나왔어요?
사랑 가지고 나어셨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아. 풍부해! 아버지 집에 먹을 것이 많다는 이야기는?사랑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사랑이 많아. 아버지가 사랑을 가지고 뛰어 나오신다.
사랑 뒤에는 먹을 것이 충분해.
이 둘째 아들이 먹고 싶어 배가 고파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사랑이 그리웠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다 는 것은 아버지 집에는 사랑이 많아
아버지 사랑을 받으면 육의 양식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의 자식들이 집 나갔다가 돌아 오면서 먹는 것을 보고 오는 자식이 어디 있는가?
사랑을 받고 싶어 부모님께 온다.
이아들이 쥐엄 열매 먹다가 사랑이 그리웠구나!
밖에 나간 자들이, 여려분의 뺨을 때리고 갔던 사람들이 사랑 땜에 다시 온다. 사랑이 그리워.
항상 사랑을 베이직으로 깔고 보시라.
물질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 뒤에 물질은 있다.
그 아들이 왔는데 가락지 껴주고, 둘이가 껴안고 많이 울었겠지. 누가 더 많이 울었을까?
아버지.
얼만큼 울었을까?
“눈물이 바다가 될 때까지.”
“사랑하는 만큼.” 이라고 자매님들이 대답을 해 주셨다.
얼만큼 울으셨는지 성경에 나와 있다.
호다 버전으로 말하면 ‘까무러쳐 기절할때까지 울었다.’
여러분이 돌아오면 하늘나라에서 잔치가 열리는데, 찬치에 주인공이신 아버지는 너무 좋아서 기절하셔어 방에 누워계신다.
그렇게 여러분이 돌아오면 기뻐하시는 아버지.
이런 것이 여러분 가슴에 뭉클뭉클 들어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버지를 만난 첫 사랑이 있고,
그 안에 들어가면 ‘우리 아버지는 졸도 하시겠구나!’라는 것이 알아 진다.
여러분이 확실히 돌아 온 것을 아셔야 한다. 다시는 쥐엄 열매를 먹지 말고.
아버지는 나 땜에 너무 이뻐서 기쁨을 이기지 못 해서 졸도 하셨겠구나! 이런 것들이 여러분 안에 가득해서 여
러분 힘들 때마다 첫사랑으로 돌아가셔야 한다.
그때에 안아주고 가락지 끼어주고, 양잡고 소 잡는 일을 나중 일이구.
그래서 아버지가 손을 잡고 끌고 가서 잔치를 벌이면서 너무 기뻐서 기절햇! 버리셨다.
구약에 형제와 아버지를 본 것이 너무 너무 기뻐서 방에서 운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죠?
요셉이다.
형들을 보고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엉엉 안에서 울어 댄다. 아버지의 심령이다.
예레미아 자매가 매 주일날 아침 거지 예수님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사랑이다.
그런데 음식을 드리는 것은 4~5시간이 지나면 배가 다시 고파.
하지만 매주 마다 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안아주고 대화 해주고
하는 그 사랑을 그 거지 예수님은 죽을 때까지 안 잊어 버릴꺼다.
이 둘째 아들이 집 나갔다 돌아 올때에 4시간 짜리 사랑을 기대해서 온 것이 아니지.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보고 온 것이다.
우리도 배 고픈것 해결할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보고 믿는다.
내가 지금 힌들더라도 그것을 보고 찾아 가셔야 한다.
사사시대때에 베들레헴에 누가 살았는가?
나오미가 살았다. 남편은 엘리멜렉이다. ‘나오미’라는 뜻은 기쁨, 희락이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서 나오미 가정이 잘 살았던 모양이다. 그 시대는 어느 시대냐면?
여호수아가 가고 백성들이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하던, 사울왕이 되기 전 그때 이다.
하나님께서 보니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았는데, 화닥지가 나셨는지 가뭄을 내리신다.
“지금 잘 사시는 분들은 지금 말 하는 것을 잘 들으시라.”하시며 형제님은 계속 말씀을 이어 가셨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사니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셔 흉년이 들어
두 아들 말로과 기룐을 데리고 네 식구가 먹기 힘들어 모압땅으로 이민을 간다.
모압이 누구의 후손인가? 롯과 그의 큰딸의 관계에서 나온 자손들이다.
암몬은 롯과 둘째 딸에게서 나온 자손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돼지 취급하는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간다.
거기가서 며느리 둘을 얻는다. 남편 엘리멜렉이 죽어 장사 지내고, 두 아들들 마저 죽는다.
이방 여인 둘하고 나오미만 남았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나니깐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이 ‘희락’의 의미인데 이름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
이름을 마라 ”쓴물”로 바꾼다.
잘 있을때에는 ‘희락’이었는데, 이방 땅으로 나와 인생의 풍랑을 만나니 희락의 이름을 마라로 바꾸어 불러 달라고 한다.
하나님은 모압 이방여인들을 칠것 같은데 아니고 아들과 남편을 치신다.
그래서 남편과 아들 둘이 죽는다.
애도 없는 두 며느리와 남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들어 희락이 아니라 ‘쓴물’이라고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한다.
그런 와중에 그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졌던 진노가 그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엎드렸는지 다시 풍년이 들었다. 굿 뉴스가 들려, 고향 땅으로 돌아가면서 며느리들에게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첫째 며느리는 자신의 고향인 모압땅에 남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겠지.
둘째 며느리 룻은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며 어머니를 쫒겠다고 한다.
룻1:16~17)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은 무엇을 보고 말하는 것인가?
이 룻은 무엇을 보고 말하는가?
이스라엘 땅에 가면 자신이 어떠한 대접 받을 줄을 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돼지 취급하는 것을 아는데
그것을 무릅쓰고 어머니를 따라 간다. 그러니 무엇을 보고 따라 가는 것인가?
하나님을 보고 따라 가는 것이다. 구원을 보고 따라 가는 것이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이방심을 섬기는 이방 땅에 있을 때에 거기서 하나님을
잘 섬겼던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자신이 섬기던 신하고는 달른 것을 발견 했던 모양이다.
어머니를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겠다며 멸시천대를 무릅쓰고 베들레헴으로 어머니를 좆아 온다.
나오미가 이방땅에서 하나님께 신실하게 했던 모양이다. 그러데도 나오미에서 마라로 전략한다.
그리고 나오미가 며느리를 하나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들어간다.
그 당시 베들레헴 성주가 보아스 였다.
거기서 룻은 열심히 이삭줍기를 하였는데, 롯은 구원을 위해 댓가를 지불했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 이삭을 주은 것이 아니라, 만약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어머니를 좆아 갔다면
시어머니를 버리고 돌아 갔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영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 댓가를 지불하며 시어머니를 봉양한다.
댓가를 지불하고 이방의 개 만도 못한 여자가 와서 시어머니를 지극히 공양하는 것을 본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뭐냐면?
나오미가 며느리 하나데리고 베들레헴으로 올때에 빈털털이로 왔다.
나오미가 이야기 하는 것이 있다. 잘 먹고 잘 살다가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이 치셔어
전재산 가지고 이민을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빈털털이가 되어 이방여인 며느리를 하나 데리고 오면서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냥 여러분 상식적으로 아시라.
룻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여호와가 징계를 할 때에 징계를 받았어야하는데 여호와의 낮을 피해서 도망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전체적으로 다 적응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징께 하실때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야 하는데 여호와의 낮을 피해 도망간다.
갔다가 돌아 온다.
내가 징계를 받는 여기에 있었더라면, 갔다가 돌아 오면서 받는 괴로움 보다는 덜 했을 것이다.
여기서 가뭄있는 곳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 덜 힘들었을텐데.
성경에는 없지만 의역을 해서 하나님의 낮을 피해서 가니깐 다 잃고 다시 돌아와 후회하는 말을 한다.
없는 사람들은 그 땅에서 버티고 살았다. 적게 먹은 것 뿐이지.
다 풍족하게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이방 여인 며느리 하나만 데리고 왔다.
풍족하게 살 줄 알고 이방땅으로 갔는데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실때 사랑으로 받지 않고 요나처럼 혼이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여 하나님께서 치신다 그럴때에 ‘그리하지 마옵소서’ 하며
기도했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몇년 후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이시고 노여움을 거두시고 축복을 하신다.
누가 기도했을까?
보아스 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보셔야 한다. 보아스는 성주인데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기도했는지 모르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스토리를 알고 보니깐, 하나님께 “그리하지 마옵소서” 기도한 사람이 있어.
그 기도한 보아스를 통해 메시야가 나오게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근데 한 사람은 살려고 나갔다가 마라처럼 되어 빈털털이로 그래도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있다며
돌아 온 나오미와 룻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적할때에는 휩쓸려서 다 그런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 하나님 그리하지 마옵소서”하며 기도하던 자가 보아스 하나 밖에 없었는줄 모르지.
또 더 있었는 줄 도 모르고.
영적으로 민감해서 우리의 죄악땜에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는구나를 보는 사람이 있다.
사랑마니 형제님의 아내 권사님이 기도를 많이 해서, 일반인에게는 보기 드문 한국에 창을 한 사람 처럼 목에
굳은 살이 생기는 성대 결절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것 처럼
보아스가 아마 기도를 많이 해서 목이 다 나갔는지도 모르지.
보아스가 목에 굳은 살이 생길정도로 기도해서 나오미 같이 도망갔던 사람들을 돌아오게 했는 줄 도 모르지.
하나님의 징계를 피해 도망 갔던 사람들을 돌아오게 했던 보아스의 믿음의 기도를 보시고 나오미와 룻을
돌아 오시게 하신 것은 아닐까?
그 쪽을 통해 메시야를 나오게 하신 것은 아닐까?하며 생각을 한번 해 보았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이스라엘을 살린다. 많은 사람이 필요없다.
하나님께 “그리하지 마옵소서!.. 하며 정말 매달린 사람.
예수님 시대에 꼭 한사람이 “그리하지 마옵소서…"했다. 그게 누구인가? 예수님이다.
예수님 밖에 없다.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해요..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달라는 것은 그리하지 마옵소서.. 용서해 주세요.. 하시며 예수님이 기도를 하셨다.
여러분이 앞으로 사역자로 사역을 하실 것인데 기도하셔야한다.
사역자가 매일같이 기도하고 있으면 괜찮은데,
평소에 기도를 안 하시다가 사역을 하게 될 분들은 삼일동안 목청에 굳은 살이 배길 정도로 기도하고 오시라.
그래야 한사람 살린다.
사역을 통해 그 한사람을 살리는데 이 한사람이 민족을 살릴지 어떻게 아는가?
그 가운데 누구 한사람.. 많은 사람은 필요없다. 하나님께서는 한사람을 들어 사용하신다.
그 한사람 들어서 불붙이고 불붙이고 해서 민족을 살린다.
그 이스라엘 땅 개판을 치던 그 땅에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고 몌시야가 나오도록 준비되는지.
그래서 이 룻의 스토리를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신다. 잊지마시라.
저는 성경박사가 아니라서 잘 모른다.
인사이트 받은 것만 여러분에게 나누는 것이다.
오늘 들은 보아스 이야기에다가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시면 이렇게 첨부하시고 해서
여러분의 것으로 은혜가 되는 쪽으로 받으시라. 그러면 여러분의 것이 된다.
절대적으로 다 그렇게 되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영성에 맞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일단은 제가 거기까지만 한 것이다.
다른 얘기보다는 기도하는 한사람을 보면서
메시야가 그쪽에서 나오는 것을 얘기한 것이다.
어제 사랑의 교회 목사님이 오병이어에 대한 설교를 하셨다.
목사님이 받으신 인사이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굉장히 좋았다.
일반적으로 얘기하신 것이 아니고 본인이 이랬을까? 저랬을까?..
생각해 보면서 하시는 그것이 저한테 좋았다.
그게 뭐냐면 어른들 오천명이 모여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배가 고플 때가 되니까, 제일 먼저 누구한테 뭐라고 하셨는가?
“빌립아, 너희가 먹을 것을 줘라..”
빌립이 어디 사람이라고 했나?
벳세다 사람..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가? 벳세다이다. 그러니 벳세다 사람 빌립에게 “이 동네 잘 알잖아?
너 떡집 어디에 있는지 잘 알지? 너가 저 사람들 좀 먹여라..”
“어이구, 이사람들을 다 어떻게 먹여요?..” 성경에 뭐라고 그랬어요?
“다 먹일려면 어느 떡집은 내가 가면 싸게 해 주는데 한 이백 데나리온이 들거에요..”
지금 이백 데나리온이 없다. 가룟 유다는 돈이 없는 줄 뻔히 잘 안다.
그 다음에 누구한테 이야기 해요? 안드레에게 말하니 뭐라고 하는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가 든 도시락이 있다고 한다.
애가 먹는 것이니까 얼마나 작아? 그 다음에 보리떡은 누가 먹는 것이라고 했나?
가난한 자들이 먹는 것이 보리떡이다. 그러니까 안드레는 얘가 가지고 온 것이니까
“아이고, 보리떡 이 쪼끄만 것하고 멸치같은 물고기 두마리 이거 말도 안되는데요?..” 그런 얘기이다.
예수님이 왜 물어보았을까? 시험코저 물어봤다고 그런다.
무엇을 시험코자? 믿음을 볼려고? 어떻게 하는지 볼려고 물어보았어?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어른들만 오천명이 있다.
“빌립,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이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냐?”
자, 예수님이 시험했다. 시험하면 정답이 있을 것이 아닌가?
답안지가 있으니까 시험이 있다. 그 답안지가 뭐였어요?
예수님이 정답을 가지고 계신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생각해 보시라.
제자들이 예전에 예수님께서 폭풍치던 바다를 말씀으로 잠잠케 한 일을 보았기에
이번에도 예수님이 하시면 된다는 믿음을 보실려고 하신 것 같다고 한나자매가 대답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을 아주 정확하게 얘기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것을 다 봤다.
그런데 장소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또 잊어버린다.
거기에 가면 그것은 되지만 여기는 아니다.
지금 제자들은 한자리 할려고 쫓아다닌다.
풍랑있을 때도 한자리에 관심을 가졌고, 그 다음에 한자리 또, 한자리 또..
여기서도 한자리하고 싶은데 도시락이 이것 밖에 안되는데 어떻게 다 먹여요?.. 이러고 있다.
자꾸 한자리! 믿음이 아니다.
제가 여러분한테 애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살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행하신 일이 있었다.
여러분을 만난 주신 일이 있었고. 여러분에게 기적을 행한 일이 있었다.
아까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분하고 계속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장소에 가서도 그분이 나오셔야 된다.
“나한테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 이때도 하셔야지요!
여기서도 하셔야지요! 하나님이 하셔야지요!!..”하며 이렇게 나와야하는데
제자들은 “도시락이 여기 있어요..” “그런데 이 도시락으로 5000명을 먹이는 것은 말도 안돼요?”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이많은 사람을 다 먹여요?”
생각도 못 한다.
이걸로 다 먹이라는 얘기도 아니고,
“다 먹여봐…”
“돈이 있어야 먹이지요?”
그 말이 맞다. 누구든지 물어보면 그 말이 100% 맞다.
믿음의 사람은,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던 사람들은 이번에도 또 하시지!
그게 믿음이다.
그리고 내가 죽을 때 마지막에 그분, 살아계신 우리 아버지가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 가시지!
예수님의 정답은 그것이었다.
“너희들 전에 기적들을 봤잖아?” 너희들의 믿음을 한번 보자는 거다.
믿음이 아직 그것 밖에 안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싹~ 가버리는 것이 낫겠다.
내가 싹 가버리는 것이 낫고 성령님이 오시면 생각나게 할 것이다 하셨다.
여러분은 성령이 임하시니까 이제는 뭘 좀 아신다.
그래서 그게 믿음이다.
어디를 가시든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항상 마음에 있고
그 흔적이 지난 번에 얘기한 갈릴리 호수에서 만난 예수님..
그 사건들이 많이 있으면 어디를 가든지 '그때 그 장소에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하셨어!..'
'거기? 그때 거기에서 내가 그런 체험이 있지!..'
'어어? 이것 똑같은 환경이네? 하나님께서 하셔! 예수님께서 하셔!!..'
그 정답을 예수님께서 듣고 싶어하셨는데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래도 예수님은 믿음 없는 제자들을 통해서도 일을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50명씩 나누어 앉게 하라고 하셔서 50명씩 앉았다.
50명씩 앉았으니 몇 그룹이 되었나요? 어른들만 100그룹이다.
얼마나 큰 지는 모르지만 바구니를 가져왔다.
어디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열두 제자들이 바구니를 들고 섰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난다. 기적이 어디서 언제 일어나는가?
제자들 열두명이 바구니를 들고 서 있다.
지금 예수님이 갖고 있는 것은 뭔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게 얼마만해요? 조그만 할 것이다.
그것을 베드로에게 앞으로 나와라!..해서 나누어 준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 떡 다섯개를 몽땅 주었다. 몽땅!
근데 그 바구니에 보리떡하고 물고기가 꽉 찼겠나?
거기에 찼겠지! 줬다. 그리고서 또 줬다.
그럼 예수님이 가진 것에는 뭐가 있는가? 또 있어요! 그래서 또 주고!
또 주고 또 주고 그렇게 주었더니 바구니가 꽉 찼다.
기적을 누가 제일 먼저 보는 것인가? 제자들이 제일 먼저 본다.
예수님한테서 나갈 때 본다. 이 베드로가 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또 제자들이 가서 준다. 이것 먹으라, 이것 먹어.. 이때 기적이 일어났어요?
성경에는 그것이 없다. 예수님의 손에서 나갈 때 기적이 일어난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니 바구니가 비었다. 그래서 다시 예수님한테 온다.
다시 또 예수님이 주신다. 또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본다.
제자들은 그 믿음 가지고, 예수님한테서 나갈 때! 믿고서!
보리떡 다섯개면 제자들 열둘한테 나누주면 없어지는 것인데
제자들이 보면서 아니, 우리가 다 받기도 전에 끝나야 하는데?
근데 다 바구니를 가져온다.
그때 믿음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나눠주는데 계속 나오는 것이었다.
베드로, 가! 그리고 다른 제자한테 또 나눠 주신다.
열두명한테 다 나눠주고 보니까 베드로가 다 나눠주고 또 온다.
그럼 또 줬다. 제자들이 제일 먼저 기적을 본다. 그 약간의 믿음 때문에!
약간의 믿음이다. 제자들은 50명씩 앉히라고 하니까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다 한다.
광주리 가져와라!..하니까 다 가져온다. 기적을 보는데 이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기적을 봤다고
목사님이 말씀하셨는가? 별 것도 아닌데 댓가를 지불했다고 했다. 그게 믿음이다.
여러분, 절대 그 믿음이 작은 믿음이 아니다.
“보리떡 다섯개하고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광주리도 가지고 와라..”
“미쳤네! 가끔 얘기하시더니만 미쳤네! 보리떡 다섯개하고 물고기 두마리 가지고 무얼하실려고?”
그런데 가지고 온다. 그리고는 다 내어놓는다. 바구니 이리 가져와라.. 그걸 내놓는다.
여러분, 그것 쉽지않은 믿음이다. 아주 쉽지않은 믿음이다.
우리 이사야 집사님이 간증한 것이 있다.
눈을 뜬 세계와 감은 세계가 완전히 다르지 않는가?
눈을 뜨면 현실을 본다. 눈을 감으면 천국을 들어가는데 눈을 뜨고서는 아무리 봐도 안된다.
근데 눈을 뜨면 현실이다. 눈을 감으면 에수님이 계신다.
그런데 이제 이사야 집사님은 눈을 뜨나 감으나 같은 세계다.
이걸 간증으로 썼다. 기가 막힌 간증이다.
근데 우리는 아직까지 거기까지는 못 들어간다.
그래서 제자들이 5천명을 보면서 예수님을 보면서 헷갈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믿음으로 바구니를 가지고 오니까 그때 기적을 본다.
우리가 이 기적을 보기가 쉽지않다.
그래서 기적을 못 본다. 우리 믿음이 거기까지 없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이, 예수님이,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기적들이 일어난다.
그러면서 어제 예를 하나 들어주셨다. 아주 재미있는 예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미스했을 것이다.
그 예가 뭐였냐면 아버지한테 양이 19마리가 있다. 세 아들이 있다.
세 아들에게 양을 나누어 줄려고 한다. 큰아들은 양의 절반을 가지고 가라.
둘째 아들, 너는 1/4을 가지고 가라. 셋째 아들, 너는 1/5을 가지고 가라.
감사합니다..하고 가지고 왔다. 19마리를 50%로 나누니 한마리를 반으로 짤라야하니 이게 안된다.
또 둘째 아들이 1/4을 가지고 갈려니 19마리를 1/4로 하려니 또 한마리를 짤라야한다.
또 셋째 아들은 1/5을 가져야하는데 19마리에서 1/5을 할려니 또 한마리를 짤라야한다.
그러니 이게 안된다. 그래서 아버지, 이것 못 짜르겠는데요?
그랬더니 양 한마리를 더 가지고 와서 했더니 양이 20마리가 되었다.
그래서 첫 아들은 반이니까 10마리를 가지고 간다.
둘째 아들은 1/4이니까 5마리를 가지고 간다.
셋째 아들은 1/5을 가지고 가니까 4마리를 가져간다.
합하니까 10 + 5 + 4 = 19마리이다. 한마리는 아버지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하나님이 Inbolve 되면 기적이 일어난다.
다 19마리가 맞다. 아버지것은 터치도 안했다.. 그 이야기를 하셨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 성령님의 임재에 예수님이 거기에 계시면 불가능한 일들이 문제가 해결이 된다.
어제 그것을 캐치 못 하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항상 주만 바라보시고 가시면 여러분은 손해보지 않는다.
손해를 본다는 것은 여기를 때리면 반댜편도 돌려 대는 것이 손해인데
나중에 보면 얼마나 큰 이익인지 모른다. 예수님 바라보면 예수님은 그러라고 하신다.
당장 손해볼 것 같은데 아니다. 이게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까 그런 경우, 여기(오른 쪽)을 때릴 때 왼쪽도 돌려댈 경우가 생길 때 하나님께 감사하시라.
어떻게 나한테, 예수님도 아닌 나한테 어떻게 이런 환경을 주셨어요?
어떻게 이런 챤스를 주셨어요? 어떻게 여기를 맞으면 이쪽을 돌려댈 수 있는 그런 챤스를 주셨어요?
정말정말 감사하셔야 된다. 그런 경우를 당하면 정말정말 감사하셔야 한다.
제가 엊그제 쇼크먹은 것이 있다.
찬양을 부르는데 지난 번에 빅베어로 TD를 갔을 때 찬양의 영이 임하면서
제가 일생을 찬양했는데 “너, 여태까지 노래했다. 지금부터 찬양한다..” 그랬다고 했지요?
야아~ 나는 어제 처음으로 그 당시 왜 그말씀을 했는지 어제 알아졌다.
엊그제 제가 여호수아 형제에게 임한 임재찬양'에서 “거룩한 성”찬양을 들었다.
나 어제밤에 잘 때 한꿈을 꾸었네
그 옛날 예루살렘성에 곁에 섰더니 허다한 아이들이
그묘한 소리로 주 찬미하는 소리 참 청아하도다
천군과 천사들이 화답함과 같이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그 꿈이 다시 변하여 그 길은 고요코
호산나 찬미소리 들리지 않는다
햇빛은 아주 어둡고 그 광경 참담해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의 일이라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의 일이라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그 꿈이 다시 변하여 이세상 다가고 그땅을 내가보니
그 유리바다와 그 후에 환한 영광이 다 창에 비치니
그 성에 들어가는 자 참 영광이로다 밤이나 낮이 없으니
그 영광 뿐이라 그 영광 예루살렘 성 영원한 곳이라
이영광 예루살렘성 참 빛난 곳일세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노래 부르자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호산나
이 찬양곡을 크리스마스 때마다 집안식구들이 다 나사거 앞에 나가 부르던 찬양이다.
우리 여동생은 피아노치고 우리는 합창을 한다.
나는 테너로 부르고. 얼마나 좋아하는 찬양이었는지.
그런데 엇그제 이 찬양을 내가 몇번을 들었다.
엇그제 이 찬양을 듣는데 이 가사가 무슨 가사인지를 처음으로 알았다.
이야~ 이 가사가 이런 가사네! 예수님의 생애를 노래한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들었다. 처음으로!
그 가사를 내가 외운다. 가사를 내가 외우고서 얼마나 이것을 쭝얼쭝얼..
근데 엇그제 듣는데 “아니, 가사가 이런 가사네!!” 를 깨달으며 내가 쇼크를 먹었다.
아,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 노래했어!”라고 하셨구나!
제가 왜 이 얘기를 하냐면 혹시 여러분도 그럴 수가 있다.
멜로디가 좋아서.. 혼적으로 너무 좋아서.. 이게 혼적으로 너무 좋으니까
멜로디가 좋고 테너로 막~ 뽑고 너무 좋으니까 영이 무디어졌다.
혼이 영을 죽여버렸다. 그게 여태까지 그랬던 것이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게 있을 수가 있다.
그래서 찬양을 너무 좋아하는 곡이 있을 경우 가만히 가사를 쭈욱~ 음미해 보시라.
나같은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형제님은 다음으로
카페에 영성 이야기에 나와있는
#307 교회를 어지럽히는 험담의 악령을 추방하라! - 프랜시스 프랜지팬 을 읽어 주셨다.
사탄은 항상 교회에 다른 사람을 흠잡는 귀신들을 내려 보낸다.
사탄의 목적은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으려 함이다. 악한 자가 이러한 공격을 하는 목적은 예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기 위함이다.
험담이 난무하면 교회는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고 불완전한 인간들만 바라보게 된다.
이는 인간의 잘못과 실수에만 집중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소시키려는 책동이다.
흠잡는 영의 임무는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일이다. 이 사악한 영은 가족, 교회, 교회의 협력단체를 공략하면서 하나됨을 파괴하고, 인간관계의 틈새를 벌려놓는다. 악한 영은 선한 것을 분별하는 척 하지만, 결국 다른 교인을 판단하고 비판하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성도에 관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교우에 대한 태도여하에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되거나, 아니면 악한 영의 공격을 받고 있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 때문이다.
흠잡는 귀신이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며칠 내지는 몇 주를 소비해가면서 교회의 흠집과 목사의 잘못을 캐내도록 책동한다.
그러한 잘못들이 수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도 상관없다. 이 속이는 영에 사로잡힌 자들은 자신을 마치 '정의의 십자군'인양 생각한다. 그리고는 교회의 다른 식구들을 죽일 적들로 생각한다.
물론 교회에도 부족한 것들과 잘못된 것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을 위해 먼저 성심껏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필요를 채워주면 된다. 그러면 부족한 것이 도리어 영적 성장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흠집을 잡는 가십(gossip=잡담,소문)의 영(험담의 영)이 작동하면 모든 것이 망가진다.
험담의 영은 교회를 파괴하는 영 중에서 가장 골칫덩어리이다. 실수나 잘못이 영적 도약의 발판이 되지 못하고, 걸림돌이나 위축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별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기도로 섬기기 싫은 마음을 비판으로 돌려대며 연막탄을 피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교회나 목사가 완벽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지적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한 정확한 비판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이 영적으로 뛰어나다는 증거라도 된단 말인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한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교회의 잘못이라면 멋들어지게 지적해 낼 수 있다.
사실 남들이 비방하는 말만 듣고서 덩달아 비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사려되는 그 장본인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사정이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 장본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비방전선에 가담하는 자들은 모두 형제/자매를 무고히 헐뜯는 자들이다...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그렇게 마구잡이로 다른 성도를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악한 자의 영이 교회에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악한 자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사악한 악령은 교인들로 하여금 목회자를 불신하게 만듦으로, 설교 말씀에 의혹을 갖게 만드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수많은 교단의 목회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교회에 영적 도약이 있기 전이나 혹은 후에는 반드시 악한 자의 영이 날뛴다. 그러한 귀신의 공격으로 교회는 항상 성장을 저지당했다고 한다.
그 악한 영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혀 놓으면, 성도들은 온갖 비방과 비난에 술취한 듯 비틀거린다. 그리고 많은 교인들이 그 독기에 질려서 겁을 먹는다. 결국 온 교회가 속임수로 인하여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거기에 관련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오직 문제 구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교회가 하나되기를 바라시며 중보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헐뜯는 자들이 날치는 가운데서는, 소위 신자라는 사람들도 예수님이고 뭐고 아예 신앙에도 관심도 없어진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는 귀신의 장난에 놀아나는 격이 되는
것이다.
귀신에 미혹된 자들은 서로에게 비방을 퍼붓기에 정신들이 없다. 한 쪽이 비방하면 다른 쪽에서는 또 다른 비방으로 맞선다. 그런 동안에 교회는 의혹과 두려움 속에서 망가져만 간다.
귀신의 표적이 된 교회는 황폐해진다. 그 와중에 교회의 목회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실망하게 되고, 잘못하면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파멸이 아닌 치유의 길도 있다. 그것은 성경적인 회개와 징계의 길이다!
..악한 자의 손아귀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은 회개뿐이다. 죄를 회개하고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믿고 의지하면, 악한 자를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꼬이게 만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비난과 욕설을 퍼붓게 만드는 것이다.
남의 흠을 잡는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그래서 사탄이 역사하면 모든 일이 꼬인다.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도 용서하지 못하게 한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면 우리들은 흠잡는 악한 자의 영에 의해 완전히 조종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서로 상대방을 (험담의) 먹이로 삼는(prey) 대신, 서로 상대방을 위해 기도해야(pray) 한다.
그러면 교우를 헐뜯는 영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똑같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면, 모든 험담의 악령은 굴복된다.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신다. 그렇지만 외적으로 나타나는 목회자의 연약함을 보고 성도들이 비방하는 경우가 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다. 목회자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그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교인들은, "목사가 신령하지 않다. 성령이 충만하지 않다"고 비난한다...그러나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려면 목회자에게도 교인들의 격려와 사랑이 필요하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큰 능력과 권위를 가진 주님의 종들을 일으키시기 원하신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광야의 메마른 땅을 지날 때, 교인들이 그 목회자에게 물을 공급함으로 촉촉히 적셔지게 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죽어가는 육에 독수리 같이 달려들어 뜯어먹어야 하겠는가?
마귀는 (성도를 참소하기 위해서) 신자의 생각과 말을 이용해서 하나님 앞으로 접근한다.
교회에 떠도는 험담에 신자가 동조할 때, 수군거리는 뒷공론과 부정적인 비판을 받아들일 때, 신자는 사탄으로 하여금 신자들의 입을 사용하도록 내어주는 것이다.
믿는다는 자들의 비판하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를 참소하는 마귀의 음성으로 변화되어 버린다.
당신이 어느 교회를 가든지, 거기에는 잘못과 부족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인지가 드러난다.
진정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면, 교회 안에 부족한 점을 보면 힘을 공급해 주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그리스도를 닮은 중보 기도자들은 교회가 온전히 세워질 때까지,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참소자는 먼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쫓아내져야 한다. 흠잡기와 비난의 소리들은 용납될 수 없다.
형제, 자매들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권세는 오직 사랑이 가득한 기도로 중보하는 자들에게서만 발견된다. 왜냐하면 중보자들은 교회의 부족함을 볼 때에, 비판적이 되는 대신에, 중보기도로 험담의 악령을 추방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목양을 하는 사람을 사탄 마귀가 가만히 둘 리가 없다. 사탄의 작전은 목자를 파괴시키고 양들을 흩어버리는 것이다. 사탄의 공격이 성공을 거두면, 사랑은 식어지고 교인들의 마음은 굳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거하는 집인 거룩한 교회에서...악독한 가십(gossip)에 의해서 인간관계가 단절되거나 파괴될 때, 또는 험담이나 비난에 의해서 신뢰가 불신으로 바뀌게 될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분노하신다(잠 6:16-19). 심지어 하나님도 마음이 상하신다면, 주의 종들의 마음은 오죽하랴!
그렇다면 교회는 살아남아야 하고 또한 하나님도 기쁘게 해 드려야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정답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옷입는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프랜시스 프랜지팬, '교회를 어지럽히는 험담의 악령을 추방하라' 중에서>
교회문제나 다른 사람에 대한 얘기를 막 하고 싶다.
근데 그것을 혼자하는 것이 아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야아, 그사람 죽일 놈이다!..”라며
비난하고 싶다.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충만 자매님의 댓글에 “하나님, 내가 왜 그사람 미워해야돼요? 나를 어떻게 알고서?
“어떻게 제가 그사람을 미워하게 됐어요? 내가 어떻게 교회를 비방할 정도가 됐어요?”
그렇게 하나님께 따지시라고 그랬다. “하나님, 내가 어디 이모양이 되었어요?
내가 어떻게 그래야 돼요? 내가? 내가 왜 이렇게 되었어요?”
그때 그랬지요? “하나님, 저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나한테 와서 저런 얘기를 해요?”
왜? 내가 비방에 넘어갈 만하니까 나한테 왔다.
여러분한테 비방하는 얘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이 들을 만하니까 온 것이다.
그때 내가 그사람이 나한테 그런 얘기하면 내가 무슨 얘기한다고 그랬는가?
“기도하세요? 성령충만하세요?”라고 이렇게 물어봤더니 얼굴이 빨게지면서 갔다.
왜 나에게 와서 쓸데없이 쓰레기 같은 남 험담하는 얘기를 하는가?
길거리의 돌처럼 많은 것이 Gossip이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 사랑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 얘기를 저사람이 나한테 해? 내가 넘어갈 것처럼 보이나?
내가 그렇게 보여요? 내가 한심하네? 그렇게 한마디만 했버리면 끝난다.
“하나님, 내가 언제 그렇게 보일 정도가 되었어요? 내가 얼굴에 빛이 안나는 모양이지요?”
제가 영적 전쟁 하기 20년 전에 그 사건이 있었다.
그때는 성령충만해서 예수님 밖에 없었다.
“아니, 장로님, 무슨 그런 얘기를 하세요? 기도하세요? 성령충만하세요?”라는
그말 밖에 않했다.
근데 요즘에 제가 얘기한 것이 있다.
여러분에게 와서 Gossip하는 사람들에게
“그것 지금 말씀하시는 것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에요?” 라고 이렇게 얘기하면 쉽다.
자 우리 입술을 빌려서 하는데 우리 안에 하나님 아니면 사단이 우리 입술을 통해서 얘기한다.
사역해 보면 안다. 사단 아니면 하나님이 한다.
누가 나한테 그런 Gossip 얘기를 하면 “지금 예수님이 얘기하시는 것이에요?”
라고 질문하면 답은 뻔하다.
내가 우리 와이프랑 얘기할 때 항상 그 얘기를 한다.
“지금 당신이 이야기 하는 것이 . 당신 안에 계신 예수님이 말하는 것이야?”
“아니면 귀신이 말하는 것이야?” 하면
너무너무 쉽다. 제가 항상 그랬다. 영적 분별이 안될 때 예수님을 갔다놓으라고 했다.
말씀으로 분별한다는데 이미 여러분들은 말씀을 많이 안다.
그런데 어떤 것은 말씀으로 분별이 안 되는 것이 있다.
어떻게 해야될 지를 모를때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WWJD(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라면? 그러면 금방 영분별력으로 갈라져 버린다.
그때 그때마다 여러분 안에 사랑의 마음이 나오지 아니하면
“아, 이것 내가 지금 문제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고 얘기할 때 항상 사랑으로 하시라.
저 사람이 나쁜 소리해도 ‘아, 저사람이 모르고 저러는구나..’아시고
그 분께 사랑을 담아 “예수님이시면어떻게 하셨을까요?” 라고 말하면
믿는 자라면 그 사람이 퍼뜩 깨닫을 것이다.
오늘은 다솜 자매의 친구인 조앤 자매가 새로왔고
마찌코 자매가 일본을 방문하고 무사히 돌아와 축복송을 불러주고 허그하며 환영하는 시간을 가졌다.
온전한 은혜 자매님의 선창으로 ‘돈 주세요’ 기도를 하고 개인기도에 들어 갔다.
첫댓글 예수님을 사랑한다하면서
그분이 하라는걸 못한다면.
예수님 마음을안다하면서
그분의 고통을 리얼로 감당못한다면.
예수님이 용서해~사랑해~ 하시는데
못해요~~한다면
거짓이겠지요.
생명을 거져받고서
그어떤걸 못 내놓는다면
있는것 모두 빼앗겨날라가도
할말 없겠지요..
그냥.
자유하고싶어,
예수님이 하란대로 해버리는게
내살길임을~
납작 엎드려 예수님께 항복하렵니다.
ㅎㅎ
그사랑아님 절대 못하지요~^^
저도 한때는 용서하지
못해 홧병에 살때가 있었는데 용서가 결국은 저를 위한 기도라는걸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어요. 너무 감사해요.맞아요! 매순간 예수님만 바라봐야죠. 영분별은 아직 서툴지만 예수님께 여쭤보면 제 맘이 편해지면서 해답을 깨닫게 되는것 또한 너무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