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도금봉에 대한 나의 기억은 매우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지금 신당동에 있는 중앙시장 근처 어느 작은 극장에서 본 공포영화때문이다.
몇살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가서 본 <목없는 미녀>에서 원한에 맺힌 귀신으로 등장한 그녀의 캐릭터가 너무도 무서웠다.
요즘 웬만한 호러물보다는 내겐 왜 그리도 무서웠던지...
그렇게 도금봉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런 그녀가 지난 6월 3일 홀연히 감기를 앓다가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일가 친척도 아닌 천주교 복지시설의 수녀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나의 존재를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면서 지난 6월 6일 발인할 때도 그의 영정 사진을 한지로 가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예견처럼 빈소를 찾은 영화계 인사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한국영화에 끼친 지대한 공헌마저 빛이 바래면서 천하의 도금봉은 결국 영화인장으로 치러지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인가?
그녀는 1957년 영화 <황진이>로 데뷔하여 1959년 <유관순>, 1961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7년 <월하의 공동묘지> 등 거의 5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어찌되었든 그녀의 말년에 관한 인생 행적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녀의 죽음을 너무도 초라하고 쓸쓸하게 맞이한 것 같아서 안타까울 뿐이다.
왜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을까?
지난 날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전성기의 모습으로 올드팬들의 기억 속에 남기를 바랬을까?
혹자는 그녀의 행동에 대하여 '나르시시즘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한국영화에 있어서 몇 안 되는 팜므파탈의 전형을 세운 그녀가 남긴 발자취를 이제부터라도 한국영화 역사 앞에 분명하게 기록해야 한다.
그리해야 앞으로도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나는 수많은 한국의 원로배우들은 물론 지금의 현직 배우들에게마저 또렷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늦은 감이 있으나 진심으로 도금봉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