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299
■1부 황하의 영웅 (299)
제 5권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제 36장 떠나가는 개자추(介子推) (8)
공실이 안정의 분위기를 찾아가자 진문공(晉文公)은 비로소 여러 신하들에 대해 포상(褒賞)을 실시했다.
19년의 망명 생활동안 자신을 따라 다니며 함께 고생했던 가신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국내에 남아 나라를 지키면서 자신을 영접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상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진문공(晉文公)이 시행한 논공행상의 기준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등공신 : 진문공과 함께 망명하여 열국을 유랑했던 신하들
2등공신 : 국내에 머물면서 진문공이 귀국할 수 있도록 힘써준 사람들
3등공신 : 진문공이 귀국했을 때 즉시 항복하고 영접한 신하들
진문공은 또 1,2,3등 중에서도 공로의 경중을 따져 다시 상(賞)을 상하로 나누어 포상을 실시하였다.
이때 포상을 받은 공신들의 면면을 대략 살펴보면,
1등공신
상급 : 조쇠(趙衰), 호언(狐偃)
차급 : 호모, 서신, 위주, 호사고, 선진, 전힐 외 다수
2등공신
상급 : 난지, 극진, 난순, 극곡
차급 : 주지교, 손백규, 기만 외 다수
3등공신
상급 : 극보양, 한간
차급 :양유미, 가복도, 극걸, 선멸, 도격 외 다수
논공행상의 내역을 살펴보면, 진문공을 따라 함께 유랑했던 가신들의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진(晉)나라 권력의 핵심은 모두 진문공의 가신단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진문공(晉文公)은 특히 호돌의 원통하고 장렬한 죽음을 잊지 못하였다.
호돌(狐突)은 진문공의 외조부일 뿐 아니라 그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였다.
단구(短軀)였지만 거목(巨木)을 연상케 하는 깊은 지혜와 높은 품격.
호돌(狐突)은 진문공의 생애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호돌 어른이 얼마나 처절하게 죽었는가.
타국을 유랑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진문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과감히 바친 태산 거두 같은 의인(義人).
진문공(晉文公)은 호돌 어른을 생각하며 눈물을 뿌렸다.
그를 위해 진양 땅 마안산(馬鞍山)에다 사당을 세우니, 후세 사람들은 그 마안산을 호돌산(狐突山)이라 고쳐 불렀다.
19년의 망명생활, 그리고 드라마틱한 멋진 귀환.
그 기나긴 유랑생활과 귀국하여 군위에 오르기까지 어찌 위에 나열한 사람들만 공이 있었겠는가.
눈에 띄지않게 음지에서 고생한 사람들의 수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 보이지 않는 공로자들을 진문공이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었다.
공을 세워도 논공행상에서 빠진 사람들이 많으리라.
진문공은 강성(絳城)의 성문 높은 곳에 조서를 내걸었다.
-공로가 있는 자로서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으면 자진하여 신고하라. 2차로 포상을 실시하리라.-
성문 앞에 내걸린 조서를 보고 반색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진문공의 가노(家奴)로서 역시 19년 동안 진문공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궂은 일을 도맡아했던 호숙(壺叔)이었다.
당연히 큰 상을 받으리라 기대했던 호숙(壺叔)은 뜻밖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상도 내려지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
'내가 1차 포상에서 빠진 것은 뭔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궁으로 달려가 진문공에게 호소했다.
"신(臣)은 포읍을 떠날 때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다니며 주공을 모셨습니다.
1만여 리가 넘는 여러 나라를 유랑하느라 발가락이 찢어지고 뒤꿈치가 터져 피가 흐를 정도였습니다.
주공께서 주무실 때는 잠도 안 자고 곁에서 지켜드렸고, 방랑할 때에는 수레를 몰며 잠시 동안도 주공 곁을 떠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공께서 상을 내리시면서 신만을 빼놓으셨으니, 혹 신이 주공께 무슨 죄라도 지은 것이 있습니까?"
진문공(晉文公)이 빙그레 웃으며 호숙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호숙(壺叔)아, 이리 가까이 오라. 내가 너를 위해 상세히 그 이유를 말해주마.
내가 이번에 상을 내리면서 정한 기준이 무엇인지 너는 아는가?"
".................?"
"나는 이번에 공을 논하면서 인(仁)과 의(義)로써 나를 지도하여 깨닫게 해준 사람에겐 상급(上級)의 상을 내렸고,
묘책(妙策)으로써 나를 도와 여러 제후로부터 욕되지 않게 해준 사람에게는 그 다음 상을 내렸고,
온갖 위험(危險)으로부터 자신을 던져가면서 나를 보호해준 사람에겐 다음다음의 상을 내렸다.
"................."
"요약하여 말하면, 가장 으뜸되는 상은 덕(德)에 대해서 준 것이고,
그 다음은 재능에 대해 준 것이고, 또 그 다음은 공로에 대해 준 것이다.
나를 위해 백방으로 애써준 수고로움은 필부의 힘일 뿐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것에 비할 수가 없다. 내 말을 알겠느냐?
나는 1등, 2등, 3등 공신에 대한 포상이 끝난 후 너를 비롯한 많은 신하(臣下)들에 대해 상을 내려줄 것이니, 너는 아무 염려하지 마라."
진문공(晉文公)의 이 포상론은 진문공이 어떠한 군주였는가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일화 중 하나다.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사뭇 상(賞)에 대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호숙(壺叔)은 잠시나마 자신의 공을 조쇠나 호언에 비했던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물러났다.
과연 진문공은 며칠 후 호숙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에게 황금과 비단을 듬뿍 내려주었다.
포상(褒賞)은 공평해야 한다. 상이란 공을 세운 만큼의 상을 내려야 그 가치와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과하거나 부족하면 상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 불평과 불만이 일게 마련이다.
그러나 진문공(晉文公)은 포상을 시행함에 있어 혈연, 친분, 사정(私情) 등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그 공만을 기준으로 논공행상을 실시하였다.
이런 면에서 진문공은 상(賞)의 의미와 속성을 매우 잘 아는 군주였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진문공(晉文公)에게도 실수가 있었다.
망명파 가신단 중 개자추(介子推)를 포상 대상에서 빠뜨린 것이었다. 고의는 아니었다.
모두들 자신들의 공적을 작성하여 진문공에게 올릴 때 개자추는 자신의 공적 조서를 올리지 않았다.
그는 궁으로 들어가 구두상으로도 자신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진문공(晉文公)은 개자추의 존재를 깜빡 잊었다. 그는 끝내 개자추를 빠뜨리고 공신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개자추(介子推)가 누구이던가.
호언, 조쇠 등과 더불어 진문공이 포읍을 탈출할 때부터 함께 따라다니며 숱한 고생을 감내한 망명파 가신 중의 한 사람이다.
개자추(介子推)는 원래 자신을 내세우기 싫어하는, 과묵하고 청렴결백한 사내였다.
유랑 시절, 진문공이 배가 고파 걸을 힘도 없을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국을 끓여 바쳤을 정도로 충성심이 깊었다.
이런 그의 눈에, 상을 받기 위해 다투듯 공적 조서를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여간 가소롭게 비쳐지지 않았다.
'보답을 바란 충(忠)은 진정한 충(忠)이 아니다.'
더욱이 개자추는 지난 2월 중이(重耳)와 그 가신단이 황하를 건너 귀국하기 직전 호언(狐偃)이 큰 공을 세우기라도 한 것처럼 외쳐대던 말을 듣고서 호언 등에게 큰 실망을 느꼈었다.
- 하늘의 공적을 훔친 도적!
그는 호언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런 호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체가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개자추(介子推)는 은퇴를 결심했다.
귀국하여 진문공이 군위에 올랐을 때, 그는 단 한 번 궁으로 들어가 조하(朝賀)만 올렸을 뿐 줄곧 병을 핑계하고 집 안에 칩거하였다.
그런 중에 논공행상이 시행되고 포상자들이 발표되었다.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개자추(介子推)는 담담했다.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개자추의 공신 탈락에 안타까움을 느낀 것은 오히려 이웃 사람들이었다.
개자추가 사는 집 바로 이웃에 해장(解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해장은 개자추가 아무 상도 못 타는 것을 보고 몹시 분격했다.
그러던 중 성문에 내걸린 조서를 보고 개자추의 집으로 달려가 그사실을 알렸다.
"2차로 상을 내린다고 합니다. 나리께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궁으로 들어가 나리의 공을 알리십시오.
그러면 주공께서도 잘못된 것을 알고 큰 상을 내릴 것입니다."
개자추(介子推)가 웃으며 해장에게 말했다.
"내 어찌 호언을 본받아 하늘의 공적을 훔칠 것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돌아가신 진헌공(晉獻公)은 모두 아홉 분의 공자를 두셨다. 그러나 끊임없는 내분 끝에 지금은 오로지 주공만이 살아 계실 뿐이다.
진혜공과 진회공이 비록 임금에 올랐었으나 하늘의 버림을 받아 그 대를 잇지 못했다.
오늘날 주공이 진(晉)으로 귀국하시어 군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늘의 공일 뿐 그누구의 공도 아니다."
"................."
"그런데 호언(狐偃), 조쇠(趙衰) 등은 어떠한가? 마치 주공의 귀환이 자신들의 공인 양 떠들어대며 상을 받고 있지 않은가.
이는 하늘의 공을 가로채는 도적들과 다름없는 행동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내가 함게 있을 까닭이 없도다!"
어조는 담담했으나, 그 안에 담겨진 뜻은 머리끝이 서지 않을 수 없는 비장감과 숙연함이 서려 있었다.
"그렇습니까......?
나리야말로 진정한 충신이십니다."
해장(解張)은 감복했다.
그런데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개자추(介子推)의 노모가 아들의 이 말을 들었다.
개자추의 어머니는 평생을 가난에 찌들어 살아온 여인이었다. 아들의 출세를 위해 갖은 시련과 고난을 감내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개씨(介氏) 가문의 부흥만 남았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아들은 출사를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노모는 손의 물기를 닦지도 않고 부엌에서 나와 개자추(介子推)를 향해 말했다.
"아들아, 너는 상을 구할 만한 자격이 있다. 너는 19년 동안이나 주공을 모시고 방랑하지 않았느냐.
더욱이 지난날 너는 넓적다리 살점까지 도려내어 주공께 바치지 않았느냐.
너의 고생은 상(賞)을 받을만 하다.
다시 생각해보아라."
어머니의 말은 눈물겨웠다.
개자추(介子推)는 슬픈 눈길로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결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이미 저들의 잘못을 책하는 말을 했습니다. 남의 잘못을 말해놓고 제가 그대로 따른다면 죄가 더 클뿐입니다.
아무래도 소자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운둔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개자추(介子推)의 성격을 잘 아는 어머니였다.
하지만 노모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네 생각을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야 가치가 있질 않겠느냐?
주공께만이라도 그러한 네 생각을 전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어머니, 말이라는 것은 한낱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속세를 떠나 은둔하려는 사람이 또 무엇을 꾸밀 것이 있겠습니까?
꾸미는 것은 현달(顯達)을 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꾸미는 것은 현달(顯達)을 추구하는 것.
개자추(介子推)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날 밤, 개자추(介子推)는 어머니를 모시고 강성을 떠났다. 아무도 몰랐다.
그가 노모를 등에 업고 향한 곳은 고향인 면상(綿上). 지금의 산서성 개휴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면상(綿上)에 당도한 개자추는 마을 뒤편으로 솟아 있는 면산(綿山)의 깊은 골짜기에다 정갈한 초려(草廬) 한 채를 짓고 약초와 나무열매를 따먹으며 조용히 지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