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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25-34)
어느 큰 저택이 불이 났습니다. 그 집 여주인은 겁에 질려 뛰쳐나왔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갑자기 다시 불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보석이 들어있는 상자를 안고 나오면서 말했습니다.“큰일날뻔 했네. 내 귀고리, 목걸이, 팔찌, 반지. 다 찾았다. 천만다행이야”그런데 옆에서 사람들이 외쳤습니다.“저기 보세요. 당신 아이들이 집에서 소리치고 있잖아요”
그 소리를 듣고서야 여인은 집에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이구 내 아들! 아이구 내 딸!” 소리를 치며 발을 동동 굴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불길이 너무 세서 손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 보석 상자만 건졌지, 자녀들의 생명은 건지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순위가 어떠해야 하는가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먼저 구하며 무엇을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십니까? 사탄은 우리 마음에 온갖 탐심과 염려를 심어서 먼저 땅의 것을 찾고 세상 것에 얽매이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욕심, 염려, 걱정, 근심 다 내려놓고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힘써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가치있는 인생을 살려면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본문, 33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우선순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이런 우선순위를 따른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염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무려 다섯 번이나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염려라는 단어입니다. 25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를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에 염려가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수많은 염려를 달고 삽니다. 그러나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까?우리가 염려를 중단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계십니다. 첫째는 아주 실제적인 이유입니다. 그것은 염려 그 자체가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눅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다" "둔하여진다"는 말은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감각을 상실하고 무력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입니다. 염려는 영혼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지나치면 영적으로 무력해질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치명적인 위험에도 빠지게 됩니다. 신앙경력이 깊고, 교회봉사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늘 염려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적 무기력증에 걸린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27절을 보십시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한다고 이미 다 자라버린 키를 자라게 할 수 있습니까? 전혀 의미없는 걱정, 해봐도 유익하지 않은 염려속에서 우리 인생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본래 염려란 단어는 헬라어로 ‘메림나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단어, 메리조라는 단어와 누스라는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그리고 메리조라는 단어는 나눈다는 뜻이며 누스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염려한다는 단어의 본래의 뜻은 마음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나누어지면 중요한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어떤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력이 떨어지게 되면 우리가 기대하는 좋은 결과를 생산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누어진 마음, 그 마음에서 어떤 생산적인 일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 한 가지는 신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염려를 극복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의식주의 문제, 이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의식주는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관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관심을 가진 것 자체는 전혀 잘못이 아니지만, 문제는 그것에 대한 염려에 빠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내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면 불안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갑자기 다가온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여러 가지 염려가 더 많아지고 두려움에 빠져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습니다.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의미가 어디 있느냐? 우리가 똑같이 염려하고 그것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절을 보면 매우 중요한 도전을 하십니다. (32절)"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것 때문에 염려하고 그래서 방황하는 인생, 그렇게 삶을 사는 것은 이방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된 너희가 저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이 염려에 매여서 똑같이 방황하고 똑같이 인생의 짐의 무게에 눌려 삽니다. 우리가 같이 걱정하고 슬퍼하면서 삶의 방향을 알지 못하고 방황한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했다는 고백이 우리의 삶에 변화와 차이점을 전혀 가져올 수 없다면 신앙의 의미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염려하는 여러분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염려와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염려와 두려움을 극복할수 있습니다.
1세기 초대 교회 문서들을 연구하던 신학자들이 어느 날 매우 재미있는 인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인물을 신비한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인물의 이름은 티테디오스 아메리노스(Titedios Amerinos)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도자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그의 흥미있는 이름을 주목합니다. 그 이름의 뜻이 재미있습니다.
티테디오스, 이것은 분명 이름인데 그 다음에 있는 것은 이름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메리노스라는 말은 ‘전혀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티테디오스 전혀 염려없는 사람. 이름치고는 재미있지 않습니까? 신학자들은 이런 추정을 합니다. "이 사람에 대한 많은 정보는 없지만 이 사람은 아마 예수 믿기 전에 굉장히 염려가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 믿고 나서 이 사람 삶 속에 뚜렷한 변화가 왔을 것이다.“
이렇게 바꾸어 보십시오. 전혀 염려하지 않는 사람, ”박병지“.이제 한번 여러분의 이름을 집어 넣어 보십시오. 전혀 염려하지 않는 사람, 000. 그렇습니까? 지금 이 순간 염려하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신앙이 염려에서 우리를 해방할 수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염려를 극복하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신앙의 의미가 어디 있습니까? 염려를 중단하십시오.
2.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십시오.
염려를 극복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올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니까 염려가 많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요 14:1)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그렇습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이 사망과 죄악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환경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인생의 우선순위를 추구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모든 역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이 모든역사를 주관하시고 내 인생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 그분은 내 곁에서 동행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전능성을 우리가 참으로 믿는다면 왜 걱정합니까? 왜 염려합니까? 결국 우리가 염려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주 신뢰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어떤 정신 의학자가 환자들의 염려를 분석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염려는 한마디로 말하면 쓸데없는 두려움에 온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 그러니까 염려는 한마디로 말하면 쓸데없는 두려움에 온 것입니다. 정말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베드로가 우리에게 이런 권면을 하지 않았습니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무슨 얘기입니까? 주님이 돌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진리는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요동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가 권면합니다. "여러분,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십시오. 주가 돌보십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는 살아계십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가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이것이 베드로의 권면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주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공중에 나는 새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저들을 책임져 주고 그들에게 주어진 기간만큼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그 새보다 귀한 존재가 아닙니까? 저 들의 백합화를 보십시오. 사실 본문의 백합화라는 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잡초라는 뜻입니다. 들에 핀 저 잡초같이 아무것도 아닌 풀도 창조주 하나님이 돌보시고 가꾸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기위해서 주께서 창조하신 고귀한 피조물인 사람을 주께서 책임져주시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30절)“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은 아셨습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이유, 걱정하는 이유, 그 염려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이유, 인생의 초점이 분명하지 못하고 당당하게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작아서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의 삶에 부딪혀 온 폭풍우, 풍랑 앞에 서서도 "하나님을 저는 믿습니다. 역사의 주인 되시고 삶의 주인 되신 내 하나님을 제가 믿습니다"하는 신뢰하는 이 믿음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인생의 초점이 분명해지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리고 내 삶이 당당한 승리요 영광이기를 소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창조자 여호와를 신뢰하라. 구원자 예수님을 신뢰하라, 주권자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먼저 구할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와 명예와 출세와 성공을 구하기 전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입니까? 죽은 다음에 가는 천당입니까? 우주의 어느 구석쯤에 있는 거룩한 공간입니까? 지구상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땅입니까?
‘나라’라 할 때 우리는 어떤 공간이나 영역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헬라어 ‘바실레이아’를 번역한 말로서 ‘통치ㆍ다스림ㆍ지배’를 의미합니다. ‘나라’는 공간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상태’에 대한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너를 통치하시게 하라, 하나님이 너를 다스리시게 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이, 욕망이, 쾌락이, 권력이, 고정관념이, 감정이, 상처가, 좌절이, 절망이, 과거가, 죄가 너를 지배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이 지배하시게 하라!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을 다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삶에 대한 염려 때문에 밤잠을 설치지는 않습니까? 혹시 마음의 상처 때문에 허구한 날 우울하고 슬픈 감정 속에서 지내지는 않습니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때문에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충족되지 않은 욕구 때문에 늘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의 헛된 풍조와 철학이 여러분을 다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매순간 하나님과 하나님 이외의 것 사이에서 선택과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염려 대신에 신뢰와 확신을, 어두운 감정 대신에 거룩한 빛을, 내 뜻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헛된 풍조와 철학 대신에 복음적 가치관을 선택하고 그것을 따라 살 것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이론적이며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의 현실과 관계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와 관련된, 우리의 일상의 모든 순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우리의 일상 속에 두루 스며들 것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와 명예와 출세와 성공을 구하기 전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입니다. 내가 염려하는 어떤 일이 있는 순간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내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께서 이 순간 나를 다스리고 있습니까?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순간 속에서도 염려를 주께 맡기고 주의 다스림, 주의 통치를 구하고 있습니까? 주께서 나를 다스리시고, 주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면 무엇이 걱정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치하시는 삶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기준이요 표준이란 뜻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잣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우리의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로 재어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기준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기준이 바로 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란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구하셨던 예수님처럼 십자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여러분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입니까?
오늘 나를 위협하고 있는 염려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내 생의 주인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오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이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지금까지 내뜻대로 살아왔다면 이제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결단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지금 이 시대야말로 그리고 이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우선 순위, 분명하고 확고한 우선순위를 바르게 할 때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이 우선 순위를 바로하는 축복을 통해서 이 고난과 시련의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빛나는 삶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예수가 주님인 것을 선포하는 삶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