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본 2016 촛불 시위 ㆍ 촛불 시위에 대한 비정치적/반정치적 해석을 뚫고 정치적 해석의 지평을 열다 촛불 시위와 탄핵과 대선의 국면이 한꺼번에 진행되고 있다. 2월 18일 제16차 촛불 집회에도 80만여 명(주최 측 추산)이 참여해 촛불을 밝혔고, 헌법재판소가 최종 변론 기일을 미룰 것인지, 대통령이 신문을 받을 것인지 논란 중이며, 대선 후보들은 이미 출마를 선언하고 언론의 초점은 벌써 대선 주자들에게 가 있다. 촛불, 탄핵, 대선으로 가쁘게 이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디쯤 서 있을까? 두 달여의 ... 더보기 ㆍ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본 2016 촛불 시위
ㆍ 촛불 시위에 대한 비정치적/반정치적 해석을 뚫고 정치적 해석의 지평을 열다
1. 진행 중인 정치적 대사건, 그리고 박근혜 이후 체제의 시작
2016 촛불 정국은 진행 중인 정치적 대사건이다.
민주화 이후 최대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2016 촛불 시위는 여러 측면에서 흥미로운 사례라 할 수 있다.
짧은 기간 동안 대규모 시민이 참여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혁명이나 쿠데타가 아니고도 정부의 통치권이 상실될 수 있다는 경험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선출된 최고 권력’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체제 관리가 가능했다는 점도 놀랍다.
민주화 이후 지난 30년간 개선?해결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여러 이슈들과 과제들이 ?
마치 밀린 빚을 한꺼번에 받아 내겠다는 듯이 ? 일제히 청구되기에 이르렀던 것도 특별한 일이다.
‘비선 실세에 의한 국정 농단’을 넘어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정부에 책임성을 묻는 방법을 둘러싼 논란,
광장과 국회, 헌재의 역할을 두고 전개된 민주주의 논쟁, 대통령중심제 등 정부 형태 내지 권력 구조를 바꾸자는 문제 제기, 친박의 정치적 시민권 박탈에서부터 ‘대연정 제안’에 이르기까지 정당 체계 변화 논쟁,
검찰과 재벌 권력을 민주화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발전 국가’로 이야기되는 기존의 발전 모델을 개혁하자는 여러 주장 등, 향후 이 모든 의제들은 여야 내지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다퉈질 중대 이슈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든, 또한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간에, ‘박근혜 이후 체제’는 분명히 시작되었다.
비록 여러 중대 이슈와 의제들이 단기적으로는 실현되지 않을지 몰라도, 그리고 수많은 갈등과 혼란을 동반할지라도 ‘장기적으로 지속될 변화의 압박 요인’으로는 남았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로 끝나거나, 대충 이러다가 마무리될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촛불 시위가 전처럼 큰 규모로 지속되든 아니든, 이 문제는 20대 대선은 물론 차기 정부 5년 내내 갈등 이슈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몇 번의 진통과 전환을 거치면서
한국 민주주의가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할 것임을 예상하게 해준다.
2. ‘해석적 개입’으로서의 글쓰기
“큰 사건일수록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깊고 넓을 수밖에 없으며,
어느 정도 먼지가 가라앉을 시간이 지난 뒤에 정리되어야 할 것들도 많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변화의 한가운데 있고, 새로운 변화가 계속 만들어지는 상황 속에 있다.
그렇기에 이미 변화가 시작된 의제들이나, 판단을 내려야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쟁점들과 관련해
불완전하게나마 의견을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때 마키아벨리는 시간을 가리켜 ‘모든 진리의 아버지’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시간의 경과가 가져다주는 ‘늦은 지혜’에 만족하지 말고 맹렬한 기세로 ‘변화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라고 했다. 2016 촛불 시위로 시작된 변화의 시간을 이어가야 할 과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그간의 변화와 앞으로의 상황을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해석하고 재해석해 내는 일은 중요하다.”
3. 왜 ‘양손잡이 민주주의’인가
8년 전 광우병 촛불 시위가 반정치적 시민 저항권의 행사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이번 촛불 시위를 정치적 시민 저항권으로 볼 수 있는 이유에 주목했다.
촛불만 든 것이 아니라 정치를 선용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내세운 점을 강조하며,
그런 의미를 담아 이를 ‘정치적 시민의 탄생’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양손잡이’는 다른 의미에서도 사용된다.
그것은 진보적 시민의 민주주의관만이 아니라 보수적 시민의 민주주의관이 공존한 특별한 경험이었다는 점이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보수적 시민들의 상당수가 촛불 시위의 참여자이거나 지지자였다. 95%의 촛불 지지는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에서의 거대한 동맹’으로 정의할 수 있고,
여권의 상당수까지 찬성한 국회 탄핵 가결은 ‘정치사회에서의 거대 동맹’으로 부를 수 있다.
이는 종북 좌파 내지 보수 꼴통이라는 규정으로 서로를 부정했던 두 길(보수 없는 민주주의와 진보 없는 민주주의의 길)이 아닌, 두 민주주의가 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 준 대사건임에 주목한 해석이다.
적대와 증오의 언어를 교환하는 ‘정치 양극화’의 악순환을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4. 박정희 패러다임의 붕괴
이 책은 이번 사태를 대통령의 비선 문제(‘국정 농단 사건’)로 좁게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국가-사회-경제 운영 모델이 그 적자의 의도하지 않은 행위의 결과로 인해 스스로 정당성을 상실한 대사건으로 해석한다. 즉, 야당에 의해서도 아니고 대안적 발전 모델의 강력한 도전 때문도 아닌 방식으로 구체제의 발전 모델이 붕괴한 특이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국가와 재벌 관계를 비롯해, 여러 차원의 큰 변화 없이는 해결이 어려운,
민주화 이후 지난 30년 동안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박정희식 국가 운영 모델은 권위주의 시기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
모든 수준에서 헤게모니를 가졌던 국가의 운영 원리이자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였다.
민주화를 통해 정치체제가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 체계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도 권위주의적 국가 운영 모델의 헤게모니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권위주의 시대로부터의 사회경제적?이념적 자원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적 정당이 헤게모니 정당이 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반면 박정희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적 비전과 사회적 기반을 창출할 수 없는 개혁적 야당(들)은 패권적 정당에 대한 항의와 비판에 의지해 선거에서 경쟁자 역할을 했을 뿐이다.
박정희 패러다임을 대체할 만한 정치적 자원을 발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현상은 거의 구조적인 측면이 있다. 그런데 이 헤게모니가 사실상 해체된 것이다. 민주화를 통해서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통해서도 가능하지 않았던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는 점, 이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5. 온건 다당제에 주목하다
“필자(최장집)는 그동안 여당의 성격을 ‘정권으로부터 파생된 정당’으로 보고 야권은 그에 대한 잔여 범주 내지 그에 가까운 한계를 보였다고 비판하면서, ‘서로에 대한 잘못 때문에 존재하는 적대적 양극화 체계’로 규정해 왔는데, 이번 과정을 지켜보면서 ‘온건 다당제로의 길’을 실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야당이 하나일 때보다 3당인 것이 훨씬 더 낫다는 판단을 했고,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합의를 만들어 가는 다당제의 긍정적인 효과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고 본다. 단일 야당 체계였거나, 아니면 민주당과 국민의당처럼 서로를 무한 견제하는 두 야당만 있었다면 이런 변화는 어려웠을 것이다.
3당 내지 2.5당 체계의 물리학적 효과가 꽤나 긍정적일 수 있다는 경험은 특별하다.
향후 새누리당에서 분열해 나온 정당이 자리를 잡아 4당 체계 내지 5당 체계가 들어선다 해도,
그런 다당제하에서 정당들이 발휘하는 정치의 역할은 양당 체계 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변화를 발전, 내실화시켜 입법부가 제1권력 부서가 되는 ‘민주적 삼권분립의 길’을 가기 위해서라도 정당 체계의 발전은 중요하다. 특히, 사회의 중대 갈등이 정치의 중심이 되는 정당 체계, 이른바 (이념적으로나 계층적으로 실체적 차이를 갖는) ‘다원적 정당정치’로의 길이 넓어져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보수 정당의 역할은 크다.
이번 촛불 시위가 남긴 가장 큰 민주적 효과를 꼽으라면 필자는 한국의 정당 체계가 1990년 삼당 합당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을 들겠다. 만약 친박으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구체제 세력이 과거 자민련의 경우처럼 소멸되는 경로로 가게 된다면 최소한 ‘민주화 세력의 범위 안에서 정당 체계의 오른쪽이 정립’된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작은 변화가 아니다.
향후 보수가 한국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퇴행시켰던, 과거와 같은 ‘냉전 반공주의에 기초를 둔 비이성적 정치 동원’ 대신 다른 이념 내지 사회적 기반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압박에 노출된 것, 이른바 비박일지라도 그런 변화를 통해서만 ‘정치적 시민권’을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냉전-반공-권위주의의 특징을 갖는, 강경 보수가 주도했던 그간의 정당정치는 끝나게 되고,
민주적이면서도 사회 통합적 역할을 하는 보수만이 인정되는 정당정치가 된다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정당 체계의 민주화’는 (헌법 전문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번 촛불 시위를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병행해 진보 쪽의 정당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의미에서
변화의 압박이 커진다면, 이는 전체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우호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촛불 시위가 개척한 변화의 실질적 내용에 주목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개헌에 대한 제3의 시각’으로서 ‘정치적 개헌론’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6. 직접 민주주의가 아닌 대의 민주주의의 심화로
“촛불 시위에서 제시하는 직접민주주의는 과연 대의제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촛불 민주주의 등의 개념이 갖는 문제는, 정치사회 현실과 상이한 경험을 마치 동일한 것처럼 잘못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집회나 광장, SNS 공간 등은 서로 비슷한 의견을 갖는 비교적 동질적인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 대해 어떠한 구속력도 갖지 않는, 자유로운 논의를 하는 곳이다.
이에 반해 정치의 공간은 서로 다르고 적대적인 의견을 갖는 이질적인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서로에 대해 강제적 구속력을 갖는 공적 결정을 추구하는 곳이다. 시민사회 공간과 정치의 공간은 전혀 상이한 것이다.
촛불 민주주의 등의 개념은 이질적인 두 공간을 마치 동일한 것처럼 혼동하게 만들 수 있다.
촛불 시위 현장을 들어 비유하자면, 민주주의는 촛불 시민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 시민과 탄핵 반대 시민 사이에서 작동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란, 촛불 시민들이 그 내부에서 자율적 토론을 통해 어떤 의사 결정(참여자들에게 강제력을 갖지 않는)을 하는 과정이 결코 아니다.
직접민주주의란 촛불 시민과 탄핵 반대 시민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강제적으로 적용되는 권위적 의사 결정을 하는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그 과정이, 참여자들이 모두 발언의 자유를 가지면서 물리적 충돌 없이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진행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정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직접민주주의 논의들은 자칫 정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당초의 목적과 반대로 현실 정치에 대한 혐오나 반정치의 정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 점은 특별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탄핵 국면에서도 나타나듯이,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는 ‘시민사회의 정치적 양극화’라고 생각된다. 흔히 자유민주주의에서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의 경험은, 역지사지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상호 인정과 관용의 자세를 촉진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그것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탄핵 사태 역시 이런 상황을 악화시킬 개연성이 높다. 외형적으로는 탄핵을 둘러싸고 국민 통합이 이루어진 듯 보이지만, 내부적으로 탄핵은 여권 지지자들 사이에 감정적 내상을 입히고 반대파에 대한 감정적 반감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흄(David Hume)의 지적처럼,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직접민주주의 주창자들은 정치를 ‘시민 대 정치 엘리트’의 구도로 바라보면서, 대의제를 정치 엘리트 독점 체제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직접민주주의를 통한 국민 주권의 회복을 주창한다. 직접민주주의하에서 정치는, 정치 엘리트들의 권력 쟁투의 장에서 시민들의 집단 지성이 발현되는 장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현실의 국민이나 시민사회를 너무 규범적?낙관적으로 바라본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국민이나 시민은 결코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 안에는 지역?계층?세대?성 등에 따른 균열이 존재한다. 특히 한국의 시민사회는, 촛불 국면에서 나타나듯이, 이념적 균열로 양분되어 있고 이런 균열이 정파적 지지와 견고히 연계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직접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자치 공간이 되기보다, 정파적 시민들 간의 직접적 충돌의 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직접민주주의가 공적인 의사 결정 체제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결정적 단점은 바로 이런 파벌 경쟁과 정치적 갈등의 격화이다. 아테네 민주정의 최대 단점 역시 이것이었다(헬드 2010, 52-3).
이런 점에서 직접민주주의로 대의제를 대체하는 것은, 현대 국가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정치적 결과에 있어서도 바람직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직접민주주의 논의는 폐기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건설적인 대답은, ‘직접민주주의인가 대의 민주주인가’라는 양자택일적?폐쇄적 질문을
‘직접민주주의 논의의 궁극적 지향점인 시민 주권의 확대 혹은 정치 참여 확대를 실현하기 위해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개방적 질문으로 바꾸고, 여기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우선의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의 민주정인 대의제의 운영에 있어서 시민의 정치적 의사 표현이나 정치 참여 기회를 가로막고 있는 각종 법?제도들을 개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대의제 전체를 뭉뚱그려 비판하기보다는,
대의제가 대의 ‘민주주의’로 작동하는 것을 가로막는 구체적 장애물들을 찾아내고 이를 제거하는 것이
정치 개혁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직접민주주의 제도는, 대의제를 기본으로 해, 대의제의 문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7. 촛불 시위를 통해 나타난 시민사회의 한계
“촛불 시위가 절정으로 향하던 12월 7일 철도 노조는 72일 간의 파업을 아무 성과 없이 마무리하고 현업에 복귀했다. 12일에는 시중은행 성과 연봉제 도입이 전격 결정된 데 이어, 12월 말 지방은행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결국 대통령 탄핵이라는 큰 이슈 속에서 노동 이슈는 묻혀 버렸다.
민중 총궐기는 촛불 시위를 계기로 시민 속으로 확장된 것이 아니라 희석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는 촛불 시위의 궁극적 목적인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중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부문적?계층적?사회경제적 이슈보다 보편적?일반적?정치적 이슈가 쟁점이 될 때 활성화되고 정치적으로 동원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촛불 시위에서도 대통령 퇴진 외에 여러 부문적 요구들이 분출했다. 하지만 그것은 촛불 시위의 구조적 배경은 되었지만, 직접적 촉발 요인은 아니었다.
결국, 사회경제적 불만과 요구가 있다 하더라도 직접 행동의 광장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최순실 게이트라는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부문적?사회경제적 이해의 분출은 어떤 공적인 것에 대한 요구라는 정치적 외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
결국 시민들의 집단적?사회적 참여는 사회경제적 이슈보다 정치적 이슈를 중심으로, 부문적?계층적?계급적 이슈보다는 보편적?일반적 이슈를 초점으로 해 이루어지며, 이 경우 시민들은 사적 영역에서 벗어나 공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로 호명된다. 민중 총궐기와 대비해 볼 때, 촛불 시민은 보편적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공공선에 헌신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다. ……
주의해야 할 것은, 공적?보편적 의제에 민감히 반응하는 한국 시민사회의 특징이 상당한 장점과 동시에 어떤 문제점도 안고 있다는 것이다.
…… 첫째, 공적 의제 중심으로 활성화되는 한국 시민사회의 속성은 부문 이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져오기 쉽다. 시민들의 사회적?정치적 행위에 있어 공공선이 강조될 경우, 그것은 시민사회 각 부문의 자기 이익 추구 행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사회 각 부문 집단의 집단적 이익의 분출을 정당한 것으로 수용하고 지지하는 자세와는 거리가 먼 정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이런 정서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파업 등과 같은 특정 부문 집단의 집단행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 혹은 방관적 외면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 노조 파업에 대해서는 ‘귀족 노조의 이익 챙기기’라는 비판이, 공공 부문 파업에 대해서는 ‘철밥통 지키기’라는 비판이, 정규직 파업에 대해서는 ‘비정규직에 대한 특권 지키기’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도시 철거민 시위나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 농민 시위 등에 대해서도 집단 이기주의 혹은 지역이기주의라는 비판이 따르곤 한다. 물론 이런 비판은 지배 계층의 이념 공세에서 비롯된 것이고, 보수 언론을 통해 사회적으로 확산된다. 하지만 그런 이념 공세가 비교적 쉽게 수용될 수 있는 시민사회적 토양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공적 대의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부문 이익의 분출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우리 시민사회의 특징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는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난 바 있다. 주지하듯이 1987년 6월까지 정치적 민주화라는 대의에 대해서는 도시 중산층까지 포함하는 전 시민적 지지가 모아졌다.
하지만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자 보수 언론의 주도하에 시민들은 등을 돌렸다.
촛불 시위에서도 이런 양상이 일정 부분 반복되는 듯하다. 촛불 시위와 함께 민중 총궐기, 노조 파업 등이 전개되었지만 사회적 연대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결과는, 사회 각 부문들이 구체적 삶의 이슈와 관련된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분리된 채 각개 격파되는 상황이다.”
“촛불 시민은 민중 총궐기를 주도했던 민중 부문과 일반 시민 두 부분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이들 간에는 일치와 불일치의 양면적 관계가 존재한다.
촛불 시위의 요구는 민주주의의 복원과 사회경제적 개혁이라는 두 범주로 구분되는데,
전자에서는 일치가, 후자에서는 불일치가 발견되는 것이다.
전자는 보편적?일반적 의제로서 촛불 시위 내부는 물론이고 거의 전 국민적 합의를 획득한 사안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후자는 부문적?계층적?계급적 요구라고 할 수 있으며,
촛불 시위 국면에서도 시민적 지지나 연대의 획득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사회경제적 개혁 추진의 내적 한계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한국 민주화의 오래된 숙제를 반영한다.
즉, 정치적 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심화하는 문제이다.
전자가 초점이 된 촛불 시위에서 민중 진영과 일반 시민들은 최대 다수 연합을 형성했고,
그 결과 국회의 탄핵 소추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이후까지 연합이 유지될지는 의문이다.
탄핵 이후에는 결국 광장에 다시 민중 진영만이 남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촛불 시위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한편에서는 촛불 시위의 ‘한계’ 혹은 ‘배반’을 지적하는 민중 진영의 비판이 예상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중 총궐기를 촛불 시위와 대비시켜 ‘불순?과격?불법 시위’로 몰아 탄압하려는 보수 진영의 공세가 본격화될 것이다(대선에서 정권 교체에 성공해 ‘개혁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민중 진영의 사회경제적 개혁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촛불 시위가 ‘대통령 탄핵을 통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일차적 목표를 넘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으려면,
민중 부문과 시민 부문의 긍정적 결합을 어떻게 확보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8. 한국 민주주의의 오디세이아
“전반전 경기를 매우 드라마틱하게 마친 다음 후반전을 준비하는 휴식 시간 같은 상황이다.
전반전의 변화와 성취를 잘 해석해 후반전을 준비해야 한다.
2016 촛불 시위가 압도적인 시민 여론의 지지에 의해 가능했고,
이어서 야 3당이 이끄는 다당제의 좋은 효과가 탄핵 국면으로 이어졌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대사건은 야당들 모두에게 ‘안정적인 정권 교체를 실현하고
박근혜 이후 체제를 만들어 가는 공통의 과업’을 부과했다고 볼 수 있다.”
확실히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고, 우리는 이미 그 길 한가운데 서 있다.
<어떤 민주주의인가 - 한국 민주주의를 보는 하나의 시각>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문제 제시!
한국 민주주의를 보는 하나의 시각『어떤 민주주의인가』.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같이 이야기해 왔던 세 명의 정치학자들이 만들어 낸 공동 작업으로, 각자 한 부씩을 책임지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대해 다각도로 고찰한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지적하고, 제자리를 찾지 못한 정당이 만든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되짚어본다.
민주주의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이냐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부터,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를 실천하지 못하고 패배한 진보의 미래에 대한 문제의식에 이르기까지 정당 민주주의론의 핵심 논점을 포괄하고 있는 이들의 주장을 인터뷰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14가지 테제를 통해 살펴본다.
출판사 서평
한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제는 ‘어떤 민주주의’인지 논쟁해야 할 시간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 왜 여전히 논쟁적인가? 어떤 민주주의를 할 것인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정당이 만든,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되짚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 것이냐의 논쟁에서 “정당 민주주의의 문제”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박근혜 당선 이후 “진보의 패배” 원인을 찾는 논쟁에서부터, 안철수 현상이 낳은 문제, 당선 이후 공약의 이행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 더보기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 것이냐의 논쟁에서 “정당 민주주의의 문제”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어떤 민주주의인가』와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는 그간 이와 같은 논점을 꾸준히 제기해 온 저자들이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체계적인 시각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공동 작업의 결실이다.
민주주의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이냐 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부터,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를 실천하지 못하고 패배한 진보의 미래에 대한 문제의식에 이르기까지 정당 민주주의론의 핵심 논점을 포괄하고 있는 이들의 시각을 인터뷰와 14가지 테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Q 왜 “어떤 민주주의”이고, 왜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인가
A 민주주의는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한 시민권이 주어진다. 공적 결정을 둘러싸고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지고 여기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다. 그 말은 시민이면 누구든 공동체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즉 민주주의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해 누구든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늘 민주주의‘들’로 나타나고 늘 논쟁 ‘중’인 상태를 동반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주의 혹은 민주주의를 운영해야 그 이상에 가깝게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시각을 말해보려 했다.
Q 운동의 관점에서 민주주의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 관점을 제기해 왔고,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운동론적 관점에서의 민주주의를 비판할 필요가 있다고 보나?
A 한국의 민주화가 운동의 힘에 의존한 바가 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라고 하면 체제에 타협하지 않는 저항의 열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민주주의도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같은, 통치체제의 한 유형이다. 그 말은 근본적으로 권력의 문제를 다뤄야 하기에 다원적 대표와 책임성의 원리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민주주의론은 저항론에서 통치론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운동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운동은 참여의 기반을 좋게 만드는 것에서 그 가치를 갖는 것이지,
운동으로 통치와 권력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Q 그래도 민주주의를 정당과 같은 협소한 제도적 틀 안에 가두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A 민주주의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으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다.
정치제제로서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은 복수의 정당이 정부 형성권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체제냐 아니냐에 있다. 국가가 인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통치자가 국민과 얼마나 소통 잘하는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운동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하면 복수정당체제를 민주주의의 가치에 가깝게 실천할 것이냐를 빼고 민주주의를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정당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운동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다만 “좋은 정당, 좋은 정당체제 없이 민주주의 없다.”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 주목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론은 저항론에서 통치론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도 통치의 체제,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Q 그간 늘 정치 개혁이 큰 이슈였는데, 무엇이 문제였나.
A 정당들은 모두 인물교체와 외부 개방을 앞세웠다. 개방적이어야 할 것은 정당이 아니라 정당체제이다.
그간 한국정치는 정당 체제가 아니라 개별 정당의 개혁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었다. 그것도 정당 공천과 지도부 선출의 권리를 외부에 개방하는 것에만 몰두하면서 당원을 소외시키고 당 조직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개방되어야 할 것은 더 넓은 대표성, 더 강한 책임성을 강제할, 좋은 정당체제를 만드는 데 있다.
“정당이 아니라 정당체제가 개방적이어야 한다.”
Q 좋은 정당체제란 무엇인가.
A 민주주의의 질은 정당들이 무엇을 놓고 경쟁하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이익집단과는 달리 정당들은 공익을 두고 경쟁하는 유사 공적 조직이다. 누가 더 공동체의 전체 이익에 더 잘 기여할 수 있는 의지나 능력이 있느냐가 민주적 정치경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사회든 공익을 둘러싼 갈등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회경제적 문제이며,
정치세력들이 이 문제를 놓고 경쟁해야 민주주의의 사회적 질이 좋아진다.
Q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정치경쟁의 중심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A 노동문제가 들어와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위에서 민주주의를 하고 있기에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인 노동이 노사 관계와 정당체제에서 폭넓은 시민권을 가져야 한다.
지금처럼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지속되어서는 민주주의는 그 가치에 상응해 실천될 수 없다.
“정당들이 사회경제적인 갈등을 두고 경쟁해야
민주주의의 사회적 질이 좋아진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Q 강한 국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는데.
A 민주화 이후 어느 정부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했다. 교리 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더 많은 시장경쟁과 함께 작은 정부 내지 국가 축소를 내세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국가가 주도해 이루어졌고 그러면서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최대 역설은,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공정한 시장경쟁을 어렵게 하는 재벌체제가 더 강해졌고, 기존의 강력한 국가가 더 강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데 있다.
선출된 대표들의 결집체인 정당이 정부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들에 의해 국가 관료제가 민주적으로 통제되어야 하고 시장 경쟁이 좀 더 공정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Q 선출직 대표로서 강한 대통령으로는 어려운가.
A 대통령 개인의 정부가 아니라 정당이 정부가 되어야 책임성이 튼튼해진다.
대통령 후보 개인의 인적 집단으로 이루어진 캠프가 선거를 주도하고, 집권 후 청와대를 주축으로 정부를 움직인다면 민주주의는 왕을 선출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으로 전락한다.
Q 개헌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정치를 잘 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생각을 해야지,
헌법을 바꿔 민주주의 좋게 하긴 어렵다.”
A 헌법을 좋게 만들어 민주주의를 잘하게 하기는 어렵다. 정치를 잘해서 민주주의를 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결선투표제를 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현재와 같이 정치를 극단적으로 양극화시키는 힘을 완화해 온건한 다당제가 자리 잡도록 하게 한 뒤, 개헌을 논의해도 해야 할 것이다.
Q 현행 선거법 체제 전반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현행 선거법 체제는 민주주의를 오히려 제한하고 있다.”
A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2개월 정도 안에 이루어지는 ‘정당의 후보공천 → 캠페인 → 투표’행위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4년 10개월(대통령 선거), 3년 10개월(국회의원 및 지방선거) 동안 정당과 유권자의 자유롭고 일상적인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 선택행위다.
그런데 현행 선거법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사전선거운동 금지’ 개념은, 선거운동 기간 이전 정당(정치인)-유권자의 자유로운 상호작용 자체를 불법화한다. ‘사전선거운동’이 금지된 체제에서 정당의 지구당은 불필요하게 되며, 정당의 선거준비는 3년 10개월의 일상적 정치활동이 아니라 2개월 캠페인 이벤트에 집중된다.
이런 조건에서 민주주의는 갑자기 등장한 낯선 후보, 이미지로서의 정당에 대한 인기 투표성 일회용 이벤트로 전락하고 만다. 또한 민주주의에서 정치활동의 소재, 방식에 성역은 없어야 한다. 유권자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은 정치활동의 소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정당(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정치활동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현행 선거법은 ‘당선되거나 당선되게 하거나 당선되지 못하게 하는 행위’라는 모호한 정의로 선거운동인 정치활동과 선거운동이 아닌 정치활동을 구분함으로써, 사실상 모든 종류의 정치활동에 자의적 규제를 적용하도록 해 놓았다. 국가가 법으로 정당과 유권자의 정치활동 내용, 방식 일반을 규제하는 사회에서 좋은 정당, 넓은 참여가 가능하기는 어렵다.
Q 여론조사와 모바일투표 등에 대해 비판적인데.
A 국민경선제, 모바일 투표 등은 참여의 가치를 오해한 것이며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선거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다. 정당과 유권자의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관계가 부재한 조건에서 일회용 여론조사와 인기투표에 기초한 공직후보 선출제도는 민주적 결정을 왜곡시킨다.
일상적인 참여의 공간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론조사와 모바일투표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 못한다.”
Q 이번 책에는 남북한 문제와 경제 발전 모델 관련한 글이 추가되었는데, 그 이유는?
A 민주주의는 자족적인 체제가 아니다.
좋은 경제체제, 좋은 국가 간 체제의 뒷받침 없이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어렵다.
우선 민족주의적 통일론에 기초를 둔 대북정책은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이지 못하다.
공존과 평화에 기초를 둔 대북정책으로 전환해야 남북한관계를 안정시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
또한 제조업에 기반을 둔 강한 내수 기반이 있어야 한다.
IT와 금융 산업 일변도의 개방경제를 지향하는 것만으로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는 어렵다.
세계경제의 충격을 완충할 수 있기 위해서도 제조업 기반이 튼튼해져야 한다.
Q 앞으로도 이와 같은 공동의 문제의식을 계속 발전시킬 생각인가
A 그것이 공동체에 대한 정치학도의 의무이자 시민으로서 보람 있게 사는 길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는 끝이 없고 우리의 판단도 불완전한 것이기에,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 관련된 중요 의제가 떠오를 때마다 함께 토론하고 같이 공부하고 또 다른 나라의 경험을 살펴 우리가 옳다고 판단하는 생각들을 더 심화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14가지 테제
테제 1 민주주의론은 저항론에서 통치론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통치의 체제,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테제 2 운동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할 수는 없다. 운동은 참여의 기반을 좋게 만드는 것에서
그 가치를 찾아야 한다. 운동으로 대표와 책임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테제 3 민주주의는 좋은 정당 체제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복수의 정당들이 경합하느냐의 여부에 있다. 인민에 대한 사랑을 아무리 외쳐도 정부를 놓고 경쟁하는 복수의 정당이 없다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테제 4 민주주의의 질은 정당들이 무엇을 놓고 경쟁하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가장 중요한 갈등 내지 균열은 사회경제적인 문제이다. 보수와 진보가 이 문제를 놓고 경쟁해야 민주주의의 사회적 질이 좋아진다.
테제 5 개방적이어야 할 것은 정당이 아니라 정당체제이다. 그간 한국정치는 단위로서의 정당개혁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었다. 그것도 정당 공천과 지도부 선출의 권리를 외부에 개방하는 것에만 몰두하면서 당원을 소외시키고 당 조직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테제 6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최대 역설적 문제는 신자유주의하에서 강력한 국가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선출된 대표들의 결집체인 정당에 의해 국가와 관료제가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테제 7 자본주의 경제체제 위에서 민주주의를 하고 있기에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인 노동이 노사관계와 정당체제에서 폭넓은 시민권을 가져야 한다. 지금처럼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지속되어서는 민주주의는 그 가치에 상응해 실천될 수 없다.
테제 8 대통령 개인의 정부가 아니라 정당이 정부가 되어야 책임성이 튼튼해진다.
대통령 후보 개인의 인적 집단으로 이루어진 캠프가 선거를 주도하고, 집권 후 청와대를 주축으로 정부를 움직인다면 민주주의는 왕을 선출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으로 전락한다.
테제 9 민족주의적 통일론에 기초를 둔 대북정책은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이지 못하다.
공존과 평화에 기초를 둔 대북정책으로 전환해야 남북한관계를 안정시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
테제 10 민주주의는 자족적인 체제가 아니다. 좋은 경제체제의 뒷받침 없이 민주주의는 발전하기 어렵다.
제조업에 기반을 둔 강한 내수 기반 없이 신자유주의적인 개방경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는 어렵다.
테제 11 국민경선제, 모바일 투표 등은 참여의 가치를 오해한 것이며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선거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다.
테제 12 현행 선거법 체제는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유사 사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비민주적이고 비이성적인 규제 장치이다. 규제할 선거운동 항목을 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허용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테제 13 학문 연구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은 대학과 지식사회의 공익적 역할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테제 14 헌법을 좋게 만들어 민주주의를 잘하게 하기는 어렵다. 정치를 잘해서 민주주의를 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결선투표제를 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현재와 같이 정치를 극단적으로 양극화시키는 힘을 완화해 온건한 다당제가 자리 잡도록 하게 한 뒤, 개헌을 논의해도 해야 할 것이다.
<정치의 공간 - 평화와 공존, 갈등과 협력을 위한 다원주의의 길>
정부를 운영하는 문제, ‘통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
좋은 정부란 국가 간 체계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시민 집단들 사이에서 경쟁과 협력의 정당정치를 이끌며, 경제의 주요 생산자 집단들 사이에서 공정한 영향력이 교환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해 줌으로써,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가능성을 확대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
. 문제는 그 다음, 정부를 이끌고 공공 정책을 운영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사회적으로 유익한 효과를 만들어 가는 것, 즉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통치 체제(a type of government)로서의 민주정(democracy)에 대한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통치’는 크게 ① 국가 간 체계, ② 정당들 사이의 경쟁과 협력의 체제, ③ 자본주의 경제체제라는 세 차원에서 기능하는데, 2017년 9월 18일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뜨거운 이슈이자,
문재인 정부 앞에 놓인 시험대가 정확히 이 세 차원에 있다.
출판사 서평
1. 통일인가 평화공존인가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지속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고, 트럼프는 군사 옵션을 이야기하며, 야당은 전술핵 배치를 주장하면서 미국을 방문했고, NPT 탈퇴와 자체 핵 개발을 언급하기도 한다. 사드 배치로 한국 기업에 대한 중국의 제재가 강화되고 있고, 일본의 아베 총리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과의 대화 무용론을 주장하면서 강력한 대북 압박을 주장했다. 전쟁의 위협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며, 어떻게 풀어야 할까, 앞선 독일의 경험에서 우리는 ... 더보기 1. 통일인가 평화공존인가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지속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고, 트럼프는 군사 옵션을 이야기하며, 야당은 전술핵 배치를 주장하면서 미국을 방문했고, NPT 탈퇴와 자체 핵 개발을 언급하기도 한다. 사드 배치로 한국 기업에 대한 중국의 제재가 강화되고 있고, 일본의 아베 총리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과의 대화 무용론을 주장하면서 강력한 대북 압박을 주장했다. 전쟁의 위협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며, 어떻게 풀어야 할까, 앞선 독일의 경험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한국이 독립적인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평화공존이 아니라, 군사적 대응이나 안보만을 대북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면 선택의 여지는 지극히 협소해질 것이다. 항시적인 군사 안보 체계를 강화하는 유사 전시 체제를 유지해야 하고, 안보를 위해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로지 북한에 대한 증오와 전쟁을 불사하는 적의를 불태우고 강조해야 한다. 그 경우 우리의 국가 목표는 너무나 부정적?소극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이 되고, 그러면서도 항시적인 전쟁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사회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왜 우리 사회를 이런 전쟁의 공포와 위험이라는 쇠창살에 가두어야 하는가?”(74).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익숙한 방식, 즉 북한을 고립시키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식의 대북 정책 내지 통일 정책으로부터, 평화의 안정적 관리를 목표로 하는 방향으로 대북정책, 남북한 관계가 전환돼야 한다. 그것은 긴 우회로를 따라 통일에 이르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통일이라는 이상은 평화의 지평 저 너머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
오직 평화를 제도화함으로써 평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 이외에 다른 가치, 다른 목표는 있기 어렵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를 상대화하는 일이다.
민족주의보다 더 우선하고 높은 가치는 평화이다”(26).
“한국전쟁은 이 시기에 민간인들을 포함해 남북한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육박하는 2백만 명이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보다 전체 인구 대비 희생자 비율이 훨씬 높은 전쟁이었으며, 현대의 그 어떤 전쟁보다 밀도 높은 죽음을 불러왔다. 그런데 이 처절한 전쟁이 끝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었을까?
38도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것 말고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그 자리에 서있다.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분명한 교훈은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북핵 위기가 고조되고, 한반도에서 또 다른 무력 충돌의 위험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오늘,
우리가 평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누군가 이 시점에서 무력을 통해서라도 민족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알아야 할 것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은 전쟁으로도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49).
2. 개혁 보수의 길 : 존립하기 위해 변해야 한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통합 논의가 한창이지만, 최장집 교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 정당 체계의 오른쪽 한계선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보수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강화하는 데 어떤 조건들이 바람직한가?
냉전 반공주의와 노동 배제를 앞세운 보수가 아닌, 민주주의 가치와 병행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보수가 주축 정당이 될 수 있는 길은 과연 있을까? 그런 보수정당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면 적은 갈등 비용만으로도 사회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인간이 유기체인 한, 그리고 사회 또한 일정한 균형을 필요로 하는 한 보수 없는 인간 사회는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보수 없는 정당정치는 민주주의자가 생각할 수 있는 미래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보수냐에 있다.
2017년 대선을 전후한 여러 상황들은 지금까지와 같은 보수라면 집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문제는 보수가 반공과 종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두려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정당성과 논리적 힘으로 서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지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처음 있는 도전이라는 것, 그런 도전을 넘어 스스로를 정립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바른정당으로 대표되는 개혁 보수에게 기회가 있을까?
그 기회를 실현하려면 어떤 변화를 감당해야 할까?
“한마디로 좋은 시절은 끝났다. 이제 정당을 통한 선거 경쟁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에 답해야 할 때가 됐다. 한국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야 하는가, 어디로 나갈 것인가를 둘러싼 이념과 가치,
비전이 다투는 자유경쟁의 시장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보수는 스스로 존립하기 위해서라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125).
“상대의 잘못에 따른 반사이익만을 바라보고, 성장 만능주의와 냉전 반공주의를 고집하고, 관료-재벌-영남으로 연결된 구체제 복원을 꾀한다면 정치적 소멸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보수는 이런 사고의 틀에 너무나 익숙하고, 그것에 안주해 온 결과 그 어떤 대안적 이념이나 이론에 대한 요구를 느낄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보수를 보호해 왔던 울타리는 벗겨졌고, 지금 보수는 세계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모처럼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현재 바른정당의 실험은 보수 개혁의 많은 내용을 함축하는 중요한 표현이다.
요컨대 보수 혁신의 길은 시대 및 세계와 조응하는 세력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보수가 변할 때 진보를 비롯한 한국 사회 전체가 변하고,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에 강하게 뿌리내릴 수 있다”(128).
3. 노동문제와 코포라티즘, 그리고 민주주의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약속했을 만큼, 노동문제는 일반 시민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체제 위에 서있는 한 ‘영원한’ 문제이다.
그리고 실제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등을 둘러싼 갈등이 진행 중이다.
3장에서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노동문제를 재정의하는 일을 살펴본다.
노동이, 배제하고 억압해야 할 반체제적 도전 세력이 아니고, 성장을 위해 그 비용을 최소화해야 할 비인격적 단위이기만 한 것도 아니라면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냉전 반공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도 아니라고 말하기는 쉽다.
계급 투쟁론이나 혁명론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어떤 한계를 갖는지 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민주주의의 관점과 양립할 수 있는 대안적 노동관 혹은 노사 관계는 어떤 것이냐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 사회에서도 노사정위원회라는 기구와 더불어, 독일 모델이라거나 코포라티즘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35년 전 코포라티즘 이론을 국내에 처음 적용해 노동문제를 분석한 최장집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그것의 이론과 실제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
촛불 시위로 인한 조기 대선과 새 정부의 출현은 한국 민주주의에서 대격변적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정치 변화가 실체적 수준에서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계기로 작용하려면 어떤 의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보는가?
“나는 노동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지배해 온 박정희 패러다임의 해체는 노동문제의 변화 없이 불가능하다고 믿어 왔다. 노동문제가 달라지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박정희 경제 발전 모델은, 국가-재벌 동맹이 성장을 주도하고 노동을 배제하는 것, 그것을 핵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2013년 대선 이래 최근 대선에 이르기까지 ‘경제민주화’라는 이슈가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재벌 개혁이 주로 이야기될 뿐 노사 관계의 개혁은 포함되지도 논의되지도 않고 있다.
노동문제를 둘러싼 개혁 없이, 재벌의 소유권과 경영권 인정을 둘러싼 대기업 지배 구조를 개혁하는 것만으로 한국 경제의 핵심인 국가-재벌 유착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극히 의문이다”(196-197).
<민중에서 시민으로 -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최장집이 바라보는 한국 정치의 현실 그리고 민주주의!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위기에 대해 '소통'을 강조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민주주의에서는 '갈등'이 보다 중요한 의미와 효과를 갖는다고 말하는 이 책은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왜 소통만으로는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기 어려운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지난 민주화운동 시기의 민중운동,
나아가 현재의 ‘촛불 민주주의’ 세태 속에서 사회적 시민권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출판사 서평
최장집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 정치의 현실 이 책에서 저자 최장집 교수는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음으로써 부응하는 일관된 면모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2002년 출간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래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성공을 평가할 때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적 징후를 말했고, 지역주의?지역 갈등의 폐해를 개탄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의미와 효과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으며, 민주주의 위기에 “다시 운동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더보기
갈등과 경쟁은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엔진이다
정치의 본질은 권력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으며, 권력은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과 세력이 갈등을 표출하고 이에 대한 경쟁과 타협, 중재와 통제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갈등은 사람들이 가진 정치적 관점이나 이념적 지향의 차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갈등의 문제가 없으면 권력의 문제도 없고, 권력의 문제가 없으면 정치의 문제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갈등을 이해하는 문제는 정치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과 관련해서는 여러 수준에서 논의할 수 있는데,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앨버트 허쉬만의 ‘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이 한국 정치, 특히 정당정치를 이해하고 정책적 차이를 갖고 경쟁하는 정당체제를 생각하는 데 큰 함의를 갖는다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갈등 내지 균열은 두 수준에서 전개된다.
하나는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사회경제적 자원의 분배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계급?계층?부문 간의 이익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나눌 수 없는 갈등으로서의 민족 문제, 즉 대북?통일 정책과 한미 관계를 둘러싼 이념적?이데올로기적 갈등이다.
이와 같은 구분이 중요한 까닭은 전자는 갈등 과정에서도 나눌 수 있는 성격으로 인해 조정과 타협을 통한 사회 통합을 가져올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양 세력 간의 적대를 영속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문제는 이들 두 종류의 갈등 중 주로 후자만이 정치의 영역에서 표출되고 그것이 전자를 억압하거나 나눌 수 없는 갈등으로 이데올로기화시켜 폭넓은 사회적 통합을 가로막는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이해에 바탕을 둘 때 한국 정치와 관련해서 갈등의 범위와 관련된 이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때 갈등의 범위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갈등에 참여 내지 관여하느냐 하는 문제를 말한다. 갈등의 범위가 넓어질 때 더 많은 새로운 참여자가 생기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갈등에 관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에 따라 그와 연관된 이슈에서 힘의 균형은 달라지며, 그 결과 또한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저자는 정치 조직 간의 경쟁은 한편으로 갈등의 범위를 넓혀 갈등을 사회화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범위를 좁혀 갈등을 사사롭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주로 정당과 그들 간 경쟁이 관여하는 갈등의 사회화는 보다 많은 갈등의 이해 당사자들을 정치에 관여케 함으로써 정치 과정에서 권력의 행사를 투명하게 만들고, 법 앞의 평등을 구현하는 법의 적용과 집행의 보편성과 직결되는 중심 변수라고 주장한다.
민주화의 주체가 ‘민중’이었다면, 민주주의 제도화와 발전의 주체는 ‘시민’
민중이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랫동안 권위주의 정권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정치사회적인 소외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중 개념은 갈등의 혁명적인 해결을 상정하면서 그 혁명의 잠재적인 주체로 설정된 개념이었다. 이와 달리 민주화 이후에 주목받기 시작한 시민 개념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민주적인 해결 주체로 상정된 개념이다.
민중이 정치적 갈등의 혁명화를 위해 설정된 개념이라면, 시민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시민화(문명화), 곧 민주적 해결을 위해 상정된 개념이다. 여기서 저자는 민중 담론의 내용에 주목하면서,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동안 정치적 민주주의는 상당한 진전을 이룬 데 비해 민중에게는 형식적인 인권이나 기본권만 강조되었을 뿐 사회경제적 삶의 질을 보장받을 권리로서의 사회적 시민권에 대한 이해는 지체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민주화의 추동력인 민중이 성숙한 민주주의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제 시민으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보장을 요구하고, 그에 바탕을 두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 민주주의는 ‘주체 없는 민주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사회적 시민권과 시민의 부재에 따른 결과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민중운동 담론은 그 자체 안에 ‘멀지 않은 장래에 빠르게 해체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했다. 민중운동 담론은 이념이나 가치 정향에 있어 역사와 정치에 대한 총체적 비전, 도덕주의, 낭만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성장주의 등을 그 내용으로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현 가능한 대안을 찾기가 힘들고,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유에서도 저자는 민중 대신 시민과 시민권의 개념을 제대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시민과 시민권의 핵심 원리는 ‘보편성의 원리’라고 했다.
시민권이라고 말하는 자유와 권리는 공동체의 성원인 개인들에게 보편적이며 평등하게 부여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시민의 출현은 민중운동이 주도했던 민주화의 결과물이지만,
아직 제대로 된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영국 사회이론가 T. H. 마셜의 논의를 옮겨 시민권은 시민적 권리(18세기)와 정치적 권리(19세기),
사회경제적 권리(20세기)로 누적적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또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점이라면서, 이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제약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밝혔다.
저자가 사회적 갈등 균열에 대응하는 정당체제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민권의 진전을 위해서는 시민-유권자의 삶의 현실에서 나오는 요구가 정당 정책 대안의 근본 소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정치적 결정의 산물로서의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는 사적 재산권과 자유시장, 자유무역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틀 안에서, 개인의 기업가적 자유와 기술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통해 인간의 복리가 최고로 증진될 수 있다고 믿는 정치경제적 실천 원리 내지 이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는 그것이 야기한 변화의 급진성과 급격함으로 인해 일종의 보수 혁명이라 부를 만큼 노동 분업, 고용구조, 고용 조건, 사회관계, 복지 혜택, 정보기술로부터 일상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빠른 변화를 가져왔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부의 양극화나 빈곤의 심화 현상 등이 단순히 신자유주의로 인해 초래된 것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정책 대안을 채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모든 잘못된 결과들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돌리는 ‘반신자유주의’론이 환원주의적이며 민중주의적 민주주의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하나의 현실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며,
따라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단순한 찬성과 반대 내지 긍정 또는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 놓은 현실의 시장구조, 생산체제, 노동시장, 산업?고용 구조의 부정적 효과를 ‘정치의 방법’으로 얼마나 완화?개선시킬 것인가에 있다고 설명한다.
덧붙여 신자유주의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부재 때문에 급격한 신자유주의로 나아갔으며, 신자유주의를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여부는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니며,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것인가가 한국 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서 강조했던 보편적 권리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확보가 필요하며,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정당체제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운동을 포괄하는 다양한 정치적 실천을 통한 더 나은 정당 발전의 모색
민주화 이후 20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정권 교체와 여러 유형의 민주 정부를 겪었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 민주주의를 바라볼 때,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운동이 남긴 유산은 매우 중요한 고려 사항이라 할 수 있다.
운동과 정당을 구분하는 계기는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은 그동안 억압되거나 표출되지 못했던 것을 드러내는 집단적인 행위로, 사회적 갈등을 표출하고 이익과 열정,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면서 이를 구현코자 한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표출된 이익과 요구가 운동이 끝난 뒤에도 일상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고 일정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일상적인 틀을 만드는 것이 제도다.
물론 그것은 없던 제도를 새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있는 제도를 확대하고 개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운동은 이 제도화의 계기가 완료될 때까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도를 일상적으로 운영하는 자율적이고 집단적인 행위자가 정당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모든 정당, 특히 소외 계층이 참여하고 이를 동원하고 대표하는 대중 정당은 운동에 그 기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당이 제도화의 틀 안에서 사회의 모든 갈등, 이익, 이슈들을 표출하고 대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제도가 정착된 이후에도 운동이 역할을 갖는 공간은 존재한다.
저자는 이런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보다 필요한 것은 운동이라기보다는 정당이라고 주장한다. 정당은 운동이 표출하고 제기하는 문제를 정치의 제도를 통해 다루고 해결하는 정치의 중심적인 메커니즘 내지 수단이라는 것이다. 운동이 아무리 사회 문제를 광범하게 제기하고 이를 정부/국가에 압박한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의 제도적 틀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해 특정의 결과를 만드는 것은 정당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운동의 경험이 많고 그 전통이 강하지만, 정당은 미약하고 그 전통 역시 약하다.
저자는 운동 자체가 갖는 효과를 부정하지 않으며, 운동과 정당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할 때 나타나는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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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제도화된 정치 과정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힘을 조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는 점을 강조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뚜렷한 가치 지향과 정책 목표를 갖되 그것을 실현 가능한 정책과 프로그램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정당의 존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한다. 개혁파 내지 진보파가 싸워야 할 것은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에 있지 모든 책임과 잘못을 외부화하면서 자신들이 남긴 ‘과거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망각하는 데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