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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이런 것입니다(롬12장 1- 2)
성경본문: 로마서12: 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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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예배’하는가 하지 않는가가 중요한 기준입니다.
어느 미션 스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목이 학생들에게 예배 출석을 열심히 권고하는데 한 학생이 도무지 응하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답답해진 교목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 한 학생에게 예배를 드리지 않는 이유를 물었답니다.
그러자 학생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님, 저는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예배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 학생이 아주 논리적으로 말을 한 것이죠. 묵묵히 듣고 있던 목사님은 그 학생에게 이렇게 말 했습니다. “학생! 지금 한 말을 거꾸로 한 번 해 볼 수 없겠나?”
잠시 머뭇거리던 그 학생이 순서를 달리해서 자신이 했던 말을 되뇌어 보았습니다.
“예배에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 했던 고백이 생각납니다.
“나는 앎으로 하나님을 믿으려 하였으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식적으로 아는 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백하는 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고, 그 예배를 통해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가운데 아주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원칙과도 같은 것이죠.
무엇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적이어야 한다는 것,
예배는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
우리가 몸을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룩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 우리는 세상과 구별이 되고,
그 구별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란,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사도바울이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 공동체에 ‘예배’에 관해 정의를 내려주는 것입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어는 ‘영적 예배’라는 것이죠.
앞에 있는 구절들은 영적 예배를 설명하는 말들이거나 전제조건이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지난해는 <종교개혁 505주년>을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국민일보>에서 주최한 행사에 사회를 맡아 참석하게 되었는데, 먼저 예배를 드리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소위 대선에 출마하는 사람들이 함께 자리를 했고, 설교를 마치자 참석한 후보들이 나와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물론 신문사에서 주최한 행사이고, 중요한 인물들이지만 예배시간에 대선 주자들이 인사를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단 한사람을 빼고는 자신들의 순서를 마치고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예배를 빙자해 하는 행사들이 참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예배의 모습은 아닌지.?또한 자신의 시간을 마치고 떠나는 사람들을 볼 때,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찮게 보이거나 무시하는 행동은 아닌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무시당하는 것을 예배라고 부를 수 있는 지? 말입니다.
혹, 우리들이 예배시간을 빌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들을 이루어가고 있다면 그것이 예배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딱 걸리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 . .’이라는 말에 말입니다.
반대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지 않으면, 영적 예배가 될 수 없다는 말이겠지요.
2023년에도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공동체에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에 예배를 중심으로 모여진 회중이라면 어떤 예배를 드리는가가 그 공동체의 건강함과 진정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만나교회는 어떤 예배 공동체로 어떤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물론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에서의 부르심은 특별하지 않을까요?
만나교회의 사명과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슬로건’이라고 표현하는데 가장 명료한 존재 의미와 행동 강령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본래 ‘슬로건’이라는 말은 중세기 쯤 영국에서 나온 말입니다. 당시 영국은 남부 잉글랜드의 앵글로 색슨 족과 북부의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두 종족은 오랜 전쟁으로 반목해 있었는데, 켈트족들은 전쟁에서 병사들을 모을 때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켈트의 용사들은 결집해 모일 때 흄! 흄! 이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때 흄은 켈트병사들의 주군인 영주의 성을 뜻 합니다.
이렇게 외치며 집결해 적들의 사기를 꺾고 켈트 용사들의 기세를 올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외치는 켈트족의 함성은 sluagh (군사) + gairm (외침) 이라 불렸고, 이 단어는 각 군사와 외침을 뜻하였으며 켈트어가 영어화 되면서 지금의 슬로건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면 만나교인들을 한 곳으로 모아 사기를 복 돋우고 영적 전쟁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슬로건은 무엇일까요?
“만나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소망을 던져 줄 수 없다면 더 이상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분명하다면 어둠과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소망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존재 이유를 위해 우리에게는 ‘사명 선언문’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이지요.
슬로건이 존재의 이유라면, 사명선언문은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지역과 세상을 섬깁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며,모임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 불림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배 공동체로 모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될 때, 세상을 섬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신학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가능하다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늘부터 7주 동안 이런 신학적 바탕위에서 우리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을 구체적으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예배란,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시작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물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A. W. 토저는 그의 책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논쟁의 대상이 아니기에 기억할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당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분이 질 수 없으시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분과 싸우든 간에 당신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주는 내 조언은 간단하다.
싸움을 그만두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으라.
그리고 ‘오 하나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씀드려라! 그분의 손에 당신을 맡겨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 갈망’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영적 갈망에서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영적 날카로움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도 예배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소개했던 민호기 목사님의 말이 있습니다.
“시계의 일은 시간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을 지난 여러분이라면 모두가 기억할 것입니다. 학교에 가고 싶은 날도 있고 가기 싫은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기 때문에 학교에 갑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는 가정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은 날이 있는가 하면,가정을 떠나고 싶을 때도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내가 가정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고, 어머니고 자식이기 때문에 다시 가정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점점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물’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예배의 기쁨과 감격은 두 가지 차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기쁨과 감격으로 인해 ‘제물’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제물이 되었을 때 찾아오는 기쁨과 감격입니다.
예배가 우리의 사명과 밀접하게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은, “예배가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주목해 보세요.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절)
오늘 본문에서는 “제물”(제사)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 제사를 수식하는 말로 “거룩한 산”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습니다.
제사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레위기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하는 말은 제가 만나 교회 목회를 시작하면서 10번 이상 동일하게 했던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제사장을 중보자로 세우고 제물을 드리는 예식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있었고, 피를 흘릴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인 행위가 동반 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구약시대에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기 위해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왔을 때 누가 죽였을까요?
누가 각을 뜨고, 누가 내장을 다 긁어내고, 누가 번제단에 올려놓았을까요?
제사장은 단지 ‘instructor’의 역할 만을 합니다.
지시를 하면 번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이 그대로 따라 합니다.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이 흰 옷을 입고 와서 제물을 잡아들입니다.
목을 딸 때 피가 옷에 묻고, 내장을 긁어 낼 때 역한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제물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습니다.
제사를 다 마치고 나면 사람들이 흩어지는데, 누가 제사를 드리고, 누가 구경꾼인지 확연하게 구별이 됩니다.
제사를 드린 사람의 옷에는 피가 묻어 있고, 역한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한 번 그런 상상을 해 볼까요?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여기에 나올 때 단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나옵니다.
구경꾼으로 나와 예배를 드리면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을 제물을 드리고 난다면, 땀 냄새가 나고 수고로 인해 오물이 묻어 있어야 정상적인 예배자들이 아닐까요?
제가 단지 목회자이기 때문에 저만 예배를 마치고 나면 그 다음날 머리가 아파서 하루 종일 견뎌야 하고, 속옷을 갈아입어야 할 만큼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일까요?
아픈 마음, 상한 심령, 뜨거운 눈물이 제단에 뿌려져야 하고, 참 힘든 희생의 제물이 쏟아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보다는 마음을 드리므로 예배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은 드리기 쉽지만 몸은 드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6장 41절에서 잠을 자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입니다.
마음으로 구제를 하고, 마음으로 선교도 합니다. 마음으로 애국을 하기도 하고 마음으로 통일을 이루기도 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우리의 몸이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는 예물을 원하시지도 않으시지만, 마음만 있고 몸이 따르지 않는 예배를 거룩한 예배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구체적인 헌신의 행위들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헌신이 드러나야 합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떤 분의 설교집에서 본 내용입니다.
외국의 어떤 목사가 퀘이커 교도들의 예배가 ‘참되다’라는 말을 듣고 그 예배를 배우기 위해 찾아갑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기도만 하고 예배를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다리다 지쳐서 이 목사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예배를 시작합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이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부터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에드가 프랭크라는 사람이 [크리스챤 센츄리]라는 잡지에 발표한 ‘제단’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공장 작업대를 늘 제단으로 생각하였고,
어떤 이는 상점 계산대를, 어떤 이는 사무 보는 책상을,
또는 부엌 조리대를 거룩한 장소로 삼았다 …
평범한 환경이 길가의 성전이 되어야 하리라'.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예배는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물 된 우리가 삶으로 예배하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가 ‘영적인’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저는 예배의 형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릴 때 이런 말을 즐겨합니다.
“어떤 예배도 성경적인 예배란 없다.”
모든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이 모든 표현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단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면, 요한복음 4장 23-24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의 기준이란 “영”과 “진리”입니다.
어떤 형식으로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종종 교인들 사이에서 자신들에게 익숙하거나, 해오던 방식을 예배의 본질로 생각하며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아주 명확하게 예배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예배는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우리들에게 익숙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예배의 중심에서 우리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있느냐를 묻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회에서도 신령과 진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형식의 대한 것들을 성전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신령과 진정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형식으로 예배하지 않으며 용납하지 못하고 마음이 불편해 지는 현상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정말 영적인 문제인가요? 아니면 예배의 형식의 문제인가요?
헌금의 방식/ 예배시간의 옷차림/ 예배시간에 사용되는 음악/ 같은 것들에 대한 의구심은 성경적인 문제인가요? 아니며 전통의 문제인가요?
본질적인 면에서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 즉 하나님께 대한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 표현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죠.
저에게 도전을 주었던 릭 워렌 목사의 말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졸게 만드는 것은 기적이다! 그런데 이런 기적이 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정신을 말하면서, 형식을 바꾸고 새롭게 하는 이유는 ‘변화’가 목적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표현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위한 최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용적인 면에서 ‘영적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영로교회>를 목회하다 은퇴하신 정필도 목사님이 예배에 대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짓된 예배를 드리는지를 말하며 사용했던 예화 중에 하나입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5살에 왕좌에 올라 장장 72년을 집권했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나라가 부강해졌고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습니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과 루브르 궁전을 건축했으며, “짐은 국가다”라고 호언장담할 정도였으며 일명 태양왕이라고 불렸습니다.
그 당시 페넬론이라는 궁중설교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왕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에 도착했을 때, 예배당에는 페넬론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왕이 왜 예배당이 텅 비어 있는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때 페넬론이 대답하기를 “저는 오늘 예배에 임금님이 참석하지 못하신다고 광고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진정으로 예배하러오고, 누가 왕에게 아첨이나 하려고 오는지 친히 보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내용적인 면에서 ‘영적인 예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중에 하나는 우리의 ‘자의적 선택’에 의해 예배가 좌우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서론 부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끊임없이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죠.
예배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가 자신의 감정적 만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죠.
선택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예배 회중을 또한 선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나는 저런 사람하고는 예배드릴 수 없어! 저 사람 때문에 나는 교회를 떠날 꺼야!”라고 하는데 우리 주님은 “바로 그 사람과 함께 예배드리기를 원해!”라고 말씀하시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영적 예배”라고 말하면서도 “관계”를 더 중요시 여기고 있지 않은지 말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인 관계가 될 때는 다른 회중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관계가 깨어지면, 여러 가지 핑계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말씀을 하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 23-24절을 주목하십시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들이 얼마나 약합니까?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구약 시대에 보면,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는 억지로라도 화목하도록 시키셨습니다. 레위기 7장 15절에 보니까,
15-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구약 시대의 제사에 보면, 드려진 제물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화목제물은 예배를 드린 모든 공동체가 함께 즐기며 먹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화목제물을 나누는 데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제사로 드리는 소 한 마리는 1,300근에서 1,500근이 나갔다고 합니다.
제사장 몫인 제물의 가슴과 뒤쪽 다리 하나를 떼 내었다 해도 나누어야할 고기는 엄청난 양일 것입니다.
이 고기를 하루 이틀 만에 나누기 위해서는 한 두 사람과 나누어서는 안 될 일이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 심지어는 “미운 사람”과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칙을 지킬 수 없게 되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누구나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아니 우리가 자랄 때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싸우고 난 아이들을 억지로 화해를 시킬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라고, 손을 잡으라고, 너희의 입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라고. . .
아주 어렸을 때는, 서로 안아주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힘든 행동을 통해서 무언가 화해와 사랑의 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어색하고 강요적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요와 어색함 속에서 화해가 이루어짐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영적인 부분에서, 영적인 예배에서 성공해야 온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기쁨은 구별과 관계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본문 말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신앙의 오류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전혀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일들을 응답으로 허락하신 일들을 보게 됩니다.
존 비비어의 [영적 무기력 깨기]에 보면 몇 가지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사무엘 상 8장 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을 찾아가 이렇게 부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이들의 바람을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우는 일이 결코 현명하지 않은 이유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왕이 생기면 백성들의 아들들을 군사로 차출해 갈 것이라 경고 하셨고,백성들은 왕을 위해 밭을 갈고 곡식을 추수하고 무기와 장비를 만들어야 할 것이고,딸들은 요리와 청소, 향수 제조 같은 각종 노역에 시달릴 것이고,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 올리브 과수원, 소와 양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아우성을 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8장 19-20절.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그들은 하나님께 끈질기게 애원하여 자신들의 소원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었으나, 그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며 다른 백성들과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이룬 그 백성들은 하나님이 경고하신 그대로 고난의 시간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신비한 음식을 먹여 주셨습니다. 바로 ‘만나’였죠.
하지만 곧 이들은 이 좋은 음식에 신물이 났고 고기를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광야를 지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잊고 원망하기 시작한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고기를 주셨지만 결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죠.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시 78:29-31)
이들의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신 분이 거짓신이거나 귀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이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졸라댑니다. 아직 돈을 관리할 능력도 안 되고, 아버지의 돌봄을 받아야 할 어린 아들이 말입니다.
그 아들의 소원은 아버지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죠.
그러나 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뒹구는 신세가 되어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원하고 요구하는 예배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순종보다 앞서가고,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닌 제약처럼 느껴질 때,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는 그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찾기 위해 우리는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기 위해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