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해 3
가을에는 떠나리라 / 김종해
바람부는 날 떠나리라
흰 갓모자를 쓰고 바삐 가는 가을
궐闕 안에서 나뭇잎은 눈처럼 흩날리고
누군가 폐문에 전생애를 못질하고 있다
짐朕의 뜻에 따라
가야금 줄 사이로 빠져나온 바람은 차고
눈물이 맺혀 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
짐朕이 이곳에 머뭇거리는 것은
아직 사랑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 그리워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이 가는 길을 탓하지 않으며
손금 사이로 흐르는 일생을 퍼담는다
슬픔이 있을 것 같은 날을 가려
이 가을에는 떠나리라
풀 / 문학세계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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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 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릴 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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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톳길
황간에서 상주, 상주에서 두원 가는 길은
발바닥이 아프다
나는 여섯 살
배가 고파 하늘이 노랗다
가도가도 황톳길*
나는 주저앉아 있고
뒤따르던 제비꽃, 애기똥풀꽃이
황토분 바르고
엄마 등에 업혀서 쉬고 있다
소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농부가
엄마의 미색에 반해서
여섯 살 나를 번쩍 들어 소 등에 태웠다
무섭다고 악을 쓰며 나는 울었는데
발바닥이 아파도
배가 고파도
엄마와 단둘이 걷는 황톳길이
나는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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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새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새는 언제나 나뭇가지에 내려와 앉는다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하늘 바깥에서 노숙하는 텃새
저물녘 별들은 등불을 내거는데
세상을 등짐지고 앉아 깃털을 터는
텃새 한마리
눈 날리는 내 꿈길 위로
새 한 마리
기우뚱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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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하나
어머니가 이고 오신 섬 하나
슬픔 때문에
안개가 잦은 내 뱃길 위에
어머니가 부려놓은 섬 하나
오늘은 벼랑 끝에
노란 원추리꽃으로 매달려 있다
우리집 눈썹 밑에 매달려 있다
서투른 물질 속에 날은 저무는데
어머니가 빌려주신 남빛 바다
이젠 저 섬으로 내가 가야 할 때다
풀 / 문학세계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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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우리의 사랑법
이 여름날
내가 물이 되어 흐르고 있을 때
그녀는 대지가 되어 와 눕는다
그녀를 향해 끝없이 하강하고
그녀의 모든 굴곡을 더듬어
익숙하게 흐를 때
솟구쳐오르는 분수의 말이거나
절정의 높이에서 하얗게 투신하는
폭포의 말이거나
나는 나의 화법으로
그녀 위에 되풀이 쏟아짐으로써
나의 여름은 완성된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임하는
우리들의 사랑법
우리 살아가는 일 저와 같아서
이 땅 있음에
사랑은 영원하여라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 문학세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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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 배달부
아직 바람은 차고
사람들은 저마다 한 그루 나목으로 서 있을 뿐,
저희 잎사귀와 푸르름을 달기 전의
신새벽 같은 그리움 속으로
우편 배달부이신 우리 아버지
당신은 집집마다
한 장 한 장 엽서를 보내 주시나니
아직도 봄에 대하여 자유에 대하여
그리움을 가진 분들께
우편 배달부이신 당신은
손수 한 장의 눈발로
지상에 강림하시나니
그 엽서 받아보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흘의 봄밤을
저희 땅에 예비하고
비로소 등불을 켜달고
먼길 채비를 하는 눈물겨운 풀잎들
아직 바람은 차고
이 2월에 무슨 일이 있든 말든
새로 혼령을 받아 거듭거듭 일어서는
저 하찮은 풀잎이 하는일 하나만 보아도
우리 아버지 뜻을 알겠네.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 문학세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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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뜰에서
밤 사이 꽃들이 궁거워
잠이 깨자마자 내려선 뜨락,
아직은 좀 싸늘한 맑은 바람 속에
언제나 그렇듯 낯익으면서도 낯선 손님처럼
새벽이 나보다 먼저 내 뜰에 와서 서성거린다.
선잠을 깬 백목련(白木蓮) 꽃송이들이
부시시 눈을 뜨며 하품을 한다.
목단(牧丹) 꽃망울들은
그 현란한 너털웃음을 단단히 숨긴 채,
아직도 한참은 더 자야 할 모양이다.
기지개를 펴는 라일락 가지 끝마다
숨가쁘게 향그러운 입김을 내뿜는
쌀알만한 흰 꽃알갱이들.
모두 다 입맞추고 볼 비비고
어루만져 주고 싶은 귀여운 것들.
이렇게 봄철 새벽 뜰에는
또 한 무리의 애타는 식구들이
바깥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을.
황사현상, / 민음사,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