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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악의 문제
(2월 15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11분)
연구 범위: 욥 30:26; 마 27:46; 욥 38:1-12; 시 73; 창 2:16, 17; 계 21:3, 4
기억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고 사랑이신데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 사실을 다루는 악의 문제는 아마도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전적으로 선하시고 전능하시다. 그런데 대체 왜 악이 존재하며, 심지어 이렇게 만연한 것인가?
이것은 단지 학문적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을 깊이 당혹하게 하고, 누군가에게는 하나님께 나오거나 그분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죄의 시작과 그 존재 이유는 많은 사람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문제이다. 그들은 악이 가져오는 끔찍한 비탄과 파멸을 보면서 그들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이런 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는다. 이것은 그들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492).
많은 무신론자들은 자신이 무신론자인 이유로 악의 문제를 꼽는다. 그러나 이번 주와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전적으로 선하시며, 타락한 세상에서 널리 퍼져가는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악의 문제는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을 따라 존재하는 문제이다.
느끼기: 하나님은 악의 문제도 사랑의 방법으로 해결하실 것이며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행하기: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어려움 중에도 자유의지로 그분을 사랑하고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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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가 악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마 27:46)
*답: 그 악이 예수님을 죽게 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3. 악의 문제의 답을 모르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욥 42:3)
*답: 내가 모든 것을 다 아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4. 우리가 경험하는 알 수 없는 일들 중에도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시 73:)
*답: 성소에서 계시된 악의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자유의지 때문에 악이 발생했는데 하나님은 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까?(수 24:15)
*답: 사람이 자기가 선택하는 일에는 충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십자가를 겪게 할 것을 아셨음에도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롬 8:18)
*답: 회복 될 때의 영광도 깨닫게 한다.
7. 사탄의 범죄 후에 그를 바로 멸하지 않으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답: 하나님의 섭리를 우주가 오해하지 않도록 기회를 준 것이다.
결론: 악의 문제는 예수님도 당면하셨으며, 우리는 답을 알 수 없는 많은 문제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것이 답이 없다는 뜻은 아니며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다. 악의 가능성에도 그분이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사랑, 선한 것도 자유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악의 문제도 사랑의 원칙을 따라 대하시고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성소를 볼 때 우리는 정의롭고 심판하시는 주님을 보며 선악의 대쟁투 가운데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2월 9일(일)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악의 문제는 현대의 상황만이 아니라 성경 자체에서도 제기되는 문제이다.
욥기 30:26, 예레미야 12:1, 예레미야 13:22, 말라기 2:17, 시편 10:1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어떻게 악의 문제를 인간이 경험하는 중요한 문제로 제시했는가?
[욥30;26]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렘12: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렘13:22] 네가 마음으로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말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시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답: 모든 구절이 악 문제에 관하여 곤란하게 질문했다.
이 본문은 오늘날도 우리가 여전히 경험하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왜 많은 경우에 악인이 번영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이는가? 왜 의로운 사람이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는가? 악이 활개 칠 때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거나 심지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이러한 질문이나 더 일반적인 악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히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악과 그 편만함을 과소평가하는 식으로 넘어가려 해서는 안된다. 악은 매우 나쁜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악을 미워하신다. 따라서 세상의 많은 악과 불의에 대해서 성경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주여, 언제까지입니까?”라는 탄식에 우리도 함께 동참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27:46을 읽어 보라. 당신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악이 어떻게 가장 충격적이고 극악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마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답: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버리셨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그 질문을 던지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악이 그분께 쏟아졌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도 악에 의해 고통당하셨으며, 이 놀라운 사실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강력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도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통해 악의 근원인 사탄을 물리쳤고, 결국에는 악을 완전히 없애실 것이다. 예수께서 이 부분을 시편 22:1에서 인용하셨고, 이후의 시편 22편은 승리로 마쳐진다.
<교훈> 악의 문제는 오늘날만 아니라 성경에서, 또 예수께서도 고통당하신 문제이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부가설명> 악 문제는 곧 죄문제다. 선과 악을 도덕적 관점으로 바라보며 대답을 들으려고 하면 결코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문제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이 일관되게 계시한 문제다. 사람들이 학자들이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인간의 도덕성과 그 나타내는 행위에 근거해서 찾기 때문이다. 기껏해서 사탄이 조종하고 사람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악을 현실적으로 없앨 때까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런 이런 생각은 이 세상의 악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성경은 선악을 도덕성에 두고 계시하지 않는다. 존재와 생명에 두고 계시한다. 아담이 생명 언약을(호6:7, 요일2:25 참고) 어겼기 때문에 그는 사망이 되었다. 사망은 그 본질이 썩는 것이다. 모든 악은 사람이 사망이 되어서 썩고 있는 딱한 현상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 성경에 썩는 것에 관한 말씀이 여러 번 나온다. 썩는 것이 다 썩어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는 이 현상을 없이하지 못한다. 그것이 옛사람의 본질이다.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썩고 냄새는 고약하고 괴로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썩어질 씨를 버리고 썩지 않는 씨로 출생한 사람이다. 그러면 썩는 냄새나 썩는 모양이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런가?
<영감의 교훈> 주께서 요구하시는 능력 - “주께서는 그들이 고난에 대해 슬퍼하지 않고 곤란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요구하신다. 아무 일에나 낙담하지 말고 모든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할 데 없는 그의 사랑의 금 사슬로 그들을 하나님의 보좌에 붙들어 매셨다. …저희는 악을 저항하는 능력과 또한 세상이나 죽음이나 혹은 지옥이라도 지배할 수 없는 능력,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처럼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여야 할 것이다”(복음 교역자, 39).
<기도> 악에 문제로 탄식하며 큰 고통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악의 문제에 무감각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 눈을 다시 십자가를 향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깊은 탄식을 보면서 죄를 멀리하며 악에 대해 더 민감하고 분별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2월 10일(월)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악에 대한 사랑의 승리와 함께 역사의 종말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많은 괴로운 문제들이 남아 있다. 악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좀 더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욥기 38:1-12을 읽어 보라. 욥에게 하신 하나님의 대답은 악의 문제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고 또 어떻게 모르고 있는가?
[욥38:1~12]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8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12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답: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그것을 관리하시는 섭리를 사람들이 다 모른다. 그러므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지 말고 섭리의 진행을 기다려야 한다.
욥은 많은 고통을 겪었고, 왜 그렇게 많은 악과 고난이 자신에게 닥쳤는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욥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하나님과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천상의 법정에서 더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욥 1, 2 참조).
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충격적이다.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1, 2). 한 역본은 이렇게 표현한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지하고 허튼 말로 나의 뜻을 흐려놓는 자가 누구냐”(욥 38:2, 쉬운말). 하나님은 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욥 38:4)하라고 말씀하신다.
욥기 42:3을 읽어 보라. 욥의 대답은 우리 스스로의 위치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욥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답: 우리가 바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이며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말하는 존재들인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욥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주셨다. 욥처럼 우리도 세상과 그 이면에서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은 답이 없다거나, 모든 것이 해결되는 날이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해야 한다.
<교훈> 답을 모른다 해서 좋은 답이 없다거나, 답이 오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아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선함을 신뢰해야 한다.
<부가설명> 욥기에 나오는 사람들, 욥과 그의 세 친구는 철저하게 도덕적 종교가들이다. 욥은 자기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았고 하나님을 그렇게 섬겼다. 즉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재앙을 받는다는 신상필벌의 사상으로 살았다. 그는 이렇게 탄식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3:25). 욥은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했다. 그의 선행은 이 재앙을 받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욥31:23). 욥이 자녀들이 놀고 간 뒤에 하나하나 헤아리면서 번제를 드린 것도(욥1:4,5) 이 재앙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엄청난 재앙이 닥쳤다. 모든 학자들이 욥기를 의인이 받는 고난의 배후, 곧 사탄의 참소로 당한다는 식으로 욥기를 생각한다. 내가 깨닫기로는 욥기는 도덕론적 종교와 창조론적 종교를 비교하여 계시한 것이다. 욥이 그렇게 도덕적으로 하나님보다 선하게 행했다고 들릴 정도로 자기 도덕성을 자랑했다(욥32:1,2). 그렇게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창조주이시다. 그래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38:4)라고 반문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지 않았으면 행동할 수 있는 욥이 없다. 우리는 욥기를 바르게 봐야 할 것이다. 욥처럼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는 은혜를 누려야 한다.
<영감의 교훈> 설명할 수 없는 신비 - “그들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이런 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의심한다. 여기에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불신과 의심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고 구원에 필수적인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다. 죄의 존재에 관하여 질문하면서 하나님께서 결코 계시하지 않으신 것까지 알아내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있다”(각 시대의 대쟁투, 492).
<기도> 가시적 해답이 보이지 않을 때 마음이 불안하고 믿음도 흔들리곤 합니다. 주님, 오랫동안 기도하지만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희는 유한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길을 맡기니 도와주옵소서.
2월 11일(화) 회의적 유신론자
하나님은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고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사 55: 8, 9)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다. 우리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깊은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왜 우리가 다양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이렇게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를 인식하는 데 기초하여 악의 문제를 이해하려는 방법을 “회의적 유신론”이라고 한다. 회의적 유신론자는 하나님의 행동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믿지만, 우리의 지식이 제한되어 있기에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회의적 유신론자는 이 세상의 악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능력으로 충분히 인식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세균을 볼 수 없다고 해서 우리 곁에 세균이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편 73편을 읽어 보라. 시편 기자는 주변의 악과 불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의 이해를 다른 관점으로 바꾸어 보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시73:1~28] 각각 읽어보자. 악이 흥왕하는 것에 대한 시인의 의문과 질문과 대답을 찾은 것이 기록되었다.
*답: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악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다는 답을 찾았다.
시편 기자는 세상의 악으로 인해 깊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악인들이 번영하는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이 불의하고 불공평해 보였다. 그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조차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던 중 그는 성소를 바라보게 되었다.
성소는 악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한 축을 제공하는데, 당신의 때에 정의와 심판을 행하실 의로운 심판자가 계신 것을 인식하게 한다.
<교훈> 하나님의 합당한 뜻이 있지만 우리는 유한하여 알 수 없다는 회의적 유신론자와 달리 시편 기자는 성소를 통해 정의롭고 심판하시는 의로운 주님을 보았다.
<부가설명> 성소는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생명 언약을 어긴 후에 사망이 된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생명으로 옮기시는지를 자세히 가르쳐주는 시청각교재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비유라고 했다(히9:9). 이 교재로 악을 처리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잘 설명해 주었다. 지성소 봉사에서 세상 임금이 심판받아 영원히 없어지게 되는 사실을 분명히 계시하셨고 그것이 조사심판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제시되었다. 조사심판의 주 대상은 사탄이다. 그는 세상 죄, 곧 사망의 책임을 지고 영원히 사망하게 된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 일차적으로 이 사망의 세력 잡은 자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2:14). 여기 마귀를 없이 하시며라고 기록했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마귀가 죽은 것이다(요3:14 참고). 개적판에는 ‘멸하시고’라고 번역했다. 오역은 아니지만 개역처럼 선명하지 않다. 헬라어는 ‘카타르게오’인데 멸한다는 뜻이 있고 없앤다는 뜻도 있다. 사실 멸하는 것이나 없애는 것은 같은 사실이다. 그런데 영원지옥을 믿는 사람들은 멸한다는 것을 지옥불에 고생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없앤다는 번역이 선명하고 확실하다. 사망이 맨 나뭉에 멸망 받는다는 말은 사탄이 맨 나중에 죽어 재가 되어 없어진다는 말이다. 사탄이 무저갱에 갇힐 때까지 이 세상에는 사망이 왕노릇 할 것이고 그러는 동안에 악과 죄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영감의 교훈> 공정한 보응의 날 - “악한 자가 번영하고, 그들이 당신께 대한 적의를 나타내도록 허용하시는 것은 죄악의 잔이 찰 때 모든 사람이 그들의 완전한 멸망 가운데서 그분의 공의와 자비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보복의 날, 곧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그의 백성을 학대한 모든 자가 공정한 보응을 받는 날, 그의 충성된 백성에게 행한 모든 잔학하고 불의한 행위가 그리스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인정되어 벌을 받는 날이 신속히 다가오고 있다”(각 시대의 대쟁투, 48).
<기도> 오늘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을 믿고 바라보며 기다립니다. 소중한 가족과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도 하나님의 뜻을 보고 바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붙잡도록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인도하옵소서.
2월 12일(수) 자유의지론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과 방식을 아무리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성경은 악의 문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를 보여준다. 악의 논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알려진 한 가지 방법은 자유의지론이다.
자유의지론은 악을 피조물이 자유의지를 오용한 결과라고 본다. 이 관점에서 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뜻으로 주신 자유의지를 피조물이 제멋대로 잘못 사용한 결과이기에 악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런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이와 관련하여 C. S. 루이스(Lewis)는 이렇게 기록했다. “악뿐 아니라 값진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도 자유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로봇(기계처럼 작동하는 피조물)의 세상은 별로 창조할 가치가 없다. 하나님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주시려는 행복은 사랑과 기쁨의 무아경 속에서 자유롭게 자원하여 그분과 연합하고 또 서로 간의 연합하는 행복이다. …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자유로워야 한다"(순전한 기독교: 뉴욕, MacMillan, 1960, 52).
창세기 2:16, 17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도덕적 자유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창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답: 임의로 먹되라는 표현을 그렇게 말한다. 명령을 하신 것이 자유의지를 인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애초에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그들에게 명령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아담과 하와는 금단의 열매를 먹었고, 그 이후로 지구는 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타락 이야기 다음 장인 창세기 4장에서, 형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일을 통해 죄의 끔찍한 결과가 나타난다. 타락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가 자유의지를 오용한 것이 어떻게 지구의 역사에 죄와 악을 가져왔는지 보여준다.
성경 전체는 자유로운 도덕적 의지의 실체를 보여준다(신 7:12, 13, 수 24:14, 15, 시 81:11-14, 사 66:4 참조).
그것이 얼마만큼이든지 우리는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창조주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행사한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기계나 심지어 아무런 의식이나 생각 없는 로봇과 같은 존재일 뿐,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교훈> 자유의지론은 그것을 오용한 결과 악이 생겼다고 본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것은 고귀한 사랑, 선, 기쁨도 그것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창세기 2:16,17을 자유의지를 주신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설명했다. 자유의지로 한 일에 책임을 묻는 것이 맞는 것인가? 자유를 주었는데 명령이 행당하는가? 또 조건도 창조주께서 놓았다. 그 조건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창조주가 만든 것이다. 여기에 이미 사람의 자유의지는 제한된 것이 아닌가?. 사람의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해놓은 것 중에서 선택하는 지극히 제한된 것이 아닌가? 나는 진정한 자유의지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해놓은 것 중에서 선택하는 것만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선택해 놓은 것에 반응하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명령하시는 말씀에 긍정적 반응을 하든지 부정적 반응을 하는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자. 부정적으로 반응한 것이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실과를 먹은 것이 아닐까? 자유의지는 항상 선택의 자유와 연관된다. 선택할 것은 누가 제시한 것인가?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선도 악도 아닌 상태에 있었는가? 아니다. 창조주께서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심히 좋다고 하셨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선택해주신 것이다. 사람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립 상태에 있지 않았다. 진정한 중립일 때만 선택의 자유가 자유의와 연결되어 이해되는 것이 아닌가? 자유의지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항상 혼란스럽다.
<영감의 교훈> 자유의지를 주시는 이유 - “사랑의 율법은 하나님 정부의 기초이므로 모든 지성적 존재들의 행복은 그들이 이 의의 대원칙과 완전히 일치함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사랑의 봉사 곧 당신의 품성을 인식함으로 솟아나는 봉사를 원하신다. 그분은 강제적 굴종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모든 존재로 하여금 당신께 자원하여 봉사하도록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신다”(부조와 선지자, 34).
<기도> 우리를 자유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고귀한 뜻에 감사합니다. 죄악으로 세상에 매여 고달픈 일상을 살지만, 하나님 우리 마음에 주신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죄에서 자유를 주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2월 13일(목) 사랑과 악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은 그것이 사랑의 필수 요건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의지를 오용하는 것이 악의 원인이다.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있지만, 하나님이 그토록 악을 미워하시면서도 잠시 악을 허용하신 것은, 악의 가능성을 배제하게 되면 사랑의 가능성도 배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악이 초래한 문제가 모두 드러나기 전에 그것을 소멸시킬 수 없는 것은 사랑에 필요한 신뢰가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다. 음울한 그늘이 밝아지고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탄의 기만적 세력이 깨어져야 했다. 이것은 힘으로는 할 수 없었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부의 원칙과는 배치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봉사만을 원하시는데 사랑은 명령으로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힘이나 권위로 얻을 수 없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진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이 사탄의 성품과 대조되어 드러나야 한다"(시대의 소망, 22).
자유의지가 없다면 사랑은 없고,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그분께서 사랑을 부정하거나 사랑이 존재하는데 필요한 자유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처럼 이 문제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 안다면 우리도 그분이 우리의 자유를 제거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누가 사랑이 없는 우주에서 살고 싶겠는가?
로마서 8:18과 요한계시록 21:3, 4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어떻게 세상의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가?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답: 하나님은 마침내 처음창조하셨을 때의 완전함을 회복하시고 사람에게 영생과 행복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악의 부조리는 다 지나가고 없다.
우리가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도 하나님은 시작부터 끝을, 또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약속된 영원한 행복도 보실 수 있다.
로마서 8:18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도 이 놀라운 약속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과 신뢰가 있는가? 사랑과 그 사랑에 내재된 자유는 너무나 신성하고 근본적인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 자유가 자신을 큰 고통을 겪게 할 십자가로 보낼 것을 아셨지만 그것을 주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어떤 대가를 치르실 것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이 자유를 허락하셨다. 이것은 왜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항상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생각인가?
<교훈> 주님은 사랑이기에 사랑이 존재하는데 필수적인 자유를 부정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자유가 십자가의 고통을 겪게 할 것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부가설명> 창조주와 피조물은 언약으로 관계를 확립했다. 언약은 관계를 맺는 수단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언약을 맺으셨다(호6:7). 하나님께서 제시한 조건은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하나님은 아담을 영생도 아니고 사망도 아닌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자기 형상과 같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생하는 생명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그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았으면 그대로 영생하는 것이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의 조건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영생을 아담 편에서는 선악과를 먹지 않는 조건으로 언약이 맺어졌다. 그래서 에덴동산에는 이 두 나무가 한 가운데 언약의 조건을 나타내는 것을 살아있는 나무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조건을 어기므로 언약을 어겼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패역한 것이다(호6:7). 예수님이 오셔서 아담이 어긴 그 언약의 조건을 다 이루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새 언약에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새 언약은 영생을 회복하는 언약이다.
<영감의 교훈> “오늘날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선택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지적 존재로서의 특전을 박탈하는 것이며, 단순한 자동인형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의지를 강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사람은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로 창조되었다. 다른 모든 세계의 거민들처럼, 그는 순종에 대한 시험을 받아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대항할 수 없는 어떤 유혹이나 시련도 그에게 오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부조와 선지자, 331).
<기도> 놀라운 자유를 주셨지만 세상에 더 큰 악이 넘쳐납니다. 주여 저희 인간의 사랑도 인내와 고통과 눈물이 따릅니다. 주님은 얼마나 고통과 어려움 속에 십자가 사랑을 주셨습니까? 놀라운 주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2월 14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1장 “죄가 용납된 이유”를 읽어 보라.
“비록 사탄이 하늘에서 추방되었을 때에라도 무한하신 지혜자는 그를 멸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봉사뿐이므로, 당신의 피조물들의 충성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와야 했다. 하늘과 여러 세계의 거민들은 그 당시에 죄의 참 성질과 결과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사탄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를 즉각적으로 멸망시켰더라면 사랑에서가 아닌 두려움에서 하나님을 섬겼을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기만자의 영향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반역의 정신도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궁한 세대를 통한 온 우주의 복지를 위하여, 사탄이 그의 원칙들을 충분히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정부에 대한 그의 비난을 모든 피조물이 바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그리고 그분의 율법의 불변성에 대하여 영원히,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남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사탄의 반역은 앞으로 오는 영원한 세월을 통하여 우주에 한 교훈, 즉 죄의 본질과 그 무서운 결과에 대해 영속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증언이 될 것이었다. 사탄의 통치가 낳은 결과와 그것이 사람들과 천사들 모두에게 끼친 결과는 하나님의 권위를 버린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 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의 행복이 그분의 정부의 존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거할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이 무서운 반역의 경험의 역사는 모든 거룩한 존재자들에게 영원한 안전장치가 되어 저들이 범죄의 본질에 관하여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며, 범죄하거나 그 죄의 형벌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42).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신정론"은 악에 직면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옹호하는 논증이다. 그러나 그것은 악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대쟁투에서 궁극적으로 옹호되는 것은 악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9과 참조)
*답: 악은 사망의 본성에 하나이기 때문에 마침내 사망이 사망하면 생명만 영원하다. 그 생명의 본성이 사랑이다.
2. 당신도 욥과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겪은 고통을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욥이 마지막에는 자신이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당신의 질문과 관련하여 스스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답: 욥은 도덕적 선을 행하는 것이 재앙을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종교가였다. 그러나 그가 선을 하든지 악을 하든지 그것은 창조주께서 창조하셨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창조주를 알고 바르게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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