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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방언에 대한 진실과 오해 2
1. 교회에 덕이 되어야 하는 은사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 바울은 12장 전체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런데 그는 말씀을 마치면서 이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고 제일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그 제일 좋은 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 14:1~5.
성령의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다고 말씀하셨다(고전 12:28).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인 우리에게 교회를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고전 12:27). 그런데 만약 이 은사가 교회를 돕는 일에 쓰일 수 없다면, 그 은사는 몸에서 떨어져 나온 팔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인(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인(외국인)이 되리”라고 말한 것이다(고전 14:11).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어로 백만 번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알 수 없는 방언으로 자신에게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외국인이 되고 자신도 복음을 듣는 그 사람에게도 외국인이 되어서 결국 아무 쓸모 없는 일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 14:13~14. 바울은 만일 방언을 말해야 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통역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통역하지 않고 단지 방언으로만 기도한다면 그것도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지만 그 기도의 의미가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통역 없이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개인적인 소원은 올릴 수 있지만 이것이 다른 신도들에게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 전체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교회에 대하여 “야만인”(11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하였다. 영어 성경에는 “마음으로”를 “with the understanding”(이해할 수 있게)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도를 할 때나 찬미를 할 때에는 영으로도 하지만 또한 마음으로도 하여 교회의 다른 사람들도 “덕 세움을”(18절)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말”은 곧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을 가리킨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
2.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2~23. 성경은 “방언”을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실제적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마 28:19)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명령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나 또는 두 가지 정도의 언어밖에 모르는 제자들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겠는가?
비록 제자들이 총명한 사람들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들 대부분은 교육받지 못한 문맹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가 필요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언어를 말하게 하는 초인간적이고 신비스러운 언어의 은사인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7. 이 성경절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 또는 “언어”는 하나의 “표적”으로서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고도 그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전에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언어로 유창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에는 방언을 말한 예가 3번 나온다 (사도행전 2, 10, 19). 이 성경절의 예를 잘 살펴보면 방언의 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1~4.
왜 하나님께서는 방언의 은사를 내리기 위해서 오순절까지 기다리셔야만 하셨을까? 사도행전 2장 5~11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리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의 명절로서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이다. 이 날은 로마 제국의 곳곳에 퍼져있는 모든 진실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택하셔서 방언의 은사를 제자들에게 내리심으로써, 그 곳을 방문중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이 성경 말씀에 따르면 적어도 15개 이상의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에게 내려진 방언의 은사로 인하여, 타지에서 살다가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개심의 경험을 하게 되었고, 오순절을 보낸 후 그들은 제자들이 전한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이 말씀으로 보아, 방언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하여 내리는 은사임을 확실하게 증거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 날에 있었던 기적이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 이 은사는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었고, 다른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였다. 이것은 언어의 은사였지, 들음의 은사가 아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 “하늘의 언어”로서 오직 하나님과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11절).
두 번째 예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에게 전도한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44~46. 사도행전 10장 1절에 보면 고넬료는 이태리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역사에 의하면 로마의 시종들은 여러 나라에서부터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언어 장벽이 있었음이 확실하며, 베드로는 아마 통역관을 세워서 통역을 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이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에게 내려졌다. 그 결과, 그 곳에 있던 유대인들과 베드로는 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후에 베드로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오순절날)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행 11:15) 하였다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통하여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오순절날 받았던 동일한 방언의 은사를 받았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전에 전혀 알지 못하던 다른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방언에 관한 마지막 예로는 바울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전도한 일이다. 사도행전 19:6절에 말하기를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사도였으며, 가장 많이 선교 여행을 하였던 사람이다(고전 14:18). 성령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임하였을 때에 바울은 그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로마 제국에서 쓰이고 있는 언어를 말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야 전도하는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고린도 교회에게 한 바울의 충고
고대 고린도 도시에는 두 개의 유명한 국제 항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여러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예배의 방법에 있어서도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서 기도하고, 증언하고, 설교를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조언하기를 만약 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말한다면 통역관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조용히 있으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고전 14:28. 즉,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것은 예의있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분명한 충고를 들어 보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들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리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만일 너희가 방언으로 쉽게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이는 너희가 허공에다 말하고 있는 것이라...교회에서 일만 마디의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기 보다는 차라리 나의 지각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나의 말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를 원하노라...누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려면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차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하라. 그러나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 고전 14:6-9, 19,27,28(킹제임스 성경역)
소위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 성경절들을 이용하여, 교회에서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중언부언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바울의 충고는 그러한 사람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디모데전서 6:20절에 “허황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하였다.
4. 하늘의 언어
내가 알고 있는 오순절파 교회에 있는 대부분의 나의 친구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이 실제적인 다른 나라의 언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말하는 것 이외에 두 번째 은사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기도 언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groanings which cannot be uttered)”이라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이유는 사단이 자신들의 기도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기도를 숨기라는 말씀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사단이 그것을 듣고 떤다고 말하고 있다.
오순절파 교인들이 말하는 소위 “기도의 언어”라고 불리는 교리는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 기초하고 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들은 바울이 기도할 때에도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였으며, 바울 자신도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요한 문제를 제시한다. 만약 자신이 어떤 기도를 했는지 알지 못한다면, 자신의 기도가 응답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고린도전서 14:14절의 성경절을 현대어로 표현한다면 “내가 만약 내 주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한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성령을 통하여 기도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전달되는 나의 생각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방언은 듣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과 묵상으로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 14:9, 28. 분명, 방언은 언어 장벽을 극복하여 복음을 다른 민족과 나라에게 전하기 위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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