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망 / 김수정
모든 생명은 물에서 태어난다. 그런 까닭으로 생명의 기원은 물이다. 적당하고 알맞은 소금기를 가진 엄마의 자궁에서 인류의 시원이 생겼고 푸르고 싶은 바다에는 펄떡이는 활어와 같은 생존의 호흡이 이어졌다. 살기 위한 몸부림은 벽화로 남아 역사를 흘렀고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물은 많은 이야기를 전설로 보듬으며 살아있는 증인이 되었다. 대자연의 길고 긴 삶을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사람의 가늠으로 어찌 헤아릴까! 다만 한 사람의 지나온 삶이라도 부디 기억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는 절박함에 운을 띄워 보았다.
투망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 쓰는 커다란 그물을 칭한다. 바다를 터전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투망의 귀함을 알기에 밥 먹는 시간보다 구멍 난 그물 수리에 우선순위를 배정한다. 배 위에서 그냥 그물을 펼친다고 일반 사람들은 생각할지 모르지만 투망 치기에는 고도의 전략이 숨어있다. 먼저 고기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어류의 특성과 습성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맞는 그물의 사용이 필요하다. 꽃게를 잡는 그물로 오징어를 잡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다음은 투망의 사정거리까지 고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인내심이다. 지능이 영리한지 살기 위한 본능인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유영은 만선의 기쁨을 노리는 뱃사람의 심장을 쫄깃하게 들었다 놨다 한다. 어차피 둘 다 생명의 끈을 붙잡은 동질성은 있다. 하나는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생활에 하나는 잡히면 죽어야 하는 경각에 달인 목숨이 치열하게 싸운다. 바다는 하루도 빠짐없이 생과 사의 사투로 지친 땀방울이 허연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정확한 판단과 배짱이 필요한 모험의 단계가 왔다. 고기의 진행 방향과 속도를 판단하고 투망이 날아가는 속도를 계산해 고기에 직접 던질 것인지 진행 방향의 앞에 던져 길목을 차단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한 번의 판단이 절대적인 능력이다. 온몸의 감각을 세워 동물적인 움직임으로 찰나의 시간을 포착해 사냥을 마쳐야 한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투망과 내가 일체가 되어 바다의 소리에 한 몸이 되어야 가능한 숨 고르기다.
이제 마지막은 바로 투망을 던져서 넓게 골고루 펴는 기술이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평행이 중요하다. 좁으면 작업 반경이 안 나와 수확량이 적고 너무 넓으면 그물을 끌어 올리는 힘에 부쳐 마무리도 하기 전에 지치고 만다.
인생도 이와 같다.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관계의 끝없는 사귐에서 만난 악연과 길연을 보는 맑은 눈이 있어야 상처를 입지 않는다. 불편한 만남을 이어가는 어리석음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각자의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 그다음은 말없이 상대를 기다려 주는 일이다. 그 대상이 부모든 자식이든 형제든 친구이건 상관없다.
연극이라는 무대는 주연도 있고 조연도 있지만, 인생이라는 무대는 주인공만 있을 뿐 연출도 관객도 없다. 오로지 내 몫의 책임으로 끌고 가야 하는 인생은 망망대해에 든 작은 배다. 그 안에서 세상과 부딪히며 기회를 기다리는 인내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경륜이고 경험이고 생활이다. 운은 타이밍이라는 말처럼 전광석화의 스침이 다가오면 망설임 없는 빠른 판단으로 기회의 목덜미를 낚아채야 한다. 성공한 자에게는 변명의 기회라도 주지만 실패한 자에게는 냉정한 삶의 룰이 적용된다. 갈무리 작업에 들어간 인생의 투망을 거두어들이면 각자의 수확량을 어깨에 메고 돌아서는 뒷모습에 막이 내리고 짙은 여운이 남은 무대는 파도 소리만 가득하다. 한 사람의 희노애락이 눈물겨웠던 자리에 남은 낡아 터진 그물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거스른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내려앉은 방에 투망을 만드는 당신이 밀랍처럼 말라 있었다. 구부러진 등 사이로 보이는 그물코 바늘에서 긴 줄이 허공으로 춤추었다. 덩실거리는 춤사위는 머리를 풀어 헤친 망나니의 슬픈 칼춤처럼 그물 사이를 휘저으며 그물코를 늘리고 있었다. 무능력한 가장. 내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었다. 공부에 남다른 재주가 있어 부모의 자랑이 되었고 무소불위의 상징이었던 군인이 되었다. 집안의 자랑이 마을의 자랑이 되고 군민의 자랑이 되었던 어두운 시절에 초고속으로 받은 계급장은 가문 좋은 집안과의 결혼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보는 눈이 없었다. 친구의 꾀임에 보장된 미래를 과감히 버리고 군복을 벗고 초보 건설업자가 되었다. 누가 알았을까? 건설 현장에서 떨어진 철판이 안전모를 뚫고 들어와 머리를 손상할 줄을, 운명은 소용돌이에 휩쓸린 나뭇가지처럼 세차게 맴돌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눈을 뜨면서 새로운 악몽이 시작되었다.
생명과 바꾼 논과 밭은 부잣집을 가난한 소작농으로 만들었고 고왔던 옆 마을 이장 딸로 아버지에게 시집온 엄마를 열 식구의 생계를 책임진 억척스러운 영덕댁으로 불리게 했다. 시부모와 여섯 자식의 굶주림은 비린내 가득한 어판장에서 헛구역질하며 산더미만 한 생선의 배를 갈라야 해결이 되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머리가 함몰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남편의 약값은 복숭아 과수원에 날품을 팔아 겨우 연명해 나갔다. 찢어지는 가난이 비명을 지르는 날은 억눌렀던 신세 한탄이 터졌고 원망의 희생양은 너무 똑똑해 폐인이 된 아버지였다.
세상 어디에도 자신과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말을 잃은 당신은 골방 구석에 쪼그리고 투망을 짜기 시작했다. 일 년의 시간을 정해 그물코를 엮었다. 투망의 크기에 따라 코의 수를 늘리고 납추를 달았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제법 튼튼한 그물이 완성되면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풀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만든 것을 한번 재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방 안 가득 하얀 눈덩이처럼 실타래를 만들어 새로 투망을 만드는 생산성 없는 일을 하는 당신이 답답했다. 햇빛을 보지 않은 얼굴은 점점 핏기를 잃었고 제대로 걷지 않은 다리는 앙상하게 휘었다. 그렇게 삶은 자식에게 미안하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아내에게 짐이 되는 존재로 각인시켰다.
모두 잠든 밤이면 허허로운 가슴을 데리고 아버지는 바다를 찾았다. 저 먼바다 어딘가에 아직 남아있을 젊은 날의 추억이 서러워 숨죽여 울었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다 본 물안개 속 뒷모습은 가장 슬픈 뒷모습으로 심장에 남아있다. 감당키 어려운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아팠을지를 몰랐다. 왜 투망을 만들고 풀기만 하는지도 몰랐다. 주린 배를 채워 줄 생선 한 마리가 더 소중했고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면 행복이었다.
아버지를 떠나보고내야 알았다. 고통의 날에 실낱 같은 희망을 그물을 뜨는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그 끈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생명이 호흡했음을 덩그러니 남은 투망을 만지면서 알았다. 살아야 했으니까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생의 마지막에 바다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삶도 물이었고 죽음도 물이었다. 형제들은 달갑지 않은 유산으로 받은 투망을 서로 밀쳐냈다. 결국, 나에게 전달되었을 때는 군데군데 터져 원래 모습이 없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보고 싶고 그리운 눈물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기억해주지 않는 시간을 살다간 인생이 서러웠다. 누구나 주인공인 무대가 당신에게는 없었다. 그것이 슬펐다.
시간이 나면 습관처럼 바다를 찾는다. 방파제에 앉아 커다란 투망을 치는 상상을 한다. 싱싱한 활어의 펄덕이는 생명력을 느끼면 심장이 뛴다. 바다에 빠진 맷돌은 아직도 소금을 계속 만들어 내는지 짠 기 품은 바람이 시원하다. 천 마디의 말보다 하나의 투망으로 전한 가르침을 따르고 살려 노력 중이다. 사람을 보는 눈, 기다리는 인내심, 정확한 판단과 거두어들이는 지혜를 조금씩 알아간다. 나이를 먹으니 아버지가 보인다. 바다도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