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지
이혜미
아마도 불안의 힘을 믿던 겨울이라서
갖가지 꿈을 옮겨다니며 살았습니다 봄잠에서 깨어나 여름 저녁의 먼동으로, 새벽 안개를 팔아 복숭아나무 잎 한 장을 얻어가며 환하고 독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도망침의 연속이더군요 숲길을 걸으면 줄지어 견디고 있을 나무들, 두려움이 우리의 신이란 걸 깨닫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지요 걸음 딛는 사이마다 잿더미였습니다
나무의 그림자를 밟으며 약속의 기한을 짐작했습니다 고독도 오래된 미신이라서 부를수록 제 몸집을 키워갑니다 껍질 터진 고목을 껴안으면 떠난 자들의 정념이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빛과 바람은 갈라지지 않고 물줄기는 몸 없이 스미는데 인간의 욕심만이 끝 간 데 없어 파묻힐 안온함을 찾는군요
신목에 깃든 혼백인들 가지 하나 붙들고 버티겠습니까 벽사(辟邪)도 축귀도 내내 머금은 기척은 건드리지 않는 법입니다 상처를 부적처럼 지니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재가 불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쇠락한 자리에 나앉으면 허기도 재앙도 다정한 내 편이었지요 대문에 뿌려둔 붉은 술과 흰쌀밥으로 내내 배부를 수도 있겠지만 다녀간 자취에 자꾸 생각을 엮으니 훗날 껴묻거리로 삼을 어리석음입니다
겨울빛에 새로 돋은 가지 끝
남청 깃발로 융숭해집니다
작은 매듭으로 어려움을 다 묶어둘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저 나무의 방향을 벗삼아
오랜 홀로를 여며두는 잠시입니다
_웹진 『문장』 2025년 12월호 발표
_이혜미 시인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보라의 바깥』(창비, 2011)과 『뜻밖의 바닐라』(문학과지성사, 2016)와 『빛의 자격을 얻어』(문학과지성사, 2021), 『흉터 쿠키』(현대문학, 2022)가 있음. 2009년 서울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수혜. 2022년 제15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賞 수상과 같은 해에 고양행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