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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역들의 고대문명들은 유적지들이 많이 발굴되고, 또한 그 시대의 문자들이 해독됨에 따라 그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데 반해, 드넓은 아시아 지역의 고대문명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찬란한 문명을 이루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인더스 문명이 있으며, 또 중국대륙 쪽에도 문헌에만 기록되어 있는 하나라에 대한 유적이 발굴되지 않아 하나라는 아직 전설속의 나라로 추정될 수 밖에 없는 단계이다.
1921년 중국의 허난성 양사오에서 신석기 시대의 대규모 취락지가 발굴된 뒤 학계(學界)에서는 황허문명[黄河文明]을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꼽으며, 중국 문명이 황허[黄河] 유역에서 시작되어 그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 뒤 중국의 각 지역에서 다양한 유형의 신석기 문화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학설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1973년 저장성 허무두에서는 벼농사와 고상식 건축물 등의 유적이 발굴되어, 양쯔강 유역에서 양사오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황허문명과는 다른 계통의 수준 높은 신석기 문화가 발달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둥베이 지방의 랴오허[遼河] 유역에서도 황허문명[과 다른 계통의 신석기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황허문명에서 중국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학설은 인정되지 않으며, 중국에서 나타난 고대 문명은‘중국문명’혹은 '황허 양쯔강문명'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 황하 문명((기원전 5000년경 ~기원전1600년)
황하 유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문명을 양소문화라고 하고, 이는 BC 5000~BC 3000경으로 밝혀졌다. 신석기 전기시대에 속한다. 스웨덴의 지질학자 앤더슨이 1921년 하남성의 양소촌 부근에서 붉은색,흑색,백색의 채색토기를 발견하고 이를 신석기 시대의 양소문화라고 칭하였다. 양샤오 문하는 황하 중류와 그 지류 유역등 중원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데, 이제껏 대규모 발굴을 해왔다.
그후 BC 2000년경~BC 1500년경의 신석기 후기의 문명으로 보이는 룽산문화가 황하강 유역에서 발전되었다. 1930년에 처음 발굴되었으며, 검은색의 토기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에 '흑도문화'라고도 불리운다. 다양한 농기구들을 사용하였으며, 가축기르기도 발달하였으며, 가옥의 형태는 반움집과 지상가옥의 두가지 형태가 있다. 묘의 크기와 부장품의 차이에 따라, 빈부의 겨차와 사유재산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양소문화를 3황시절로, 그리고 룽산문화를 5제시절로 추측하고 있으며, 그 뒤의 이리두 유적지를 하나라와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3황5제.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순으로 중국의 문명이 이어져 왔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중원 중심, 한족중심의 중화사상을 믿으며, 사방의 오랑캐들을 사이(四夷)라 했는데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하며 항상 천대하고 괄시해 왔다
그 오랑캐의 소굴인 동북방 뉴허량(우하량·牛河梁)과 둥산쭈이(동산취∇山嘴)에서 제단(壇)과 신전(廟), 그리고 무덤(塚) 등 엄청난 제사유적이 3위 일체로 확인된 것이다. 이뿐인가.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인 차하이(사해·査海)에서 중국 용신앙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용형 돌무더기가, 차하이-싱룽와(흥륭와·興隆窪·BC 6000년)에서 옥기의 원형과 빗살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등이 쏟아졌다. 중국학계는 기절초풍했다.
◆ 요하문명 (기원전 4500 ~기원전 2500)
홍산문화(紅山文化)는 만주지역의 신석기문화를 말한다. 황허문명보다 더 높은 문명이 그 시기에 만주지역에 있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지리적인 위치는 현재 내몽고 적봉시를 북단으로, 요녕성 조양시, 하북성 북부지역을 남단으로, 요녕성 통료시, 금주시를 동단으로 하는 지역으로. 지금의 요하 서쪽, 북경의 북쪽지방이 된다.
중국한족의 무대인 중원으로 통칭되는 황하지역과는 다른 만리장성 밖의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이 활동했던 주된 영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중국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우하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까지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실로 세계사를 다시 써야할 지도 모를 어마어마한 유적들이 이곳에서 끊임없이 발견, 발굴되고 있다. 특히 우하량유적은 거대한 제단, 여신묘, 적성총이란 삼위일체의 거대 유적을 갖추고 있고,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한 문명이라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이외에 많은 옥기와 인골, 동물조각상들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서 계급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하량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물품들
또한 이곳에서는 적석총(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묘실벽을 짜는 석관묘(돌널무덤)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홍산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이다. 반면에 중국의 화하족은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였고 주(周)나라시대에 들어서 나무로 관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이러한 묘의 형태가 요서지역에서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중원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석총은 예,맥과 고구려, 백제, 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계통의 묘제이다.
이 홍산문명이 바로 한(韓)민족의 나라인 고조선의 중심지로 인정되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한국학계의 일부에서도 홍산문명을 보고 고조선이 실제로 BC. 2333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게 되었다.
홍산문명은 황하문명보다 먼저 고대국가를 형성한 유적으로 성곽과 왕궁터가 발견되므로 고조선의 건국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러한 홍산문화의 발굴로 인해 <환단고기>에 나오는 환국이 바로 홍산문명(BC.4500~BC.2500)이고 홍산문명은 흥륭와문화, 신락문화(BC.6000~BC.5000)을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도 재야사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게 되었다.
◆ 양쯔강 문명 (기원전 5000년경~기원전 1000년경)
1973년 저장성 허무두에서 대규모의 신석기 유적지가 발굴된 이후, 양쯔강 유역에서는 다양한 유물들이 잇달아 발견되었다.
허무두 유적에서는 옥(玉)으로 만든 옥기(玉器)와 칠기(漆器) 등이, 장쑤성의 우쳉[吳城] 유적에서는 자기(磁器)가 발굴되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황허문명과는 다른 청동기(青銅器) 유물들이 출토되어, 양쯔강 유역에서 오랜 기간 황허문명과는 다른 특징을 지닌 문명이 발달하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허무두[河姆渡] 문화는 수렵(狩猟), 어로(漁労)와 함께 벼농사를 지었으며, 돼지 등을 가축으로 길렀다
양쯔강문명에서 가장 주목할 문명은 유항[余杭]에서 발굴된 양저[良渚] 문화는 기원전 3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며 옥(玉)으로 만든 장신구와 비단 등이 출토되었다. 순장(旬葬)이 이루어진 묘가 발견되어 사회적 분업과 계층화가 뚜렷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양저왕조는 신석기 시대 양쯔강하류에서 탄생, 당시 중국영토의 절반을 차지했을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과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저는 특히 우리나라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치우천황이 우리 민족인 동이족을 끌고 중국대륙애 세웠던 왕조라고 주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남만(南蠻)의 소굴이었던 장강(양쯔강) 유역에서 탄생한 이른바 양저(양저·良渚)문화도 난공불락의 중화주의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훙산문화보다 약간 늦은 량주문화의 찬란한 옥기와, 흙으로 쌓은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 그리고 궁전터와 제사유적 등 높은 문명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양저에서 발굴된 옥으로 만든 물품들
예컨대 양저문화의 대표격인 양저 유적은 30㎢의 면적에 50곳이 넘는 건축지와 거주지, 고분군을 자랑한다. 특히 판산(반산·反山) 12호는 중심대표인데, 그곳에서 나온 옥월(玉鉞·옥으로 만든 도끼)과 옥종(玉琮·구멍 뚤린 팔각형 모양의 옥그릇) 등 옥문화는 휘황찬란 그 자체다.
유적에서 확인된 옥종(예기). 훙산옥이 조형적인 반면 량주 옥문화는 세밀화를 그린듯 정교함을 뽐낸다.
훙산문화의 옥과 비교하면 약간 차이가 있죠. 량주보다는 이른 시기인 훙산옥은 사실적이고 조형적인 반면 량주의 옥문화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정교합니다. 옥에 세밀화를 그린 듯한 1㎜의 세공기술은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죠.”(이교수)
옥월과 옥종은 예기이자 위세품이다. 옥종이 의식에 사용됐다면 옥월을 포함한 각종 부월(도끼)은 군권을 뜻한다. 이 판산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신권과 군권을 한꺼번에 차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판산 인근의 모자오산(막각산·莫角山) 유적군은 양저문화 유적군의 중심점이다. 동서 길이 670m, 남북 폭 450m로 전체면적이 30만㎡에 달한다. 높이 10m의 인공토축을 쌓았고, 그 위에 작은 좌대를 3개 조성했다. 유적에는 좌우로 나란히 배열된 직경 50㎝가 넘는 나무기둥들이 있고, 20m가 넘는 초목탄층과 홍토 퇴적층이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이곳이 궁전터이자 제사를 지낸 곳임을 방증해준다. 야오산(요산·瑤山) 유적에서는 홍색, 회색, 황색 등 3색으로 조성된 대형제단과 묘지가 확인되었다. 양저 유적 조사단은 한마디로 “이곳에는 궁전과 제사기능을 갖춘 대형건축물 혹은 도성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고고학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훙산문화와 양저문화는 차례로 중원으로 몰려와 중화대지에서 4000~5000년 문명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인정했다. 후에 들어서는 중국 최초의 나라인 하나라와 상나라를 형성·발전시키는데 초석을 놓았다고 덧붙였다.
◆ 전설의 하왕조 (B.C.2,300년-B.C.1,700년경)
하왕조에 대한 기록은 17대 472년간 존속했다는 기록이 "죽서기년(竹書記年)"과 "사기(史記)" 에 남아있다.
하(夏)는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600년까지 존재했다고 기록된 중국의 옛 나라이다. 문헌상으로 기록된 중국의 첫 국가이기도 하다.
고고학적으로 그 존재가 입증되지는 않아 그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웠으나,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꾸준히 발굴작업이 진행중인 이리두 유적 발굴 작업과 사료 비판을 통해 중국 사학계에서는 하나라의 존재가 널리 인정되고 있다.
첫째왕은 우임금으로 하나라의 개국 군주로, 요순임금의 하나인 순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부자상속제를 확립하였다. 마지막 왕인 걸왕 때 은나라의 탕왕에게 멸망했다.
1959년 하남성 언사현 이리두촌에서 대규모 발굴이 시작된 이래 이와 유사한 형태의 문화가 하남성 중서부와 산서성 서남부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칭하여 이리두 문화라고 한다.
이곳은 하대(夏代)의 유적을 탐색할 목적으로 1959년 이래 현재까지 계속 발굴하고 있는 유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유적임이 점차 분명해졌다. 이 유적의 특징적 문화는 이리두문화라고하여 전기(1,2기)와 후기(3,4기)로 나뉘어지는 바, 대략 기원전 1900년부터 기원전 1500년경에 상당한다. 더구나 이리두문화의 전기와 후기 사이에는 분명하게 문화단계로서의 큰 차이가 보인다.
이 이리두유적의 중앙부에서 이리두후기에 속하는 거대한 건축터가 두곳 발견되었다. 하나는 동서 108m, 약 2m두께의 판축(版築)으로 다진 터로, 주위는 장(牆;토벽)으로 둘러싸고 중앙 북쪽으로는 더욱 일단을 높힌 기단 위에 30m×40m 정도의 대규모 전당(殿堂)이 세워져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곳으로부터 150,정도 떨어진 곳에 또 하나가 있었는데 발굴자에 의해 <이리두2호궁전>이라고 이름붙혀졌다. 사방 90m의 터 위에 회랑, 담, 대문을 세우고 안에는 32m×12m정도의 건조물을 갖고 있다. 이 건조물 북측에 하나의 대묘(大墓)가 있었던 것으로부터 발굴자가 <궁전>이라고 이름한 바, 혹은 종묘였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일단 하왕조가 실재했다고 해도 현재 발견되고 있는 이리두 유적이 곧 하의 왕성유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현재로서 이 시기의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서 일부에서는 하의 왕성을 다른 곳에서 찾고자 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 하나가 최근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왕성강(王城崗)에서 발굴된 두 개의 고성(古城)에 대한 견해이다. 이것은 그다지 잘 보존된 성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 변이 100m가 채 못되는 성벽이 두 개가 접속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에서 판단하면 이리두 제2기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원전 2천년을 약간 상횡하고 있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이를 하의 왕성이라고 보려한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따르기는 어렵다. 예컨대 하대에 속한다고 해도 이를 왕성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반파촌의 앙소기 취락규모와 비교해도 너무 협소하다.
하왕조는 과연 존재했는가. 오늘날 이를 적극적으로 부정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왕조= 국가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려면 예컨대 왕성지, 왕묘 등이 발굴되고 그것이 문헌상의 기술과 합치하는 것이 먼저 요구된다. 현재 고고학자들에 의해 결사적 탐색이 계속되고 있고 뜨거운 토론이 반복되고 있다. 하왕조의 실재가 증명되는 날은 그다지 먼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