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범려는 월나라를 떠났다.
어느 때 그는 대부(大夫)인 종(種)에게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월왕의 얼굴형상(곧 관상)은 목이 길고 까마귀의 주둥이처럼 입이 굽었다.
이런 사람은 곤란할 때는 함께 고생을 같이 할 수가 있지만,
성공을 한 후에는 안락한 생활은 함께 누리기에는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월나라를 떠났지만 그대는 왜 그대로 붙어있는가.”
이 충고에 종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어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종은 반란을 꾸미고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퍼뜨렸다.
마침내 월왕으로부터 칼을 받아 자살하였다.
결국 방법이 철저하지 못해 실패하고 만 것이다.
범려는 가벼운 보물 주옥(珠玉) 따위를 싣고 따르는 종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강과 호수를 차례로 거쳐 바다로 나와 해로로 산동성에 있는 제(齊) 나라에
이르러 성명을 바꾸어 치이자피(鴟夷子皮)라 일컬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재산을 불려 수십 만금을 모은 큰 부자가 되었다.
제나라에서는 그가 현자(賢者)라는 소리를 듣고 재상(宰相)의 자리에 앉혔다.
이에 범려는 깊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집에는 천금의 재산을 지니고
관원으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보통 사람으로서 이 이상의 명예는 없다.
그러나 오랜 동안 존귀한 영예를 누리는 것은 오히려 불길(不吉)한 일일 수도 있다’고
하면서 재상의 자리를 사임하였다. 또 많은 재산은 전부 남에게 주어 버리고
진귀한 보물만을 가지고 남모르게 그 곳을 떠나 도(陶)라는 고장으로 가서 자리 잡아
살면서 도주공(陶朱公)이라 일컬으면서 또다시 억대의 재산을 모았다.
하루는 노(魯)나라 사람 의돈(猗頓)이란 자가 찾아와서 재물을 모으는 방법에 대해 물으니
우선 다섯 마리의 암소를 기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의돈씨의 고장에서 소와 양을 크게 길러 10년 동안에 왕자나
고위 고관에 있는 사람에 견줄 만큼 큰 부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부자라고 하면 반드시 도주(陶朱: 범려)와
의돈(猗頓) 두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십팔사략(十八史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