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과 실상의 괴리
호세아서 8:1~7
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2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3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
4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5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내 진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그들이 어느 때에야 무죄하겠느냐
6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장인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이 나리라
7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한국은 1인당 소득 상승 등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음에도, 상대적 박탈감과 사회적 고립감, 과도한 경쟁 압박 등으로 인해 subjective well-being 즉, ‘주관적 안녕감’이 낮고 자살률이 높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UN의『세계행복보고서』에서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6.04점으로 OECD 38개 회원국 중 33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전했으며, 통계청 및 OECD 발표에 따르면 자살률은 2024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29.1명으로, OECD 회원국 중 20년 가까이 1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을까요?
문화경제 성장으로 절대적 빈곤은 줄었으나, 타인과 끊임없는 비교로 인한 상대적 빈곤감이 급증했습니다. SNS 및 주거·자산 격차 확대로 인해 ‘남들만큼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기준선이 지나치게 높아졌으며, 이는 높은 스트레스와 우울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치열하게 경쟁의식을 품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밤을 새워 스펙을 쌓고, 자산을 늘리기 위해 투자 공부를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노력을 마친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밀려오는 것은 성취감이 아니라 이유 없는 텅 빔과 허무함일 때가 많습니다.
수고하고 땀을 맺혀가며 얻었던 수확물을 쥔 손을 펴보았을 때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허탈감과 더불어 내가 그토록 바라고 달려왔던 그 무언가가 정작 내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 주고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세대만 겪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고 그렇습니다.
솔로몬 왕은 전무후무한 지혜, 막대한 부, 권력, 그리고 성전과 궁전 성축이라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위의 성취를 모두 경험한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전도서(Ecclesiastes)를 통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하며 깊은 허무감에 대하여 단 하나의 단어로 진단합니다. 바로 ‘허상’을 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도 우리와 참 닮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안전망을 구축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붙들었던 것은 모두 언젠가 사라질 허상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지식의 허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 8:2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알다’라는 뜻은 원어 히브리어에서는 ‘야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배워서 아는 것’을 포함하여 경험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지만, 함께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앎’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였습니다. 호 8:3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세상의 많은 이치를 알고 지식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입니다.
구약시대 사사기의 주제는 ‘사람이 자기의 옳은 대로 행하였다’입니다. 나름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잘못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람의 판단에 의한 잘잘못은 근본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는 죄인이 아무리 바른 판단을 하였어도 거기에는 죄가 오염되었기에 바른 판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말씀이 학개서 2:13에 나옵니다.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게 된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라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고 했습니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죄인의 사상에서 아무리 선하게 보인 것이 나올지라도 결국은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세상의 기준을 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허상입니다.
호 8:4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머리와 전략으로 지도자를 세우고 정치적 계산을 했습니다. 내 경험과 이성은 다르지 않다는 자만, 이것이 허상입니다. 그들은 강대국을 의지하고 세상의 주관자들에게 줄을 대면 삶이 안전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진짜 실상을 두고, 세상의 그늘을 파라솔 삼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증한 허상은 우상 숭배입니다.
호 8:4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우상은 거창한 신상이 아닙니다. 나에게 유익을 준다면 언제든 가꿔내고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것, 즉 Money, Success, Recognition(돈, 성공, 인정)이 곧 우리가 만든 현대의 금송아지입니다.
두 번째는 인생들이 심어 놓은 허상의 결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 8:7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바람을 손으로 쥘 수 있습니까? 씨앗인 줄 알고 평생 가슴에 품고 싶었는데, 열매를 맺을 때가 되어 보니 그것은 싹이 나지 않는 '바람'이었습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그 미미했던 바람이 삶의 후반부에 나를 통째로 흔드는 '광풍(태풍)'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지식을 심고, 세상의 사람을 의지하며, 내 유익을 위해 우상을 심었던 삶의 끝은 결국 "줄기가 없으며, 싹이 결실하지 못하고,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는" 허무함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쌓아 올린 영광은 결국 세상이라는 이방인에게 노략질당하고 맙니다
이런 끔찍한 결과에 대한 예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났습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국가의 실질적인 안위를 살피는 대신, 애굽의 막강한 군사력이라는 외세의 허상과 자신의 정치적 권세에 의존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순응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거듭된 경고를 보냈음에도, 그는 눈앞의 권세과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평화 공세에 눈이 멀어 실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시드기야가 맞이한 말로는 참혹했습니다.
그는 도망치다 바벨론 군대에 잡혀,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아들들이 처형당하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아들들의 죽음이 그가 육신의 눈으로 본 마지막 잔상이 되었고, 곧이어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토록 지키려 했던 왕좌, 권력, 국가의 영광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그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시드기야의 삶은 우리에게 ‘영적인 안목을 잃고 허상을 좇는 자는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실체마저 빼앗기게 된다’는 무거운 교훈을 전합니다. 눈앞의 권력, 재물, 혹은 헛된 보장은 영원하지 않으며,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하는 눈은 결국 겉껍데기뿐인 권세와 함께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는 허상에서 벗어나 실상을 쫓는 것은 무엇인지 말씀드리려 합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실상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시스’은 ‘아래에’라는 뜻인 ‘휘포’과 ‘서게 하다’, 또는 ‘확립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스테미’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 … 아래에 확립하다’ 혹은 ‘ … 아래에 서다’를 뜻하는 것으로 ‘기초’, ‘실체’, ‘확증’, ‘객관적 실체’(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휘포스타시스’는 사람의 생각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진리인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의 실상을 이루게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진리는 그 안에 성령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겪을 때 진리가 우리는 자유케 하는 것을 경험하므로 우리의 신앙이 더욱 굳건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기도하는 마음을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내 안에 담긴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이 내 안에서 떠오르면 이것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겁니다. 문제가 내게 커 보여 마음이 답답하고 염려가 될 때 기도하므로 점차 줄어들고 하나님께 문제를 풀어갈 지혜를 주실 때가 있고, 문제의 장애물을 옮겨 주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진리는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독일의 형제단 운동가였던 카운트 폰 징젠돌프는 모든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복음을 전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에게는 단 하나의 열정이 있다. 그것은 오직 그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상이 말하는 실상은 눈에 보이는 통장 잔고, 직함, 타인의 인정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것이야말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우리의 진짜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허상이 무너지는 자리이며, 오직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유일한 실상(Reality)이 되십니다.
헛된 바람을 거두고, 실상을 심으십시오!
언제까지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으려 사막을 달리시겠습니까? 내 지식, 내 인맥, 내 유익이라는 금송아지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 삶에 진짜 실상이 채워집니다. 오늘 이 시간, 바람을 심던 우리의 손을 거두고 십자가의 실상을 심으십시다. 세상은 당신이 얼마나 가졌느냐고 묻지만, 예수님은 오늘 당신의 빈 손을 잡으시며 “내가 너의 실상이 되어주겠다” 말씀하십니다. 헛된 광풍에 휩쓸리지 않고, 영원한 실상이신 주님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거룩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