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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1392년-1910년. 이성계 건국. 27대 519년/ 순종 때 한일 합방으로.
붙여 한 곳에 모아 수장시킨 것으로 전해짐. (방문의 내용: 왕씨 들에게 섬을 하나 내줄 테니 강화 해 안에 모두 모이라는 것.)기왕에 불안에 떨고 있던 왕씨 들은 이러한 약속을 믿고 강화도 행 배를 탔다 가 모두 수장됨. 이성계 일파의 모략임을 간파한 일부 왕씨 들은 배에 오르지 않았으며 ( 全, 田, 玉, 龍,)씨 등으로 속여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 이성계의 등장 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고 아들 행리, 손자 춘이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를 얻었다. 그러나 원이 고려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원주민과의 대 우를 달리하기 위해 차별호적을 만들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이자춘은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 기로 결심한다. 당시 원은 명에 의해 중원으로 밀려나자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실시하여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긴밀 한 관계가 있던 기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이자춘은 이러한 공민왕의 의도를 간파하고 1355년 공민 왕을 만나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한다.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 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 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 위화도회군과 4대 불가론 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고려를 명의 속 국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 1388년 2월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기지인 요동을 정벌하고자 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조 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여 그 해 4월 요동정벌을 감행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5월에 위화도에 당도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장마로 압록강 물이 엄청 불어나 강을 건널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 4대불가론 려가 있다. 고 주장하자,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 자,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해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내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족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의견이 양립되자 조민수는 목은 이색에게 조언을 구 해 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국새를 맡겼고 안씨는 아홉 살인 우왕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 받게 한다. 그러나 창왕은 이듬해 11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 당하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 창군 요창을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조민수가 실각하자 이성계를 왕으 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가속화 되었고 마침내 1392년 7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이성계는 왕으로 등극하고, 공양왕을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 제1대왕 :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기간: 1392.7-1398.9. 집권 6년2개월 76세) 이성계는 마침내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로 고려 국왕으로 등극하고, 1393년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 또 무학과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 수도를 물색 케 하고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삼는다. 이성계는 개국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 경국전을 비롯한 각종법전이 편찬되었다. 또 숭유 억불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다. ● 새 도읍지 한양 으로 계룡산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여 왕성건립을 시작했다. 그러나 계룡산은 지역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하륜의 주장에 따라 도읍지는 다시 한양으로 변경되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왕 이 서경인 평양과 남경인 한양에 궁궐을 짓고 돌아가면서 머무르면 국운이 크게 융성한다는 지론에 따라 숙종 5년인 1101년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짓기도 했다. 일찍이 도참사상의 대가로 잘 알려진 신 라의 고승 도선은 '한양은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두 모이는 곳이기에 반드시 왕성이 들어 설 것이며, 왕성의 주인은 이씨가 될 것'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에 고려왕조는 이를 염려하여 고려 중엽에 윤관 으로 하여금 북악산 남쪽에 오얏(자두)나무를 심었다가 그것이 무성하게 자라자 베어 버리게 했다. 즉 오얏李의 성한 기운을 없애 이씨가 왕조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한양으로 도읍지는 정해졌지만 궁터만은 쉽게 정하지 못했다. 하륜은 모악산 아래 지금의 신 촌으로 무악은 인왕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용호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정도전 은 대왕은 남으로 향하는 법이지 동향을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면서 북악산 아래쪽을 극구 주 장했다. 이에 무악은 화산인 관악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궁 을 앉히면 관악산의 화기가 뻗쳐 우환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관악의 화기는 한강이 막아 낼 수 있다는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을 채택하여 북악산 아래에 왕성을 짓고 궁궐을 남쪽으로 향하게 했으며,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불을 잡아 먹는다는 전설의 동물인 해태의 석상을 경복궁 앞에 세웠다.
■ 제2대왕 : 정종. 1357년-1419년 재위기간 : 1398년 9월-1400년. 11월. 기간 2년2개월 61세. 정종은 원래 왕위에 뜻이 없었다.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그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방원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수있느냐"?고 반문 하며 세자 되기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방원의 양보와 권유로 세자로 짹봉되었고, 1개월 후 태조가 물러나면서 왕위에 올랐다. 비록 왕좌에 있긴 하였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정종 때의 정치는 거의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 되었다. 그는 수도를 개경으로 옮기고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 이 일어나자 방원을 세제에 책봉했고, 재위시에는 정무 보다는 격구 등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 이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났다.
-제1차 왕자의 난 : 1396년 세자 방석과 정도전의 배후세력인 신덕왕후 강씨가 병으로 죽자, 방원의 정계복귀노력은 한층 가속화 되었고, 병권 집중운동을 벌여 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진법 훈련 강 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388년 세조가 계비강씨 소생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하자, 방원 등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 하고 일곱째 방번도 함께 살해함. 이때 이성계는 와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 해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권력을 잡자 세력강화를 위해서 왕족들의 사병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400년. 동복형인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키자, 방원과 그의 사병들이 조기에 진압, 이일로 방원은 세제 자리를 확보. 방원의 심복 하륜의 주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 을 얻어 1400년 2월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고 11월에 왕위를 물려 줬다. ※ 태상왕이 된 태조 이성계는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흥에 머물렀다 . 이때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남. 태조가 물러난 것은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 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중 이라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덕궁 별전에서 74세로 죽음.
■ 제3대왕 : 태종 이방원 1367년-1422년. 재위 : 1400년11월-1418년 8월. 17년10개월. 방원은 세제로 책봉되자 병권을 장악하고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 나갔다.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 군 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윈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 을 맡게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문화의 잔재들을 없 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 그리고 1400년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왕으로 등극 했다. 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겼으며 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했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자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한층 박차를 가했고, 중앙제도와 지방제 도를 정비하여 고려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제정을 안장시켰다. 노비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 을 당한 백성이 자유롭게 청원케 하는 등 새로운 사회 정책을 실시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태종은 교 육과 과거제도 정착에도 역점을 두어 귀족위주의 관리 등용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 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주력했다. 태종은 이처럼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고 조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 정치는 그가 상왕으 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고, 이러한 개혁에 힘입어 세종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 게 되었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기 전인 1418년 장자인 양녕대군이 절제없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 로 세자에서 폐하고 충령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권을 이양했다. 태종은 재위 18년 동안 네 차례나 선위파동을 일으켰고, 상왕이 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 박습의 옥을 치죄하고 병선 227척, 군사1만7천여 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1422년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태종은 12명의 부인과 29명의 자녀를 둠.
※ 양녕대군 : 자유분방. 사냥과 풍류를 좋아함.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 다고하나 정확 치 않음. 1418년 세자에서 폐위 69세 사망.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대왕에 걸쳐 91세까지 삶. 왕의 연고 존친으로 극진한 대우와 존경을 받 음.
● 태종시대의 주요 5대사건 무구 형제의 옥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태종이 선위를 표방하자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왕후사 이의 불화였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써 아버지 민제와 왕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 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 할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이 발생하게 된다.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서인으로 전락시키고 여흥으로 유배 시켰다. 태종은 정비 민씨와 장인 민제 장모 송씨의 면목을 생각해 가급적 생명만은 보전시킬 생각이 었다. 그러나 민씨 형제는 유배 중에도 대간 등의 논핵을 가중시킬 행동을 자주 하다가 결국 1410년 자진하였다. -6조직계제 단행 - 태종은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 진 육조장관들의 품위를 정3품에서 정2품으로 높였다. 되면서 왕권과 중앙 집권이 강화되어 왕조의 안정을 이루게 된다. -거북선의 개발 - 태종실록의 태종 13년에 보면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 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태종15년에는 좌대언 탁신이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 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일종의 장갑선으로 짐작된다. 거북선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신문고 설치: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1401년 송나라 등문고를 본 따 설치했다. - 한양으로 다시 천도 -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제1 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개경으로 옮겨갔다. 태종은 등극 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5년 창덕궁이 준공되자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태종 대에는 이 사건들 외에도 호구법을 제정하여 호패법을 실시하였으며, 포백세와 호포세를 폐지했고, 환자치료를 위해 처음으로 동녀를 선발하여 부인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 제4대왕 : 세종 충녕대군 : 1397년-1450년 재위:1418년 8월-1450년 2월. 집권31년6개월.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네 번째 선위파동으로 이때 황희 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 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 를 당하기도 했다.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 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수 차례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 이 지켜야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 에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 등의 청원 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 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 아들 충녕대군 도가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4대왕인 세종이다. 태종은 충녕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등도 잘 안다 면서 세자에 책봉했다. 이처럼 태종은 충녕의 학문과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기에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휼륭한 유교정치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세종 시대의 권력 구조나 정치적 양상은 세종 19년을 분수령으로 두 시기로 구분된다. 세종은 이 때 를 전후하여 국가 기강의 중심이었던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변혁하여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사를 의정부로 넘기는 한편,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결제하도록 하는 등 이전에 비해 더욱 유연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집현전은 고려시대에 이미 설치된 기관으로 조선 정종 시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지만 세종초에 이르러 기능이 대폭 확대되었다. 세종은 명과의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기위해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 그리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따라 집현전은 젊고 유망한 학자들이 채용되었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집현전 인 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천체관측기구인 혼천의, 해시계인 앙 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세계최초의 강우량계측기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국토의 개척과 영토의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했다. 박연을 통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다. 문종은 세종 즉위3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에 머물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역수 및 산술에도 뛰어났고 서예 에도 능했다.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었고 6품 이하의 신하에 대해서는 윤대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 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렇듯 유연함과 강인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제위 2년3개월만에 39세 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 제6대왕: 단종(1441년-1457년. 재위 : 1452년 5월-1455년 윤6월. 집권 3년 2개월) 현덕왕후 권씨는 26세에 단종을 낳고 해산에 기력을 완전히 빼앗긴 탓으로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녀 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에 혜빈 양씨는 세손 홍위 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르케 양육된 홍 위는 8살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하고 성삼문, 박팽년 , 이개, 하위지,유성윈,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이는 세종자신도 이미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처지였고 세자 향(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세종이 이런 간곡한 부탁을 한 것은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 이었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 하자 홍위는 세자로 책봉된다. 문종은 즉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세 자를 부탁 한다는 고명을 남기고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세자 나이 12세임. 단종이 12세에 왕위에 오 르자 수렴청정 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는데,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왕비도 없었다. 모 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았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데 그쳤다. “황표정사” - 대신 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하는 방식. 따라서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들인 황보인, 김종서 등 에게 집중됨. 이렇듯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왕숙들이(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는것. 1453년 4월 명나라에 고명사로 갔다 돌아온 수양은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고,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철퇴로 죽이고 황보인[영의 정] 조극관[병조판서] 민신[이조판서] 이양[우찬성]등은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 안평 대군은 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하여 강화도에 유배시켜 賜死 함. 이처럼 정치적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수현의 딸을 왕비로 맞음. 그러나 이듬해 윤6월 수양대군이 자기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 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 갔다. 신들이 사형 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 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 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賜死됨.
※ 단종복위사건(1455년) : 1455년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신하들을 귀양 보내고 왕 으로 등극하자,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자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 위지, 유성원 등의 문관들은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들과 모의하여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 킬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 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되었다. 당시 세조는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해 상왕 단종과 함 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바로 이 순간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게획 이었다.하지만 한명회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암살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김질이 장인 정창손 에게 사실을 알려 단종복위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붙잡힌다. 김질이 고발할 때 성삼문에게 들은 말이라 했고 성삼문은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과 같이 모이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더 추궁 하자 유응부와 박정도 등도 이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육신 :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 중종 때 사림파들이 충절을 기리기 위해 . ■ 제7대왕 : 세조(1417년-1455년. 재위:1455년-1468년. 집권 13년 9개월. 52세.) 계유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내외전, 경연, 춘추서운관사 . [겸판]이병 조, 내외병마 도통사.등 여러 중직을 겸하여 정권을 독차지하고 거사에 직, 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 지, 권람, 한명회, 양정등 자신을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승정원(비서실) 중심의 국사를 운영함. 의정부서 사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권 제에 가까운 육조 직계제를 단행했고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처럼 세조는 관제개편과 관리들의 기강확립을 통해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 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사업으로 사회를 일신 시켰다. 그러나 정치운영 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중심이 아닌 측근 중심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켜 궐내에 사찰 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 들이기도 했다. 그의 불교 융성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 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 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파란 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십이지상을 난간동자석주에 옮겨 새겼다. ,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일종의 대리 서무제 였다. 세조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이미 악화된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원상제를 도입한 해인 1468년 9월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세자 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그 다음날 죽었 는데, 이는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457년 형 의경세자가 횡사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즉위했으나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데다가 건강 마져 좋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섭정과 원상제도라는 두 가지 형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행사해야 했다. 섭정은 모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루어졌다. 예종이 죽자 왕위계승은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으로(당시4세) 이어져야 하나, 정희왕후와 한명회 등이 결탁하여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성종(13세)을 예종이 죽는 날 왕에 앉힌다. 첫째인 월산군이 당시 16세였으나 둘째인 자을산군으로 왕통이 이어진다. 이는 자을산군의 장인이 한명회였기에 정희왕후 와 서로 결탁함. 당시 한명회는 최대 권력가였다. 성종은 태어 난지 2달만에 아버지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射藝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어느 뇌우가 몰아치던 날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 했는데도 그는 얼굴빛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이를 보고 태조를 닳았다고 하면 서 기상과 학식이 뛰어 날 것임을 예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성년의 나이인 20살 까지 7년 동안 할머니인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1476년 섭정이 끝나자 원상제도 를 폐지하여 왕명출납과 서무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 들과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 했다. 임사홍, 유자광 등 공신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출신 신진 세력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위협 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조선 백성들은 개국이래 가장 태평성 대 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은 후기에 들어 유흥에 빠져 들었고 이것 이 확산되어 사회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 을 빠져나가 규방 을 출입 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어우동에 관한 야사의 이야기도 이시기에 형성됨.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계비윤씨를 폐비시킴.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로 생을 마침. 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 되었다. 1479년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게 된다. 이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가 되고 만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성종은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 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윤씨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게 하여 사약 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賜死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 까지는 폐비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연산은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게다가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향도 있었다. 성종은 이런 연산을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에 책봉한다. 이에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 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한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 밖 에 없었다. 이때 세자 융의 나이는 8세임. 1494년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폭군은 아니 었다.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의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문신의 사가독서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 를 새롭게 했다. 하지만 명분과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은 사사건건 간언을 하는가 하면 연산군에게 학문을 강요했다. 원래 학문에 뜻이 없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시 하던 연산군은 그 때문에 사림을 귀짢케 여겼다. 연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을 흥청이라 했 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 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같은 사치행각은 결국 국고를 거들 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생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려 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은 이에 반발하여 왕과 대립하며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한다. 이때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윤 씨 사건을 연산군 에게 밀고하게 된다. 내막을 자세히 모르던 연산은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생극을 자행하는데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그는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 과 사간원,홍문관,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폭정이 계속 이 어지자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군사를 일 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중종반정」. 이 실록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 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화술주시」.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임.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이때 유자광을 찾아갔고, 유자광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은 부관 참시형이 가해졌고 김일손,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했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사림을 싫어했다.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 을 이용해 훈구세력과 잔여 사림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연산군 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사건을 들 추어 낸다. 윤씨의 폐출 경의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 극을 자행한다. 우선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 귀인과 정 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 보내 사사시켰다. 병중에 있는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3일만에 죽게했다.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김굉필 등 10여명이 사형당하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남효은 등은 부관참시에 쳐 해졌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자녀 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했다. . ● 연산군의 폐출과 진성대군의 등극.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 하는데 성공했다.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는 이들의 청을 처음에는 거절 하다가 결국 연산군 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중종은 등극한 뒤 가장 먼저 나라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홍문관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여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시과, 사가독서, 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하여 문벌세가들을 견제하려 했다. 중종 즉위 4년 후인 1510년 영의정직에 있 던 박원종이 죽어 공신세력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개혁적인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정치 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가고있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그러 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 해서 훈구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 다. 더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 반정공신 위훈 삭제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사림세력을 숙청 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온나라의 민심이 조광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하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라 쓰고 벌레가 그것을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주초는 조 趙를 분리한 글자 이므로 조씨가 왕이 되려 한 다는 뜻이었다. 비록 미신에 불과했지만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몹시 불쾌 해했다. 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다 훈구파가 영의정, 좌이정, 우이정 등에 임명되자 곧 사사 되었다. 이 사건은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훈구세력이 지나친 도학적 요구에 염증을 느낀 중종과 모의하고 벌인 일종의 친위 쿠테타적 성격이 짙다. 중종의 정치개혁은 실패로 돌 아갔는데, 그것은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뚜렸한 정치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 문정왕후 윤씨(1501-1565년) :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 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했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 판서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 들의 불만을사기도 했다. 명종은 그녀의 지나친 정권 욕에 불만을 품고, 신진사림 세력들을 등용 시켜 외 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히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조정을 패권 다툼의 장 으로 몰아갔던 그녀는 희대의 악후였다. 그녀는 1남4녀 를 낳았으며 35세에 명종을 낳았다. 1515년 성균관 유생 200명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지라는 관직에 임용되고, 그 해 가을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전적,감찰, 예조좌량을 역임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중종은 그를 정언에 앉혀 언론을 통해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1517년 그는 그 동안 형성한 세력을 기반으로 중종과 함께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 하기에 이르렀다. 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훈구파의 엄청난 반대가 있었지만 중종의 지원 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이 곳을 통하여 등장한 인물은 신진사림파가 많았는데, 그들은 조광조 의 추종학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막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 공신의 4분의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탈했던것이다. 이에 훈구 세력 은 더 이상 사림파의 급진적인 성향을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직해 조정을 문란케 하고 있다고 탄핵을 한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은 훈신들의 탄핵 을 받아 들여 대대적인 사림파 숙청을 감행하였다. - 이것이「기묘사화」이다 -1519년 을 끼쳤다. 중종과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6세에 세자에 책봉되어 25년간 세자로 있다가 1544년 중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인종의 모후인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6일만에 25세를 일기로 죽 었다.그래서 그는 문정왕후 윤씨 손에서 자랐다. 윤씨는 성질이 고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여자이기 때문에 전실 부인의 아들인 인종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그는 성품이 조용하고 효심이 깊으며 형제 간의 우애가 돈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3세 때부터 글을 읽었고 8살 나이로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철처한 금욕생할을 추구했고,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이는 그가 도학 사상에 깊이 매료 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와 귀인 정씨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슬하 의 자녀 는 없었다. 귀인 정씨는 정철의 큰누이이다. 인종은 30세에 즉위하여 31세에 죽음.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이를 구실로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유관,유인 숙 등을 사사케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인 사림세력들을 유배시켰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 으로 윤원형 일파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 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시대'가 도래 했고 이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은 막상 권력을 독점하자 그 동안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시켜 사사했다. 또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부를 축척 하였다. 이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 내에 집이15채나 됐으며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긴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 었다. 또한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종이에 적어 보냈다가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왕을 불러 면상에다 대 고 반말로 욕을 해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왕의 종아리를 때리거나 빰 을 때리기도 했다. 왕의 권위 가 이 처럼 땅에 떨어지고 조정 대신들은 권력을 독점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해 있었기에 사회는 어수 선하고 민심은 병들 수 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나타난다. 이같은 조선 혼란의 근본 원인은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마침내 1565년 그녀가 죽자 조선은 급속도로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자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 에서 밀려나고 승직을 박탈당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 윤원형 역시의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에 유배 되었다가 자살하였다.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했다.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은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인순왕후 심씨에게서 순회세자를 얻었으나 13세에 죽었다. 때문에 후사를 남기지 못해 중종의 9째 아들 덕흥군의 3째 아들 하성군(선조)이 이어 받았다. 하성군의 즉위로 조선은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얼출신인 방계혈족이 왕위 를 잇는 상황에 처해졌고 이 때문에 왕의 권위는 한층 떨어지게 되었다.
■ 제13대왕 : 선조(1552-1608년. 재위:1567- 1608년. 집권 40년 7개월. 59세.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그의 부인 인순왕후 심씨는 명종의 유명과 종실의 천거에 의해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인 하성군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수렴 청정했다. 이때 하성군의 나이 는 16세였는데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선조가 정사처리에 능숙하고 친정할 능력이 있다 는 판단에 따라 이듬해 17세가 되던 해에 편전을 넘겨주었다. 그는 즉위 초에는 학문에 증진하고 경연 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정치 의 신봉자가 됐으며 훈구,척신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으며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도 했다.척신들이 완전히 조정에서 사라지자 정권을 장악한 사림은 분당되는 사태에 직면했고 이후 동인 과 서인 으로 분리되어 당파 싸움을 하게 된다.
이이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1591년 세자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하게 된다. 한편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 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 곳 동향을 살피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돌아 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면서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동인인 통신부사 김성일은 토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 것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하게 할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 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 의 주장과는 달리 이듬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 해 왔으니 이것이『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 13일). 7년 동안 지속된 임란이 끝나자 선조는 전란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민심을 안정 시키기 위해 전력을 쏟는다. 스스로 음식과 의복을 절제하여 사치를 배격하는 한편 농토를 개간하고 양식을 절약하는 정책 을 실시해 민간경제를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또한 민간의 사기를 돋우고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전란 중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공신을 녹훈하였다. 하지만 선조의 전란 복구 노력은 거듭 되는 흉년으로 쉽게 효과를 볼 수 없었으며 조정은 당쟁이 더욱 악화되어 혼란이 점차 가속화 되었다. 결국 선조는 전란의 뒷수습을 채 마무리 짓지도 못한 채 1608년 59세를 일기로 41년 동안의 치세를 마감해야 했다. 의인왕후를 비롯해 8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14남 11녀 의 자녀를 얻었다. 란을 수습하고 외척 정치를 없앴으며 신권 중심의 정치를 구현한 뛰어난 왕 이었다.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 당시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은 적통론에 입각해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 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들은 임해군을 제거하고 영창대군을 폐서 시켜 강화도에 유배하고 '7서의 옥' 이 발생하자 영창대군을 증살(烝殺)함. 또한 인 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인목왕후로 폐비시킨 뒤 서궁으로 유폐시켰다. 대북파의 의견 에 따라 저지른 광해군의 이같은 패륜행위는 인조반정의 구실이 됐으며, 이에 따라 광해군은 폐위되 고 인목왕후 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부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후에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증살시킴. 우여곡절 끝에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 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 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 들 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폐위되어 폭군으로 기억되고 마는 비운의 왕이 된다. 그의 15년 재위 기간동안 정권을 장악한 것은 대북파였다. 대북파는 정권유지를 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했는 데 이 때문에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과 서인들은 광해군 정권을 전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623 년 김류 ,이귀,김자점 등 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인조)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 한다. 마침내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폐위된 후 광해군은 강화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유배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하다가 죽었다. 이기간 동안 그는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 제16대왕 :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1649년.5월. 집권 26년2개월.55세를 일기) ● 인조 반정의 명분 대 했다. 그리고 청과 명에 대해 중립적인 외교로 실리를 취했으나, 인조는 대명 사대주의에 빠졌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릅을 꿇는 치욕을 당했다. 인조반정으로 정인홍, 이이첨 등은 사형을 당했고, 대북세력 200명 모두 숙청 당함. 인조는 친명 사대주의를 표명하여 정국 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괄의 난, 청의 침입 등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고 결국 청과 군신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다. 이괄의 난은 인조가 한성을 버리고 도주했을 정도로 조선 조정에 치명 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괄이 북방 주력부대를 이끌고 내려옴으로써 변방의 수비에 허점이 생겨 후금 의 침략을 용이하게 했다.
소현세자와 함께 오랫동안 볼모 생활을 하며 반청 감정을 강하게 키웠던 효종은 왕으로 등극하자 곧 친 청세력을 몰아내고 척화론자들 을 중용하여 북벌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 하였다. 이같은 계획은 끝내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지만 그 덕택으로 국력이 강해져서 사회 안정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군사와 함께 나선 병력을 흑룡강 이북으로 후퇴시켰다. 데 청군은 겁을 먹고 감히 그들에게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력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나선군은 흩어졌고 이후 흑룡강 부근에서 활동하던 나선군은 거의 섬멸됐다. 두 번의 나선 정벌은 조선군의 사기를 한껏 높여 이후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조선은 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 하여 북벌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표류해온 네들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 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초 생산에 매진 하였다. 그러나 효종 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 사회의 안정 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 제18대왕 : 현종(1641-1674년.재위 : 1659년-1674년. 집권 15년 3개월.34세 일기.) 현종 시대는 밖으로부터 외침이 일체 없었고 내적으로는 사회가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집권 15년 동안 예론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정쟁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상 기간을 둘러 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임 간의 논쟁을 말한다.이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왕실의 전례 문제인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예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 문제이다. 율곡학파인 서 인과 퇴계 학파인 남인간의 정권주도권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었다. 이것은 표면적으론 단순한 학 문적 언쟁인 것 같지만 파고들면 효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것이었다. 당시 선비들에게는 목숨을 걸만한 중요한 사안이었다.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자 그의 아들인 석철이 왕위를 이어야 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세손이 아닌 둘째 아들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
■ 제19대왕 : 숙종(1661-1720.재위 : 1674년8월-1720년6월. 집권 45년10개월.60세일기)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로 명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 되었고 1674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곧바로 친정을 시작하였다.숙종 시대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으나,숙종은 비상한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를 안정시켰다. 마련 한 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중전과 후궁들에 대한 애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숱한 옥사를 유발하여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다.
원자에 정하려 했는데, 서인측이 정비 인현황후 민씨가 아직 젊어 왕자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 상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만에 왕자 균을 원자에 정호하 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며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때문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인 들이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은 사사된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전 민씨가 폐위 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1694년 노론계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폐비 복위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 이 악화 되어 있었고 민씨를 폐위 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 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 시키고 폐비민씨를 복위시켰다. 민씨가 복원되고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에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어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난다. 희빈 장씨는 그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가 죽기를 빌었고, 이사실을 안 숙종은 진노하여 그녀를 자진케 했는데 이를 듣지 않자 사약을 내렸다.이로써 소론은 세력이 대폭 축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이 사건은 무속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무고의옥’이라고 한다. 숙종은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폐위 사건에서 보듯이 애정의 편향이 심하여 그 것을 정치쟁점화 시켜 당쟁 을 격화시키는 흠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의 통치 전반을 평가해 볼 때 왕권 강화를 위해 고의적으로 반복하던 환국정 치의 일면으로 해석 될수있다. 그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 권을 교체하면서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 급부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 했다. 숙종은 용사축척권을(왕이 정계를 대개편 하는 권한)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했다. 붕당의 한계성 은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시 몰락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점 을 적절히 이용하여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고 나인출신 희빈 장씨와 무수리 출신의 숙빈최씨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 제20대왕 : 경종(1688-1724년. 재위 : 1720년 6월-1724년8월. 집권 4년2개월. 37세일기.) 경종은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희빈장씨 소생이다. 이름은 균이었다. 왕자 균은 생후2개월이 될무 렵 숙종의 정비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원자 정호를 받았으며 3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부당 하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서인 노론측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일만에 왕자 균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 를 빈으로 격상시켰다. 이에 송시열의 반대 상소가 올라오자 숙종은 이미 종묘사직에 고하여 원자로 확정했는데도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지적하며 심하게 분노했다. 이 때문 에 송시열이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 균은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경종은 왕궁의 법도에 따라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없었다.
이에 당시 집권당 이었던 노론측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세제책봉이 거의확실 했지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는 왕위를 탐하고 있지 않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연잉군 나름의 자구책 이었을 것이다. 선뜻 왕세제 자리를 욕심내게 된다면 그것은 왕위 를 넘보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경종 시대는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권 다툼으로 조정이 항상 피바람에 휩싸였 고 이 때문에 경종은 재위 4년간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경종은 재위4년2개월 만에 37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슬하에 자녀는 두지 못했다. 노.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 마져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 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 정국을 열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탕평 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는 데 그 대표 적인 사건이「사도세자사건」이다.
남인,소론,소북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세력과 그들 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김씨,수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사이를 벌여 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 하였으며 이 때문 에 세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 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을 하였다. 1762년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세자를 제게 할 기회를 노리 고 있던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담은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또 계비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 인 홍계희,윤급,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 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8일만에 굶어 죽게 하였다. 세자나이는 28세였다.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思悼 라는 시호를 내리고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행한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는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던 서원, 사우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켰으며, 1772년에는 과거 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경제 정책에서는 균역법을 시행하고,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 하도록 해 탈세를 방지했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 이 고구마를 가져와 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숱한 당쟁에 휘말리며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슬기롭게 극복 하고 정국을 탕평책으로 주도하면서 각 방면 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하였으며 1776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선 27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 위에 있었으며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 제22대왕 : 정조(1752-1800년. 재위:1776.3월-1800.6월. 집권 24년 3개월. 49세일기).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빈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 로 입적되어 제왕수업에 들어갔다.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다. 이후 1775년 82세의 연로 한 영조 가 대리청정을 시켰고 이듬해 영조가 죽자 그는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다. 정조는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야 했고 이 기간 동안「홍국영」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 갔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살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 하는 한편,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해 친위세력을 형성 해 나가기 시작했다.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 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팔도의 장첩,묘염, 전랑 직의 인사권을 모두 총괄하였고,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 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 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 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 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지 얼마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 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다.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 되었다. 정조시대는 양반,중인 ,서얼,평민 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부흥기였다. 그러한 문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 제23대왕 : 순조(1790-1834. 재위: 1800-1834년. 집권 34년.) 정조가 죽자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 정하게 되었다. 그는 순조1년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위해「오가작통법」 을 썼다.정순왕후는 근 5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앉은 뒤 1년만에 죽는데 벽파의 기둥이었 던 그가 죽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는다. 1802년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들인다. 이때 부터 영안 부 원군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간 이어진다. 순조 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 에게로 넘으가고 ,철 종 대에 와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 정권의 특징 이라면 당쟁시대와는 달리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 배제시켜 버리는 세도 정권의 전횡을 가능 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사회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 한 수탈과 민생의 피폐가 나타 났다. 농민들의 불만은 순조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비롯,19세기 중협이후 전국적인 민란으로 폭발 했다. 이러한 민란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 한편 그에 불만을 품고있던 조대비와 흥선대원 군의 밀약으로 고종의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의 막을 내리게 한다. ■ 제24대왕 : 헌종(1827-1849. 재위:1834-1849. 집권 14년7개월. 23세일기)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 이다.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하다가 헌종이 15세가 되던 해인 1841년 에야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된다. 수렴청정이 끝나자, 안동 김씨의 세력이 다소위축 되면서 풍양조씨의 세력이 우세해 진다. 조대비의 부친인 조만영은 어영대장,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세도를 확립한다. 그 후 5,6년 동안은 풍양조씨 일문이 현달 하드니 일문의 내부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 일문으로 넘어간다.
헌종 대에 정권을 잡아 안동 김씨를 견제한 풍양조씨 일문은 정치 혁신 대신에 안동 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하여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 시켰 다.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물론이요,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다. 헌종 대에는 사회가 불 안하고 민심이 이반되는 틈을 타서 모반사건 이 일어나는데, 헌종 2년에 있었던 남응준의 모반과 헌종 10년에 있었던 민진용의 옥이 그것이다.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이나 몰락한 양반이 일으킨 두 모반 사건은 당시의 상황이 누구나 왕권을 넘볼 만큼 왕권이나 정치권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는 반 증 이기도 하다. 헌종 12년 5월에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 다는 죄목으로 7월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다. 헌종은 재위 기간동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일문의 권력 투쟁에 휘말리다가 적절한 민생 안정책도 세우지 못한 채 23세의 짧은 생을 마감 하게 된다.또한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정치력의 부족으로 적절하게 대응하거 나 대비 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헌종은 두 명의 아내를 두었으나 1849년 6월6일 창덕궁에서 후사없이 죽었다. ■ 제25대왕 : 철종(1831-1863년.재위:1849-1863년. 집권 14년6개월.33세일기.) 농부에서 제왕이 된 강화도령 원범이 철종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 의 손자이다. 1844년 헌종10년에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철종의 아버지)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능 지처참을 당 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여기에 연루되어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 아들 원경이 사사 되고 둘째아들 경응과 셋째아들 원범은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리하여 천애 고아가 된 두 사람은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 기 원범에게 왕통을 이으라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가 바로 철종이며 그 때 그의 나이 19세였으며 학 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 였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헌종의 6촌 이내에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849년 왕위 즉위식을 올렸고 나이가 어리고 학문을 연마한 바없다는 이유로 1851년까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21세 되던 1851년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게 되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나 정치의 실권 은 여전히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1851년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은 철종을 보필한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국사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의 조카인 김병학이 대제학을 맡 고 김병국이 훈련대장 김병기가 좌찬성을 차지함으로써 조정을 장악한다. 안동김씨 일문은 왕족 중 에서도 나중에 왕위에 올라 자신들 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자가 있으면 미리 처단하기에 서슴치 않았다. 대원군의 형 이하전의 죽음이 그 예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당시 철종은 이미 세도가의 첩자 등이 온 궁중에 퍼져 있었을 것으로 믿었고, 자칫하면 임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감지하 고 있었다. 철종은 이렇듯 계속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에 대항할 방법이 없자, 자연히 국사를 등한시하고 술과 궁녀들을 가까이 했다.
이렇게 되자 본래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1863년 재위 14년만에 33 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혈육으로는 숙의범씨 소생의 영혜옹주 하나있음. 이렇듯 왕권을 배제 시킨 세도정권은 정치적 견제없는 조건 하에서 삼정문란으로 나타나는 수탈정책의 극에 달함. 모든 법도가 안동 김씨에 의해 좌우되고 뇌물이 성행함은 물론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 매직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을 착취하여 그것을 벌충 하였고 이같은 수령의 부정에 편승한 아전들의 횡포 또한 백성 들의 고혈을 짜는 것이었다. 고종은 1852년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2세임. 위 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 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고종이 즉위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 을 그에게 위임 시켰다. 이로써 대원군은 고종을 대신하여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지고 자신의 의지 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그는 우선 쇠락한 왕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 오는 외 세에 대적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한다. 우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재정을 충당했다.
화 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토록 했다. 한편「대전회통」「 육전조례」「양전편고」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 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었다.하지만 한편으로는 몇 가지 무리한 정책과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못한 채 지나친 쇄국 정책을 폄 으로써 어려움에 처하기도 한다.
12세 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이 어느새 20세를 넘겨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었으며, 1866년에 입궁한 민씨가 노대신들과 유림을[최익현의 상소] 앞세워 대원군 하야 공세를 벌렸다. 그래서 마침내 1873년 고종이 서무를 친히 결재하겠다는 명을 내리고 통치대권을 장악 하게 되자 대원군은 정계 일선 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왕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했다. 병인양요-1766년. 신미양요-1771년 3개항을 개항하도록 규정하는등 우리나라만이 갖는 일방적인 조약 이었다.운양호 사건으로 맺어짐. 별기군의 설치로 민씨일파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군졸들의 불평이 폭발하여 발생한 난으로 군졸 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민겸호 등 민씨 일파를 죽였다. 대원군은 왕명을 위임받아 난을 수습하고 재집권 하였다. 이때 그는 명성왕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다시 정국을 주도하려 했지만 명성 왕후의 요청 으로 원세개가 이끄는 청국군이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반전되어 청국으로 연행되는 신세 가 되고 말았다.그는 청에 연행되어 3년 동안 중국 바오딩에서 유수생활을 해야 했다. 임오군란으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이 맺어지고 이 조약으로 일본 경비군의 조선 내 주둔이 실현되어 그 세력 기반을 굳혔다. 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일본의 힘을 빌어 우정국 낙성식에서 일으킨 정변으로 신정부는 청나라 의 간섭 으로 3일만에 실패하고 김옥균.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도화선되어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혁명이다. 혁명은 확대되어 봉건사회의 압박에 대한 농민 운동으로 변하여 기세가 걷잡을 수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과 민씨세력들은 청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그들간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진주 한 청.일 양 국군은 돌아가지 않고 일본이 청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 하자고 제의 하였지만 청은 이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단독으로 조성의 내정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 에 주둔한 청 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청.일전쟁 은 두 달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문물제도를 근대적인 방식에 의해 실시한 개혁이다. 군국기무처를 설치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일본이 바라는 것과는 달리 소신대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자, 은퇴를 강요당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개혁을 단행한다. 계급 의 타파. 노예해방. 조혼금지. 신교육실시 등 이다. 사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간섭을 더욱 강화하고 승리의 대가로 받은 요동 반도를 러시 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다.이같은 정세 를 감지한 조정은 배일 친러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 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친일세력으로 하여금 조 정을 장악하게 한다. 어 서의 일본의 특권을 승인케한후 이토 히로부미는 강압적으로 이 조약을 체결케 하여 한.일 합방의 기초 를 이루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주권을 잃고 외교권을 박탈 당했으며 일본은 서울에 통감 부를 두고 보호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착취와 탄압에 시달리게 되자, 고종은 1907년 6월에 네들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를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상황을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준.이위종.이상설) ■ 제27대왕 : 순종(1874-1926년. 재위:1907년3월-1910년. 집권 3년 53세일기.)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이후 일본은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고 순종을 등극 케 한다. 이후 순종은 일본 의 탄압에 밀려 별다른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군대를 해산 당하고 사법권을 강탈당하는 등 숱한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일본은 친일세력 이완용,송병준,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매국단 체인 일진회 를 앞세워 조선인이 원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이합병 한다는 논리로 1910년 한일합방조 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케 했다. 순종은 황제의 위치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머물렀다. 일본은 그를 이 왕이라 불렀고 왕에 해당 하는 대우를 해주면서 왕위의 허호는 세습되도록 조처했다. 순종은 폐위된 후 16년 동안 창덕 궁에서 머물다가 1926년 4월25일 53세 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두 명의 황후를 맞이했 으나 슬하 에 자식은 없었다. 이로써 조선은 27왕조 519년 역사의 막을 내린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일을 맞이하여 6.10만세운동이 일어난다.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