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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네폴라 구나라타나 큰 스님 특별법문
주제 : 『IMPERMANENCE』 (무상)
제가 얘기할 주제는 ‘무상’입니다. 저는 ‘쉬운 영어로 쓴 무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무상은 그 자체로 매우 확실하고, 분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 우리 주변의 모든 것, 우주의 모든 것이 영원히 무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이를 매우 명확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담마에 대해 숙고해보면, 담마에는 6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잘 설해진’, ‘직접 볼 수 있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 ‘와서 보라고 권유할 만한’, ‘가까이 두고 실천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각자 알고 누리는 자유’라는 특성입니다. 저는 이 중에서 한가지 특성을 고르고자 합니다. 그것은 ‘와서 보라.(come and see)’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장 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초대장을 받는다면, 다음과 같은 3가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1. 누가 초대장을 보냈는가?
2. 어디로 가야 하는가?
3. 무엇을 보라고 하는 것인가?
이 경우,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게 됩니다.
1.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2. 어디로도 갈 곳이 없다.
3. 볼 것이 없다.
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세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었다면, 당신은 이러한 초대장이 매우 비정상적인 초대이며, 비정상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것을 주의깊게 알아차리며 살펴본다면, 이러한 3가지 질문과 대답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이러한 초대장을 부처님께서 보내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초대장을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이 초대장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은 통찰로의 초대입니다. 지금 현재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초대입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진정으로 주시한다면, 당신 안의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한가지 예로 호흡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루에 2천번 정도의 호흡을 합니다. 이렇게 많은 호흡이 필요한 이유는, 호흡 그 자체가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호흡을 통해 우리 몸에 필요한 산소를 흡수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호흡은 우리의 생에 걸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계속 일어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수행을 통해 지혜를 기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이 변하고, 우리의 느낌, 지각, 생각, 의식도 항상 변합니다. 이어지는 두 순간에도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이 항상 무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 현재 이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소리를 들을 때에도, 소리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이것은 소리가 항상한 것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호흡도 항상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항상 변하고 있습니다.
20~30년간 저를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저를 만나러 와서 “스님,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최근에 의사 선생님을 만나 뵈셨나요?”라고 묻곤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스님께서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는 같은 질문을 하진 않았습니다만, 질문하는 그 역시도 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희끗해지고, 숯이 적어진 머리, 주름진 피부, 약해진 시각, 청각, 후각, 식욕 부진, 거동의 불편함, 불면증 등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안의 변화, 즉, 무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가 ‘장애’라고 불리는 것에 의해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가지 층의 번뇌들이 있는데, 우리의 시야, 지혜, 이해를 가로막는 첫번째 층을 ‘장애’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바로 탐욕, 성냄, 들뜸과 후회, 나태와 혼침, 의심입니다. 이러한 장애는 우리가 집중명상을 수행하더라도, 끊임없이 다시 올라옵니다. 장애를 일시적으로 극복했음에도 다시 올라오는 이유는 그 아래에 ‘족쇄’라고 불리는 또 다른 번뇌의 층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땅 아래 뿌리내린 식물을 가정해봅시다. 우리가 식물을 자르더라도 이내 다시 자라납니다. 왜냐하면, 뿌리가 땅 밑에 연결되어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살아있는 한, 식물은 계속 자랍니다.
맥주, 위스키 같은 양주를 땅에 오래 묻어두면 발효로 농축되어, 이것을 마시면 당신은 나가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사와(āsava)라고 불리는 아주 작은 번뇌라도 남아있으면, 우리 마음 속에서 생에서 생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강해지고, 눈덩이처럼 불어나 계속 증장됩니다. 번뇌는 의식 아래에서 지속되는데, 아누사야(anusaya)라고 불리는 이러한 ‘번뇌의 잠재성향’이 우리의 무상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습니다. 우리에게 무상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지만, 이러한 번뇌 층의 힘으로 인해 무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무상은 책이나 외부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실재입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저를 만나면서도, 항상 관심이 외부로 향해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영역인 몸, 느낌, 마음, 그리고 마음의 대상에 항상 관심을 기울이도록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4가지 알아차림의 토대’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4가지 알아차림에 대해 21번이나 반복하여 경전에서 설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의 몸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 몸의 내부와 외부가 항상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몸에서 몸의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과 사리짐을 알아차리도록 가르치셨습니다.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도 몸을 알아차리는 한가지 방법입니다. 호흡은 부푸는 성질, 꺼지는 성질, 부풀고 꺼지는 성질을 지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푸는 성질과 꺼지는 성질을 언급하신 뒤에, 왜 다시 부풀고 꺼지는 성질을 언급하셨을까요? 우리는 숨을 들이쉴 때, 호흡이 들어오고 사라지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숨을 내쉴 때, 호흡이 나가고 사라지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호흡이 부풀고 꺼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부풀 때 부푸는 것을, 꺼질 때 꺼지는 것을, 사라질 때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호흡은 매우 작은 공기입자들의 집합이며, 이 작은 공기입자들도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러 위빠리나마(viparināma 변화, 괴壞)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호흡에서의 마지막 변화까지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풀고 꺼지는 성질을 다시 한번 언급하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와서 보라’ 라는 이러한 무상의 가르침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하고 이에 대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의 경험을 전체적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난다고 미루어 아는 추론적 지혜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우리의 몸, 느낌, 지각, 생각, 의식, 접촉은 모두 변해가고 있으며, 더군다나 모든 것이 항상 동시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고, 타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오한 비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신분, 인종, 계좌잔고, 가문 등 외부적인 것들로 자신과 남을 비교합니다. 하지만, 명상에 있어서는, 특히 무상을 보기 시작하면, 자신과 다른 이들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과 타인의 몸, 느낌, 인식, 생각, 의식, 접촉 등 모든 것이 변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형성된 것들(行, 유의법)”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성질입니다. 빨리어로는 ‘상카라(saṅkhāra)’라고 합니다. 상카라는 미리 조건 지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상카라의 3가지 특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남을 볼 수 있고, 사라짐을 볼 수 있고, 일어남과 사라짐 사이의 인과를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요소는 무상합니다. 따라서,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도 무상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변화하는 상카라를 주시하고, 알아차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담마에 대한 5가지 쟁점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비유를 상윳따 니까야에서 설하셨습니다. ‘메추라기와 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매 한 마리가 들판에 있는 메추라기를 채어갔습니다. 메추라기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메추라기] “우리는 너무 불행하고, 운도 없는 날이구나!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영역에 머물렀다면, 이 매는 나와 싸울 기회도 얻지 못했을 텐데.”
[매] “메추라기여, 그대 선조의 영역은 어디인가?”
[메추라기] “흙더미로 덮여있는 잘 쟁기질된 저 들판이라오.”
그러자, 매는 자신의 힘을 확신하지만, 자신의 힘을 자랑하지는 않으면서, 메추라기를 놓아 주었습니다.
[매] “가거라. 메추라기여, 그러나 거기에서도 그대는 나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날 매가 찾아와 메추라기를 덮쳤습니다. 그러나, 메추라기는 흙더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매는 메추라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에 빗대어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선조들의 영역에서 거닐라. 그러면, 마라는 그대를 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선조의 영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네 가지 알아차림을 확립하면 번뇌인 마라가 그대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알아차림을 수행할 때 번뇌가 우리를 침범하지 못 합니다.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하여는 주위를 외부로 돌리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 즉 와서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매우 절묘한 비유로도 가르치셨습니다.
“볼 때는 오직 본다는 것을 알기만 하고, 들을 때는 오직 듣는 것을 알기만 하고, 맛볼 때는 오직 맛보는 것을 알기만 하고, 냄새를 맡을 때는 오직 냄새를 맡는 것을 알기만 하고, 닿을 때는 오직 닿는 것을 알기만 해야 한다.”
이것의 깊은 의미는, 들을 때에는 듣는 것 외의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100%의 주의를 당신이 듣고 있는 순간에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소리를 들을 때, 소리의 파동을 느끼고, 이해하고,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소리는 견고하다고 여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사실은 매우 작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무상한 대상입니다. 이것은 변화하며, 새로운 것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빠르게 진행됩니다. 이것을 일러 산따띠 흐름(santati ghana 연속체)이라고 합니다. 끊임없는 흐름이 견고한 듯 보이지만, 사실 견고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매우 작고 미세한 4가지 요소(四大)-땅, 물, 불, 바람-로 이루어진 은유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그 순간에 주의를 기울여 알아차리도록 설하셨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무상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무상은 미세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거시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거시적인 수준에서 무상을 이해할지라도, 미세한 수준에서 무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차림으로 계발해야만 합니다.
이것으로 저의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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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두사두사두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