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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떠난 고향집에 40년 만에 돌아온 유용주 작가. 옛 집터에 새로 지은 조립식 주택을 배경으로, 어릴 적과 다름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감나무를 쳐다보며 감회에 젖어 있다. 장수/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유용주의 장수 고향집
14살 중국집 배달부로 떠난 뒤
40년 떠돌다 돌아온 고향
가난한 유년은 아프지 않지만
부모 떠나고 형제는 흩어져
나의 오욕칠정, 희로애락
모든 작품이 시작된 곳에서
마지막을 보내야죠
문학과 정면승부 해봐야죠
먼바다를 떠돌던 연어가 제 태어난 모천으로 회귀하듯 유용주는 작년 5월 고향 전북 장수로 돌아왔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입 하나 줄이자는 비원(悲願)에 떠밀리다시피 중국음식점에 취직했던 때로부터 딱 40년 만이었다.
“아버지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부엉새는 울지 않았어/ 풍양빵 두 개를 들고/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도착한 곳은/ 이름도 그럴듯한 중국집 명월각/ 키가 크는 게 소원이었어/ 저놈의 자전거를 언제나 탈 수 있을까/ 섣달그믐의 칼바람 속/ 언 손은 더욱 얼어 갈라 터지고/ 중학교 당직실은 별보다 멀리 있었어/ 그 별을 바라보면서 울고 있을 어머니보다/ 배가 너무 고파왔어/ 당직교사가 먹다 남긴 짜장면을/ 농협창고 뒤에서 숨어 먹으며/ 어서 키가 커야지/ 자전거만 탈 수 있다면/ 초등학교도 농협도 읍사무소도/ 씽씽 페달을 밟고/ 빨리 배달할 수 있을 텐데/ 월급도 삼천 원쯤 올라갈 수 있을 텐데”(유용주 시 <조성에서 자전거타기> 부분)
창도 전깃불도 없는 집에 이삿짐을 풀다
그가 돌아온 곳은 40년 전 떠났던 바로 그 고향 집 자리다. 떠나올 때 단칸 초가였던 집이 방 하나에 거실 하나인 조립식 경량철골주택으로 바뀌었을 뿐. 장수를 떠난 그가 명월각이 있던 보성을 거쳐 대전, 서울, 양평, 서산 등지로 떠도는 사이 한우자금을 얻어 소를 키우던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고 돌아가시자 집과 전답은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갔다. 1984년이었다. 4남1녀 중 셋째아들이었고, 열 살 차이 나는 막둥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 자신 막내 노릇을 했던 유용주가 막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몇 해 뒤에 가까스로 집터를 되찾았다. 그러고도 곧바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시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지난해 5월 짐을 싸서 내려왔다. 그사이 가족들이 살던 집은 허물어져 없어지고 그 자리는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용주는 우선 마을회관에서 기거하면서 밭을 갈아엎어 터를 다지고 석축을 쌓아서는 집을 앉혔다.
조립식 주택이었던 만큼 뼈대를 세우기까지는 신속했다. 지난해 장마 무렵에 벌써 골조가 완성되었고, 유용주는 유리창도 달지 않은 집에 장판부터 깔고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온 첫날 그는 스티로폼 패널 위에 먹던 반찬을 진설하고 소주 한잔 부어 놓고는 부모님께 인사부터 고했다. ‘셋째가 드디어 고향 집을 되찾았습니다.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날, 전기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아 깜깜한 밤에 반딧불이 한마리가 집터를 도는 게 보였다. 늦반딧불이였다. 그 모습이 흡사 순시를 도는 듯했다. ‘어머니의 영혼이 아닐까.’ 혹시나 싶어 두 손을 벌리고 가만 있었더니, 신기하게도 반딧불이가 그 손에 앉아서 한참을 머물다 떠나갔다.
노동자 출신 시인이자 소설가인 유용주의 고향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 교동리, 속칭 다릿골이다. 장수에서 남원 방면으로 19번 국도를 달리다가 수분령 고개를 넘자마자 오른쪽으로 나타나는 첫 번째 마을이다. 수분령(水分嶺)은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한 물이 북쪽으로 흐르면 금강이 되고 남쪽으로 향하면 섬진강이 된다고 해서 이름붙여진 고개. 사진작가 강운구의 1970년대 ‘수분리 연작’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강운구가 수분리 일대를 카메라에 담을 무렵 유용주는 고개 너머 수분국민학교를 다녔다. 지금 그 학교는 폐교되었고, 그 자리에는 문학관 건물로 맞춤하다 싶은 뜬봉샘생태학교가 들어섰다.
“신무산(神舞山) 자락이, 유용주의 강보였다. 별이 뜨기 시작하면, 이 산의 신들은,(…) 토끼며 노루, 호랑이며 반달곰, 참나무며 소나무, 재나무며 느릅나무 들이라는 유정(有情)의 기호들을 벗어, 신단수(神檀樹) 가지에 걸어 놓고, 이 나무를 둘러 돌며, 춤추고 노래하여 잔치하는 것을, 유용주는, 그들 가운데서 보고 듣고 자랐다. 그러는 새 그도, 그들의 춤을 익히고, 그들의 노래를 배웠는데, 그의 운문적 정신은, 그렇게 살을 입었다. 별이 지기 시작하면,(…) 이 신들도, 벗어 뒀던 의상들을 다시 걸쳐 입고 들로 나가는데, 유용주는, 그들의 그 들에서의 고통과 슬픔을 또한 초롱히 지켜보았으며, 함께 고통하고 슬퍼했더니, 그것이 그의 산문적 정신의 뼈를 만든 것이었다.”
장수 출신 선배 작가 박상륭이 유용주의 두 번째 소설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 보고>에 쓴 발문은 신무산을 중심으로 한 장수의 자연과 문화가 유용주 문학의 뼈와 살을 이룬 내력을 특유의 만연체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용주 자신 한 산문에서 여름 소나기 때 하늘에서 우박처럼 쏟아지는 물고기며 산 위를 날아가는 거대한 산갈치, 동그란 귀가 달린 청사·홍사·백사, 그리고 호랑이와 흑곰 같은 어릴 적 고향의 신화적 동물들에 관해 열을 내어 말한 다음 이렇게 쓴다. “40년 동안 세상 밑바닥을 살아오면서 단 하루도 고향을 잊은 적 없다. 내 모든 작품은 장수에서 나왔다. 내 모든 희로애락 오욕칠정은 모두 고향 땅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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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주 작가는 거실 바닥 소박하게 쌓인 책 앞에 앉아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정아 기자 |
서산에서 귀향한 이유는… 개소리 때문!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장수가 정작 유용주의 출생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1959년 5월10일, 그가 세상 빛을 처음 본 곳은 사실 부산이었고, 장수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였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처음 세상 구경을 한 곳,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할 정도로 속을 썩이면서 어긋나게 성장한 내가 태연하게 장례를 치르고 당감동 시립화장터에서 어머니를 화장한 뒤 산에다 뿌리면서 마지막으로 어머니 뼛가루를 몸에 바른 곳도 부산이었다.”(유용주 소설 <마린을 찾아서>에서)
부산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누나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던 유용주가 아버지의 고향 장수로 올라온 것은 여섯 살 때였다. 그러니까 태를 묻은 부산에서 여섯 해를 살던 어린 유용주는 어느 날 갑자기 장수로 뿌리를 옮겨 와서 낯선 전라도 말을 귀와 입에 익히다가는 다시 여덟 해 만에 고향에서도 떨려난 것이다. 그것은 또한 빵공장 심부름꾼과 금은방 세공, 술집 웨이터, 우유 배달, 목수 등 갖은 직업으로 점철될 ‘노동자 유용주’의 출발이기도 했다.
“가난에 허덕이던 유년기였지만, 고향은 저에게 언제나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주식 삼아 먹어야 했던 보리밥이나 수제비를 대하면 지겹다는 생각보다는 그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에 사로잡히곤 하죠.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객지로 떠돌 땐 전주에만 들어서도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먹먹한 느낌이 들곤 했어요.”
고향 장수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가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충남 서산이었다. 교사인 부인의 근무지가 그곳이었고, 한때는 문우인 소설가 한창훈과 같은 아파트 아래위층에서 지내기도 했다. 20년 넘게 살면서 거의 고향처럼 여겼던 서산을 떠나온 계기 중의 하나는, 우습지만, 개였다. 이웃집 개들이 밤이고 낮이고 그악스럽게 짖어대는 소리는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개 주인과 언쟁을 벌이고 몸싸움도 불사했지만,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서산에서 쓸 만한 글은 다 썼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고향 장수였다. 마침 외동딸도 서울의 대학에 진학한 터라 운신이 자유로웠다. 결심이 섰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 고향으로 가자!’
“40년 만에/ 반백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더니// 눈이 침침한 동네 어르신들/ 몰라보신다// 여수떡 아들이라고/ 셋째라고 귀에다 고함을 지르자/ 끄덕끄덕 하신다// 그려, 여수떡, 사람 참 좋았는디…// 이 풍신도 아들이라고/ 떡두꺼비 낳았다고/ 중흥 바닷가 외할매가 보내준 미역,/ 국 끓여 드셨겠지/ 땀 훔치며 드셨겠지”(유용주 시 <여수떡> 전문)
여수 출신이라서 ‘여수떡(댁)’이라 불렸던 어머니는 행려병자처럼 타지를 떠돌다 행방불명된 둘째아들이 혹시라도 고향 집을 찾아올까 봐 마을 사람들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아들 오면 밥 좀 해 주소.” 서른 살 즈음이던 1985년에 행방불명이 된 둘째형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건달이었던 큰형은 부친과의 불화로 그 전에 이미 호적을 파서 나갔다. 셋째인 유용주가 졸지에 장남 노릇을 하게 된 저간의 사정이다.
먼 길을 돌아 고향에 돌아온 유용주는 우선 나무를 심었다. 마당 둘레와 석축 사이사이, 그리고 진입로와 이웃 밭을 가리지 않고 100여 주를 심었다. ‘실수 많이 하는 유가’를 자처하는 그가 주로 심은 것은 호두며 대추, 밤, 감, 모과, 복숭아, 은행 등 유실수였다. 꽃사과, 자목련, 백목련, 수국 같은 꽃나무들도 몇 그루 심었다. 서산 집에서 캐 온 매발톱과 바위취도 마당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석축 사이에는 영산홍과 철쭉도 심을 예정이다. ‘유실수’ 씨가 말한다. “나무는 워낙 당대를 보고 심는 게 아니라 후손들을 위해 심는 거랍니다. 제가 세상에 잘못한 것도 많고 빚진 것도 많으니 힘 닿는 대로 나무라도 많이 심어서 세상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요.” ‘소극적 채식주의자’라는 그는 보통은 텃밭에 심은 상추며 치커리, 쑥갓 같은 채소, 그리고 주변 산자락에서 뜯은 산나물을 두어 가지 김치와 함께 비벼 먹는 것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맨 마지막에 가라앉을 ‘콩가루집안 이야기’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인데다 나이가 들수록 아침잠이 없어져서인지 아무리 늦게 잠든 날이라도 새벽 네 시, 또는 늦어도 다섯 시 전에는 눈이 뜨인다. 차를 몰고 동네를 빠져나가서는 수분령에 받쳐 놓고 장수읍내 체육관까지 걸어서 간다. 산길은 12킬로미터, 강을 따라 가면 7~8킬로미터 거리다. 아침 7시를 전후해 체육관에 도착해서는 수영과 헬스를 충분히 한 다음 군내 버스를 타고 수분령에서 차를 챙겨 돌아오면 10시30분 정도. 집에 도착해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도 오전 11시를 넘지 않는다. 부족한 밤잠을 벌충하느라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나면 때맞춰 우편으로 <한겨레>가 도착한다. 텔레비전을 없앤 대신 그는 신문은 1면부터 마지막 광고면까지 샅샅이 훑어본다. 신문과 함께 도착한 책과 잡지, 또는 부인이 서산에서 챙겨다 준 책들을 읽으며 오후 시간을 소일한다. 다섯시에서 여섯시 사이에 이른 저녁을 챙겨 먹고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밤 10~11시. 몹시 배가 고파 오면서 술도 당기기 시작한다. 갈등하다가 ‘소주 한 병만 먹자’고 스스로를 달랜다. 그렇지만 한 병만 마시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은 두 병, 많을 땐 네 병까지도 마신다. 물론 독작이다. 안주는 고구마나 땅콩. 두 병 이상 마시면 여기저기 보고 싶은 사람들한테 전화를 돌리는 버릇이 있다.
“길에서 일하다가 제 성질 못 이겨서 객사했을 수도 있는데, 어쩌다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그 모진 세월 지나서 고향까지 거슬러 올라왔네요. 가족과 친지, 문단 동료 등 여러 분들의 도움 덕분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문학과 정면 승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피할 데가 없는 거죠. 비장하게 말하자면 여기가 바로 제가 죽을 자리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앞으로 20년 정도 최선을 다해 쓰고 싶어요.”
장수에 내려온 1년 동안 시는 30편 가까이를 썼다. 지난 7년 동안 쓴 것보다 많은 숫자다. 소설은 우선 계간 <문학바다>에 한 회를 연재하다 중단한 연작장편 ‘맨 마지막에 가라앉는 것들’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그가 스스로 ‘콩가루 집안’이라 표현하는 형제들 이야기다. 나아가, 고향 장수의 자연과 사람들에 대해서도 쓸 계획이다. “박상륭 선생이 알맹이는 다 빼먹고 남은 건 쭉정이일 뿐”이라고는 해도 “작가는 자신의 고향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 보고>에도 조금 그렸지만, 여태까지는 참 잘 못 살았지요. 그렇지만 어느새 저승꽃(=흰머리)이 이렇게 많이 도착했는데, 이제는 좀 잘 살아 봐야 하지 않겠어요? 제가 롤모델로 삼고 싶은 권정생 선생이나 니어링 부부처럼 소박하면서도 진실된 삶을 말이에요. 그렇게 잘 살다 보면 덩달아 좋은 작품도 나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