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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92
3월7일 [사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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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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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blLY7uN4pg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65557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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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
젊은 형제들이 떠나간 공동체다 보니, 나름 여기저기 청소한다고 하지만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참 많습니다. 제일 우선적으로 신경 써야할 성전인데, 어느 날 청소가 너무 소홀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랜만에 성전 창문을 활짝 열고 바닥을 쓸고 닦으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노기 띤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큰 충격을 받으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습니다. 성전 안팎은 수많은 환전상들과 소나 양, 비둘기파는 상인들이 즐비했고, 그들은 큰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좌판에서는 흥정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싸게 해드릴께요! 오늘 들어온 물건이라 싱싱합니다!”
짐승들은 울어대지, 악취는 진동하지, 경건하고 성스러워야 할 예루살렘 성전은 시장터를 방불케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은 순수했던 초심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상업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성전을 잠식해버렸습니다.
유다인들의 신앙에서 사랑은 사라지고 제사만 남았습니다. 마음, 영혼, 진심이 담긴 제물 봉헌이나 진지한 예배는 사라지고, 형식과 율법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속화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신 예수님께서 분노와 슬픔 가득한 얼굴로 성전 정화 작업을 실행하십니다.
동물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십니다.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 다른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거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마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복음 2장 16절, 19절)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과격한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당신 성전을 정화(淨化)시키십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떼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 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가 아닐까요?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이 시대 바람직한 의미의 성전 정화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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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dHi7-XEBa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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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이들은 행복하다: 눈물이 채찍이 될 때>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하는 ‘성전정화’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폭력을 쓰신 유일한 장면입니다. 사랑이 폭력이 되는 경우는 그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죽을 때입니다.
저도 예수님께 폭력을 당해본 적이 있는데 신학교에 들어와서입니다. 사제로 불러주신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왜 내가 이렇게나 많이 바쳤는데 나를 행복하게 해 주지 않으시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때 내 안에 모신 성체에서 울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너에게 다 주었다.”
나는 내가 가졌다고 착각한 것을 주님께 드린다고 또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분명히 ‘진리’였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채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채찍은 ‘은총’이었습니다. 은총이 제 안에 있는 장사꾼을 몰아내었습니다. 저는 제가 드리는 것으로 무언가 보답을 달라고 주님과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은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에게 생명을 내어주고 계셨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 채찍이 너무 따가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장사하던 마음은 채찍에 맞아 눈물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하게 하였습니다.
“주님, 당신께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나도 누군가를 위해 피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죽음을 통해 우리 마음의 성전을 정화하시고, 또 우리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정화하는 방법입니다. 눈물과 피는 채찍이 되어 누군가를 장사꾼의 소굴에서 성전으로 정화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때문에 저를 위해 흘리신 눈물로 제가 정화되는 것을 보시고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이기헌 주교의 『함께 울어주는 이』라는 책에는 오래 전 당신이 첫 본당에서 사목하시던 당시의 이런 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신부님이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오랫동안 성당을 비워야 했기에 특수 사목을 하는 동창 신부에게 본당을 맡기고 떠나있어야만 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걱정했던 자매 한 분이 그동안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자매에게는 두 아들과 남편이 있었는데, 자매님은 비신자인 남편이 어찌나 고집이 쎈지 그렇게 오랫동안 성당에 가자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속상해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주일미사에 나온 것입니다. 아내를 잃게 만든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할 텐데 성당에 나와 본당 신부에게 먼저 “저 예비자 교리반도 시작했습니다.”라며 인사하였습니다.
한편으로 ‘그렇게 완고하던 분이 어찌 된 일인가?’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동안 본당을 맡아준 동창 신부 덕분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그 자매를 방문해 봉성체도 해 주고, 병이 악화되자 정성을 다해 병자성사도 해 주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과 남편을 남겨두고 떠나는 자매님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그 신부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사제가 보여준 ‘눈물’이었습니다. 신부라면 늘 하는 일인데도, 자기 본당 신자도 아닌 사람과 그 가정의 슬픔을 마음으로 함께하며 자기 일처럼 눈물을 흘리는 신부가 정말 감사했고 큰 위로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주교님은 책에서 이 말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눈물로 씻겨진 영혼 안에서 위로를 받으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플 때 울지 않으면 몸이 대신 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한 스트레스가 건강을 망친다는 뜻일 것입니다. SBS 스페셜 92회, ‘신이 내린 묘약 – 눈물’(2007)에서는 왜 우는 사람이 행복한지에 대한 한 사례를 제시합니다.
서울 양천구의 김진성 씨.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40대 가장입니다. 군인 장교 출신인 그는 여러 번 사업이 실패해도, 아내와의 이혼 위기에서도, 혹독한 사춘기로 방황 하는 아들 앞에서도 절대로 울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아빠는 감정도 없는 냉혈한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그가 변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우는 모임’을 통해 스스로 마음속에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앞에서,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가정이 변하는 놀라운 경험을 체험했습니다. 상처받았던 아들과 아내의 마음이 아빠의 눈물로 녹아내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많이 우셨습니다. 그때 우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웃고 계십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울어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쉴 안식을 마련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피와 눈물로 성전을 마련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때에 내가 눈물로 재건한 성전이 나의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눈물은 자아의 피입니다. 자아는 나를 잡아먹는 뱀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죽으면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생명의 눈물이 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채찍이 되어 다른 영혼을 정화합니다. 내 영혼의 정화가 곧 다른 영혼의 정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고 나 때문에 정화된 사람은 나의 성전이 됩니다. 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의 안식처가 되어드리며 동시에 자신의 안식처를 눈물로 닦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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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계약’, 즉 ‘하느님과의 약속’과 ‘정화를 통한 해방과 자유’이다. 계약을 통하여 받은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과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를 위해 인간이 행하여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제1독서: 탈출 20,1-17: 우리는 모세에게 율법을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된 땅으로 갈 때,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주셨다. 이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신 분이시다 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십계명은 '자유'의 표현이며, '종살이'를 벗어났다는 보증이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신적인 '해방'과 '정화'를 끊임없이 요청하신다.
즉 처음의 세 계명으로 하느님께 달아들고, 나머지 일곱 계명으로 사랑과 존경으로써 형제들을 더욱 사랑하며, 보다 더 매순간순간 떨어질 수 있는 거짓된 우상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기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은 진정한 해방을 자유를 위한 것이다.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이나 율법주의 혹은 순전히 의미를 잃어버린 외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다.
복음: 요한 2,13-25: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성전정화의 의미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잘못을 바로 잡아 주시는 것이며,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전이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거룩한 곳이며,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곳으로, 그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며, 하느님 안에 진정한 자유를 느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타성적인 것으로 습관적인 것으로 변해버린 그 가치관을 바꾸어놓는 말씀이다. 즉 하느님의 현존과 또 그분과의 결정적 만남의 장소인 성전의 예식 기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그 결과 알맹이가 빠진 예식 자체가 천박해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옛 예식과 당신 자신을 교체해 놓으신다.
예수님의 이 격렬한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징표를 요구하는(18절) 유다인들에게 당신 자신이 새로운 성전임을 암시하신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19-21절) 이는 예수님의 기적을 두고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마태 12,24)며 예수께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징표를 요구하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몸을, 즉 사람들이 수난의 비극을 통해 짓밟은 당신을 하느님의 권능으로써 사흘 후에 부활시킬 당신의 몸을 징표로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징표는 당신 자신과 연결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분 자신과 동일시되는 징표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개심만 드러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표현하시기 위해 먼저 “내 아버지의 집”(16절)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들이 성실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메시아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나중에 가서야, 부활을 체험한 후에 깨달았다.(22절) 여기서 이 성전정화가 십자가와 수난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는 육화의 신비를 통해 이미 '성전'이 되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부활하심으로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다.
이제 이 성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느님의 현존 자체를 실현시킨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꿈’인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 영원히 실현되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은 우리도 그 성전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현존의 신비로 우리의 삶을 감싸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 자신의 정화가 필요하다.
제2독서: 1고린 1,22-25: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파스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시다. 구원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만이 구원을 주실 수 있으며, 그래서 십자가가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며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이 십자가는 십자가로서만 끝나지 않고 부활의 영광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이 십자가를 통해서 진정한 해방과 자유, 즉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하느님의 계명과, 십자가, 성전의 정화에 대한 것을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모두 우리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의 표시는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4,15; 15,14)
만일 우리의 신앙이 ‘성전’ 앞에만 머물러 있고 고통과 영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희생제물을 바쳐야 하는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착각 속에 빠져있는 신앙이다.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도 나타났듯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수난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해방되고 끊임없이 정화되어 그리스도라는 성전에 머물러 살기 위해서는 즉 구원을 차지하려면 주님께서 내려주신 계명을 잘 지키면서 나 자신이라고 하는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감으로써 '지성소'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나 자신이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성전이 되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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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성당을 찾았습니다. 머리는 복잡하고 책을 봐도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아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성당을 찾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청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앉아 제대 뒤에 걸려 있는 십자가만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요? 시계를 보니 네 시간이나 흘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고자 성당을 찾습니다. 때로는 위로받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성당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아니면 행복과 즐거움을 얻고자 성당을 찾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그런 곳입니다. 하느님을 만나 위로받고 평화를 얻으며,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바라고 청하고 두드리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가 성전만이 아닌 당신의 ‘몸’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체험하기 전의 제자들처럼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내어 주십니다. 빵으로, 포도주로 당신의 사랑과 희생을 그들에게 전해 주십니다. 바로 성체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성체가 바로 성전이며, 하느님과 만나는 곳이며,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 행복과 즐거움이 함께하는 곳입니다. 그 성체를 우리가 모십니다. 그 성체를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십니다. 우리 모두, 또 우리 각자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집이 됩니다. 여러분은 성체를 모시고 하느님의 집이 된 사람, 눈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만납니까? 그 사람의 목소리와 행동이 어쩌면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위로와 평화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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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을 정화하시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1) 예수님께서 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것은,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들과 소들을 몰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채찍을 휘두르신 것이 아닙니다.) ‘채찍’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셨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예수님께서는 가축들을 다루는 용도로 채찍을 사용하셨습니다. 어떻든 장사꾼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신 일이 과격하게 보이기는 합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그 일이 ‘열정’으로 보였지만, 장사꾼들은 부당한 압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 당시의 성전 광장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난장판’이었습니다. 그곳은 ‘거룩함’이나 ‘경건함’은 찾아볼 수 없는, ‘세속적인 무질서와 시끄러움’만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성전 ‘안’이 아니라 ‘밖’인데, 꼭 ‘거룩함’과 ‘경건함’을 지켜야 하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광장도 성역에 포함된 곳이니 당연히 ‘거룩함’과 ‘경건함’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봉사한다는 명분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짓을 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성전 광장이 아니라 세속의 길거리에서 장사를 한다고 해도, 하느님을 내세워서 장사를 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3)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라는 말은, 뜻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열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하느님만을 섬기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재물을 섬기는 자들’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시편 69장 10절인데, 시편 69장을 좀 더 읽어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송가로 그분을 칭송하리라. 이것이 주님께는 더 좋다네, 수소들보다 뿔 달리고 굽 갈라진 황소들보다. 가난한 이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하리라.”(시편 69,31-33ㄱ)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이기심과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바치는 물질적인 재물이 아니라, 성실하고 진실한 신앙생활과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치는 찬양과 찬미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하느님께 헛된 제물을 바치지 말고, 하느님께서 참으로 바라시는 것을 바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4) 무엇인가를 ‘파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사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사는’ 사람이 있으니까 ‘파는’ 사람이 모입니다.) 성전에서 제물 봉헌용 가축들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았던 것은, 또 아주 비싼 수수료를 떼고 환전을 해 주었던 것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싼 값에 산 가축들을 봉헌해야 제물로서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사고방식도, 즉 더 비싼 제물을 바치면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사고방식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파는’ 사람들과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5) 당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뒤에는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사제들은 장사꾼들과 한통속이 되어서 이익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성전을 난장판으로 만든 주범은 사실상 사제들이었고, 장사꾼들은 종범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사실은 사제들을 겨냥한 일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한 일은 돈을 받고서 하느님의 은총을 파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18-21)
여기서 유대인들의 질문은 “무슨 권한으로 장사꾼들을 쫓아내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을 보게 되면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나에게 권한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는 말씀은,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행하고 있는 낡은 예배와 제사를 폐지(중단)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예배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치 하느님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거저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싼 예물을 많이 바칠수록 은총을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형편이 안 되어서 남들처럼 예물을 바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은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에 “더 많이 바치면 더 많은 은총을 받는다.”라고 강조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백 퍼센트 사이비 종교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은 언제나 항상 ‘감사 예물’입니다. (이미 받은 은혜와 지금 받고 있는 은혜와 앞으로 받게 될 은혜에 대한 감사 예물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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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 8월부터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에서 서울교구에 사제파견을 요청하였고, 서울교구에서도 사제파견을 결정하였습니다. 중간에서 다리를 놓았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에서 원하는 서류가 있고, 서울교구에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실무자들이 서로 연락하도록 하니 쉽게 풀렸습니다. 서류가 준비되고, 비자가 나오면 서울교구에서 사제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교우들에게 서울교구에서 사제가 올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제가 올 때까지는 계속 미사를 도와드리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신부님이 오셔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도와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문득 세례자 요한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임시로 도와드리는 것이지만 서울교구에서 사제가 오면 정식으로 한인 공동체의 담당신부가 오는 것입니다. 저는 신문사의 일을 하면서 도와드리기에 한계가 있지만 담당신부가 오면 온전히 공동체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였던 말을 생각합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모든 신앙인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신앙인이 가야할 길을 전해줍니다. 그 길을 충실하게 가면 광야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을 가면 비록 지옥과 같은 고난의 길을 간다 할지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가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고,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길을 가면 슬픔은 기쁨으로 변하고, 오해는 이해로 변합니다. 그 길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 받았던 ‘십계명’입니다. 하느님만을 섬기고,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않으며,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죄를 짓지 말고, 간음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남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았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다시금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른다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밀알 하나가 떨어져서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살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물은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물은 생명의 물이어서 다시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눈먼 이는 눈을 떴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졌습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나 걸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신앙고백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약함이 무엇인지는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구원의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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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원일 안드레아 신부님]
<껍데기는 가라>
어느덧 사순 3주일입니다. 지난 재의 수요일,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 모두는 머리에 흰재를 받으며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창세기 3장 19절 참조)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던 관성에 젖어 이 말씀마저도 매년 듣고 지나가는 통과의례로 생각하며 그저 살던 대로 살아갑니다. 이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기어이 채찍을 휘두르십니다.
제발 말 좀 들으라고, 제발 네 생각대로 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의 생각을 먼저 좀 살피라고, 제발 네 뜻대로 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좀 헤아려 보라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어이 우리에게 채찍을 휘두르십니다.
성전은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을 앞세우는 곳이라고, 성전은 사람의 뜻을 드높이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드높이는 곳이라고, 성전은 사람의 판단을 내세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판단을 내세우는 곳이라고 우리에게 채찍을 휘두르십니다.
성전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내 뜻을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돋보이는 곳에서는 하느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요한 3,30) 합니다.
사순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기입니다. 단순히 내게 주어진 어떤 고통이나 고난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가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가 죽음으로써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알맹이(본질)에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성전의 화려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거룩한 것은 입(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손과 발입니다.
『껍데기는 가라』 는 1967년에 나온 『52인 시집』 에 수록된 신동엽 시인의 시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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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남경철 루도비코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즈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전례 분위기에 젖어들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변화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이 변화의 기점을 저는 컬러텔레비전의 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톨릭 전례는 상당히 시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례 시기마다 바뀌는 제의의 색깔만으로도 전례 시기의 분위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지만 컬러의 등장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더욱 자극적인 것에 우리의 눈길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순 시기처럼 예수님의 희생과 고통을 함께하려는 우리 신자들의 마음을 너무 쉽게 흔들리게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보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세상의 유혹에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됩니다. 주일날 미사 때만 사순 시기라는 사실을 깨닫지만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사순 시기는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요즈음은 보는 것 만이 아닌 의지로 무장해서 사순 시기를 지내야겠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인 탈출기의 말씀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느님은 당신을 따를 계명을 주십니다. 이 계명들을 잘 지키기기 위해서는 시각적인 즐거움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주위 민족들의 신들로부터 이런 유혹을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런 유혹을 물리쳐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세상 사람들은 물리적인, 즉 보이는 성전만을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성전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야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의지로 무장하며 사순 시기를 지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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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태균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신부님]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자리>
요한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인 ‘성전 정화’ 말씀을, 포도주가 다 떨어져 파장 분위기인 잔칫집에 예수님께서 물로써 좋은 포도주를 마련해주심으로써 새롭게 잔치를 이어갈 수 있게 하셨다는 ‘카나의 혼인 잔치’ 바로 뒷부분에 놓고서 복음 말씀을 풀어나갑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의 모습, 그 한 예로 복음사가는 당시의 성전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성전에서 하느님은 당신 자리에서 밀려나 있고, 율법과 제의규정에 따른 장사치들이 그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복음 16장 13절),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오 복음 9장 13절) 등의 성경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모두 쫓아버리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면 물이 포도주가 되는 복음 말씀처럼, 현실에서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채찍을 휘둘러서 과격하게 표현하실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 말씀을 몸으로 살아가시는데,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 인간들의 기준에는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고 성전에서 난동을 부리며 신성모독을 하는 자로 보일 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이 인간의 길에 방해가 되면 인간들은 하느님도 죽일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이 사순 시기에 꼭 필요한 정화작업입니다. 어떻든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체험을 통해서야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가능성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 몸인,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성전입니다.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건축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자리, 그곳이 바로 성전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도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일, 치열한 정화작업을 통해서 나 자신이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풍성한 생명의 잔치가 새롭게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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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3 주일입니다. 3월의 첫 주일입니다. 이제 봄이 오려나봅니다. 우리 영혼의 봄도 피어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멀지 않아 부활로 피어오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광야를 지나면서 살아가야 할 계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제2독서>는 십자가가 하느님의 힘과 지혜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지어지는 새 성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하느님, 저희 마음이 주님의 계명을 따르게 하시고, 저희가 십자가의 지혜로 죄에서 해방되어 주님 사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첫 번째로 하신 일이 바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또 환전상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요한 2,15)
거룩한 성전이 형식적 예배와 인간의 탐욕으로 부패되고,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 함은 곧 당신께서 처벌하시고 심판하시는 권한을 가지셨음을 나타내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통해서,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 주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요한 2,18) 하고,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무시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소.”(요한 2,19)
“새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새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먼저 당신의 몸이 허물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제, 성전의 숨겨진 신령한 의미가 드러나는 때가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하느님 현존의 가시적 상징이었던 성전을 파기하고 온전한 “새 성전”이 드러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이 세워질 참된 성전, “새 성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건물로써 신축될 ‘성전’이 아니라, <제2독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워질 “새 성전”, 곧 부활로 세워지는 참 성전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새로 탄생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로써, 성전의 3번째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곧 첫째는 ‘하느님이 현존’을 나타내는 장소로 하느님을 만나고 경배하는 곳이요, 둘째는 ‘예수님의 몸’은 하느님의 현존 그 자체로서, 하느님을 드러내는 동시에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음을 말하며, 셋째로는 예수님의 부활로 세례 받은 우리가 성령의 궁전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밝혀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1코린 3,16-17)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1코린 6,20),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교회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헌 성전”을 허물고 “새 성전”을 지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 말씀의 끈으로 만드신 “채찍”을 달게 받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편리와 이기를 채우기 위한 가축들과 돈을 쏟아버리고, 그릇된 마음의 “탁자”들을 뒤엎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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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 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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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2,16)
오늘 복음은 성전 정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는 '두 개의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보여지는 건물로써의 성전이고, 또 하나는 보여지지 않는 성령의 궁전인 몸의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십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데,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돈을 버는 장소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분노에 대해 유다인들이 불만을 드러냅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요한2,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몸의 성전인 마음의 밭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것들이 몸의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3b-24)
사순시기는 '청소하는 시기'입니다. 몸의 성전인 나의 마음의 밭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의 힘이시고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담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밭에 십계명의 본질인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더 담고', 이 두 사랑이 '더 하나가 되는 시기'입니다
모든 것이 흘러나오고, 나를 부활케 하는 힘이 샘솟는 나의 성전은 깨끗한지? 죄의 때로 더럽혀 있지는 않은지?
얼른 다시금 정신차리고, 마음의 밭을 깨끗하게 정화합시다! 그래서 다시 부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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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집>
요한 2,13-25 (성전을 정화하시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집다운
하느님의 집들이
하느님의 집들을 살린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쁘실까
하느님의 집답지 않은
하느님의 집들이
하느님의 집들을 짓밟는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아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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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 친구 신학생들과 외출 나갔다가 볼링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처음 가 본 볼링장에서의 체험은 놀랍고 신났습니다. 볼링핀이 넘어지는 소리에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신학교 앞에 있는 볼링장은 세게 그리고 힘차게 굴리면 스트라이크가 많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볼링핀이 줄에 매달려 있어서 세게 굴리면 줄이 엉켜서 스트라이크를 낼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신나게 볼링공을 세게 굴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볼링장이 이렇지 않다는 것을 방학 때 가 본 볼링장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줄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볼링핀은 정확하게 공을 굴려야지만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있었습니다. 볼링장 코치에게 부탁해서 자세를 배웠습니다. 준비 자세, 스텝 과정, 스윙과 릴리스, 팔로우 스루까지 단계적으로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이 단계상의 주의사항과 자세 하나하나를 기억하면서 볼링공을 굴렸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제가 똑바른 자세를 하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신경을 쓰면서 볼링공을 굴리다 보니,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는 이 자세에 익숙해졌습니다. 더는 자세와 주의사항을 일부러 기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몸에서 기억하고 있어서 저절로 그 자세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볼링이 더 재미있어졌습니다.
주님의 길을 가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처음에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따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몸이 기억하게 되면 저절로 주님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스러울 때 분명히 주님 안에서 커다란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사랑만을 이야기하신 분이 채찍을 휘두르고 돈과 탁자를 엎어 버리는 폭력을 보여주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느님에게서 이득을 보려 함으로써 하느님 자체를 더럽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신 성전은 시장이 아니며, 이전의 제사 제도는 이제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받았던 시나이산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전인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하느님과 함께했다면, 그 모든 형식적인 것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모습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당신이 새로운 성전임을 밝히셨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성전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성전이 됩니다.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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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딱지}
독일 튀빙겐 대학 연구팀은 사람의 코에서 만들어지는 코딱지에서 강한 항생물질이 발견됐다고 2016년에 발표했습니다. 연구팀은 사람 콧속에는 수백 종의 세균이 살고 있지만 이와 함께 ‘특정 세균’(Staphylococcus lugdunensis)이 살균효과가 있는 물질 ‘루그더닌’을 만든다는 사실을 찾았습니다.
루그더닌은 식중독의 원인인 웬만한 항생제도 없애기 힘든 황색포도상구균이나 바실러스균을 제압할 정도의 힘 있는 천연항생제라고 합니다. 우리 몸 안에 항생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프면 병원에 가서 항생제 맞을 것이 아니라, 코딱지를 먹어야 할까요? 그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코딱지에는 분명히 항생제 역할을 하는 면역물질도 있지만, 각종 병을 일으키는 200여 가지의 나쁜 세균도 함께 뭉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연구를 보면서, 우리 몸의 신비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신경을 써서 만든 몸이라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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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만든 한 주간을 감사하며 또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갈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성전정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인 것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23) 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요한2,14-15)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셨을까요? 평소에 온순하던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섭지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긴장하게 되는데 바로 그 모습입니다.
사실 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을 모아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뻔하니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너 정말 그럴 수 있나?’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손에 땀난다.’,‘손 떨린다’고 말합니다. 왜 손에 땀이 나고 손이 떨릴까? 분명 이유 없이 땀나거나 까닭 없이 떨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긴장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손이 떨리고 땀나는 현상만을 보지 말고 그 원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근원을 치료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화장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 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을 정돈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고해성사를 보고 나와 제대 앞에 나와 두 손을 합장하고 짧게 기도하였습니다. 이를 본 신부님이 ‘할머니 무슨 기도를 하셨나요?’그랬더니 할머니께서 ‘삼종기도를 했지요.’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다시 ‘할머니, 삼종기도 하실 줄 아세요?’ 했더니 할머니께서 ‘그럼요, 땡, 땡,땡’아닌가요?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오래전에 멕시코 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과달루페성모님이 모셔진 성당을 비롯 300년 이상 된 성당을 위주로 여러 성당을 방문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성당 규모나 조각, 그림 등으로 보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성전을 가득 메워서 주님을 경배하고 찬미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관광지로서 순례객을 맞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성전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역사가 오래된 건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이 성전을 누가 다시 아름답게 빛나게 할 것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각을 바꾸라는 가르침입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어렵지만, 이곳을 찾아와서 소와 양, 비둘기를 제물로 바치며 제사를 지내고 예배를 하였습니다. 지나치게 공간 개념에만 얽매여 성전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약의 성전입니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상 제물로 바치시고 부활하심으로 짐승을 잡아 바치는 구약의 제사를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미사 안에서 성체를 축성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와 의식만을 강조하는 예배는 사라지고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체험하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의 몸은 분명 성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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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손이 못생겼다고 고민하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의사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제 손이 너무너무 보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자 의사가 즉시 말했습니다.
“딱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아가씨의 손을 떼어 내든지 아니면 아가씨의 눈을 떼어내든지” 하는 것입니다.
**** 미운 사람이 옆에 있어요, 어떻게 할까요?
눈을 떼어내든지, 아니면 사랑하든지. 아무튼 성전을 잘 가꾸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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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의 정화淨化와 성화聖化>
-사랑이 답이다-
1.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이라크를 사목 방문 중인 머릿 기사 말마디들이 가뭄에 빗줄기처럼 반갑고 신선했습니다.
-“벽(walls)을 다리(bridges)로 대치하는데 도움이 되는 교황님의 이라크 방문”
하느님과의 벽을 다리로 대치하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들과 딸들을 위한 교황님의 기도”
아브라함은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모두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라크는 3월6일을 ‘관용(Tolerance)과 공존(Coexistence)의 국가의 날’로 선포하다.”
관용과 공존,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드는 멋지고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인지요! 말마디만 들어도 마음의 상쾌합니다.
“교황님은 종교 최고 지도자와의 만남에서 종교 공동체들간의 우정과 상호존중, 그리고 대화를 강조하다.”
종파를 초월하여 아름다운 일치를 위한 필수적 덕목이 우정과 상호존중, 대화입니다. 그 모범을 보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람, 우리 자랑스런 살아 있는 성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2.어제 성聖 샤를르 후코의 영성을 살아가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에 속한 자매님과의 면담성사중 받은 수도회 팜프렛 말마디들 역시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우리 소명의 본질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유일한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고 그분을 따라 걸으며 그분처럼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예수의 샤를르 작은 형제1858-1916). 저는 성인보다 무려 14년을 더 살고 있네요!
3.어제 제가 사랑하는 수도 도반道伴에게 청탁 받은 원고를 제출하면서 주고 받은 담백솔직한 메시지입니다.
“방금 원고를 보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많이 부족할 것입니다. 잘 봐주시기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신부님, 메일 하나 보냈습니다.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 수고많으셨습니다. 정밀精密하게 교정보셨네요! 감사드리며 200% 만족합니다. 각주 출처는 곧 확인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수도원 하늘길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친애하는 신부님!”
“네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기분 좋은 메시지를 주고 받은 후, 도반 수도사제의 카톡 사진을 여는 순간 한 눈에 들어온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에 감동이었습니다
“항상 그리스도를 호흡하라!”
그리스도를 숨쉬며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격에 벅찬 행복이겠는지요! 새삼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 우리의 사랑, 우리의 기쁨, 우리의 행복임을 확인합니다. 베네딕도 규칙에서 제가 특히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두 구절입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4,21)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43,3)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말씀을, 기도를, 교회를, 성전을, 이웃을, 자연을, 삶의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들의 모든 수행들 또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제 매일 강론 역시 그리스도께 대한,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표현을 찾습니다. 제가 수도원내에서 참 많이 카톡 사진을 찍어 나누는 것 네 가지가 1.하늘길, 2.예수님 부활상, 3.일출장면, 그리고 4.불암산을 배경한 주님의 집 성전입니다. 수도원의 가시적 중심인 성전은 제 유일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러니 오염된 성전에 열화와 같이 분노하신 주님의 심정이 이해되고도 남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보루로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성전이 속화俗化되면 그 무엇이 세상을 성화할 역할을 하겠는지요! 그러니 예수님께 성전정화는 너무나 절박한 것이고 여기서 주님의 분노는 사적인 감정의 분노가 아닌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기인한 거룩한 분노, 의로운 분노였던 것입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하신후 이뤄질 불가시적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예언처럼 들립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야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전에서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수도공동체 형제들이요 여기서 늘 깨닫는 것이 성전의 세차원입니다. 1.보이는 가시적 성전, 2.블가시적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의 성전, 3.각자의 성전, 그러니 셋은 구별할 수 있을 지언정 분리할 수 없습니다. 셋이자 하나일 때 온전한 성전입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공동전례의 수행은 동시에 세차원의 성전을 정화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거행되는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으로 정화되고 성화되는 가시적 성전은 물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공동체 성전과 공동체 성원 하나하나의 성전이 정화되고 성화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화답송 후렴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의 은총이 기도와 더불어 끊임없이 성전을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매일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은 온갖 잘못된 선택과 악이라는 질병에서 우리를 예방하는 백신입니다’라는 성서학자의 말도 생각납니다. 예방의 백신뿐 아니라 정화와 성화의 치유제가 되는 말씀의 영약靈藥입니다.
성전안에는 제대가 있고 제단 뒷 벽 중앙에 높이 달려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흡사 각자 ‘마음의 성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하여 십자가의 성호경을 그을 때마다 내 마음의 성전을, 내 삶의 중심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상기하게 되니 마음의 성전 정화에 얼마나 좋은 성호경 기도인지 깨닫습니다. 성호경 기도를 바칠 때 마다 바오로의 고백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이 되지만, 그 누구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합니다.”
얼마나 고무적입니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성호경 기도를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고백할 때 마음의 성전에서 샘솟는 하느님의 힘과 지혜가 안팎의 성전은 물론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사랑의 선물중 하나가 제1독서 탈출기의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의 수행을 일상화할 때 역시 악팎의 성전의 세속화를 막아줌은 물론 정화와 성화도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은 주일로 바뀐 가톨릭 교회의 십계명을 꼭 지키시기 바랍니다.
1.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부모에게 효도하라.
5.사람을 죽이지 마라.
6.간음하지 마라.
7.도둑질을 하지 마라.
8.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일체의 탐욕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오로지 사람하라는 십계명 말씀입니다. 평범의 비범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선물인 십계명의 수행 역시 사랑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십계명의 수행에 충실할 때 안팎의 성전은 저절로 정화되고 성화될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듯 그리스도의 성전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삼차원(개인, 공동체, 건물)의 안팎의 성전 모두를 정화하고 성화해 주시어 당신과의 일치를 깊이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사랑과 정화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마음의 성전도, 공동체의 성전도, 건물의 성전도 저절로 깨끗해 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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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 우리 관계의 핵심을 짚어 주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을 쫓아내시며 일갈하십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과 사뭇 다른, 거칠고 폭력적인 모습까지 보입니다.
무엇을 치우라고 하시는 걸까요? 당시 상황으로 보면, 성전에서는 순례자들이 희생제물로 구입할 가축들이 거래되었지요. 그리고 그들이 환전해야 하는 성전 통용 화폐들 또한 쌓여 있었을 것이고요. 또 성전의 종교 기득권층과 결탁된 모종의 이권들에 대해서도 철퇴를 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우리 영혼 구석구석에 들어찬 세속적 탐욕과 욕정, 이기심을 흔들어 균열을 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령의 성전인 우리가 그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를 강하게 촉구하고 계십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치우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22)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강력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증명할 표징이나 지혜가 아니라, 그분이 매달려 목숨을 바치신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아울러 세속적으로 우리를 힘있어 보이게 해 줄 재물이나 권력, 인맥이나 명예가 아니라, 약하고 어리석을망정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을 끝까지 남겨야 합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예수님께서 우리 안의 헛된 욕망과 허영심, 위선과 오만을 치우라고 명하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로 세례를 받고 교적에 이름은 올렸지만 마음은 세속의 영광을 좇는 이중적인 양다리 생활을 청산하라고 단호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이 말씀은 먼저 성전 안에서 부당하고 무질서한 상거래를 하지 말라는 의미도 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신앙을 하느님과의 거래로 여기지 말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하느님이 응당 우리에게 당연히 무언가를 해주셔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간혹 있나 봅니다. 계명을 지키고 헌금을 하는 대가로 하느님을 내게 작은 불편도 허락하면 안 되는 노예 정도로 여기는 듯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뭐라도 맡겨놓은 듯, 요구하고 추궁하고 따지며 그것을 기도라고 착각하지요.
이는 제1독서에서 알려 주는 계명 준수의 근본 정신과 영 딴판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탈출 20.6)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선물로 주셨지요.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계약의 근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이 사회법과 다른 것은 책임과 의무 이전에 "사랑"의 마음으로 준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과 이웃을 보호하는 계명이 하느님과의 거래가 아니라 피조물로서 그리고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본성이고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요한 2,23-24)
예수님은 표징을 보고 믿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으십니다. 그건 보고 확인해서 결과를 수용하는 것일 뿐 진정한 믿음이 아니니까요. 믿음은 감각과 머리로는 가늠이 되지 않아도 기꺼이 받아 안는 모험이고 투신입니다. "표징"이나 "지혜"에서가 아니라 "십자가 죽음"에서 생명을 볼 수 있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랑의 힘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주님과 거래하지 맙시다. 주님은 내 봉헌이나 봉사의 대가로 재산과 권력을 보장하는 관리자나 지킴이가 아니십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세상 만물과 역사를 섭리하고 관장하시는 그분께서 살리시거나 죽이시거나 풍요롭게 하시거나 앗아가신들 우리가 그분께 요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자비를 믿고,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며 의탁하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 영혼의 성전 안에 예수님께서 치우라고 명하시는 것이 무엇일지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이 눈에 보이면, 가차없이 버릴 수 있는 용기도 청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관계는 거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고 의탁하는 영혼은 평화까지 선물로 받아 누립니다.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로 엮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하느님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을 정화하고 사랑을 회복하는 사순 제3주일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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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GuDehxKDE8&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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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 19)
완벽한
교회는
그 어디에도
없다.
불완전한
인격체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인격체들이
더욱 맑고
아름다워지는
사랑에 있다.
주님께서
친히 교회를
세우셨다.
허무시는 분도
다시 세우시는
분도 우리의
주님이시다.
회개가 필요한
우리들 교회의
모습이다.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회개와
복음이다.
교회를
가로막는 것은
다름아닌
건강하지 못한
우리들 삶이다.
주님께서는
건강한 교회를
간절히
원하신다.
교회는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교회의 소명은
여기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교회는
물질이 아니라
인격을 구원한다.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하느님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삶을 닮고
있어야한다.
어려운
우리 시대에
위로와 희망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건강한 교회이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사랑이 중심이
되는 교회는
언제나
소외되고
낮은 곳을
향한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
교회의
나아갈 길을
다시 찾는
은총의 주일
되시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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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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