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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없다
말씀 : 요9:1-7
요절 :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 9장 1-11절 입니다. 말씀의 제목은 “운명은 없다”입니다. 예수님은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나서 그를 눈뜨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가 소경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말씀하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1.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날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태어나 사고로 맹인이 된 사람이 아니라 처음 날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세상은 암흑이었고, 그는 정말 운명적이고 슬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께 무슨 질문을 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은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인가 물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장애인으로 태어난 이유가 누군가의 죄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생각에는 전생의 개념이 깔려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윤회하고 업보대로 이루어지는데 전생에 죄를 지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장애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보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업보대로 장애인이 되었다면 남은 것은 그것이 누구의 죄인가 하는 것만이 남습니다. 그가 날때부터 소경으로 낫다면 그 죄는 자신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답이 이것이든 저것이든 절망적이고 운명적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슬프고 운명적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불행을 죄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 인과응보적이고 율법적인 생각을 했으므로 그들은 장애인들과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자신이 그런 상황에 빠지면 자기연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하는 제자들에게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선 제자들의 생각이 잘못됐다 하십니다. 날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이 소경된 것은 자신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합니다. 예수님은 윤회를 부인하신 것이고 업보를 부인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가진 율법적이고 인과응보적인 사고방법, 그리고 운명적인 사고를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불행을 보고 운명의 돗자리를 깔고 앉아 슬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제자들이나 유대인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고 우리는 세상을 살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부모의 죄라면 그 부모는 살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소경 자신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다면 그가 살 수 있겠습니까? 자기 죄로 인해 소경으로 태어났다면 너무 억울하고 슬픕니다.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평생 자기 운명을 한탄하며 죄의 댓가를 치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죄와 죽음 아래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제자들의 마음에 있는 이런 인과응보적 생각과 운명과 슬픔을 가져가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때문이라 합니다.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이며, 하나님의 목적때문이며,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소경과 제자들에게 비추시는 빛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은 누군가의 죄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나타내고자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죄때문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이,,, 이 불행을 통해 새 창조를 이루시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불행과 행복을 다 가지고 새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메시야로 오셔서 바로 그 일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날때부터 소경으로 난 사람을 고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새 창조를 드러내보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메시야로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메시야로 그에게 임하셔서 이제 그의 눈을 뜨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과응보에 생각, 운명적인 생각을 하며 불행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새 창조를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므로 새 창조의 관점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의 눈으로 불행당하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새 창조를 이루시는 예수님은 모든 운명 가운데 드러누워 있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운명적인 인간조건 가운데 드러누워 한탄하는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눈뜨게 하신 예수님은 운명가운데 슬퍼하며 드러누워 있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로 빚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거지의 불행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새 창조를 이루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는 어떤 불행이나 어떤 고난도 새 창조의 재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재료로 사용하실 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힘써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기 원하시는 선하신 일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된 자가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불행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불행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행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불행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행을 사용하셔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자신과 같이 어둔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목자로 살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때가 낮입니다. 낮은 예수님이 오신 때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때입니다. 하나님도 낮에는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쉬셨습니다. 우리도 낮에는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낮은 우리가 젊을 때입니다. 우리에게 건강이 있을 때이고 돈이 있을 때이고 우리에게 사명이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늙고 죽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날이 저물고 저녁이 오듯이 반드시 죽음은 옵니다. 우리는 그 전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우리가 어떤 불행한 조건 가운데서도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세상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적인 노력과 지혜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밝히는 빛이 되십니다. 세상에 예수님의 빛이 비추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하시는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운명의 어둠을 몰아내는 섭리의 빛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사랑의 빛입니다.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는 소망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원망의 어둠을 몰아내는 감사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운명의 빛을 섭리의 빛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인생은 밝아집니다. 우리가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어떤 상황 어떤 조건 가운데서도 힘써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소경을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고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소경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소경은 청각이나 촉각이 발달하여 있습니다. 그는 침 뱉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진흙이 눈에 붙여지는 것도 느꼈습니다. 눈에는 티도 들어가지 말아야하는데 진흙과 침까지 넣는 것을 알았습니다. 소경은 이것으로 인하여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예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8-11절을 보십시오.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눈먼 자가 눈을 뜨자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전에 그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눈을 뜬 자는 자신이 바로 소경에서 눈을 뜬 자임을 분명히 증거하였습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빛되신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빛으로 살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물을 때 예수님이 내가 그라고 증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건사고 없이 조용하게 지내던 2019년 9월1일 저녁7시경.
119구조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용준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단대응급실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해보니 용준이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머리와 몸 이곳저곳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으며, 자가호흡이 않되서 산소마스크를 통해서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걱정과 근심으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근광목자는 요한,모니카 목자님께 전화를 드려 중보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용준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CT를 찍고, 찢어진 눈두덩이를 꼬맨후 상태를 지켜보기 위해 중환자실로 이동을 했습니다. 다음날 신경외과 담당교수를 만났습니다. 용준이는 머리가 깨지거나 피가 나오지 않아서 우선은 지켜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뇌가 부어오르면 머리 뚜껑 여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용준이의 뇌가 부어오르지 않게 해달라고“ 요한목자님께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이 기도제목을 바로 교회단톡방에 올려주셨고 동역자님들도 서로서로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이기도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사 용준이의 뇌는 부어오르지 않았고, 머리에 칼을 한번도 데지 않았습니다. 용준이는 중환자실에서 상태를 계속 지켜봐야 했으며, 매일저녁,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요한목자님께서는 7시 면회시간에 오셔서 기도와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성이와 하람이를 비롯해 여러 동역자님 한분한분이 면회시간에 오셔서 눈물의 기도를 해주고 가셨습니다. 자기 새끼도 아니요, 자기 동생도 아닌데 이렇게 까지 눈물로 기도와 물질로 지원을 해줄수 있는가?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든든했습니다.
전혀 반응을 안보이던 용준이는 3주후부터 조금씩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말을 하면 고개를 끄덕거리고, 손을 잡아달라면 잡아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고, 눈은 초점없이 천장의 형광등만 바라보고 있었고, 두 손과 발은 움직이지 말라고 묶어 놓았습니다. 담당교수는 지켜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용준이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야 하는가 고민하고 있을 때,,,, 상미목자님이 ”서울에 있는 의사나 지방에 있는 의사나 도구로 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을 해주셨고, 요양병원의 신경외과 원장을 만나서 ”용준이는 금방 회복을 할거라는 말“ 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끔 마음에 두려움이 임하기도 했지만 요한목자님과 동역자님들의 기도를 힘입어 금방 마음에 평안이 임했습니다.
용준이는 중환자실에서 40도의 고열에 시달리기를 잘했고, 부러진 눈밑의 뼈 재건수술과 부러진 허벅지 뼈에 쇠를 덧되는 수술을 한후 50여일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길수 있었습니다. 용준이는 여전히 인지가 돌아오지 않았고 헛것을보고 이상한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었습니다. 유동식을 먹으며 재활치료에 들어갔습니다. 용준이의 인지는 안좋았고 2달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다리의 근육운동과 관절운동과 보행연습을 하기시작했습니다. 기저귀는 여전히 차고 있었으며 목에 끼우고 있던 보형물도 떼고 입으로 먹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열려있는 동공은 여전했습니다.
용준이는 약물과 재활치료를 통해 차츰차츰 좋아지기 시작했고 100일만에 퇴원해서 재활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여전히 목자님들과 동역자님들은 용준이를 위해 기도와 물질을 지원해주셨고, 병문안을 오실때마다 용준이가 좋아하는 치킨과 피자를 사다주셨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양다니엘선교사님 가정에서는 500만원의 물질을 지원해주셨습니다. 직장을 그만둔 저에게 동역자님들의 물질지원은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병원에서 용준이는 나이가 제일 어린환자였고, 재활치료 선생님들이나 간호사선생님들한테 인기가 많았습니다. 용준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인지능력과 감정조절은 여전히 안좋았습니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경미,수성목자님한테 용준이 상태를 얘기하고 물어보았을 때 책을 갖다주는 등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상미목자님은 용준이의 단백질 보충을 위해 두유와 구운계란을 푸짐하게 갖다 주셨습니다. 용준이는 이런 사랑속에서 살도 찌고, 병원생활에 적응을 해나갔고 회복해갔습니다. 마가,루디아 목자님은 간호로 지쳐있는 저희를 위해서 귀한 인삼과 공주 알밤을 한보따리 싸다 주셨습니다.
3학년에 올라간 용준이는 코로나로 인해 개학이 늦어졌고, 개학을 한후에는 체험학습과 병가를 통해 겨우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5개의 전문대에 원서를 썼으며, 비대면 면접을 통해서 모두 합격을 하였고, 최종적으로 충남도립대 작업치료학과에 입학을 해놓았습니다. 최요한목동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현재 용준이는 다리 보철을 빼서 거의 회복하였고,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과 약물치료를 통해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열려있던 동공은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기도되로 용준이 머리에는 칼도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런 용준이를 보면서 ”하늘이 도왔다“”조상이 도왔다“”멀쩡한데 왜 입원했냐며“ 묻는분들도 많았습니다.
처음 용준이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용준이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과 사망권세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요한목자님을 비롯한 동역자님들의 기도와 물질지원과 위로를 통해서 저는 마음에 평안함을 얻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친형제자매보다 더 끈끈한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되엇습니다. 그리고 용준이가 다친 것이 저의 죄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것은 운명적인 생각이며, 하나님께서 용준이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히 만드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용준이를 통해서 저 자신도 더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용준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사고로 인한 인지의 어려움을 겪을수 있겠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이 어려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나갈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운명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우리의 슬픈 운명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빛으로 그 사건을 바라보아야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진흙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셔서 우리의 운명을 극복케 도우십니다. 우리의 불행이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의 샘터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불행이 복음을 전하는 생명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도와 말씀의 진흙이 있습니다. 이를 힘써 이겨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