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된 항문
이홍사
낙엽이 굴러 항문으로 들어갔다
항문에서 비행기가 떴다
꽃은 항문에서 피고
새는 똥구멍으로 화염을 뿜으며 계절의 저편으로 날아갔고
계절은 다시 오지 않았다
항문엔 정수리도 뒤통수도 없다
기차는 항문에서 나오지 않았다
몽골 초원을 다니다 보면 가끔 나타나는 소련군의 버러진 격납고 이제 그 항문에는 유탄이 날아오지 않았다 괄약근 긴장이 완전히 풀린 항문 말하지 못하는 표정과 말문을 닫아버린 눈빛만 교차하는 풀과 붉은 흙
입술마저 붉은 언어는 괄약근만 팽팽히 죄고
지금은 양 떼가 올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초원
한때 봉인된 항문이었지
괄약근에 힘이 풀려 느슨해지자 쟈르갈의 소도 들어가고 도르치네 망아지도 들어가 배를 깔고 눕는 항문 밤이면 몽골의 별이 내려와 제 몸을 한껏 열어 붉게 핀 들꽃에 수작을 걸기도 하지만 구린내는 여전했고
국경이 없는 구린내
국경을 모르는 계절은 깜냥대로 항문으로 들어가 쉬다 가는데
튤립의 발원지는 언제나 항문이었다
튤립이 생의 한 계절 느낌표를 들이키고
항문으로 귀환했다
우리는 항문의 자식
괄약근이 느슨한 언어가 찔끔 쏟아놓는 한마디
나는 원래 격납고가 아니야
항문은 지난한 생을 봉인했지만
차가운 바람이 새어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