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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반포의 서른 두 평짜리 아파트이다. 칠팔 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반포 같은 곳에서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 기억 속에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반포는, 수원으로 놀러갈 때에 버스 속에서 바라다본, 키 큰 포플러나무가 피난살이하러 나와 있는 바싹 마른 아낙네들같이 모여 있는 소택지이다. 그 소택지를 메워 자연스러운 자연을 거의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백 동이 넘는 아파트를 세워놓은 곳에서, 나는 거의 사 년째 살고 있다. 내가 반포 아파트에 오게 된 것은 정말 이상한 행운 때문이었다. 내가 맨 처음 내 문패를 단 집을 가졌던 곳은 연희동이다. 연희동 채소밭이, 거의 모든 서울 근교의 채소밭이 그러했듯이, 쓰레기로 뒤덮이고 하수도가 뚫리자, 맨 먼저-이 맨 먼저 때문에 맨 먼저 결국 그곳을 떠나야 되었지만-마흔 평 남짓한 조그마한 땅을 사서 스무 평짜리 집을 짓고서 나는 내 평생 처음으로 거기에 내 문패를 붙였다. 길이 포장이 안 되어서 장마철에는 장화를 신어야 될 지경이었는데도, 앞뒤로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어서 꽤 편안하게 일년을 지낸 셈인데, 일년이 지나자 마자 내 집 주위에 이른바 미니 이층이라고 불리는 양옥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내 집 창 옆의 공지에 새 집이 들어서자, 내 집은 앞집, 뒷집, 옆집 사이에 파묻혀, 가련한 난쟁이 집이 되어버렸다. 작고 낮은 집에 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언짢은데, 이제는 햇볕이 거의 들지 않아서 집안은 늘 눅눅했다. 다른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 눅눅함을 벗어나려고 나와 아내는 복덕방에 그 집을 내놓은 지 반 년 만에야 겨우 그것을 팔고, 스물 두 평짜리 여의도 아파트에 전세를 들었다. 그것이 나의 아파트 생활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잠잘 때는 비록 공중에 떠서 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우리는 육층에 세 들어 있었다-처음에 그것은 굉장히 편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연희동에서처럼 겨울에 마루에 연탄 난로를 피울 필요도 없어졌으며, 새벽에 일어나 연탄을 갈 필요도 없었다. 더운 물이 아무 때나 나와서 나처럼 이발소 가기와 목욕탕 가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자주 목욕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엘리베이터라는 문명의 이기를 날마다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내도 간단한 물건들을 구입할 때는 일부러 시장에 나갈 필요가 없이 전화기만 들면 되게 되었다. 문화적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그 문화적인 생활에 점차로 싫증을 내게 되었다. 여의도 아파트엘 가본 사람이면 다 알겠지만, 그곳은 이른바 복도식 아파트이다. 중앙에 엘리베이터가 있고 층마다 같은 복도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 내가 세든 아파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왼편 끝에 있었다. 내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너 개의 현관을 지나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겨울에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여름에는 더우니까 자연히 현관문과 부엌 창문을 열어놓게 마련이어서 보기에 좀 거북한 것들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현관문을 열어 놓으면 대개 응접실에 비치해둔 텔레비전 소리가 밖으로까지 들려 나왔다. 그때는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지금보다는 훨씬 친절해서 아침에 그 전날의 인기 프로그램을 재방송해주고 있었는데, 그래서 나는 내 집 응접실에 있었던 텔레비전이 소리를 내지 않을 때에도 아침부터 그것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남의 텔레비전 소리를 듣게 되면서부터 나는 신문을 보지 않아도 그때의 인기 가수가 누구이고 인기 연속극이 무엇인지를 금세 알게 되었다. 같은 층에 있는 여러 세대 중의 반이 넘는 세대가 언제나 텔레비전을 켜고 있었는데, 그 프로그램이 거의 언제나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듣거나 보지 못하면 사람은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모양이었다. 아파트가 대중 조작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거기에서였다. 직업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얼굴의 형태가 달라도 거주 공간이 같으면 성격이 비슷해지게 마련인 모양이었다. 나도 내 아내도 옆집 사람들과 같은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을 보고 듣고, 같은 밑반찬을 준비하고, 같은 식의 음식을 만들고, 그래서 결국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전세 계약 기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이제 아파트에는 신물이 났으니 다시 단독 가옥으로 가보자고 내 아내를 죄기 시작했으나, 아내는 땅집-이게 내 아내만의 독특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에 갈 의사가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연탄에는 이제 질렸다는 것은 연탄가스에 질렸다는 뜻만이 아니라, 연탄 갈기에 질렸으며, 찬물 데우기에 질렸으며, 손수 자질구레한 물건을 사러 밖으로 나가는 것에 질렸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가정부를 구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덧붙여졌다. 그때쯤 해서 나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내 꼬리를 붙잡혔다. 그렇게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내 아내가 나 몰래 신청한 스물 두 평짜리 반포 아파트가 당첨이 된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내 주위의 상당수의 사람들이 신청을 했다가 떨어졌는데, 내가 아는 사람으로서는 내 아내만이 당첨이 되었다. 내가 견딜 수 없이 분노를 느꼈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아무튼 내 속으로는 다시 내 집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를 보고 내 아내는 위선자라고 공격을 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위선자였다. 나도 슬슬 아파트에 동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반포 아파트는 여의도 아파트와 다르게 계단식이어서, 그 획일성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얼마 뒤에 그곳은 적어도 나에게는 여의도와 마찬가지가 되었다.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아파트가 하나의 주거 공간이 아니라 사고 양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중산층의 사고 양식이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술꾼들에게 술을 마시면 취하는 병이 있듯이 여러 가지의 병이 있다. 그 가장 큰 병은 새로운 더 큰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어하는 병이다. 사람들이란 혼자 있을 때는 제법 사람 같은 생각을 하다가도 여럿이 있을 때는 금세 달라진다. 남 앞에서는 가능하면 은밀하게-왜냐하면 아파트의 주민들은 문화인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그래서 가장 우선하는 것은 같은 동에, 또는 같은 층에 사는 사람이 자기보다 우월한지 우월하지 않은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의 우월성을 판단하기는 극히 힘들고, 판단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대개 사람들은 외모로, 다시 말해 그가 갖고 있는 것으로 상대편을 쉽게 판단해버린다. 상대방이 갖고 있는 것이 자기가 갖고 있는 것보다 많으면 우선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서른 두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스물 두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보다 열 평이 우월하고, 마흔 두 평짜리에 사는 사람은 스물 두 평짜리에 사는 사람보다 스무 평이 우월하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아파트 단지에 돌아가면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스물 두 평에 처음 발을 디딜 때는 그렇게 적어 보이지 않던 공간이 서른 두 평에 다녀온 뒤에는 그렇게 비좁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물 두 평에 사는 사람은 서른 두 평으로, 서른 두 평에 사는 사람은 마흔 두 평으로 옮겨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리고 일년에 두 번 그런 노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때가 있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아파트 값이 오르는 때와 순서가 있다. 아파트 값이 가장 높이 치솟아 오르는 때는 봄과 가을이다. 그리고 그 값은 스물 두 평에서부터 오른다. 스물 두 평부터 오르기 시작한 아파트의 값이 마흔 두 평, 예순 두 평에까지 그것과 비례해서 오르기까지에는 짧게 잡아서 보름, 길게 잡아서 한 달쯤의 시간이 걸린다. 그 시기를 적절히 이용하면 더 넓은 집으로 옮기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아파트 값이 움직이는 시기에는 모든 아파트 주민이 소다를 잔뜩 넣은 밀가루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아파트 단지는 사람을 적당히 미치게 하는 데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 방법 말고도 아파트를 옮길 수 있는 다른 더 쉬운 방법이 있다. 적당한 시기에 그때의 시세에 따라 자기의 아파트를 팔면, 그 돈으로 자기의 옛날 아파트보다 넓은 새로 건축되는 아파트를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로 건축되는 아파트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붐빈다. 그 아파트에 누구나 언제든지 쉽게 당첨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에 당첨이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때에는 집을 그냥 날려버리는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법이므로, 그리고 성공한 사람이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는 더구나 드물기 때문에, 새 아파트 청약은 그야말로 자기의 운을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험대이다. 더 새롭고 더 넓은 아파트로 가려는 아파트 주민들의 병은 아주 고치기 힘든 병이다. 나도 내 아내도 그 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가 관악산 기슭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그리고 그 대학교가 교수 사택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택공사는 꽤 유리한 조건으로 그 학교의 교수들에게 서른 두 평짜리 아파트를 몇 동 분양해주는 데에 동의를 했고, 나는 그 동의의 혜택을 입고 이사를 와서 지금까지 거기에 살고 있다.
아파트 병의 뿌리는, 내 빈약한 머리로 진단하기에는 남보다 더 잘 살고 싶은 데에 있고, 그것의 뿌리는 여러 의미의 경쟁심에 있고, 그 경쟁심의 결과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판가름 난다. 아파트 병이 가르쳐 주는 가장 확실한 교훈은 나보다 백만 원을 더 갖고 있는 사람은 그 백만 원만큼 나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이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자기의 뛰어남을 확인하는 전시 공간이 된다. 같은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자동차가 있고 없음이, 자동차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끼리는 캐비닛형의 냉장고가 있고 없음이 사람 판단의 잣대가 된다. 그래서 너도 나도 기를 쓰고 남들이 사들인 것을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사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가 가진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기가 판단되는 사회! 한 소설가가 전해주는 것을 그대로 믿자면-나 자신은 겪은 적이 없으나, 활자화된 소설에 나오는 것이니 아마 사실이리라. 요즈음은 현실이 소설보다 훨씬 허구적이니까 말이다-마흔 두 평에 사는 사람에게는 고기 반 근을 시켜도 배달을 해주는데, 스물 두 평에 사는 사람에게는 고기 한 근을 시켜도 배달을 안 해준다. 스무 평이라는 아파트의 크기의 차이가 그렇게 작은 일에까지 섬세하게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가 가진 것을 통해 판단하려는 경향이 아파트만의 특유한 현상은 아니겠으나, 아파트에서 그것은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더 첨예하게 나타난다. 왜 그럴까? 그것에 대해 오래 생각하다가 나는 그것이, 아파트에서는 그 아파트의 주인이 가진 것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파트는 그 내부의 면적이 어떠하거나 같은 높이의 단일한 평면을 나누어 사용하게 되어 있다. 보통집, 아니 다시 내 아내의 표현을 빌면 땅집은 아무리 그 면적이 적더라도 단일한 평면을 분할하게 되어 있지 않다. 다락방이나 지하실은 거실이나 안방과 같은 높이의 평면 위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거실이나 안방보다 높거나 낮다. 그런데 아파트는 모든 방의 높이가 같다. 다만 분할된 곳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파트에서의 삶은 입체감을 갖고 있지 않다. 아파트에서는 부엌이나 안방이나 화장실이나 거실이 다 같은 높이의 평면 위에 있다. 그것보다 밑에 또는 위에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아파트이다. 좀 심한 표현을 쓴다면 아파트에서는 모든 것이 평면적이다. 깊이가 없는 것이다. 사물은 아파트에서 그 부피를 잃고 평면 위에 선으로 존재하는 그림과 같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은 한 평면 위에 나열되어 있다. 그래서 한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아파트에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같이 자신을 숨길 데가 없다. 모든 것이 열려 있다. 그러나 그 열림은 깊이 있는 열림이 아니라 표피적인 열림이다. 한눈에 드러난다는 것, 또는 한눈에 드러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깊이를 가진 인간에게는 상당한 형벌이다. 요즈음에 읽은 한 소설가의 소설 속에는, 아파트 단지에서 몸을 숨길 곳을 찾지 못한 아이들이 옥상 위의 물탱크 속에 들어가 숨음으로써 자신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간 끔찍한 사건이 기술되어 있었다. 물탱크는 밖에서는 열 수 있으나 안에서는 열 수가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같은 평면 위에서 대번에 그 정체를 드러내는 사물과 인간은 두께나 깊이를 가질 수 없다. 두께나 깊이는 차원이 다른 것이 겹쳐서 생기기 때문이다.
땅집에서는 사정이 전혀 딴판이다. 땅집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나름의 두께와 깊이를 가지고 있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것이 다락방에 있을 때와 안방에 있을 때와 부엌에 있을 때는 거의 다르다. 아니 집 자체가 인간과 마찬가지의 두께와 깊이를 갖고 있다. 내가 좋아한 한 철학자는 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인간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락방은 의식이며, 지하실은 무의식이다. 땅집의 지하실이나 다락방은 우리를 얼마나 즐겁게 해주는 것인지. 그곳은 자연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다락방과 지하실에서는 하찮은 것들이라도 굉장한 신비를 간직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쓸모가 없는, 또는 쓰임새가 줄어든 것들이어서, 쓰임새 있는 것에만 둘러싸여 살던 우리를 쓰임새의 세계에서 안 쓰임새의 세계로 인도해 간다. 화가 나서, 주위의 사람들이 미워서, 어렸을 때에 다락방이나 지하실에 혼자 들어가, 낯설지만 흥미로운 것들을 한두 시간 매만지면서 나 혼자만의 세계에 잠겨 있었을 때에 정말로 내가 얼마나 행복했던고! 화는 어느새 풀리고, 주위 사람들에 대한 증오도 사라져, 이윽고 밖으로 나와 때로는 이미 전기가 들어와 바깥은 컴컴하나 안은 눈처럼 밝은 것을 볼 때에, 때로는 황혼이 느리게 내려 모든 것이 있음과 없음의 그 미묘한 중간에 있는 것을 보고 느낄 때에 세계는 언제나 팔을 활짝 열고 나를 자기 속으로 깊숙이 이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 자란 뒤에도 다락방이나 지하실을 쓸데없는 것들이 잔뜩 들어 있는 쓰레기 창고로서가 아니라 내가 끝내 간직해야 될 신비를 담고 있는 신비로운 사물함으로 자꾸만 인식하게 된다. 나도 내가 사랑한,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그 철학자처럼 다락방과 지하실 때문에 땅집을 사랑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 지하실과 다락방 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한식집의 부엌이다. 내가 태어난 시골의 내 외갓집 부엌은, 그 집이 제법 부유했기 때문에 꽤 넓었다. 그. 부엌에는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아낙네들이 가득차 있었고 그 부엌을 건너 질러가면, 외할아버지가 친손자들에게만 주려고 외손자들에겐 접근을 막은 단감나무, 대추나무들이 있었다. 사람이 없을 때에 그 부엌에 들어가보면, 부엌 바닥은 한없이 깊고 컴컴했고, 누룽지를 넣어둔 찬장은 한없이 높고 높았다. 그 부엌을 나는 한 한달 전에 두 사람의 시인과 함께 놀러간 어떤 절에서 다시 보았다. 그때의 그 즐거움!
땅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많은 것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 대한 아름다운 산문을-남긴 생텍쥐페리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과연 그렇다. 땅집이 아름다운 것은 곳곳에 우물과 같은 비밀스러운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는 그 비밀이 있을 수가 없다. 오분 안에 찾아낼 수 없는 것은 아파트에 없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다. 스물 두 평 또는 서른 두 평의 평면 위에 무엇을 숨길 수가 있을 것인가. 쓰임새 있는 것만이 아파트에서는 존중을 받는다. 아파트에 쓰임새 없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값비싼 골동품뿐이다. 그 골동품들 또한 아파트에서는 얼마나 엷게 보이는지. 그것은 얼마짜리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의 두께로 존재하지 않는다. 두께 없는 사물과 인간. 아파트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산다. 그러나 감출 것이 없을 때에 드러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감출 수도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사람은 자기가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숨겨야 살 수 있다. 그 숨김이 불가능해질 때에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만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무의식은 숨김이라는 생생한 역동성을 잊고 표면과 동일시되어 메말라버린다. 표면의 인공적인 삶만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 가장 첨예한 상징적인 사실이 아파트에서는 채소를 손수 가꿔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아파트에서는 자연과의 직접 교섭이 거의 완전히 단절된다. 아파트에 자연이 있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자연이다. 아파트 안에서 키워지는 꽃이나 나무들은 자연의 그것이 아니라, 깊이 없는 사물들에 다름 아니다. 자연의 상실은 아파트에서의 삶을 더욱 엷게 만든다. 그 삶을 약간이나마 두껍게 해주는 것이 음악일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또는 나 같은 사람에겐 시나 소설이다- 그것들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나는 아파트에서 살 수밖에 없다. 나의 적은 월급으로는 가정부를 두어야 버텨낼 수 있는 땅집에서 견뎌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내 아이들에게 가장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아이들은 비록 아파트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아이 시절을 아파트 단지 안에서 보냈다. 그리고 아직도 보내고 있다. 그들이 보고 느끼는 것은 아파트의 회색 시멘트와 잔가지가 잘 정돈된 가로수들 뿐이다. 그들에겐 자연이 없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남도의 조그마한 섬이다. 그곳은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나서 이제는 꽤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아무튼 그 조그마한 섬에서, 나는 산에 올라가 산나무 열매를 따 먹거나, 떼지어 몰려다니며 밭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몰래 맛보거나-목화꽃을 따먹을 때에, 무나 감자를 몰래 캐 먹을 때에, 옥수수를 불에 구워먹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즐거웠던가. 어른들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무서움까지도 우리에게는 즐거움이었다-선창에 나가 서너 시간씩 바다를 바라 보고 앉아 있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면, 옻나무나 발목까지 빠지던 개펄의 감촉이 맨 처음 되살아나오고, 가도가도 끝이 없던 여름날의 황톳길의 더위와 모깃불의 매캐한 냄새가 나를 가득 채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 자연을 살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대신에 내가 소풍날에야 한두 개 얻어먹었던 삶은 달걀이나, 내가 고등학교 때에야 맛본 짜장면 따위를 시켜주며, 그들의 관심을 원더우먼이나 육백만 불의 사나이로 돌려놓고 있다. 나의 바다와 산은 원더우먼이나 육백만 불의 사나이의 달리기와 높이 뛰어오르기 또는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로 바뀌어져 있다. 좋은 자연을 보고 숨쉬는 대신에 이제는 하도 먹어 맛도 없는 달걀이나 짜장면을 먹고 자라는 내 불쌍한 아이들! 계속 자라면서 그들이 배우는 것은 선생님께 잘 보이기, 과외 공부하기, 회색 시멘트에 길들기, 오엑스식의 문제 알아맞히기, 그리고 재치 있게 말하기 따위이다. 한마디로 감춰지지 않는 것 배우기이다. 아니 이렇게 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나도 내 아이들처럼 아파트의 삶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엷게 본다. 거기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가. 그것은 거기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당위만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파트에서 벗어나야, 아니 땅집으로 가야 사물과 인간의 두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내가 아파트에서의 삶에 깊이 물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아니 그러면 다락방이나 지하실이나 부엌이 없는 곳에서 산 사람에겐 깊이가 없단 말인가? 바다와 산만을 보고 자라나야 삶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또 아이들은 언제나 신비 덩어리가 아닌가? 아이들에게는 조약돌 하나로도 우주보다도 넓은 세계를 꿈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나의 잘난 체하는 태도의 소산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을 깊이 있게 생각해야 아파트에서의 나의 삶에 대한 충분한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데, 그 비판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그 생각에 깊이 잠기면 잠길수록 나는 어느 틈엔가 남도의 한 조그마한 섬의 밭에, 산에, 바다에 내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한 젊은 시인의 표현을 빌면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그 말을 뒤집으면 내가 두껍지 않을 때에 나는 엷게 판단한다는 것이 될지 모르겠다.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를 비난하는 체하는 자기 모순. 나에게 칼이 있다면 그것으로 너를 치리라. 바로 나를!
(김현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