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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5강-3 (2013. 11. 18.)
答 劉通判 彦冲(一)
스님이 말한
恰恰用心時(흡흡용심시)에, 恰恰, 흡족하게 마음을 쓸 때에,
아~ 어디에도 거리낌 없이 쓰는 것이 恰恰입니다.
恰恰無心用(흡흡무심용)이니, 恰恰히 무심히 쓰니,
曲談은 名相勞(곡담명상노)요 直說은 無繁重(직설무번중)이라.
曲談은 = 굽은 말은, 설명이 아주 장황하고 긴 것은 名相만 수고롭혀요.
그리고 直說은 無繁重이라. 바른 소리는 繁重함이 없어요.
無心恰恰用(무심흡흡용)호대,
無心이 恰恰히, 무심하면서 흡족하게 쓰되, 아주 흡족하게 쓰되,
常用恰恰無(상용흡흡무)니, 항상 써도 恰恰이 없음이니,
흔적이 없는 것이지요.
今說無心處(금설무심처)가, 지금 말하는 無心處가
不與有心殊(불여유심수)라함이, 유심으로 더불어,
(그쯤 되면 有心이니ㆍ無心이니 분별할 것이 없습니다.)
더불어 다르지 않다. 라고 한 것이
不是誑人語(불시광인어)리라.
이것은 사람을 속이는 말이 아니다. 말입니다. 제대로 체득한 사람은 이쯤 다 누리고 있다 이 말입니다. 누려야지요. 스스로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昔에 婆修盤頭가 常一食不臥하고 六時禮佛하며 淸淨無欲하야
爲衆所歸러니 二十祖闍夜多가 將欲度之하야
問其徒曰此徧行頭陀能修梵行이 可得佛道乎아
其徒曰我師精進이 如此어늘 何故로 不可리요
闍夜多曰汝師가 與道遠矣라 設苦行을 歷於塵劫이라도
皆虛妄之本也니라 其徒不勝其憤하야 皆作色厲聲하야
謂闍夜多曰尊者는 蘊何德行이관대 而譏我師어뇨
闍夜多曰我不求道호대 亦不顚倒하며 我不禮佛호대 亦不輕慢하며
我不長坐호대 亦不懈怠하며 我不一食호대 亦不雜食하며
我不知足호대 亦不貪欲이라 心無所希名之曰道라한대 婆修聞已에
發無漏智하니 所謂先以定으로 動하고 後以智로 拔也라
참 좋은 법문이 이제 나옵니다.
昔에 婆修盤頭(석바수반두)가 常一食不臥(상일식불와)하고,
바수반두라고 卅三祖師(삽삼조사)속에 들어있는 조사 스님이지요.
항상 一食不臥에 일종 식만 해요.
六時禮佛(육시례불)하며 淸淨無欲(청정무욕)하야
爲衆所歸(위중소귀)러니, 모든 대중이 전부 귀의한 바라. 그런데
二十祖闍夜多(이십조사야다)가
將欲度之(장욕도지)하야,
‘야~ 저 사람 참 열심히 정진한다. 그런데 아직도 소견은 틀렸어,’ 그래서
‘내가 저 사람 제도해야지’ 하고서
問其徒曰(문기도왈), 그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들 스님이 참 열심히 정진한다.
徧行頭陀(변행두타), 온갖 두타행은 빠짐없이 다 잘한다. 이 말입니다.
能修梵行(능수범행)이, 능히 범행을 닦는 것이
可得佛道乎(가득불도호)아? 불도를 얻겠는가?
그렇게 열심히 정진하는데, 그것가지고 불도 되겠나? 이랬습니다.
其徒가 曰(기도왈), 그 제자들이 말하기를
我師精進(아사정진)이 如此(여차)어늘,
우리 스승의 정진이 이와 같은데, 당신도 잘 알지 않느냐?
일 종식하지ㆍ六時禮佛하지ㆍ淸淨無欲하지, 그래서 온 대중들이 다 귀의하지, 우리 스님이 그 정도인데, 그런데 何故로 不可(하고불가)리요?
闍夜多가 曰(사야다왈),
汝師(여사)가 與道遠矣(여도원의)라. 그대의 스승은 도하고 멀다.
設苦行(설고행)을 歷於塵劫(력어진겁)이라도,
설사 고행을 塵劫동안, 진사 겁이 지날 때까지 한다하더라도, 수억 년을 한다하더라도 皆虛妄之本也(개허망지본야)니라. 다 허망의 근본이다.
其徒不勝其憤(기도불승기분)하야, 그 제자들이 그 憤을 이기지 못하고,
皆 作色厲聲(개작색려성)하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소리를 냅다 지르면서
謂闍夜多曰, 사야다에게 말하기를
尊者는 蘊何德行(존자온하덕행)이관대,
존자는 도대체 무슨 덕행을 쌓았기에
而譏我師(이기아사)어뇨? 우리스님을 이렇게 비판합니까?
闍夜多曰, 사야다가 말하기를,
이것 유명한 말입니다. 밑줄 쫙 그어야 되겠지요?
我不求道(아불구도)호대, 나는 도를 구하지 아니하되
亦不顚倒(역불전도)하며, 또한 顚倒하지도 않는다.
我不禮佛(아불례불)호대, 나는 예불도 아니해.
亦不輕慢(역불경만)하며, 그렇다고 부처님 한 번도 輕慢히 여긴 적 없다.
我不長坐(아불장좌)호대,
나는 한 번도 長坐한적이 없다. 시간되면 잘 때 잔다. 그렇다고
亦不懈怠(역불해태)며, 懈怠한 적도 한 번도 없다.
我不一食(아불일식)호대, 나는 일 종식 한 번 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亦不雜食(역불잡식)하며, 나는 雜食한 번도 아니한다.
어떤 스님 일종식한다고 해가지고 그냥, 그 스님 아이스크림을 워낙 좋아해서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다드렸더니, 시도 때도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고는 그냥 막 배탈이 나서, 그런 일도 있고요. 또 국수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잡수십니다. 그래요. 그런 것도 우리에게 다 교훈이지요.
我不一食호대 亦不雜食하며.
我不知足(아불지족)호대, 나는 知足을 몰라. 足한 줄을 모르지만
亦不貪欲(역불탐욕)이라. 또한 탐욕도 모른다. 탐욕도 하지 아니해.
心無所希名之曰道(심무소희명지왈도)라한대,
마음에 바라는 바 없는 것을 이름 해서 도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이 소리를 듣고는 얼른 가서 그대로 막 일러바쳤지요.
婆修聞已(바수문이)에, 그러니까 바수반두가 그 말을 얼른전해 듣고는
發無漏智(발무루지)하니, 無漏. 샘이 없는 지혜를 발했으니,
所謂先以定으로 動(소위선이정동)하고 後以智로 拔也(후이지발야)라.
먼저 선정으로써 움직여 놓고 뒤에 지혜로써 뽑아버린다.
아주 참, 근사하지요. 서장! 이 글이 정말, 그 전에는 그런 말, 말이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출출 문장입니다. 출출 문장. 나오는 것 마다 문장이라는 뜻인지, 하여튼 어려서 그런 말 들었습니다. 출출 문장이라. 문자를 잘 쓰면 그래요. 우리가 못 뽑는 것도 아까 이야기했듯이 그렇지요. 잔뜩 흔들어놓고, 나중에 싹 뽑으면 간단하게 뽑히지요. 그런데 흔들기도 전에 자꾸 뽑으려고만 하면 그것이 뽑혀지나요? 흔들어놓고 뽑아야지요.
스님들 신도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 딱 있으면 작전을 잘 써야 됩니다.
先以定으로 動하고 後以智로다. 하하하 아무것도 그냥 단숨에 되는 것이 없다고요. 대혜스님도 이런 수단을 쓰잖아요.
杜撰長老輩가 敎左右로 靜坐하야 等作佛하나니
豈非虛妄之本乎아 又言靜處에 無失하고 鬧處에 有失이라하니
豈非壞世間相하고 而求實相乎아 若如此修行인댄 如何契得懶融의
所謂今說無心處가 不與有心殊리요
請公은 於此에 諦當思量看하라 婆修도 初亦將謂호대
長坐不臥하면 可以成佛이라하더니 纔被闍夜多의 點破코사
便於言下에 知歸하야 發無漏智하니 眞是良馬가
見鞭影而行也니라 衆生의 狂亂이 是病이어늘
佛이 以寂靜波羅蜜藥으로 治之하시니 病去藥存이면 其病이
愈甚이라 拈一放一이어니 何時是了리요
杜撰長老輩(두찬장노배)가
敎左右로 靜坐(교좌우정좌)하야, 그대로 하여금 조용히 앉아서
等作佛(등작불)하나니, 부처 짓기를 기다리게 하나니,
豈非虛妄之本乎(기비허망지본호)아? 어찌 허망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又言(우언), 또 말하기를,
靜處에 無失(정처무실)하고, 고요할 때는 공부가 잘 돼.
鬧處에 有失(료처유실)이라하니,
시끄러울 때는 공부가 안 된다. 라고 했으니,
豈非壞世間相(기비괴세간상)하고 而求實相乎(이구실상호)아?
어찌 世間相을 무너뜨리고 實相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실상이 세간 상이고 세간 상이 실상인데, 세간에서 실상을 봐야 됩니다.
번뇌에서 보리를 봐야지, 번뇌에서 지혜를 봐야 되고요.
若如此修行(약여차수행)인댄,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할진댄
如何契得(여하계득), 어찌 계합하겠는가?
懶融(라융)의
所謂今說無心處(소위금설무심처)가, 지금 말하는 無心處가
不與有心殊(불여유심수)리요. 有心으로 더불어 다르지 않다. 라고 하는
이 도리에 계합할 수 있겠는가?
請公(청공)은, 청컨대 그대는
於此(어차)에, 여기에
諦當思量看(제당사량간)하라. 자세히 思量해서 보라.
婆修도 初亦將謂(바수초역장위)호대, 바수반두도 처음엔 장차 말하기를,
長坐不臥(장좌불와)하면 可以成佛(가이성불)이라하더니,
長坐不臥만 해도 성불한다. 라고, 이렇게 여겼어요. 그러다가
纔被闍夜多(재피사야다)의 點破(점파)코사,
막 사야다가 딱 점찍어주는 소리 한마디. 그것을 點破라고 그럽니다.
사야다가 딱. 그러니까 사실은 그것이 무르익었지요.
徧行頭陀가 헛한 두타가 아닙니다. 헛한 고행이 아니라고요.
그런 고행을 통해서 그야말로 그 한마디에 딱 깨닫게 된 것이고, 석가모니도 그렇지요. 6년 고행 했기에 1주일간의 선정이 효과가 있었지, 그 6년 고행 없이 그냥 일주일, 딱 보리수나무 밑에서 선정을 든다고 석가모니 같은 그런 경험이 있어지는 것 아니라고요. 그 고행이 헛한 고행은 아닙니다. 그런데 ‘고행만이 최선이다.’ 라고 이렇게 여겨선 안 된다는 것뿐이지요.
點破함을 입고서
便於言下(변어언하)에, 곧 언하에
知歸(지귀)하야, 돌아갈 줄을 알아서
發無漏智(발무루지)하니, 無漏智를 발했으니
眞是良馬(진시량마)가 見鞭影而行也(견편영이행야)니라.
참~~ 훌륭한 말은요? 채찍 딱 떨어지기 전에 그림자만 보고, 채찍 딱 드는 그 모습만 보고 그냥 천리를 달린다는 것이지요. 그래 공부하는 사람도 그렇게 공부해야 제대로 되는 것이지요. 이거 미련한 사람은 그냥 채찍이 수 10번ㆍ수 100번 떨어져도 달릴줄 모릅니다.
衆生의 狂亂(중생광란)이 是病(시병)이어늘
佛이 以寂靜波羅蜜藥(이적정바라밀약)으로 治之(치지)하시니,
부처님이 寂靜波羅蜜藥으로써 다스렸으니,
病去藥存(병거약존)이면,
병이 제거됐는데도 아직도 약을 남겨놓을 것 같으면
其病이 愈甚(기병유심)이라. 그 병이 오히려 더 심하다.
병 한 가지에 약이 천 가지라고요? 그 많은 약 중에 해당되는 약도 있지만, 약이란 것이 오히려 몸을 해치는 그런 경우도 더 많습니다.
拈一放一(념일방일)이어니, 하나를 잡으면 하나를 놓게 되거니,
何時是了(하시시료)리요? 어느 때에 마칠 수 있겠는가?
生死到來에 靜鬧兩邊은 都用一點不得이니
莫道鬧處에 失者多하고 靜處에 失者少니라
不如少與多와 得與失과 靜與鬧를 縳作一束하야
送放佗方世界하고 卻好就日用에 非多非少하며 非靜非鬧하며
非得非失處하야 略提撕看是箇甚麽니라
無常이 迅速하야 百歲光陰이 一彈指頃에 便過也니
更有甚麽閑工夫가 理會得理會失하며 理會靜理會鬧하며
理會多理會少하며 理會忘懷理會管帶리요
石頭和尙이 云謹白叅玄人하노니 光陰을 莫虛度하라하시니
遮一句子를 開眼也着하며 合眼也着하며 忘懷也着하며
管帶也着하며 狂亂也着하며 寂靜也着이니 此是徑山의
如此差排어니와 想杜撰長老輩는 別有差排處也리라
咄且置是事하노라
生死到來(생사도래)에,
생사가 이르러옴에, 죽음이 다다라 왔을 때, 이 말입니다.
靜鬧兩邊(정료양변)은,
고요하다느니 아니면 시끄럽다느니 하는 그것은
都用一點不得(도용일점부득)이니,
한 점도, 조금도, 눈곱만큼도 쓸모가 없다.
莫道鬧處(막도료처)에 失者多(실자다)하고,
만약 말하기를 시끄러울 때는 공부가 안 된다하고,
靜處에 失者少(정처실자소)니라. 고요할 때는 공부가 된다.
그런 소리하지 말라 말입니다.
不如少與多(불여소여다)와, 많은 것과 적은 것과
得與失(득여실)과, 득과 실과
靜與鬧(정여료)를, 靜과 鬧를
縳作一束(박작일속)하야, 한 묶음으로 묶어서, 한 덩어리로 만들어서
送放佗方世界(송방타방세계)하고, 타방세계에 던져버리고,
卻好就日用(각호취일용)에, 도리어 일용에
非多非少(비다비소)하며 非靜非鬧(비정비료)하며
非得非失處(비득비실처)에 나아가서
略提撕看是箇甚麽(략제시간시개삼마)니라.
간략히, 가뿐하게, 이런 말입니다. 가뿐하게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아무 것도 생기기 이전, 거기가 도대체 무슨 소식인가?
이것은 是甚麽하고 같은 것이지요.
無常이 迅速(무상신속)하야 百歲光陰(백세광음)이
一彈指頃(일탄지경)에 便過也(변과야)니,
참 빠른 것은 세월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마지막 강의시간이 됐습니다.
百歲光陰이 一彈指頃에 문득 지나가 버린다.
更有甚麽閑工夫(갱유삼마한공부)가, 다시 무슨 부질없는 공부가
理會得理會失(이회득리회실)하며, 得ㆍ失을 이해하고, 그 다음에
理會靜理會鬧(이회정리회료)하며, 靜ㆍ鬧를 이해하고,
理會多理會少(이회다리회소)하며, 多ㆍ少를 이해하며,
理會忘懷理會管帶(이회망회리회관대)리요?
忘懷ㆍ管帶를 이해함이 있겠는가? 말입니다. 그런 것 따질 시간이 도대체 어디 있어요? 부질없는 공부가 무슨 得ㆍ失. 靜ㆍ鬧. 多ㆍ少. 忘懷ㆍ管帶. 그것이 있느냐? 말입니다.
石頭和尙(석두화상)이 云 謹白叅玄人(근백참현인)하노니
光陰을 莫虛度(광음막허도)하라하시니,
하~ 이 다섯 자, 참 중요한 겁니다. “시간을 함부로 보내지 말라.” 부처님도 마지막에 방일하지 말라. 비구들에게 그랬습니다.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말라.
光陰을 莫虛度하라. 시간 함부로 보내지 말라.
遮一句子(자일구자)를
開眼也着(개안야착)하며 合眼也着(합안야착)하며,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항상 이마에 붙이고 살라 말입니다.
“시간을 함부로 보내지 말라.”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 인생을 좌우하는 겁니다. 똑 같이 부여된 시간이 하루 24시간이고,
1년 365일인데,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결국은 그 사람 인생을 좌우하는 겁니다. 우리 어릴 때 강원에서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 1년 지나면 달라져 있고ㆍ1년 지나면 달라져 있고ㆍ1년 지나면 달라져 있고, 쳐지는 사람은 계속 축ㆍ축ㆍ축ㆍ축 쳐지고, 앞으로 나가는 사람은 쑥ㆍ쑥ㆍ쑥ㆍ쑥 앞으로 나가고, 딴 길로 가는 사람은 영~~ 딴 길로 가있고요.
바른길로 가는 사람은 계속 바른길로 가고요. 야~~ 그것참, 그런 것을 오랜 세월 지켜보면 참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요는 같은 시간을 가지고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光陰莫虛度, 遮一句子를 開眼也着하며 合眼也着하며
忘懷也着(망회야착)하며 管帶也着(관대야착)하며
狂亂也着(광란야착)하며 寂靜也着(적정야착)이니,
어떤 경우라도 이 글자 다섯 구, “시간 함부로 보내지 말라.” 말입니다.
“시간 아껴라.” 그것을 붙일지니,
此是徑山(차시경산)의 如此差排(여차차배)어니와,
이것은 徑山 = 나 = 대혜가 이와 같이 차정안배. 이와 같이 배대하는 거다.
이와 같이 ‘지시한다.’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지도하라. 그렇지만
想杜撰長老輩(상두찬장노배)는, 아마도 杜撰長老들은
別有差排處也(별유차배처야)리라.
특별이 다른 가르침이, 다른 지도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말입니다.
딴 사람들은 틀림없이 달리 가르칠 거야. 그렇지만 내 앞에 왔으니, 내가 가르치니 나는 나의 형식대로 가르칠 수밖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咄且置是事(돌차치시사)하노라.
咄, 이쯤 해 둡시다. 그랬습니다. 이 일은 이쯤 해 둡시다. 그랬으니,
우리도 서장 공부 이쯤 해 둡시다.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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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