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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9일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제1독서 : 사도 10,34ㄱ.37ㄴ-43
제2독서 : 콜로 3,1-4
복 음 : 요한 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탈리아 과학자 새무엘 마코라는 럭비 선수들을 대상으로 탈진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마음이 근육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선수들은 최대 에너지의 80%에 해당하는 강도이자
평균 242와트의 전력을 생산하는 수준으로 약 10분간 사이클 페달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탈진한 상태가 확인되면 금전적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즉, 완전히 탈진해서 도저히 사이클 페달을 밟지 못할 상태가 될 때까지 타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그들은 하나둘씩 포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연구진은 딱 5초만 더 힘껏 페달을 밟아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5초 동안 그들은 평균 731와트의 전력을 생산했습니다.
마코라 박사와 그의 연구진은 선수들이 포기한 이유가
근육이 물리적으로 운동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노력이 최대치에 이르렀다는 자각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공감이 가는 연구 내용이었습니다.
최대로 노력했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포기하고 나면 그때가 되어서야 여전히 더 노력할 힘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지요.
이처럼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노력해도 안 된다며 좌절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힘을 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라.”라고 말씀하셨고,
특히 당신의 부활을 통해 충분히 용기를 낼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포기를 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고 다시 해 본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해도
포기했을 때보다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당신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신 가장 힘센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커다란 슬픔을 맛봐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작용해서
사람을 피해 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무덤을 비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렇게 힘센 분과 함께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통과 시련 속에서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다시금 힘내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매 순간 부활의 기쁨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부활 축하드립니다.
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축하할까요?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주님께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일까요?
제자들에게는 주님의 부활은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살아서도 영원히 살고, 죽더라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좋은 추억과 기억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은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치유된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마귀 들렸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 기쁨입니다.
세리, 창녀,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기쁨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죽더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모님에게도 기쁨입니다.
죽었던 아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받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기쁨입니다.
다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은 놀라움이며, 기쁨입니다.
믿을 수 없는 꿈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023년 부활입니다.
부활은 축하해야 할 사건이고, 기뻐해야 할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희랍어로 부활은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일어나야 할까요?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 있을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활은 20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삶으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났습니다.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일어났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숨어 있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이야기를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셨던 곳입니다. 많은 이적과 표징을 보여주셨던 곳입니다.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던 곳입니다.
가파르나움,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 절름발이, 소경, 세리, 죄를 지었던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도 갈릴래아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움, 근심, 걱정, 절망, 아쉬움, 불평, 불만을 던져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편안하십니까?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
이제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다시금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도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거짓과 탐욕은 남아 있었습니다. 위선과 폭력도 남아 있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하지만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여인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거짓과 탐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위선과 폭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부활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이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은 변해 있었습니다.
내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박재찬 안셀모 신부
부활 축하합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이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와 그 가정에 충만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1970년대 일입니다.
3일 후 본당 성전 건립 기금을 지불하기 위해
현금을 찾아놓은 시골 본당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이 신부님은 혹시나 건축 대금을 지불하기 전에
이 많은 돈을 도둑맞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성체 분배를 마치고 감실에 남은 성체를 모시다가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옳지! 여기 감실에 두면 아무도 모를 거야!
여기야말로 가장 안전한 금고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기금을 모두 감실 안에 넣어두고는 종이에다가 이런 메모를 남겨두었습니다.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
이틀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삼 일 째 되던 날,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성당에 갔더니
감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감실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누가 감실 문을 부수고 돈을 몽땅 털어갔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자세히 감실 안을 보니,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라는
자신의 메모 아래에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시어 이곳에 안 계시는도다.??!!”
그 건축기금이 바로 예수님(?)이었나 봅니다. 삼 일째 되던 날 부활했으니 말입니다.
작년 부활 때, 코로나로 예수님께서 자가 격리를 해야 해서
부활이 2주 후에 온다고 하며 우스개소리를 하곤 했는데,
올해는 제때 에 여러분 마음속에 부활하셨는지요?
대답에 힘이 없는 것을 보니,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셨는데도
우리가 준비 안 된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 스스로가 만족하는 제대로 준비될 날을 기다리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년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주님 부활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정작 부활의 주인공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마음 상태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대한 우리의 마음 상태에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준비되었건 아니 되었건
이미 우리 가운데 부활하셔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곳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났건 못났건 이미 우리를 당신 피로 우리 모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지 않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 마음이 아직 예수님 중심으로 변화되지 못해서 그럴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마음이 아직 비워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아직 깨어나지 못해 주님을 알아 뵈올 수 있는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부활의 기쁨은 나의 감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은총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로움 입니다.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인간의 마지막 어둠인 죽음을
죽음으로 쳐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우리가 이제는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아직 준비가 못 되어 부활의 기쁨이 없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넘어
주님께서 나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그 자체로 함께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사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요 주춧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주님 체험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영원히 살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모진 박해 앞에 이내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믿기 어려운 것이 바로 죽은 이들의 부활이기도 합니다.
죽어보지 않은 우리로서, 그리고 죽은 이들은 여전히 무덤에 묻혀있고,
그 영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로서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토마스 사도처럼 그렇게 우리에게는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1서에서 이런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12-14. 20)
우리는 사도신경에서도 우리의 부활에 대해 고백합니다.
어디에 나옵니까?
그렇죠!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우리의 온몸과 온 영이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부활할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라고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부활에 대해
머리로 믿으려 애쓰지만, 마음에는 와닿지 않은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그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니까 죽지 않고 다시 사는 것이겠지!“라고 여기며
진정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요?
혹은 ’나에게도 예수님께서 짠! 하고 나타나시면 나도 사도들이나 여인들처럼 믿을텐데,
예수님이 많이 바쁘신가봐?‘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우리 자신의 부활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도 부활하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죽어야죠!“
그런데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잘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과 함께 죽기로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에 두지 못하고 우리 자신을 그 중심에 둘 때가 많습니다.
필요할 때는 주님을 찾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자신을 중심으로 내 뜻대로 살아갈 때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도 필요합니다.
영적인 죽음과 재탄생이 우리를 진정 주님 부활에 동참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영적으로 죽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빈 무덤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기억해 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와 얼룩으로 무덤처럼 되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깨끗이 치워 놓아도 어느 틈엔가 우리 마음속에 이기심의 벌레들이 기어 나옵니다.
이런 주검을 감추어 두는 무덤과 같은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것은 희망이 없는 듯한 시신과 같은 모습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 마음과 우리의 영을 깨끗이 정화해 주십니다.
그리고 은총이 충만해진 어느 날, 우리 마음이 텅 비어있는 듯
그러나 너무나도 충만한 날이 도둑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선행을 하는 것은 이날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때에는 오늘 복음에서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던 것처럼
우리 마음의 문이 사람과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질 것입니다.
무덤에 머물던 흰옷을 입고 앉아 있던 젊은 천사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마음은 착한 천사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예수님과 일상을 살았던 갈릴래아로 가서 주님을 만나라고 지시해 주었듯이
우리 마음의 착한 양심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뵈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에게 알려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무덤 안에 거하시지 않고,
우리 일상 속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뜻과 자신의 것에 대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무덤에서 나와, 일상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아 뵈올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는 은총을 오늘 우리는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을 함께 기뻐하고 감사드리며,
오늘 우리 자신의 부활을 위해 자신에 대해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청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상처와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새로운 눈으로 자신과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바라보며
여인들과 함께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사랑으로 전하도록 합시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주간 첫날”(1절), 오늘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당신의 탄생으로 인간의 탄생을 거룩하게 하신 분이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날, 부활하신 분과 함께 낙원이 열린다.
그 낙원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
그곳에 분명히 주님께서 묻히셨는데,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마리아는 시신이 없자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한다.
마리아는 무덤에 왔을 때, 아직 어둠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을 살핀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부리나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이 아마포와 따로 잘 개켜져 놓여있었다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보이는 현상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으로 얻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빠지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잠겨야 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이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보고’ ‘믿게’ 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 구체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지,
빈 무덤이나 잘 개켜진 수건과 같은 어떤 구실이나 단서를 찾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9절).
부활의 은총으로 새로이 창조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을 갈망하면서 부활을 숨 쉬며 살아야 한다.
부활을 숨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삶이 매 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 체험 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저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우리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형제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었던
한없는 사랑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 사랑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삶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의 삶을 이미 이 땅에 끌어내려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삶은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부활한 후의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연습, 아니 죽어야 한다.
죽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한 말과 같이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 선포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도 항상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전할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기뻐하고 경축하는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에서,
교회는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부활 이야기, 곧 빈 무덤 이야기를 선포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요한을 비롯한 복음사가들이
모두 전하고 있는 이 빈 무덤 이야기를 바탕으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 하였습니다.(1코린 15,3-5 참조)
빈 무덤 자체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입증하는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은 부활 사건에 대한 표징이자 증언입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님께서 무덤에 누워계셨다면
부활에 대한 복음 선포는 가능하지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빈 무덤의 발견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40항 참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베드로에 이어서
무덤에 들어간 뒤에야 보고 믿었습니다.(20,8 참조)
그가 본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빈 무덤입니다.
그러나 그는 빈 무덤을 보고, 이 징표를 통하여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 너머에 있는 실재,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부활의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인 신비 현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사람으로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절망과 죽음의 공간이었지만,
그 무덤은 생명과 희망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더 이상 어둠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비어있습니다.
예수님이 묻히셨던 그곳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요한 20,1-9 주님 부활 대축일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알 수도 없다.
제자들은 비어있는 무덤을 보고서야
예수님께서 되살아 나셨음을 믿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더이상 '죽은 이'들의 공간인
무덤에 계실 수가 없다.
그리고 이제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살아계신 분으로 존재하신다.
때때로
'죽은 이들의 공간'인 무덤으로 내려갈 때가 있다.
아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무것도 볼 수 없이
철저히 혼자 고립되어 있는 공간..
그럴 때를 돌아보면 어김없이 예수님도
내 곁에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만 같다.
내 마음이 무덤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예수님께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치우고
빛을 비추어 달라고 청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그러다 문득 이 '돌'을 치우는 것은
어쩌면 나의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 힘으로만 돌을 치우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무덤에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올리며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예수님과 함께 치우며
나 또한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해본다.
[출처] 요한 20,1-9 주님 부활 대축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