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ekers -The Last Thing On My Mind
어제 실로 오랜만에 양평 두물머리를 들러 오래전 추억이 있는 양평시내 남한강을 건너 집에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양평과 나의 인연은 73년 여름부터 시작한다. 당시 고1이었던 나는 동내후배로부터 교회에서
양평에 수양회가는데 같이 가자는 얘기를 듣고 마침 그교회를 다니는 큰형과 함께 양평에 가게 됐다.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갔는데 그때 남한강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를 지나게 되었고 나는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되어 한참을 바라보았고 언젠가 한번 오리라 했는데 이제서야 가보게 되었다. 일행중에는
나와 같은 고1여학생이 있었는데 그애 이름은 옥이었다. 사실 옥이는 통학버스안에서 나의 가방을 몇번
받아준 적이 있어 이미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기차안에서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다.
기차는 신원역에서 잠시 정차하였고 그때 옥이는 고2 형의 기타반주에 맞춰 양희은의 이루어질수없는 사랑을
불렀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청아한지 나는 넋을 잃고 듣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일행은 양평시내를 지나
미류나무숲이 울창한 강가에 텐트를 치고 여장을 풀고 모두들 푸르고 맑은 남한강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옥이의 손을 잡아주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그러다 옥이는 저녁밥을 차려야 한다며 먼저 올라갔고
나는 후배들과 한참을 더놀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옥이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저녁먹으라고 다가오는데
그애 등뒤로 붉은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그렇게 강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우리는 산속깊이 오지마을 개척교회에 가서 일박하고
산속에서 텐트치고 1박을 더하며 캠프파이어를 끝으로 양평에서의 꿈같은 4일간을 보냈다.
그여름이 가기전에 우리는 경인고속도로 건너 신정동으로 이사갔고 나는 교회도 안나가면서 교회앞에서
혹시 옥이를 볼수 있을까 얼쩡거리다 당시 6학년이던 옥이의 여동생을 만나 아는척했지만
정작 옥이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3년후 2월 고교를 졸업하고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집에 오는데 그교회 목사님 아들이자 형의 친구가
나를 보며 다가오면서 대뜸 니형이 죽었다고 이야기했다. 형은 용산역앞에서 사망한채 발견됐고
주머니안에 교회 전화번호가 있어 그형에게 연락이 간것이었다. 그형과 함께 집에가서 어머니께
그얘기를 하니 어머니는 그자리에서 쓰러지셨다. 형의 장례를 마치고 나는 그형에게 옥이는 지금도
교회에 나오냐고 물었더니 니형의 얘기를 듣고 엄청 울더라고 말하였다. 그후 나는 군대에 입대하고 병장때
T/S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목적지가 양평 용문이었다. 포천에서 우리를 태우고 출발한 M60트럭이
용문에 다다를 무렵 고개를 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트럭이 전복되었고 나의 몸은 트럭의 호로사이로 퉁겨져 한참을 날라갔다.
그짧은 순간 나는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기절도 안했고 죽지도 않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일어날수
없었고 기어서 보니 우리가 탄 트럭은 완전히 전복되었고 트럭사이 전우들의 하반신과 다리가 보이고
나처럼 퉁겨져 나온 전우들도 몇명보였다. 뒤이어서 군용 앰블란스가 도착하여 전우들을 태우고 갔고
나는 목적지인 용문에 도착해서 작은 군용텐트에 혼자 누웠지만 너무 아파 잠을 이룰수 없었다.
다음날 나는 용문에 있는 61연대 의무대에 보내졌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다행히 골절은 없었고 며칠후
대대장님이 찾아와 대대장님의 지프를 타고 함께 원대복귀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트럭에 탔던 8명의 전우중에
3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나를 제외한 4명은 헬기로 수도통합병원에 후송되어 치료후 모두 의병제대하였다.
나만 홀로 33개월 만기를 채우고 제대후 동작동국립묘지에 잠든 전우들의 묘소에 참배하였다.
돌이켜보면 고1때 그강가에서의 풋사랑의 추억이 나를 살린 것이다. 그후 옥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50년만에 찾아온 양평시내는 몰라보게 변했고 우리가 텐트를 치고 머물렀던 강가 미류나무도 모두 베어지고 없어
나는 강가를 바라보며 그시절을 회상하다 집에 돌아왔다
첫댓글 앗 ! 그용문산 트럭전복사고 알아요
그때 우리는 팀스프리트 훈련때
용문엔 통신관련
난 가설병이라 청평하고 홍천담당
아 당시 통신병이고 그사건이 이웃 사단에까지 더 전달이 되었군요
선탑자 둘은 구속되고 3명이나 죽고 4명이 중상을 입었으니 모를리 없었을겁니다
통신 가설병이라~~
군생활 제대로 한~~아주 수고 많이한 분입니다
바로 당사자 셨군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의병제대하면 원호대상자가 되었을텐데
그땐 몰랐습니다
3993 4154 지존 통화
고마워요 지금 목이 많이 부워 통화는 어렵고
진정되면 전화할께요 !
@그산 그래요
그리고 난 6군단 통신대 소속으로서 그당시 5군단 6군단 통합훈련이라서
첫 사랑의 추억이 있는 두물머리 양평 을다녀 오셨군요
끝내 말하지 못했던 옥이 와의 만남도 이루지 못 한채
두물머리 의 추억
간직 한 그산 님의
추억담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기차안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너무좋아
어제 모처럼 가봤는데 두물머리는 참 잘꾸며놨고
양평시내는 너무 많이 변해 그시절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약간 검은 얼굴에 양갈래머리를 한 옥이의 얼굴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60트럭 뒤에 타서 차가 전복되면 정말 위험하죠
에고!
운전병이 졸더라도 선탑자가 그걸 인지하고
통제해야 하는데 둘 다 졸았나 봅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반갑습니다. 출발전 트럭을 덮은 호로를 반호로로 바뀌어 틈새로
튀어나올수 있었습니다. 전체 호로를 다씌웠더라면 거의 다 죽었을 겁니다
운전병이 졸았고 선탑한 인사장교도 졸은거로 확인되어 영창에 갔는데
아마 그뒤 불명예제대했을겁니다
그렇게 장남을 떠나보내신 어머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저는 감히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차남인 그산님은 극적으로 살려주셨군요.
추억 속의 고운 소녀 옥이님 이야기도 애틋합니다.
두물머리는 제게도 추억 속의 장소로 자리매김한 곳이고
저 사는 의정부에서 그리 멀지 않아 종종 저 큰 느티나무와 강물을 보러 가곤 합니다.
단, 평일이라야 합니다.
주말에는 극심한 교통 체증 때문에 두물머리로 들어가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것도 극한의 인내를 필요로 하거든요.
그산님 오늘도 삶의 진정성이 가득 담긴 글 잘 보고 갑니다. ^^
반갑습니다. 어머니는 실신하셨고 아버지는 겉으론 태연한척하셨지만 주무시다가 뒷산에서 니형이부른다며 올라가신적도 있습니다.
어제 갈때는 서울을 경유했는데 오전이라 그런지 하나도 안막혔는데 올때는 길이 너무 막혀 양평을 들러 여주를 통해 다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충남 집으로 내려가니 엄청밀렸습니다. 그래도 숙제하나 한 기분으로 아주 개운하고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두물머리는 지나쳐만 봤지 어제처음 가봤는데 사람은 매우 많았지만 풍경이 정말 좋고 입구의 닭갈비집도 아주 맛있었습니다.
동행한 아내가 주중에 또오자고 합니다. 늘 정성가득하신 댓글 감사드리며 오늘도 즐거운 저녁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
구사 일생..
인간이 다 존귀하겠지만..
그산님은 특별히 귀한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남한강 그쪽으로 자연경관이 참 수려한데
서울 살때는 가끔 가보기도 했는데..이제 세월 흐르니..
가본지 십여년 된것 같고..ㅎ..남한강에 물안개 피어 오르면 참 멋집니다.
이포교..용문산쪽 으로 한번 가보고 싶군요...
반갑습니다. 제생애 꼭 가보고 싶은곳이 몇곳있었는데 어제 하나 해결하고 내려온 느낌입니다
사고후 용문사와 용문산은 몇번 올라가봤지만 양평읍내는 50년만에 처음 가봤습니다.
수십년만에 찾은 양평은 군데군데 전원주택이고 시내는 고층아파트들이 즐비하여 옛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양평뒤를 우뚝 버티고 있는 용문산만은 옛모습그대로
웅장하게 서있고 푸른 강물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용문산 정말 멋진곳이니
한번 가보시기 권해드립니다.
@그산 양평도 많은 변화가 있나 봅니다.
용문산은 사실 몇번 다녀왔는데..다시 가고 싶은 곳입니다.
625전사에 빛나는 용문산 전투의 현장이라
과거에 특별히 몇번 찾았었죠.
저도 전에 근무했던 군부대,다녔던 학교 등등
계획하여 방문하기도 합니다..짠~하죠..전 모습 볼 수없으니 더 짠~하고 세월 무상 느낍니다.
맛있는 저녁 드시기 바랍니다.
@가을이오면 수십년만에 찾아간 양평시내는 옛모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양평읍내와 많이 떨어져 있는 용문은 등산 하러 2번정도 갔었는데 커다란 은행나무와 산과 계곡은
그대로였구요. 장도영장군이 이끈 용문산전투는 한국전쟁 3대대첩의 하나로 일컬어집니다.
저는 8사단에서 근무했는데 부모님 산소가 한탄강너머로 옛부대앞을 지금도 자주 지납니다.
예전에 다녔던 학교나 군대 등은 마음속에만 있지 직접 들어가보지는 않았습니다
즐거운 저녁되시기 바랍니다 !
그리운 옛 추억 가득한 음악 그 시대 가수들 그리고 혈육을 잃은 온 가족의 아픔 청춘 시절적 옥이 생각 그런데 옥이는 왜 그 산님 돌아가신 형의 죽음 소식에 그렇게 울었을까요 그냥 좀 궁금해서 🤔 그리고 군시절 트럭 사고에서 다치지 않고 살아 나셨지만 글 속엔 아직도 사고의 트라우마가 지워지지 않으셨네요 지워질 수가 없겠지요 살아 날 운명이셨고 옥이씨와 돌아가신 형님도 지켜주셨으리라 믿고 싶네요 그 산님 음악에 잠기고 님의 인생 여정에 잠긴 시간이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운선님의 댓글을 보고 문득 옥이가 보고 싶어집니다. 형과 옥이가 다녔던 그교회는
지금도 그자리에 있을겁니다. 형의 친구였던 목사님 아들이 지금도 그교회에 계실테고 독실한 신자였던
옥이의 전번도 알고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형은 이사온 후에도 그교회를 계속다녔고 과묵하지만 모두에게
잘해주는 사람이라 옥이가 형을 많이 따랐을겁니다. 위 노래는 팝의 명곡으로 많은 가수가 리바이벌했고
국내에서는 산이슬이 마지막남은것이란 노래로 취입했는데 이노래를 들으면 그때 그강가가 생각납니다
https://youtu.be/eCbYHf8iX3k?si=icqIh7-5bEa3C48I
PLAY
@그산 산이슬 노래 이 새벽 잘 들었습니다 저의 20대 방황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노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운선 감사합니다. 저도 이노래로 그리움을 달랬었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
그산님의 추억이
참 애잔합니다.
초6인 옥이동생을 만났을때
용기를 좀 내서 물어보셨으면 좋았을텐데요.
그리고
형님의 죽음과
트럭이 전복되는 대형사고는
너무 충격적이구요.
트라우마는 없으신지요?
젊은시절에 남들은 경험하지 않은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보내셨네요.
지금 같으면 바로 제대했을텐데
33개월 복무 하신 것도 좀 억울해요.
반갑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회앞에서 양평에 같이 갔던 후배를 만나 옥이 나왔냐고 물으니
안나와서 동생을 소개해줬던것 같아요. 형이 떠난후 한동안 골목길에 서있는것 같아 무서웠습니다
사고후유증으로 피곤하면 등이 아팠고 20년정도 증상이 있었습니다. 공무원할 생각에
끝까지 근무했는데 원호대상자가 더 혜택이 많다는걸 몰랐습니다
제대후 일이 안풀릴땐 그때 죽었으면 부모님에게 원호혜택을 드릴수 있었는데
한탄한적도 많았지요.
@그산
토닥토닥요.
사고 후유증이 무서운데
그때는 그걸 몰라서 고생고생 하셨네요.
제 조카가 군에서 허리를 다쳐서
의가사?제대를 했고
지금 공무원인데 매달 유공자연금도
따로 나오더군요.
그산님의 지난세월이 만만치 않으셨지만
이런저런 일들이 그산님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을듯요.
늘 힘내시고 파이팅해요^^
@제라 감사합니다. 그때는 죽거나 외형적으로 다치지 않아 감사하다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고지식했습니다. 그런데 제아버지도 호국원에 이장하려고 병적증명띄어 보니
6.25때 의병제대했는데 원호신청을 안하셨더군요. 고지식한건 부전자전인것 같습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오늘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
이름도 이쁜 옥이라는 소녀.
저같으면 백방으로 한번 찾아볼텐데요.
경치좋은 두물머리와
옥이.
한 편의 수채화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도 그애의 이름 석자와 얼굴 모두 또렷이 기억납니다
교회앞에 가면 만날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몇번 찾아간 적이 있는데
결국 못만났고 우리는 또 소사로 이사갔습니다.
지금생각하면 너무 시련이 많았지만 꿈을 잃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안고 사시네요.
반갑습니다. 아름답다기 보단 가슴아픈 젊은날의 추억들이었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