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연합회 임제록 제1강-1 (2012.06.28)
좋은 시절이 된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우리 불교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스님들도 임제록을 대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모든 분야가 다 개방되고, 또 자유스러워지고 해서 출판 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정보 전달이 원활하다 보니까 책을 구하기도 쉽고, 만들기도 쉽고, 그래서 또 이러한 임제록을 강설하는 이러한 기회까지도 우리에게 이렇게 가까이 왔습니다. 참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임제록 강설을 듣겠다고 신청하신 스님들이나 우리 일반 불자님들께서 아마 임제스님을 어느 정도는 좀 알고 계시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감히 “임제록 강설이라.” 이것을 뭔 소린지 몰라서도 쉽게 올 수가 없는 그런 일인데, 이렇게 뜻밖에 많은 분들이 신청을 하시고, 동참을 하셔서 제가 부족한 강의지만 강의하는데 아주 상당한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많이 동참 하셔서 고맙고, 하루 두 시간 남짓 여섯 시간 동안 임제스님의 정신을 우리가 어느 정도라도 이해를 이해해서 그것이 불교를 이해하고ㆍ내 개개인의 인생하고ㆍ세상을 이해해서 참으로 불교가 지향 하는바 해탈. 해탈 감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돼야 되겠다 싶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제스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殺佛殺祖라고 해서, 부처님에게도 우리가 매달리지 않고, 조사에게도 또한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부처님을 뛰어넘고, 조사님을 뛰어넘는 그런 당당한 자주성으로써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가르침이라면 우리가 거기에서 또한 정말 이 좋은 세상에 걸 맞는 우리 개인의 인생도 아주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어떤 힌트를 임제록에서 얻는다면 충분한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임제스님을 한 마디로 이렇게 평 합니다.
“임제이전에 임제 없고 임제이후에 임제 없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 도대체 무슨 소리냐? “임제이전에 임제 없고 임제이후에 임제 없다.” 누구나 마찬가지지요. 무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비이전에 무비 없고 무비이후에 또 무비 없습니다. 그러나 임제스님을 두 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2700년의 길고긴 불교 역사 속에서, 5ㆍ6000년의 인류역사 속에서 정말 인간의 당당한 그 자주성을 드날린 가르침으로서는 세상에 임제스님 같은 이가 없다. 부처님도 거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 어떤 선불교의 많은 조사스님들도 거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 사람을 칭찬하는데 그 보다 더 뛰어난 칭찬은 없습니다.
“임제스님 이전에는 임제 없고 임제스님 이후에도 임제 없다.”
길고긴 역사 속에, 많고 많은 성인들이 명멸해 간 그 역사 속에서 오로지 임제스님만이 우뚝 높이 솟은 태산준령이다. 이런 표현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임제록을 제대로 이해를 하면 불교 역사 속에서 참으로 ‘임제스님 같은 이가 없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임제스님의 그 위상을 나눠드린 유인물을 통해서 잠깐 살펴보고 임제록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一.傳燈系譜 = 法脈 世尊 -- 1 迦葉. 2 阿難. 3 商那和修 …… 28 達摩 東土→ 1 達摩. 2 慧可. 3 僧璨. 4 道信. 5 弘忍. 6 慧能. 7 南嶽. 8 馬祖. 9 百丈. 10 黃蘗. 11 臨濟(38祖). ←가섭부터 38조 임제스님 밑으로→ 1 興化. 2 南院. 3 風穴. 4 首山. 5 汾陽. 6 慈明. 7 楊岐. 8 白雲. 9 法演. 10 圓悟. 11 虎丘(一派, 大慧). 12 應菴. 13 密菴. 14 破菴. 15 徑山師範. 16 雪岩. 17 及菴. 18 石屋. 19 太古普愚. 20 幻菴. 21 龜谷. 22 碧溪. 23 碧松. 24 芙蓉. 25 淸虛(一派, 浮休)(63祖) |
임제스님, 그리고 또 현재 우리가 불교를 믿으면서 이 자리에 있기까지의 그 역사적인 내력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傳燈系譜(전등계보)를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맨 처음에 우리는 석가세존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가섭존자, 아란존자, 상나화수, 이런 식으로 쭉~~ 불법이 대를 이어 내려오고, 28조 달마스님에 이르렀습니다. 달마스님이 東土에 와서 혜가스님 - 승찬스님 - 도신스님 - 홍인스님 - 6조 혜능스님으로 이렇게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남악 - 마조 - 백장 - 황벽, 그 다음에 11대 임제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으로부터는 38대 조사가 되고,
우리에게는 그 이후에 임제스님 제자로써 흥화존장 - 남원도옹 - 풍혈연소, 태고보우를 거쳐서 이렇게 해서 끝에 보면 우리 귀에 익숙한 청허스님에게 까지 이르러 오는 그런 임제스님의 법맥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선과 임제선의 문제라고 해가지고 임제스님은 한국불교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가? 그동안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기에 “임제이전에 임제 없고 임제이후에 임제 없다.” 고 이렇게 이 세상에서 찬탄할 수 있는 말 중에서 최고의 극찬을 할 수 있는가? 이 참고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편양언기스님의 문집에 있는 이야긴데요.
韓國禪과 臨濟禪의 문제 1. 不失臨濟者는 有本有原이라 吾東方太古和尙이 入中國하야 嗣石屋而傳之幻菴하고 幻菴傳之小隱(龜谷)하고 小隱傳之正心(碧溪) 하고 云云 --(鞭羊集권2) 2. 太古愚公이 入中國得佛旨하야 以還于東하야 到師八葉이니 實臨濟之正宗이니라 --(碧溪 碑 -- 법주사) 3. 芙蓉靈觀이 接臨濟之遺緖하니 浮休與淸虛休靜은 俱事靈觀하니라 --(또 다른 碧溪 碑) 4. 太古는 嗣石屋而傳之幻菴하고 幻菴傳之龜谷하고 龜谷傳之正心하 고 正心傳之智嚴하고 智嚴傳之靈觀하고 靈觀傳之西山하니 此實臨濟之正脈而惟西山이 獨得其宗이라--(休靜 碑) 5. 臨濟十八傳而爲石屋하니 太古得石屋之傳이라 自是로 又六傳而至吾師하니 其源流之遠이 如此니라 --(대흥사 淸虛 碑) 6. 臨濟後二十四世에 有嫡孫曰浮休니라 --(浮休碑 - 白谷集 권2) 7. 龜谷衣冠膚(핏줄, 혈통)는 去爲臨濟孫이로다 ---(哭龜谷詩 -- 牧隱) |
1. 不失臨濟者(불실임제자)는, 임제스님의 정신을 잃어버리지 아니한 사람은 그야말로 有本有原(유본유원). 근본이 있다. 그리고 근원이 있다.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고 참선을 하든지ㆍ경을 보든지ㆍ염불을 하든지ㆍ기도를 하든지, 임제스님의 근본정신ㆍ임제의 宗旨(종지). 임제의 宗旨를 잃어버리지 아니해야 그 사람은 불교에서 근본이 있는 사람이다. 사회에서도 “근본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합니다. “아~ 저 사람은 근본이 있는 사람이다.” 제대로 가정교육이 있고, 배운바가 있고 사람으로서 정신이 똑 바로 배긴 사람은 저 사람은 근본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불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 안에서도 근본 있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불교인으로서 근본 있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소리를 만약 들으려면 임제의 물이 튀어가야 됩니다. 임제의 핏방울이 튀어가서 임제의 피가 우리의 정신 속에 흘러야 된다 하는 뜻입니다. 임제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튀지 않은 사람은 “불교의 근본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吾東方太古和尙(오동방태고화상)이 入中國(입중국)하야,
우리나라 태고 화상께서 중국에 들어가 가지고
嗣石屋而傳之幻菴(사석옥이전지환암)하고, 석옥청공 스님의 법을 잇고, 그 다음에 幻菴傳之小隱(龜谷)하고, 환암스님에게 전하고, 환암스님은 다시 龜谷(구곡), 小隱傳之正心(碧溪)하고, 소은구곡에게 법을 전하고, 소은스님 또 벽계정심 선사에게 법을 전했다. 이렇게 까지 편양언기 스님 문집에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이런 것을 소개 하는 이유를 제가 말씀을 드리지요. 그 다음에 두 번째
2. 太古愚公(태고우공)이, 태고보우선사가
入中國得佛旨(입중국득불지)하야,
중국에 들어가서 佛旨를 얻어서, 부처님의 근본취지를 얻어가지고,
以還于東(이환우동)하야, 동쪽으로 돌아왔어요.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왔어요. 그래서 到師八葉(도사팔엽)이니, 8엽에 이르렀습니다. 그 스님의 제자 순서로써 여덟 번째 이르렀는데, 實臨濟之正宗(실임제지정종)이니라.
실로 臨濟之正宗이다. 그랬습니다. 임제스님의 바른 맥을, 또 임제스님의 그 宗禪을 이어 받은 사람이다. 이것이 법주사 있는 벽계정심 선사의 비석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3. 芙蓉靈觀(부용영관)이 接臨濟之遺緖(접임제지유서)하니,
임제스님의 진짜 법문은 감히, 핵심이 되는 법문은 감히 우리가 얻을 수가 없고, 遺緖, 말하자면 부스러기들. 법문 중에서 다 거둬가고 남은 부스러기 같은 것들. 이런 것만 얻었다. 그렇게 겸손하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임제스님의 핵심을 얻었겠지요. 그렇지만 겸손하게 표현하는데, “나는 그 핵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 나머지, 버리고 남은 그 遺緖를 접했으니, 얻었으니 浮休與淸虛休靜(부휴여청허휴정)은, 부휴와 청허휴정은, 청허휴정선사, 서산, 사명 이런 이들이지요? 俱事靈觀(구사영관)하니라. 모두 영관스님을 섬겼다.” 이랬습니다. 이것 또한 벽계스님의 비석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 밑에도 전부 그런 내용인데요. 무슨 어디에 비석. 누구의 문집. 이런 것을 쭉~~ 이야기하는데, 전부 임제스님의 이야기를 거론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상 훌륭한 스님은 임제스님 피가 흐르고 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임제스님 피가 흐르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불교인으로서 근본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임제스님의 정신을, 또는 임제사상을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그 동안은 우리가 사실은 불교인으로서 근본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이기도 하지만, 그나마 이런 소리라도 듣는 사람은 이제 조금 임제스님의 그 정신의 피가 내 정신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는 불교적 근본이 성립이 되는 것이지요.
그 동안 우리는 불교근본이 없습니다. 절에 아무리 시주를 많이 했고, 금강경을 여러 수천 번을 읽었고, 법화경을 아무리 많이 공부를 했고, 했다 하더라도 이 선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임제스님의 사상을 배우지 아니했다면, 그 동안 불교인으로서 근본이 없다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피가 우리 혈맥을 통해서 흐르기 시작하고 비로소 임제스님의 정신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전부 그런 것을 증거로 갖다 대놨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어느 큰스님이 계셨다. 그리고 그 스님은 임제스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만약에 임제스님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아니다. 아무리 “큰스님ㆍ큰스님.” 하고 자랑해도 임제스님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이어받지 못했으면 그 사람은 큰스님이라고 할 가치도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유수한 사찰에, 역사가 있는 그런 사찰에 큰스님들의 碑가 많은데, 그 비석을 보면 전부 “임제스님의 몇 대손이다ㆍ임제스님의 몇 대손이다ㆍ우리 스승은 임제스님으로부터 몇 대손이고, 나는 그 스승의 제자다.”이런 식으로 전부 임제스님 앞으로 줄을 섭니다. 소위 요즘 표현으로 하면 전부 임제스님 앞으로 줄을 댑니다.
그래서 “임제스님과 줄이 닿지 아니한 불교인은 불교인이라고 할 것도 없다.” 이렇게 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놀랍지요. 여러분은 이 임제록.
짧은 여섯 시간이지만, 임제록과 관계를 맺는 이 순간이 어찌 보면 불교인으로서 정말 아주 획기적인 그런 시간이 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그런 시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가? 이렇게까지 찬탄해 마지않는 임제스님이 본 불교라고 하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불교하고 전혀 달라요. 완전히 내려놔야 됩니다. 정말 새롭게 알아야 됩니다. 그런 불교입니다. 그러나 정말 불교의 안목이 있었던 과거 조사 스님들은 한결같이 임제스님이야말로 진정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고, “나는 그 불교를 배워서 나도 불교인으로서 근본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 동참을 정말 잘하신 그런 입장이 되겠습니다.
임제스님의 역사적인 그런 이야기는 무슨 사전이나 다른 것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임제스님의 스승인 황벽스님이 있는데, 그 황벽스님께서 임제스님에게 가르친 것이나, 그 외에 다른 스님에게 가르친 것이나, 말하자면 우리가 먼저 하나의 그 열쇠를 여기서 하나씩 갖게 된다면, 이런 열쇠를 나눠드리면 이 임제록이라고 하는, 임제스님의 불교정신이라고 하는, 이것을 여는 좋은 열쇠가 되지 않겠나? 이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열쇠를 하나씩 나눠드리는데, 그 열쇠로써 임제스님의 가르침을 여는 겁니다.
임제스님의 가르침을 여는 이 일은 말하자면 불교의 眞數를 여는 일이고,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가를 열고, 그 창고 속에 들어가서 우리가 보물을 한껏 체취 해 갈수 있는 그런 길이 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잘 아시는 분도 계시겠습니다만,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황벽선사가 배상국이라고 하는, “상국” 벼슬을 하는, 배휴 라고 하는 불교역사에서 아주 뛰어난 그런 거사분인데, 그 분을 깨닫게 한 사건입니다. 그 간단한 이야기하나 우리가 머리에 두면, ‘아~ 이 선불교에 있어서ㆍ참선불교에 있어서 어떤 안목이라고 하는 것. 불교를 보는 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ㆍ불교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길이구나.’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불교하고는 전혀 다른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니 배휴라고 하는 상국 벼슬이라면 뭔 말인가? 하니 정승입니다. 정승정도 됩니다. 국무총리쯤 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이 어느 작은 사찰에 갔어요. 그 지방에 부임해 가서 쭉~~ 사찰 구경을 합니다.
옛날에 동래부사로 부임하면 으레 범어사에 올라옵니다. 범어사에 올라와서 여기저기 기웃 거리고 자기 이름 새겨놓고, 거기에 연유된 이야기들이 또 무수히 많지요. 그와 같이 이 배휴라는 사람도 사찰에 올라와서 여기저기 기웃기웃 하면서 구경합니다. 그러다가 祖師閣(조사각)에 들어갔습니다.
祖師閣에 들어가니까 역대 고승들의 진영, 그림이 쫙~~ 걸려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구경다가 그 안내하는 주지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에 고승들의 사진은 이렇게 있는데, 그림은 이렇게 있는데 고승은 어디에 갔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고승들의 얼굴 그림은 여기에 이렇게 걸려 있건 만은 이 사람들이 지금 어디 갔느냐?ㆍ어디 갔느냐? 우리가 정말 한번 생각해 볼만한 일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주지스님은 대답을 못했습니다. 상당히 수준 높은 질문이잖아요. 그래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니까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절에는 없느냐? 그렇게 물으니까, 여기에 며칠 전에 어떤 객스님이 한분 와 계시는데 그 스님이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그 스님을 불러서 물어 보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 객스님이 마침 임제스님의 스승인 황벽스님입니다. 임제스님의 스승 되는 황벽스님입니다. 그래서 황벽스님이 안내받아 갔습니다.
가서 주지 스님이, “이러고저러고 해서 나한테 이런 질문을 했는데 나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스님이 혹시 대답할 수 있으면 대답을 좀 해주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 배상국, 배휴가 황벽스님에게 묻습니다.
황벽스님에게 똑 같이 물어요. 주지스님에게 물었듯이 그대로 똑 같이 묻습니다. “여기에 역대 조사스님들의 진영은 이렇게 즐비하게 있건 만은 이 사람들이 지금 어디 갔습니까?”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 배휴를 보고 황벽스님이 “배휴~~” 하고 불렀습니다. 그 사람 이름이 배휴니까 “배휴~~” 하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엉겁결에 배휴가 “예~~” 하고 대답을 합니다. 엉겁결에 “예~~” 하고 대답을 합니다. “바로 여기 있구나.”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바로 여기 있구나 하고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조사 스님들의 진영이 있고, 그 조사 스님들의 개개인이 어디 가 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중심이지요.
내가 정신이 살아있을 때ㆍ내가 나를 지키고 있을 때, 모든 역대 조사스님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많은 부처님이 그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너도 있고ㆍ나도 있고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내가 정신을 잃고 있다면ㆍ내가 내 주인공을 놓치고 있다면 천하에 살아있는 부처님이 수백 명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하고 관계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임제록교재의 표지에 보면,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 이런 말이 있지요.
隨處作主 立處皆眞. 그걸 여러 번 써놨지요? 이 역시 임제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隨處作主라. 어디에 있든지, 곳을 따라서 내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주인노릇을 하라ㆍ주인노릇을 하라. 내가 어디에 있든지 주인노릇을 할 때만이 과거에 역대 조사스님이든ㆍ과거 불보살이든, 전부 함께 살아서 이 자리에 동참하고 있다. 역대 조사든 諸佛諸祖든 할 것 없이 모두가 여기에 함께 살아있는 것이지, 내가 隨處作主가 안 되면ㆍ내가 내 주인으로써 내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사진이 아무리 있고, 산사람이 아무리 있다한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억지로 해석을 하자면 그렇습니다. 이것 뭐 엉터리 해석입니다.
‘엉터리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석함으로 해서 그 진실에 조금이라도 접근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엉터리 해석이지만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배휴~~” 하고 부르니까 “예~~”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럴 때 “아 여기 있구나ㆍ고승이 바로 여기 있구만.” 그랬습니다.
그 말에 배휴도 크게 깨달았습니다. 깨닫고는 평생을 황벽스님을 스승으로 모신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임제록을 푸는, 임제스님의 불교를 우리가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 꼭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것을 항상 가지고... “이것이 바로 隨處作主라고 하는 의미와 임제록을 바로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 임제록은 그 차례를 보면
序文(서문)이 있고,
上堂(상당)이 있고,
示衆(시중)이 있고,
勘辨(감변)이 있고,
行錄(행록)이 있고,
塔記(탑기)가 있고, 이렇게 중요한 것이 여섯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序文은요? 불교의 序文내지 중요한 글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서문입니다. 옛날에 선방에 방부를 들일 때, 선방 앞에 가서 큰 소리로 임제록 서문을 외웁니다. 큰 소리로 임제록 서문을 외우고 있으면 무사통과입니다. 그 사람은 물어볼 것 없어요. 무조건 선방의 방부 O K입니다. 그런데 임제어록서문을 외울 줄 모르면 방부 안 받아주는 그런 예가 있었습니다.
黃檗山頭(황벽산두)에 曾遭痛棒(증조통방)하고
大愚肋下(대우늑하)에 方解築拳(방해축권)이로다. 하는 이것을 척~~ 가서... “객스님이 와서 선방에 방부 들이려고 합니다.” 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 문둥이가 어딨어요?
그냥 黃檗山頭에 曾遭痛棒하고 大愚肋下에 方解築拳이로다.
이렇게 임제록 서문을 쫙~~ 문 앞에서 큰 소리로 외우면 ‘야~ 이거 공부 하는 사람이 하나 왔구나ㆍ이 사람 정말 공부 인이 왔구나.’ 이렇게 하고 그냥 무조건 받아줬던 그런 참 아름답던 풍속이 선방에는 전해졌습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신분이 뭐냐? 어디서 왔느냐? 누구 상좌냐? 나이는 몇 살이냐? 본사가 어디냐? 이것은 정말 학인들이나 하는 일이지, 선방에서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게 차원이 달라요.
이 序文을 살펴보면 임제록 전체에 대한 내용을 아주 압축해가지고 序文에다가 이렇게 모아 놨는데, 이것은 천하의 명문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어지간하면 이것 외우세요. 외우면 아주 참 외울 가치가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序文을 낱낱이 해석할 겨를은 없고, 그 다음에 넘겨서 10페이지 보겠습니다.
|
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