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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1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제1독서 : 사도 2,36-41
복 음 : 요한 20,11-18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한 학부모가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철수가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놀지 않고 책만 봐요.
계속 저러면 나중에 왕따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 아이에게 잘 말해서 친구들과 놀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2) 왜 혼자 책을 읽냐면서 아이를 나무랍니다.
3) 이런 전화를 왜 하냐면서 선생님께 화를 냅니다.
아마 1번을 선택하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번은 분명히 정답이 아닙니다.
왕따당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왕따시키는 것이 잘못일까요?
친구와 놀지 않고 책만 보면 왕따당할 수 있다면서
마치 아이의 책 읽음이 잘못된 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왕따시키는 아이의 잘못이 아닌, 왕따당하는 아이의 평소 행동 때문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1번으로 늘 유도합니다.
사실 피해자 중심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면서 그 원인을 제공했을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약자인 피해자 중심에 서야 분명히 문제 해결의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는 피해자 중심이 아닌 가해자 중심의 세계였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른 사람이어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것이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인 병자와 창녀 그리고 과부 등의 사람은
죄가 많아서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당시에 죄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 편에 서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커다란 사랑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사랑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주님 말씀을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까지 받습니다.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편에 서는 사람만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칠 때,
우리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부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 마리아의 사랑이야기 2탄입니다.
사랑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 준비되고 이루어진 곳도 동산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사랑으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또다시 동산에서 사랑으로 부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그렇게 에덴동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두 제자는 이미 돌아갔건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울다”의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소리로 통곡하여 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사랑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무덤을 들여다보고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두 천사를 봅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요한 20,12)
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무엇인가를 도와달라고 하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러기에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고 ‘눈이 열리어’(루카 24,31)야 할 일입니다.
그분은 나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는 당신이 더 이상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모르는 낯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활은 다름 아닌 사랑의 승리이며,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은
예수님처럼,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미국에서 처음으로 혼배 주례를 부탁받았습니다.
저는 이번 혼배 주례를 부탁받으면서 우연이 필연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작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였습니다.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 되면서 형제님은
시카고를 경유 해서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를 탑승하게 되었습니다.
옆 좌석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이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시카고에서 내려 뉴욕으로 갈 때 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옆의 책 읽던 여성이 친절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짐을 다시 찾아서 부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성과 5분 정도 짧은 대화를 했지만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 메일을 주고받고 가끔 연락을 했는데 그 여성도 친절하게 답을 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한다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음악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된 아들과 여성은 음악회를 같이 갔고,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약혼식을 하고, 뉴욕에서 혼배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선택이 필연이 아닌 우연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책을 가까이하고,
낯선 이웃에게 친절함을 보여준 여성의 따뜻함입니다.
그 여성의 따뜻함을 알아보았던 아버지의 안목입니다.
그럼, 저와는 어떻게 연결이 되었을까요?
저는 지난 사순시기에 오타와, 토론토, 뉴욕, 뉴저지에서 사순특강을 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 오타와는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여정이었습니다.
사순특강을 듣기 위해서 저를 기다리는 오타와의 교우들의 눈망울이 선합니다.
규모가 크지 않아서 사순특강을 들을 기회가 적었다고 합니다.
30여 명이 사순특강을 들었고, 고맙게도 신문 구독도 해 주었습니다.
과묵하지만 속이 깊은 토론토 신부님은 사제관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서재에 있는 책을 선뜻 빌려주었습니다.
뉴욕의 퀸즈성당은 특강 전에 십자가의 길, 성체강복이 있었습니다.
특강은 미사 중에 하였습니다.
덕분에 매주 금요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뉴저지에서 사순특강을 하였습니다.
강의를 듣던 형제님은 제게 아들의 혼배미사 주례를 부탁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혼배 주례를 하면 아이들에게 더 큰 축복이 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신랑과 신부를 위해 혼배 주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사순특강을 들었던 형제님은 처를 처음 보았는데도
아들과 며느리를 위한 혼배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인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5월 6일 하느님 앞에서 부부가 되려는 요한과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설교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고, 신자가 삼천명 가량 늘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물위를 걷다가 빠졌던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꾸지람을 듣던 베드로입니다.
절망 중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베드로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갈릴래아에서 낚시를 하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무엇이 베드로의 마음을 바꾸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를 품어주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따듯한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시카고를 경유하는 뉴욕행 비행기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보통은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타고 내리는 것이 비행기입니다.
그런데 따뜻한 마음과 마음이 만나니 우연은 필연이 되어서
젊은이들이 부부가 되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비록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 중에 있다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교만과 욕망 중에 있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해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시카고 경유 비행기가 아닌
빈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의 간절함이 있다면,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자캐오의 간절함이 있다면
봄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는 꽃을 보듯이,
우리는 주님 부활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려는 이에게만 나타나시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도 예수님께서 부활할 것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타락의 소굴에서 건져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다 보면 믿어집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믿으면 사랑하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알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사랑을 떠받치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원하고 믿는 일은 사랑을 높이기 위한 목적입니다. 물론 믿어지면 더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랑하려는 자에게 믿음을 가장 먼저 주십니다.
영화 ‘라이언’은 어린 시절 기차에서 잠들어버린 다섯 살 인도 소년 꼬마 라이언이
호주에 입양되었다가 다시 어머니를 찾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다섯 살 꼬마 라이언은 형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석탄을 훔쳐
엄마에게 우유를 사다 드리는 것이 유일한 놀이이자 즐거움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형이 나갈 때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졸랐지만,
잠이 너무 쏟아져 형은 동생을 업고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차역에서 잠깐 자라고 하고 절대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라이언은 잠을 자다 일어났고 형을 찾아 어떤 기차에 올랐는데
거기서 또 잠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며칠을 그렇게 간 끝에 더는 집을 찾을 수 없는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고아원에 있다가 그는 사랑이 많은 한 호주 가정에 입양됩니다.
그의 양부모는 다른 형도 한 명 입양하였는데 그 형은 좀 망나니였습니다.
엄마도 사랑했지만, 엄마를 사랑할수록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친엄마가 자신을 잃고 슬퍼할 것 같은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괜히 데리고 나와 잃어버린 죄책감에 고통스럽게 살아갈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애인과의 관계도 제대로 되지 않고 모든 삶이 엉망이 됩니다.
25년이 지난 뒤 라이언은 엄마를 다시 찾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구글 지도가 인터넷에 올라왔고 그는 구글 지도를 통해
자신이 발견된 곳으로부터 주위를 뒤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자신의 기억에 있는 동네와 똑같은 곳을 발견합니다.
25년 만에 엄마를 만나 처음으로 한 말은 죄송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젠가 아들이 돌아올 것을 믿고, 다른 동네로 가지 않고 그 동네에서만 살았습니다.
불행히도 형은 25년 전 그날 동생을 찾다가 기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라이언은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를 친어머니에게 소개해줍니다.
이제 진짜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키워준 부모님이나 그 부모님이 입양한 망나니 형까지.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낳아주시고 존재하게 하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을 만나기를 필요로 합니까?
어쩌면 마리아 막달레나만큼 예수님을 만나기를 희망한 사람은 없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시궁창에서 구원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유튜브에서 보면 새끼 때 자기를 구조한 사람을 엄마로 믿는 새나 동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동물들은 어미를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이 아니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몰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조금만 사랑을 준 대상이라도 부모로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반면 많은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사랑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를 창조자로 여기고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한 유일한 분을
사랑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돈을 벌면 되지’, ‘성공하면 되지’, ‘자녀를 잘 키우면 되지’ 등으로
각자가 삶의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합니다.
그 공허함 속에 고통스러워하지만, 끝까지 창조자가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를 보여주신 유일한 분을 사랑하기를 거부합니다.
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나를 사랑해주신 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자신을 시궁창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채워지지 않은 채 그녀는 무엇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를 찾으면 결국엔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데 그 형제를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존재하게 하고 그 형제도 존재하게 하신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왜 당신을 사랑할 마음이 없는 이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실까요?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싶지 않고 세속-육신-마귀를 좇는 이는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없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일은 하느님 뜻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
그리고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믿게 하시고 부활의 기쁨을 주십니다.
누구를 찾고 있느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
마리아가 혼자 무덤에 남아 울고 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도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리아가 이미 들여다본 무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것은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있는 천사들을 만난다.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고 묻는다.(13절)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고 답하였다.
그리고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 하였다.
마리아의 눈은 닫혀 있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리아야!”(16절) 이름을 부르신다.
처음에는 여인이라고 부르시고, 다음에는 이름을 부르셨다.
‘너를 알아보는 이를 알아보아라.’라는 말씀이다.
마리아는 “라뿌니!”(16절) 즉 ‘스승님’으로 알아본다.
그분은 마리아가 지금까지 찾고 있던 분인 동시에
마리아가 당신을 찾도록 내적으로 인도하신 분이다.
마리아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17절) 말씀하신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17절)
이 말씀은 우리와 같이 모든 지체로 만들어지신 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분,
죽음 이후에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그 건너가심의 첫 열매를 당신 안에 지니고 계신 인간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가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결국 그분이 계시는 곳에 그분의 삶들도 있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 주시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
그리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였다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으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부활절의 삶이 이러한 삶이 되어
참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는 모습이 나온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
인간으로서 예수님께 깊은 애정을 품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녀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앙은 없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여전히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청하는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애도를 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그녀의 전부였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났을 때 못 알아본다.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야 알아본다.
그러나 그때에도 막달레나는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예수님께 매달리고 싶어 하고 붙잡아 두고 싶어 한다.
현세적으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의 애정이
비록 고귀하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막달레나를 참다운 제자로 만들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인간 예수에 대한 단순한 인간적인 애정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신앙을 대신할 수는 없다.
부활은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이지
부활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처] 요한 20,11-18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