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지역에 그림을 보면 좀 충격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안학궁 터가 있는 지역이 완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안학궁하면 당나라 수도보다 더 크다고 소문난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이 허허벌판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혹시나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붉은색 선이 대성산성과 장안성입니다. 방효태가 사수지역에서 전멸했다면 당나라 군의 주 진격로는 그림과 같이 대성산성쪽이었을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장안성(=평양성)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학궁은 과연 무사했을까요? 1 지역은 전투가 벌어졌을 예상지입니다. 장안성 안에 안학궁이 있었다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덩그러니 밖에 놓여 있으니 정확히 말하면 멘붕이 왔습니다. 제 3차 고구려-당 전쟁도를 그려보면서 평양을 현 요양성 인근이 아닌가 의심을 한 이유도 안학궁의 위치 때문입니다.
궁이 파괴되었다면 왕이 과연 이곳에 있었을까?
제 2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현 평양 지역을 소정방이 공격하였다는 근거로 신라의 군량배달 사건이 매우 크게 작용합니다. 저도 댓글로 수군에 대해 논하면서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은 하고 있지만 솔직하게 80% 가량은 그 내용을 뒤집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3차 고구려-당 전쟁에서의 고구려 수도만큼은 현 평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로 말씀을 드리는 건지 전달이 되었을 지 모르겠네요.
첫댓글 안학궁 주변에는 대성산성(둘레 약 7km)외에도 청암산성(5km), 고방산성(8km), 청호동성(1.5km) 등이 안악궁성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학궁 방어가 약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말기에는 고구려왕은 장안성(외성, 중성, 내성, 북성) 의 내성 안에 있는 궁성에 잘 지낼 수 있으니, 전쟁이 났을 때 안학궁성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안학궁을 중심으로 북쪽 대성산성, 남쪽 2.5킬로 청호동 토성, 동쪽 3.5킬로 장수천, 동남쪽 2킬로 고방산성, 서쪽 3.5킬로 청암동 토성이 있다고 합니다. 당군의 진입 예상로로 봤을때 안학궁은 바로 정면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전투와 궁의 파괴에 대한 여부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만약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져 파괴되었다면 왕족들이 계속 장안성에 남아 있었을까요? 당병들에겐 궁은 좋은 약탈 목표가 되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교전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586년에 이미 안학궁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를 합니다. 멸망기에 안학궁성은 별궁 정도 의미밖에 없습니다. 왜 거기에 왕족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어떤 성(예 : 대성산성) 성만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도 방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벽으로 가로막혀 있지 않다고 해서 안학궁성이 파괴되었다 어쨌다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7세기 안학궁성 관련 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어떻게 전쟁이 일어났는지는 다 추정입니다. 다만, 고구려 멸망기에 안학궁성도 불탄 것은 분명하겠지요. 지금 주춧돌만 남아있을 정도니까요.
고구려 평원왕 28년(586년)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백제와 신라와의 국경이 불안해져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550년이전에는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와 전쟁을 벌었고, 550년과 551년부터는 신라가 도살성과 금현성 그리고 고구려의 10개군을 빼앗으면서 북진하게 됩니다. 장안성으로 도읍한 후 598년에 백제를 공격하고 603년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합니다. 608년에는 신라를 자주 공격하여 우면산성을 빼앗습니다. 그런데 611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자 고구려의 대응이 바뀝니다. 수나라 방어가 일 순위가 되고, 백제와 가깝게 지내면서 신라를 견제하는 것입니다.
안학궁의 위치를 보면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곳을 항구가 있는 서쪽으로 상정하여 방어선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있다면 동쪽으로 우회하여 왔을때는 방어가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대성산성부터 대동강 쪽으로 외곽 성만 쌓았다면 가히 철옹성이 되고도 남는데 안했다는 것은 아직 미완성이었거나 적을 신라와 백제로만 국한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장안성과 안학궁성의 거리는 겨우 10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별도의 성으로 보기에는 좀 이상하지 않나요?
고구려가 안학궁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한 것은 나제동맹의 위협뿐만 아니라 북쪽의 돌궐, 북제 등 외부적으로 여러 위협이 가해졌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수도의 구조는 보통 평지성과 산성의 세트로 되어 있었다고 이해됩니다. 평시에는 평지성에 거하다가 유사시에는 산성으로 올라가 방어를 한다는 개념입니다. 졸본이 있었던 환인은 하고성자성-오녀산성, 국내성이 있었던 집안에는 국내성-환도산성, 평양의 경우 안학궁-대성산성이 짝을 이루어 수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평민들을 보호하기 힘들었고, 평지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 번거롭다는 점 등입니다. 그래서 산성과 평지성을
아우르는 장안성의 건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장안성은 적이 한 번도 넘지 못한 견고한 성입니다. 알천랑님의 우려와 달리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방어하기엔 더 좋습니다. 보통강과 대동강이 자연스레 해자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멸망시에 장안성은 내부에서 먼저 문을 열었기에 점령 당한 것이지 당나라가 장안성을 먼저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고구려 멸망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신라의 기록을 보면 평양성 북문, 평양성 내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평양의 명칭은 장안성입니다. 장안성 = 평양성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평양이라는 의미가 뭘까 찾아보았습니다. 언어학적으로 평양은 삐양이고, 삐는 산크리스트어로 '번화하다'라는 내용이 있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평양 동황성, 평양 평양성, 평양 장안성. 이런 형태로 생각해보니 평양성과 장안성은 같은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2차 고당전쟁때는 평양 장안성에서 전투가 있었고, 제3차 고당전쟁때는 평양 평양성에서 전투가 있었다면...
'장안'은 당나라 수도와 이름이 같고, 평양이 지명으로서 그 유래가 훨씬 유구합니다. 사람들 입에는 당연히 장안보다는 평양이 잘 붙습니다. 백제가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라 고쳤다 해서 우리가 성왕 이후의 백제를 남부여라 부르지 않고 백제라고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조선은 한양을 한성이라고 고쳤지만 사람들은 한양이라고 더 많이 불렀습니다. 언어학적으로 산스크리트어와 연관시키려는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자신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역사를 공부하면 이런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지요.
삼국사기에는 평양성과 장안성이 나옵니다. 성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나와 있기에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조수아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말했던 평양이라는 곳이 한곳이 아닌 여러곳이라면, 역사책에 기록된 구체적인 지명, 즉 평양성과 장안성이 함께 존재한 것은 아닌가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판단합니다. 고구려는 여러번 천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선입견이 아닌 상식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요?
글쎄요. 님 말씀대로 3차 고당전쟁 때 다른 곳에서 전투가 있었다면 그 까닭이 분명해야 합니다. 남건이 끝까지 싸우고자 하고, 보장왕과 남산은 항복하는 그 장소는 고구려 수도 외에는 다른 곳이 없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장안성이 곧 평양성이라는 것은 평양성 출토 성벽 유물들이 증명합니다. 장안성은 양원왕 8년(552년)에 쌓기 시작하여 평원왕 28년(586년) 완공, 도읍을 옮깁니다. 평양성 출토 성벽에 새겨진 글들이 이 시기에 공사가 누구의 책임 하에, 어떤 방향으로 진행됐는지 말해줍니다. 장안성이 현 평양성이며, 이곳이 고구려 멸망까지 수도가 아니었음을 부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제3차 고당전쟁때는 평양 평양성에서 전투가 있었다면..."이라는 말은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