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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 제 32 장 첫번째.
第 32 章. 용권풍(龍捲風).
1.
낙타를 잡아 다음날 아침까지 배불리 먹은 장군부는 다시 출발했
다. 마차를 이끌던 낙타는 떼어버리고 튼튼한 말 네 마리를 달아메
어 기동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대원들은 새로 얻은 말에 올랐
다. 빈 말이 72필이나 되었다.
"남은 말들은 어찌합니까?"
"마초가 넉넉지 않아 데려갈 수도 없는 일입니다."
"우선 끌고 갑시다. 좀 더 먼곳으로 끌고가야 군사들 손에 넘어가
지 않을 겝니다. 하루안에 건초를 구하지 못하면 그때 풀어주도록
합시다."
"그러지요. 자, 출발이다. 사방을 잘 경계하라!"
장군부는 빠를 걸음으로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태양빛은 여전히
뜨겁고, 모래사막은 끝이 없었다. 가끔 가시덤불과 돌산이 보일 뿐
이었다. 하루를 꼬박 걸었어도 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말을 끌고온 것은 과연 잘한 일입니다. 군사들이 말을 구해 좇아
오려면 적어도 하루는 걸릴 것이예요. 마침 바람도 불어주니 흔적
은 곧 지워질 겁니다."
사막의 바람이라야 사납기만 하지 더위를 식혀주진 못한다. 모래
먼지가 눈,코,입을 괴롭게 할 뿐이다. 짜증만 자꾸 치밀었다.
"안심하기 아직 이르지요. 우린 지금 사막의 한가운데쯤에 위치해
있을 겁니다."
"아, 정말 지겨운 놈들이야! 어떤놈이 이같은 수작을 부리는진 모
르지만 세력 하나는 알아불만 하군. 바얀이란 놈이 수작을 부린 것
이라면 흥, 흥!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고 말걸."
다른 일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제법 살만한 모양이다. 하긴
벌써 이틀동안 군사들을 보지 못했으니 어느정도 안심을 하는건 인
지상정일 것이다. 도중에 초지를 한곳 발견하긴 했지만 말들을 먹
일만한 풀은 얻지 못했다. 일차로 삼십여필의 말들을 초지에 풀어
놓고 출발했다.
날이 어두워 졌을 때 제법 큰 초지를 발견했지만 장군부는 초지를
그냥 지나쳤다. 사람이 있는 곳에눈 머물 수 없는 일이다. 다음날
도 말먹이를 구하지 못했다. 이십여필의 여유분을 남겨두고 모두
사막에 풀어 놓았다.
"이제 식량도 열흘치 밖에는 없어요. 건초는 오육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요!"
"그 안에 사막을 벗어날 순 있겠소?"
"이런 속도라면 가능 하겠지요. 하지만 일단 군사들에게 좇기게
되면 힘들어요."
삼일동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방을 살피는 대원들도 점
차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드넓은 초지를 발견했다.
초지 가운데에는 서너가구의 유목민들이 양떼를 방목하고 있었다.
상장히 큰 연못이 있었다.
장군부는 어두워질 무렵 조용히 초지에 접어들어 유목민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정말 오래간만에 푸른 나무 그늘아
래 쉬어보는 셈이다. 물줄기 끝에서 보초를 세우고 목욕을 했다.
그동안 쌓인 먼지들이 말끔이 가시자 기분까지 상쾌해 졌다. 도일
봉 또한 목욕을 즐겼고, 장군도 깨끗이 씻어주었다.
도일봉은 풀밭에 누워 어두운 보랏빛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정말
평화스런 하늘이다. 아름다운 보랏빛이 온 하늘을 덮고 있었다. 싸
움만 없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여행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그때 이수복과 주근깨아가씨 연화가 다가왔다. 이들 둘은 그동안
많이 친해져 있었다. 어쩌면 마음 속으로 사랑이 싹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수복은 점잖은 성격이고, 연화는 활달하고 친절했다. 그
래서 도일봉도 이 주근깨 아가시와 그중 친했다.
"그렇게 나란히 다니니까 보기 좋은데! 다른 사람들이 셈내겠는
걸?"
도일봉의 미소에 연화 또한 생긋 웃었다.
"낼테면 내라죠 뭐. 혼자 뭘 하세요?"
"그냥 하늘을 보고 있지. 보랏빛 하늘이 참 예쁜걸!"
"어머! 예쁜걸 감상?줄도 아시내요? 사아가씨도 부를까요?"
"그녀를 왜?"
"호호호, 그 무서운 여아가씨는 은근히 대장님을 좋아하는 눈치던
데요?"
"연화!"
이수복은 연화의 말이 지나치다고 핀잔을 했다. 하지만 연화는 입
만 삐죽거릴 뿐이었다. 도일봉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다 좋은데 너무 드세단 말야. 만약 화가 나서 날 때리기
라도 한다면 내가 어떻게 막아내겠어? 난 무서운 여자는 싫어요!"
"호호, 그녀가 이 말을 들으면 정말 때리고 말겠어요."
"그럴까? 하핫."
"정말 그러고도 남을걸요! 호호호."
점잖은 이수복도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연화가 의기양양 입을
열었다.
"그리고 대장님도 이건 모를걸요?"
"또 뭐가 있는데?"
"무선생이 난아가씨를 좋아하고 있는 것 말이예요."
"엥? 무순찰이 난아가씨를?"
"정말이라니까요! 그 두분은 그동안 함께 마차를 타고 왔잖아요?
무선생은 난아가시가 상처를 돌봐주는걸 아주 좋아해요. 난아가씨
도 은근히 마음에 있는 모양이예요. 정말이에요!"
"그래? 허허, 삼수 이친구. 언제 난소저를 꼬드긴거야? 핫핫."
도일봉은 재미있게 웃었다. 무삼수가 비록 바람둥이긴 해도 그동
안 한 여인에게 정을 주는걸 못봤는데, 이건 다소 의외의 일이었
다. 수줍은 소녀의 모습에 혹한 것일까?
연화가 생각났다는 듯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참! 이건 대장님 것이예요."
푸른색 비단으로 만든 허리띠였다.
"웬 허리띠를?"
"잘 보세요. 제가 특별히 만든 것이란 말이예요. 본래는 수복오빠
것만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마음 크게 먹고대장님 것도 만들었어
요."
살펴보니 허리띠는 두겹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안쪽에는 가죽을
사용했고, 작은 주머니들이 무수히 많았다.
"암기 주머니예요. 모두 72개의 작은 주머니가 있어요."
"아하. 이곳에 유성표와 은비도를 담아 두르란 말이군! 이건 참
멋진데. 겉에서보면 아무런 표시도 없잖아!"
"암기를 줘봐요. 제가 넣어줄께요."
도일봉은 허리에 차두었던 주머니를 내주었다. 유성표와 은비도들
이 아무렇게나 담겨져 있었다. 모두 72개 였다. 연화는 하나하나
주머니에 꼽았다. 꼭 맞아 손으로 잡아빼지 않으면 빠지지 않았다.
"재주가 비상한걸! 수복은 좋겠네?"
"네? 아, 네."
이수복은 쑥스러워 뒷머리를 긁었다. 연화가 방긋 웃었다.
"이 비단은 제가 아끼고 아끼며 간직해 두었던 것이예요. 좀 아까
운 생각이 들어요."
"그래? 흐음. 그럼 나도 뭔가 보답을 해야겠는걸. 다른건 줄것이
없고...가만있자. 수복, 암기들 중에 매화표가 있었지? 그것이 제
일 예쁘던데 그걸 연화에게 선물하겠네."
"그건 모두 금입니다, 대장님!"
"까짓, 금이 뭐 대수겠나. 연화는 제일 아끼는 비단으로 선물을
만들어 주었잖아. 금암기가 비록 값이 나가는 것이지만 내가 제일
아끼는 것은 아니야. 성의를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모자란 감이 있
어. 그리고 그 암기들은 자네와 함께 얻은 것이니 모조리 내것이라
고도 할 수 없는거야."
"어머, 어머. 고마워요, 대장님!"
"나도 고마운걸. 핫핫."
연화는 너무 좋아 펄쩍펄쩍 뛰며 박수를 쳤다. 도일봉과 이수복은
그런 연화를 보며 빙그래 웃어주었다.
도일봉은 낡은 허리디를 풀고 선물받은 허리띠를 감았다. 안쪽에
두루고 있던 화사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 꼭 드는군. 아주 좋아!"
"저도요!"
세사람이 웃고 있을 때 사소추가 다가왔다.
"무슨일로 그토록 즐거우신가요?"
도일봉은 여전히 풀밭에 누워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어서오시오, 사소저. 우린 지금 저 보랏빛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
다오."
"보랏빛이오? 잿빛인데요?"
하늘은 과연 꿛빛이었다. 떠드느라 시간 가는줄도 몰랐던 모양이
다. 석양이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수복과 연화가 일어섰
다.
"저희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들은 정다운 모습으로 천막쪽으로 가버렸다. 사소추는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기 좋군요."
"그런 것 같소. 앉아요."
사소추는 옆자리에 앉았다. 둘은 나란히 앉아 하늘만 바라보았다.
사소추는 무슨 말인가 하고싶은 표정 이었으나 끝내 입을 열어 말
을 하지는 못했다. 침묵이 흐르고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별들이 하
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문득 도일봉이 먼저 입을 열었
다.
"바람이 제법 심하군요. 그만 들어갑시다."
도일봉이 일어서자 사소추는 불만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입만
삐죽 거렸다.
날이 밝자 곧 출발했다. 그날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후 늦게
초지를 발견했다. 만천은 더 가지않고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모
래 위에서 자는것도 이제 질렸던 것이다. 일찌감치 천막을 치고 쉬
었다. 그런데.
"누가 옵니다!"
정찰대원들이 달려와 소리치는 바람에 모두들 퉁기듯 몸을 일으켰
다.
"어느 쪽이냐? 몇 명이더냐? 군사들이냐?"
질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정찰대원이 말했다.
"이십여명 입니다. 모두 말을 탓지만 군사들은 아닌 것 같습니
다."
"제기...또 어떤 놈들이지?"
어쩌면 보물을 노리는 무림인들 인지도 모른다. 만천은 서둘러 천
막을 걷고 다시 길을 잡았다. 이십여명 이라면 무서울 것도 없지만
남의 눈에 띄어 좋을것이 없다. 장군부는 이십여리를 걸어 모래위
에 천막을 쳤다. 초지에서 편히 쉴 운명이 아닌 모양이다.
날이 밝자 대원들은 잔득 긴장한체 길을 걸었다. 다행히 뒤따라
오는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한나절도 되지않아 편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사라져 버렸다. 점심을 먹고 막 출발준비를 끝냈을 때 그들
이 불쑥 나타났다. 어제 보았던 이십여명의 말탄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출현이 워낙 갑작스러워서 장군부 대원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서 앞에 떡 버티고 있는 자들의 모습
이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눈빛이 형형하고 자세가 바르게 안정되어
있는 것이 모두들 한가닥씩은 할 것 처럼 보였다.
앞을 맡은 황삼산이 앞으로 썩 나서 누구냐고 호통을 치려는데,
그자들 뒷편에서 네필의 말이 앞으로 나섰다. 말들이 모두 최상품
의 명마들이다. 도일봉의 장군만은 못하지만 모두 천마리 말중에
고루고 고른 말들임이 분명했다.
말 등에 올라 있는 네명의 청년들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생김생
김이 깔끔하고 시원했으며,그중 한명은 딱 벌어진 영웅의 기상이
엿보였다. 두명은 너무 곱상하게 생긴 편이었고, 한명은 황색가사
를 걸친 라마승이었다. 라마승 외에는 모두 표범가죽을 덧입힌 사
냥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허리엔 패검을, 등에는 강궁을 짊어졌다.
도일봉은 영웅의 기상이 돗보이는 중앙의 청년을 보고 눈을 똥그
랗게 떴다.
"아니, 너는... 바얀이 아니냐!"
그 청년은 바로 몽고의 귀족 바얀 공자였다. 옆의 라마승은 요원
이었다. 도일봉은 이들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도일봉을 바라보았다. 요원라마가 나서
며 빙긋 웃었다.
"또 보게 되었구려, 도시주?"
사소추도 이 두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매섭게
눈을 흘겼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인연이 꽤나 질긴 셈이로군?"
바얀을 보고 놀랐지만, 옆의 두 청년을 본 도일봉은 고개를 갸웃
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낮설지 않은 모습들이다. 그때 한 청년이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 미소가 누군가와 너무 닮아 있었다. 도일봉
은 탁 무릅을 쳤다.
"아이쿠, 이런! 밍밍 이로구나! 어라...? 그대는...그대는...교영
도 왔군!"
밍밍과 교영이었다. 남장을 하고 사냥복을 입어 미처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밍밍이 방긋 웃으며 손짓을 보냈다. 그러나 교영은 찬바람이 일도
록 코웃움을 쳤다. 도일봉은 두 여인을 보자 반갑기 이를데 없었지
만 바얀 옆에 있는 것은 싫었다.
"교영, 밍밍. 그대들이 이 먼 사막엔 웬일이야? 계집...여자들이
나와 돌아다니면 못 써! 더욱이 바얀이나 저 요상하게 생긴 중놈과
함께 다니는 것은 더 나빠. 뭐하러 왔어?"
바얀이 기분 나쁜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도일봉은 그런 바
얀은 아랑곳 않고 두 여인만 바라보았다.
장군부 대원들은 나타난 사람들이 다름아닌 바얀일행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두 여인의 아름다움에는 더욱 놀랐다. 두 여
인이 비록 남장을 하고 있지만, 타고난 아름다움은 다 감춰지지 않
았던 것이다.
사소추는 두 여인을 보자 자존심이 상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두 여인에 비해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질투가 복받쳐
당장이라도 얼굴에 칼질을 해주고만 싶었다. 그녀는 매섭게 두 여
인을 노려보았다.
무삼수가 만천을 향해 말했다.
"만천선생은 나서지 말고 마차안에 그냥 있는 것이 좋겠소. 얼굴
을 마주쳐야 좋을게 없어요."
만천의 식구들은 아직도 몽고인들과 어울리는 중이다. 만천이 장
군부의 일원인 것이 알려지면 좋을것이 없다. 만천이 고개를 끄덕
였다.
무삼수는 다시 부장들을 향해 눈짓을 하여 전투준비를 시켰다. 이
자들 역시 보물을 노리고 왔음이 분명하다.
밍밍이 배시시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도일봉 보러왔어요. 야단치면 나빠요!"
그녀의 한어는 제법 늘었지만 아직도 서툴기만 했다. 도일봉에게
다가오려던 밍밍은 서소추의 날카로운 눈빛을 대하고 주춤했다. 도
일봉이 오만상을 찡그렸다.
"제기... 나를 보러 이 먼 곳 까지 왔다니 고맙긴 하지만 잘못 왔
어. 바얀이란 녀석은 질투에 눈이 멀어 나를 죽이고, 내 말을 빼앗
으려는 녀석인데 그걸 구경하러 온거야, 응?"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당하자 밍밍은 부끄럽고 화가 치밀어 입을
삐쭉거렸다. 그 와중에도 사소추를 향해 매섭게 눈을 흘겨주는 것
도 잊지 않았다.
요원라마가 입을 열었다.
"도시주께서 이 먼 사막까지 와서 요란한 명성을 떨친 것을 축하
드리는 바이오. 그러나 고성에서 얻은 물건은 우리 선조들의 것이
니 주인에게 돌려 주었으면 하오이다. 물건을 돌려 준다면 공자께
서도 고마워 할 것이오."
그러나 도일봉은 요원라마의 말은 듣고 있지도 않았다. 화가 난
표정으로 교영만 바라보고 있었다. 밍밍은 다가와 아는척을 해주는
데, 교영은 아예 본체도 않는지라 화가 났던 것이다. 밍밍이 다가
와 옆구리를 꼬집었다.
"도일봉 나빠요. 교영은 바얀만 좋아해요!"
"아이쿠, 아파라. 누굴 꼬집는 거야!"
도일봉의 호들갑에 모두들 피식 실소를 흘렸다. 사소추는 그들을
수작에 더욱 질투가 솟구쳤다. 어찌되었든 요 계집애를 반드시 혼
내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도일봉이 바얀을 향해 말했다.
"흐음. 이봐, 바얀. 자넨 예로부터 운이 없었고, 실력도 모자라.
그걸 이미 느꼈을 텐데도 이렇게 남의 뒷통수 치는 일을 그치지 않
는군? 그까짓 보물 때문에 자네가 여기까지 왔나? 아니면 또 다른
수작이 있는거야?"
교영이 들으라는 듯 일부로 체면 구겨지는 말만 골라 지껄였다.
교영은 다만 코웃움만 쳤다. 바얀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휘두르
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도일봉의 도발에 넘어갈 수는 없
는 일이다. 바얀은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여 위엄있는 모습을 지켰
다.
요원라마가 대신 나섰다.
"도시주. 길은 두 가지 뿐이오. 한가지를 택해..."
"중놈의 새끼!"
도일봉의 벼락같은 호통에 요원라마의 말이 뚝 그쳤다.
"네놈은 주둥이 닥치고 가만히 있거라. 이 도일봉은 지금 화를 꾹
꾹 눌러 참고 있단 말이다. 네놈이 나설 자리가 아니야! 한마디만
더 지껄였다간 목을 처버리겠다."
요원라마의 표정은 그야말로 똥이라도 씹은 듯 했다. 욹그락 붉그
락 수시로 바뀌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쓰려 했다. 바얀이 막았다.
"건방진 녀석! 그깟 말장난으로 본인을 도발시켜 보겠단 말이냐?
결정해라. 길은 두 가지 뿐이다."
도일봉은 벌컥 화를 내려다가 오히려 싱글벙글 웃었다.
"헤헤헤. 그 꼴을 보니 꼭 보물 때문에 이 먼 사막까지 온 것 같
진 않은데? 그래, 집안 어른들은 안녕 하시던가? 군대에 있는 친척
들도 물론 무고 하시겠지? 자넨 정말 대단한 일을 벌였어? 그점은
나도 인정해주지."
바얀은 뜨끔 했지만 모르는척 했다.
"네 녀석의 헛소리에 참여하고 싶진 않다. 물건을 다오."
"안준다면?"
바얀이 입을 다물자 뒤에 시립해 있던 자들이 한발한발 앞으로 나
섰다. 도일봉이 그 꼴을 보고 놀라는 시늉을 냈다.
"어이쿠, 무서워라! 협박도 잘 하는구나. 헤헤헤. 그럼 나도 협박
한가지 해볼까? 내가 중원으로 돌아가 자네가 이곳에 있더라는 말
을 떠들고 다니면 어떨까? 그걸로 부족하다면 군대를 출동시켜 한
달이 넘도록 쫄쫄 굶긴 자가 자네라고 떠들어 볼까? 그리되면 자네
와 놀아 보겠다고 찾아오는 자들이 꽤나 많을걸. 그 사람들은 사람
찾는 일이 전문이라 자네가 어딜에 숨어있든 찾아내고 말거야. 그
럼 정말 재미 있을거야. 어떤가? 이만하면 간이 서늘한가?"
도일봉의 말은 사실 가슴 뜨끔한 말이었다. 바얀이 비록 무림인들
을 두려워 하지 않지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도
일봉이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까 궁굼하기도 했다.
요원라마가 호통을 쳤다.
"네놈이 살아서 중원으로 갈 수 있다고 여기느냐!"
"네이노옴!"
도일봉은 또 한바탕 벼락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황룡궁이 들려 있었다. 황룡궁을 들었다 싶은 순간 첫 번째 화
살이 요원라마의 가슴을 향해 날았다. 요원라마가 깜짝 놀라 넓다
란 소매를 맹렬히 휘둘렀다. 그러나 화살은 하나가 아니었다. 두
개, 세 개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요원라마가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
매자 바얀이 검을 뽑아들고 돕고 나섰다.
"흥. 신궁(神弓)의 화살을 피해 보겠다고?"
도일봉이 호통을 내지르며 이번엔 품 속에서 세 대의 장군전을 꺼
내 쏘았다. 한 대는 바얀에게, 두 대는 요원라마를 향해 날았다.
바얀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장군전을 막느라 요원라마를 도울 수 없
었다. 요원라마가 허둥대며 간신히 한 대를 막았다. 두 번째 장군
전을 소매를 휘둘러 막았으나 장군전은 그대로 소매를 뚫고 들어가
퍽! 하며 가슴을 파고들었다. 한자나 되는 장군전은 꼬리 부분만
남기고 살 속에 박혔다. 소맷자락이 없고, 정순한 내공력이 없었다
면 장군전은 그대로 요원라마의 가슴을 관통했을 것이다.
요원라마는 자신의 가슴을 뚫고 들어온 화살을 보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쟨천히 장군전을 뽑
았다.
"너... 너...!"
장군전을 뽑아든 요원라마는 도일봉을 가르키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끝내 한마디도 못하고 말 등에서 굴러 떨어졌다.
"악!"
교영과 밍밍이 비명을 질렀다. 바얀의 뒤에 있던 두명의 사내가
밀 등자를 박차고 도약해 도일봉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에는 어느
새 약간 굽은 칼이 들여 있었다.
씨익!
도일봉의 황룡궁에서 화살이 날았다. 그와 동시에 무삼수가 호통
을 내질렀다.
"쏴라!"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이 일제히 활과 석궁을 俑 그녀의 장력 한방에
쭉쭉 뻗어 나갔습니다. 대장님께서는
그녀에게 크게 부상을 당했고, 또 몽고 놈들에게 고문을 당하셨던
모양입니다."
"그 정도란 말이지."
여인의 무공이 얼마나 높든 지금 그게 문제는 아니다. 도일봉의
행방을 한시라도 빨리 알아내야 한다.
"일단 돌아가세. 군사와 상의해 봐야겠어."
"네."
경황 중이었지만 이수복이 생각하기에 도일봉은 몽고 놈들에게 잡
혔을 가능성 보다는 여인이 대려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아
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은 마른 땅으로 올라와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양쪽은 아직도 냇물을 사이에 두고 화살을 날리고 돌을 던지는등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원들이 두 사람을 맞아 젖은 옷을 벗기고
새 옷을 가라입혔다. 여인이나 군관등은 싸움터에 있지 않았다.
이수복이 옷을 가라입고 연화를 돌아보았다.
"다리 위에서 싸우고 있던 자들은 어디로 갔소?"
연화가 말했다.
"우리가 도착해서 화살을 쏘아대니까 금세 흩어졌어요. 여인은 물
로 뛰어들었고, 군관등도 물가로 달려갔어요."
"음."
이수복이 아직도 안심이 되지않아 고개를 쭉 빼고 냇물 아랫쪽을
바라보았다.
"엇, 저기!"
냇물 아랫쪽에서 힘없이 걸어오는 군관 일행이 보였다. 이수복은
크게 기뻐서 무삼수를 향해 말했다.
"저길 보십시오! 저기 저, 붉은 전포를 입은 군관이 바로 대장님
을 잡았던 자입니다. 옆에 회의를 입은 자는 군관의 수하고요. 두
놈이 남았었는데 또 한놈은 보이지 않는군요. 여인에게 당한 모양
입니다."
무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대장을 잡지 못한 것 같군. 그렇다면 여인이
대장을 대려갔다는 말인데... 그 여인에 대해 아는걸 말해보게."
"저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틀동안 대장님을 구출하기 위해 의
논도 하고 함께 행동했지만 여인은 거의 말이 없었습니다. 대장님
을 그 여인이 대려간 것이라면 일단 위험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녀
는 대장님을 구하기 위해 한달이 넘도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마도 대장님을 부상시킨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네."
무삼수는 만천을 돌아보았다.
"여기에 더 있어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소이다. 일단 이 자리
를 떠나도록 하십시다."
만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후퇴명령을 내렸다. 장군부 대원들은 천
천히 뒤로 물러섰다가 이내 말에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군사들은
마구 함성을 지르며 화살을 날려댔지만 얼마간 좇는 시늉만 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안전한 곳에 이른 후 만천이 입을 열었다.
"대원들을 일단 산채로 돌려 보내야 겠어요. 이렇듯 몰려다녀서
좋을게 없소. 무순찰께서 계속 대장님의 행방을 탐문토록 해보시
오. 낙양에 돌아가 손부장을 내려 보내리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삼수는 일행에서 떨어져 근처를 탐문하기
시작했다. 이수복과 연화는 도일봉의 행방을 몰라 안타까와 하면서
도 다시 만난걸 기뻐했다. 그들은 대원들과 함께 산채로 돌아갔다.
군관의 뒷발질에 걷어차인 도일봉은 그대로 물 속으로 처박혔다.
군관의 발길질에는 실로 천근의 힘이 실려있었다. 도일봉은 그 충
격으로 인해 입으로 피화살을 뿜으며 날아갔다. 여인외에 이런 충
격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도일봉은 생각보다 큰 부상을 입진 않았
다. 물론 열차례가 넘도록 두 고문기술자들에게 인정없는 구타를
당해 몸은 걸레가 되다시피 했으며 실제로 반쯤은 죽은 몸이었지
만, 그는 그동안 단 한가지 배워둔 것이 있었다. 절로 익혀졌다고
말하는 편이 옳으리라. 그건 바로 매를 맞는 요령이었다.
고문기술자들이 때리는 그 숱한 매를 맞으며 도일봉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조금이
라도 덜한 곳으로 몸을 돌려가며 매를 맞았다. 그러던중 어떻게 해
야만 덜 아프고, 어떤 부위로매를 맞으면 몸에 덜 충격이 오는지
절로 깨달았던 것이다.
군관의 발길질이 가슴을 강타하는 순간, 도일봉은 몸을 약간 숙여
왼쪽 어깨로 그 힘을 받았다. 근육은 맞는 부위로 절로 모여들었
고, 몸은 최대한 뒤로 젖혀졌다. 순간적인 대응이긴 했지만 발길질
의 충격은 다소나마 완화되었다. 더욱이 군관의 발길질로 인해 그
동안 억눌려 왔던 가슴 속의 울혈이 뚫려 피를 ㅂ고보니 오히려 시
원한 감각도 있었다. 정신이 가물가물 하는 중에도 도일봉은 흐르
는 물에 몸을 띄울 수 있었다. 싸우는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몸의 감각이 점차 희미해지고, 정신도 흐릿해 졌다. 의식을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쉽지 않았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싸우는 소리, 비명 소리도 들렸다. 누군
가 자신을 들어올리는 것을 느꼈을 때 그는 마침내 의식을 잃고 말
았다. 두려움 보다는 차라리 편안했다.
무척이나 편안했다. 군사들에게 잡혀 있는 동안 이런 편안함을 느
껴보지 못했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불을 지펴주고 있었다. 옷을
말려주고 있었다. 혹시 삼랑이 와 있는건 아닐까? 교영과 밍밍인지
도 모른다. 도일봉은 누가 온 것일까 궁굼함을 참지 못하고 가만히
눈을 떳다.
생소한 얼굴이다. 아니,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잇어 누군지 알아
보기 힘들었다. 앉아 있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검은옷을 입
고,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흩날리고 있었
다. 누군지 한 번은 본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누군지 생각나질 않
았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말도 못할 통증이 전신으로 퍼저나갔다.
"아이고. 아파라!"
도일봉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여인이 불을 지피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도일봉은 흐릿한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대는... 누구요?"
고통 때문에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나왔다. 여인은 말없이 바라보
았다. 너무도 차가운 눈빛이다. 네모진 얼굴형은 무척이나 강인해
보였다. 도일봉은 그제서야 여인이 누구인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무서운 한빙장을 쓰는 여인. 철의 전사같던 그 매서운 여인이다.
"흐음. 그대였군."
여인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차가운 눈빛은 여전히 변하
지 않았다. 여인은 고개를 돌려 나뭇가지를 꺽어 불에 넣었다. 불
빛이 유난히도 붉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도일봉은 다시 눈을 감았
다. 잠이 몰려왔다.
구수한 냄새가 허기를 자극했다. 도일봉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기분이 한결 맑아진 것 같았다. 들려오는 새소리도 상
쾌했다. 앞에서는 여인이 무엇인가를 불에 굽고 있었다.
"거참, 맛있는 냄새가 나는걸. 나를 줄건가?"
도일봉은 상체를 일으켜 보았다. 여전히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이쿠, 삭신이야. 정말 지독하게도 아프구나!"
도일봉은 평소에도 엄살이 심한 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그동안 당해온 고문이 그토록 끔찍했던 것이다. 어이구
데이구, 엄살을 부려가며 왼손으로 땅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
다. 여인은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뻘뻘 땀을 흘리며 일어나
는 도일봉에게 여인은 구운 새다리 하나를 쭉 찢어 건네주었다. 도
일봉은 왼손으로 받아 입김을 불어가며 당장 새다리를 한입 가득
뜯었다. 제법 맛이 있다.
"후우, 후. 맛있네. 솜씨가 제법인걸?"
도일봉은 다시 한입 뜯으며 말을 이었다.
"성한곳은 이 뿐인데 근아마 다행이야. 식욕은 본래부터 좋은 편
이고."
그처럼 고생을 했는데도 여전히 왕성한 식욕을 보면 이해하기 힘
든 일이다.
도일봉은 주절주절 저 혼자 지껄이면서 꿩 한 마리를 삽시간에 먹
어치웠다. 여인은 시종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제 몫을 다 먹고도
도일봉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여인은 자기것의 반을 쭉 찢어 건네
주었다. 도일봉은 또 게 눈 감추듯 그것마져 먹어치웠다. ㄱ;ㅔ서
야 좀 살 것 같았다.
꺼억!
거창하게 트름을 한 번 하고, 도일봉은 불가에 걸려있는 웃옷을
집어 걸쳤다. 옷을 입으며 문득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어깨에는 흰
붕대가 감겨있었다. 한기덩어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허허 참. 이것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는데, 결국 주인이 가져간
모양이군!"
물론 어깨는 여인이 치료해 주었다. 여인은 전문적으로 한기를 흡
수하는 공력을 익혔으므로 도일봉의 어깨에 뭉쳐있는 한기를 제거
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한기덩어
리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었고, 치료를 하지 못해 살이 썩고 있
었다. 덕분에 한웅큼의 어깨살을 도려내야 했다. 도일봉은 기절해
있었는지라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살을 많이 잘라내어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여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찬바람이 일 듯 차가웠다. 도일봉은 물끄
러미 여인을 바라보며 오른손가락을 꼼지락 거려보았다.
"어라, 이것좀 보게! 손가락이 움직이네. 팔도 움직일 수 있겠는
걸!"
"몇달 조섭하면 나아지겠지."
정말 메마르고 삭막한 말투다. 도일봉은 공연히 헛바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얼음귀신 하고는! 이봐, 그대는 본래가 그 모양인가, 아니면 일
부로 그러는거야? 뭐 좋은게 있다고 그토록 무섭게 굴어?"
여인이 매서운 눈빛으로 도일봉을 노려보았다.
"주둥이 함부로 놀렸다그는 그 입마져 못쓰게 될 것이다."
"허어, 제기랄. 정말 귀신이 따로없군. 이제와서 날 못살게 굴려
면 뭐하러 살려놨어? 내가 심심할 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야?"
"주둥이 닥쳐!"
"아이쿠, 무서워라. 얼음귀신의 목소리가 크기도 하구나!"
여인이 눈썹을 곤두세우며 손을 처들었으나 내리치진 못했다.
"조용히 하고 있어."
"쳇. 잘났어 정말!"
도일봉은 콧바람을 날리며 말을 그쳤다. 그는 끙끙 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여인이 그 꼴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하려는 거냐?"
"제기랄, 별걸 다 참견하고 그래. 오줌누러 가는데도 따라올거야?
뭐 볼게 있다고. 아이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다리가 후둘거려 두 발짝도 옮기지 못하
고 풀석 주저앉고 말았다.
"뭘해. 좀 부축하지 않고!"
여인이 매섭게 노려보면서도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햇살이 눈을 자극했다. 군관에게 잡힌
이후 해를 직접 보기는 처음이다. 산공기는 맑고 시원했다. 아직은
쌀쌀한 겨울 바람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훈훈함이 느껴졌다.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니 우거진 나무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실로 오랜
만에 보는 자연이다. 산 밑으로 겨우네 쌓였던 눈이 녹아 졸졸 거
리며 흐르고 있었다. 벌써 봄이 오고 있었다. 여인은 큰 나무까지
부축해 주고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도일봉은 나무에 의지하여 소
변을 보았다. 몸서리 처지게 시원했다.
혼자 걸어보려 했지만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봐, 날 좀 데려가. 난 못 걷겠어."
여인은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부축해 주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
온 도일봉은 짚더미에 기대어 숨을 헉헉 거렸다.
하루는 금방 지나갔다. 여인은 끼니마다 새나 짐승을 잡아와 구워
주었다. 도일봉은 아구아구 잘도 먹었다. 여인은 꼭 필요한 말 외
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루가 더 지나자 다소 힘이 나는 것 같았
다. 도일봉은 쭈구리고 앉아 기경을 운용해 보았다. 힘만 들고 고
통만 몰려왔다. 몸이 너무 지쳐 있다. 걷는 연습과 오른손 운동도
해보았으나 그것마져 쉽지 않았다. 도일봉은 짚더미에 쓰러져 인상
을 마구 찡그렸다. 여인이 겨우 한마디 했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제기. 얼음귀신!"
도일봉은 그러나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아, 제기랄. 정말 힘들구나. 이럴 때 삼람이 있었으면... 밍밍
은? 교영이 보고싶구나!"
도일봉은 문득 여인을 돌아보았다.
"이봐. 언제 내려갈거야?"
여인은 아직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저 도일봉의 상처가
낳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 갈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도일봉이 재촉했다.
"이봐. 지금 가자고. 난 푹신하고 따뜻한 잠자리가 필요해. 목욕
도 하고 싶고. 잘 차려진 밥상에 술도 마시고 싶어. 그러니 날 마
을로 데려다 줘. 지금 당장 말이야."
여인도 이 냄새나는 동굴이 좋을리 없다. 하지만 지금 마을로 내
려가면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 군사들은 아직도 두 사람을 찾고 있
을 것이다. 천군만마(千軍萬馬)라도 두려울게 없지만 귀찮은건 딱
질색이다.
"때가 되면."
도일봉이 우겨댔다.
"어째서 지금은 안된다는 거야? 가면 가는게지."
"넌 걷지도 못해!"
"아하, 제기랄. 걷지 못한다고 가지 못할까? 그대처럼 튼튼한 여
인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날 안거나 업고가면 될 일을. 어서 가
자고, 어서!"
여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도일봉을 바라보았다. 안거나 업고 가
라고? 결단코 이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 하지만 도일봉은 당연하다
는 듯 말을 이었다.
"왜 그런 눈빛으로 사람을 봐? 내가 귀신처럼 보여? 힘 센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없는건 당연한거야. 힘 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
을 업을까? 나도 예전엔 힘 없는 사람을 업고 산을 내려간 적이 있
단 말이야. 별로 어렵지는 않아!"
도일봉은 음흉하게 웃었다. 그가 업어준 사람은 모두 여인 뿐이
다. 여인은 인상만 잔득 찡그릴뿐 말하지 않았다.
"이것 봐. 어서 가자니까. 난 옷도 갈아입어야 해. 옷은 다 찢어
지고 신발도 없잖아?"
"...."
여인은 자신이 도일봉을 업고가야 한다는 것이 어딘지 크게 어색
한 것만 같았다. 하긴, 여기까지도 업고 왔으니 다시 한 번 업는다
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냄새나는 동굴은 정말 싫다. 여인은 곧 동
굴안의 흔적을 지우고 도일봉을 향해 등을 내밀었다. 도일봉은 크
게 기뻐서 낼름 여인의 등에 업혔다.
여인의 등에 업혀보긴 처음이다. 이 얼음같은 귀신도 알고보면 여
인이겠지? 삼랑이나 밍밍, 교영의 포근한 품을 기대했던 도일봉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이 여인은 마치 남자들처럼 근육질의 몸을
지니고 있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담? 꼭 사내놈 몸 같잖아?'
속으로는 투덜댔으나 그래도 업힌 것이 감지덕지다. 그는 두 손으
로 여인의 목을 감고 얼굴을 등에 뭏었다. 여인은 무사가 다 그렇
듯 아무 민감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손 끝이 목을 스치자 흠짓
몸을 떨었다. 그러나 여인은 모르는척 걷기 시작했다. 도일봉은 기
분이 좋아 흥얼거렸다.
"여인의 등이 이처럼 편한건 처음 알았는걸! 흠 흠."
여인은 도일봉이 자신의 목덜미에 숨을 불어넣고 코를 킁킁 거리
자 어쩐지 왕소름이 돗는것만 같았다. 마음이 사뭇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집어 던지기 전에 얌전히 있어!"
"허어,그것 참. 너무 딱딱 거리지 말라구. 그대는 냄새가 없단
말야. 삼랑이나 밍밍, 교영의 몸에서는 아주 좋은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흐음. 그대는 늘 얼음덩어리처럼 하고 다니니까 그런 냄새
가 없는거야. 여인이 되가지고 그런 냄새가 없다니 원..."
도일봉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아픈곳을 찔린 여
인이 몸을 흠짓 떨며 발작을 일으키려 했다.
"난 여자가 아냐. 한 번 더 주둥일 놀렸다간 집어 던질줄 알아
라."
"잘났어 정말!"
도일봉은 콧방귀를 뀌었다. 도일봉은 세상에 자신이 여자가 아니
라고 말하는 여자가 있을줄은 몰랐다. 이보다 더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도일봉은 헹 코웃움을 치며 왼손을 들어
여인의 귓볼을 간질렀다. 여자가 아닌지 시험해 볼 심산이다.
여인은 귓볼이 간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마름까지
도 간질거리는 것 같았고, 뒷머리가 쭈뼛 왕소름이 오싹 돗았다.
하지만 자꾸 소리를 질러대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 모르는척 바삐
걸음을 옮겼다.
도일봉의 손이 이번엔 목울 간질렀다. 여인이 부르르 몸을 떨었
다. 여인은 더욱 빨리 걸었다.
'뭐야, 이거. 정말로 석녀(石女)아냐?'
도일봉은 오기가 치밀었다.
"이봐. 천천히 가자고. 누가 쫓아와?"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요감사해요~^^
즐독입니다
스토리가 중간에 짤렸네요. 정주행바람
잘밨어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석녀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